歷史敎訓 로마史 Digest -27-
로마는 3개월의 짧은 기간에 220 척의 신조선을 진수시켰다. 해난사고에서 존명한 80 척을 합해 모두 3백 척이 되었다.10년 전까지만해도 군선 한 척 없던 로마다.
해군 창설 첫해에 시칠리아 북안 리파리島海戰에서 카르타고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으로 귀국해서 10년 후 執政官으로 재선된 스키피오와 시칠리아 南岸서의 해난사고의 책임자였던 두 전 집정관이 이번 戰役의 전선 사령관으로 재임명되었다.
적에 포로가 되었던 자와 사고의 책임자들에 지휘권을 맡긴 것은 인간적 명예회복 기회를 주자는 뜻이 아니라 실책을 범해서 배운 것이 있을터이므로 그들에게서 결과를 보겠다는 취지였으니 재미 있는 이야기이다.
스피키오가 이끄는 3백 척의 해군 선단은 해상으로, 두 전 집정관은 육로로 시칠리아 북안을 따라 카르타고군의 거점 팔레르모 공략에 나섰다.
사기 왕성하게 공세를 취한 쪽은 오히려 카르타고 측이었으나 전과는 그 반대였다.
육해군의 공조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한 로마軍은 마치 2인 3각의 기세로 적을 압도했다.
北岸의 메시나와 팔레르모 중간 위치의 체팔루 공략에 성공을 한다.
이로써 메시나와 시라쿠사로부터의 보급로 확보는 보장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州都인 팔레르모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결국 팔레르모가 로마군에 함락된 것은 이듬해 BC.253년에 가서였다.
팔레르모 주민들은 다수의 親로마파와 소수의 친카르타고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다수파의 안내로 입성한 로마군은 친카르타고파 주민 1만 4천 명을 붇잡아 몸값을 내면 자유민으로 남기고 아니면 노예로 팔아넘긴다고 통고했다. 그중 1천 명만이 몸값을 치루고 자유민으로, 나머지는 노예로 전락했다.
팔레르모 주민에 대한 이 조치는 시칠리아의 요충인 팔레르모가 로마의 손에 떨어지자
갈팡질팡하던 주변의 여러 도시 주민에 영향을 주어 로마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城門을 열어주는 효과를 냈다.

이제 시칠리아 全域에서 카르타고측에 남은 지역은 본토에서 보급이 용이한 서안쪽 해안도시 마르살라와 트라파니 등 다섯 곳뿐, 카르타고勢는 시칠리아에서 자취를 감출 날이 멀지 않다고 보았다.
팔레르모 함락으로 시작된 BC.253년의 시칠리아戰線은 로마 육해군의 우세로 끝나가고 있었다. 오는 봄을 기해 함락한 팔레르모 대신 카르타고의 보급기지가 된 마르살라 공략을 개시할 참이었다.
그런데, 동계휴전을 이용해서 귀국 도중의 로마함대가 시칠리아를 뒤로하고 이탈리아 서안을 북상하려던 중 느닷없이 불어닥친 거센 폭풍우를 만났다.
이번에는 뱃사람들의 충고에 따르기로 했으나 그 주변바다는 그리스詩人 호머의 영웅
<오디세이>의 표류담에도 나오는 難海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로마해군은 역부족으로 두번째 해난사태로 백 50척의 배와 다수의 인명을 잃었다.
BC.255년과 253년 한 해걸러 일어난 바다 참사로 정말이지 로마人도 낙담하지않을 수 없었던 것같다. 다음해 그다음해도 海軍 再編成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시칠리아島를 둘러싼 지중해 바다도 休眠을 취하는 동안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와 본토간의 제해권 확보를 위해 60척의 군선을 파견한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로마가 두번째 해난사고를 당한 것을 안 카르타고는 이번이야말로 팔레르모 탈환의 절호의 기회로 보고 백 50두의 코끼리戰車隊를 앞세우고 마르살라를 등지고 팔레르모로 향했다.
로마인이 코끼리떼의 파괴력을 처음 당면하는 것은 아니다.
4 반세기 전에도 에피로스王의 象隊 공격을 세 차례나 물리쳐 이긴 경험이 있으나 코끼리 공포를 상기시키는 것은 불과 4년 전 레굴르스 지휘하의 敗戰 때였다. 이때 8천명의 로마병사가 코끼리떼에 밟혀 죽었던 것이다.
코끼리 수로는 그때가 문제가 아니다.
마르살라 공략을 위해 백 5십 마리의 코끼리떼 앞에 감히 나설 병사는 없었다.
코끼리의 모습을 본 로마병들은 한발도 나가려하지 않았다.
지휘관이 아무리 독려하고 욱박질러도 꼼짝을 안했다.
바다에서는 풍랑이, 뭍에서는 코끼리가 로마병의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대세를 타고 밀어닥치는 카르타고軍에 의해 팔레르모 가까이까지 밀린 로마軍은 비로서 도망치기를 멈췄다.
팔레르모 방위책임을 맡은 집정관 메테루스에게는 부하병들의 코끼리공포증을 털어내는 일이 급선무라 판단했다.
팔레르모시 둘레의 성벽 바깥쪽에는 방위용 垓字(수로)가 파져있다.
메테루스는 그것을 보다 깊이 넓게 파고 아래로 갈수록 좁게 파서 소위 코끼리 함정을 만들기로 했다.
城내에 단독 지휘관뿐인 것을 알아채린 카르타고軍은 기세 좋게 밀어닥쳤다.
輕裝步兵들이 성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뒤에 달려오는 적병은 놔두고 지축을 흔들며 밀어닥치는 코끼리떼에 일제히 投槍을 던지고 돋바로 성내로 피신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코끼리는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더구나 투창에 상처를 입어 포효하며 흙먼지를 이르키며 돌진하는 코끼리들 대부분은 파놓은 해자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창을 맞고 해자 앞에 간신히 멈춰선 놈들은 이미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조련사의 손을 벗어나 갈팡질팡하며 뒤에 밀려오는 카르타고 병사들을 짓밟아댔다. 카르타고軍은 제칼에 맞아 제가 쓰러지는 꼴이 된 것이다.
이때 로마군 지휘관 메테루스는 중장보병단을 출격시켜 적을 소탕하는 동안 시내에 대기 주이던 경장보병들이 성벽 위에 나타나 해자 속에 빠져 허둥대는 코끼리를 향해 창을 던진다.
파렐르모공방전은 이렇게해서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백 5십마리의 코끼리 중 붇잡은 십여 마리 외 모두 척살되었다.
카르타고측의 전사자는 2만을 헤아렸고 지휘관과 함께 마르살라로 살아 도망친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 패전 지휘관은 결국 본국에 소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제1차포에니전쟁 14년만에 두 번째 패전책임을 물어 처형된 것이다. 패전책임을 묻지 않는 로마와 대조되는 조치인 것이다.
코끼리 공포를 극복한 로마인은 바다에 대한 공포도 서서히 잊어갔다.
BC.250년, 이달리아 각지의 조선소로부터 2백 척의 군선이 진수하고 그해 로마는 새로 편성된 함대와 4개군단 모두를 마르살라攻略에 투입한다.
시칠리아에 남은 영역이 마르살라와 트라바니뿐인 카르타고도 임전의 각오가 만만치 않았다. 2개 도시 중 하나라도 잃으면 시칠리아의 카르타고세력은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해 BC.249년은 양측 일진 일퇴의 지루한 제1차포에니전쟁 16년째를 맞는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