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지메노湖畔 전투 제3회전-1-
BC.217년 한니발이 원정 2녀째를 맞는 해에 로마측 그의 상대는 귀족 출신 세르빌리우스와 평민 출신 프라미니우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로마는 한니발이 어디에 진출할는지 자못 신경이 쓰였다. 볼로냐(Bologna)에서 리미니(Rimini)까지는 평원이고 프라미니아街道가 달리고 있다. 5만 대군이 이 길로 반도의 등뼈 아페닌山脈을 넘으면 로마로 직행이다.
그러나 한니발의 의도를 확신을 갖고 예측한다는 것은 누구도 자신이 없었다.
어디를 통해 남하할는지 예측불허의 한니발을 邀擊하는데 로마는 병력을 둘갈래로 나누어 파견했다.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리미니로 가서 프라미니아街道에 포진하고 프라미니우스는 아레쪼(Arezzo)로 가서 아페닌山脈을 넘는 한니발을 토스카나(Toscana) 지방에서 요격하기로 했다. 어느 쪽이든 한니발의 동향이 파악되는대로 양자는 합류하기로 하고......
이해 4월, 30세의 한니발은 전군을 이끌고 越冬基地를 뒤로 했다.
겨울을 난 볼로냐에서 리미니로 향해 프라미니아가도를 통해 남하하는 용이한 길은 택하지 않았다.
볼로냐에서 바로 아페닌산맥을 넘어 피렌체(Flrenze)로 내려오는 거리는 짧지만 이 험로를 택했다. 알프스보다는 월경이 쉬우나 아페닌산맥을 넘어 아루노江(Aruno) 유역에 내려와서 한니발은 예상치 안흔 장애에 부딛친다.
지중해성 기후의 이탈리아에는 비가 경울부터 봄까지 집중해서 내린다.
그 해는 예년보다 비가 많이 왔다.
아페닌산맥에서 발원하는 아루노江은 피렌체 근처에서 여러개의 지류를 모아 피사(Pisa)를 거쳐 서쪽 티레니아海로 빠지는 토스카나지방 최대의 하천으로 우기에는 범람하여주변을 늡지로 만든다.
한니발은 수렁을 헤쳐 피렌체까지 오는데 꼬박 3박 4일이 걸렸다.
두 마리밖에 남지않은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5만 병력을 이끌고 난행군한 한니발은 눈병까지 겹처 곤욕을 치렀다. 결국 희대의 전술가 한니발은 이때 눈병으로 외눈박이 애꾸가 된다.
피렌체서 휴식을 취한 하니발은 거기서 남동쪽 백킬로 떨어진 아레쪼(Arezzo)에 프라미니우스의 2개 로마군단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보란듯이 일대를 방화와 약타로 로마의 동맹도시 주민 에토룰리아인들을 괴롭히며 남진을 멈추지 않았다.
아레쪼에서 페루지아(Perugia)로 가는 길 어중간에 중부지방 최대의 트라지메노湖(Trasimeno)가 시계 가득 펼쳐진다. 호수 북쪽은 구릉이고 호면에는 좁은 평지가 동서로 뻗어있다. 여기를 지나 동쪽으로 향하면 프라미니우스가 우군 세르빌리우스의 군단과 합류하기로한 페루지아에 닿게된다.
그날만은 행군을 서둘러서 해 지기전에 트라지메노호반에 도착한 한니발은 미리 척후를 내보내 주변 지세 정찰까지 마치고 각 대대를 담당 지역에 배치한 상태서 밤을 지내기로 한다. 불도 피우지 못하게했다.
남쪽으로 내려온 길은 호면에 닿으면서 동쪽으로 휘어진다.
굽은길 바로 옆 언덕 아래에 숨은 것은 騎兵隊였다.
그 바로 옆은 갈리아兵이 숨고 또 동쪽에는 리비아와 스페인 輕步兵團이 배치되었다.
모두 언덕 아래 숲속에 숨어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다.
좁은 호반길 저쪽 지점에는 출구를 막는 형태로 重裝步兵의 진지가 구축되었다.
적을 호반으로 유인하여 호수를 끼고 돌때 호면을 제외한 前後 左 세 방향에서 공격하여 섬멸한다는 전술대형이었다.
4월 19일은 트라지메노호반을 두껍게 덮은 아침안개 속에 날이 밝고 있었다.
아침까지도 시계가 10미터도 안되었다. 한니발은 기상정보까지 꿰고 있는듯 헀다.
오늘은 기어코 적을 추격하겠다고 다짐하며 이른아침 로마군은 의심 없이 호반의 협로에 발을 딛었다. 안개로 시야가 좁아진 호반길을 행군하며 적이 멀리 있다고 생각한
로마군은 전속력을 내서 2만 5천명 전군이 좁은 호반지대에 드러서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열 선두가 호반 동쪽에 대기하고 있던 적의 복병에 부딛히면서 戰端은 내려졌다.
전위부대가 적병과 감투하고 있는 것을 후속부대는 짙은 안개때문에 알수없었고 뒤따르는 사이 서쪽 후위으로부터 적 기병의 기습을 받았다.
이때 언덕 아래 숲속에 숨어있던 한니발의 갈리아병과 경장보병들도 좁고 긴 호반에 갇힌 로마군을 치고나왔다.
사고를 모른채 후속 차량들이 차례로 밀어닥쳐 연쇄 사고로 많은 희생이 발생하는 고속도로 교통사고와 같은 異變이 BC.217년 봄 트라지메노호반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차라리 殺戮이었다.
살륙의 밧줄은 앞 뒤 옆 3방향에서 조여들었다.
호수에 뛰어들어 도망가는 로마병도 물을 박차고 달려드는 적 기마병의 창살에 찔려 양처럼 죽어갔다.
5만의 한니발군에 대해 2만 5천의 로마군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살육이라지만 전투는 3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집정관 프라미니우스도 지휘 불가능 상황에서 일개 기병으로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遺體는 전투가 끝난 뒤에도 찾지못했다. 사령관도 일개 병졸도 구별할 수없이 뒤섞인 피의 제전이었기 때문이다.
안개가 개인 트라지메노호반에는 카르타고군마저 눈을 뜰수없는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로마군은 2만 5천명 중 1만 7천명의 전사자를 냈다.
전위 대열 6천명은 적진돌파에 성공해서 동쪽으로 도주했으나 적 기병대의 추격을 받고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호수를 헤엄쳐서 산중으로 도망해 로마까지 생환한 병사는 2천에 불과했다.
한니발을 대적하기 위해 특별히 증편한 2개 군단의 병력을 고스란히 잃은 것이다.
한니발측 손실은 2천명에 머무렀다. 그것도 한니발이 스페인에서 데리고 온 정예는 극소수뿐, 거의가 현지조달의 갈리아人 병졸들이었다.
후세 戰史家들은 이 트라지메노호반전투를 전투로 보지 않는다. 비겁한 속임수로 남을 첬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당시 로마인들은 그 방법이야 어떻든 진 것은 진것으로 인정했다.
로마에는 사실대로의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집회 소집권을 갖는 집정관은 전사했고 또 한사람의 집정관은 전선에 있어 집정관 부재 중 法務官이 소집한 시민집회에서 법무관은 "우리는 완패했다"고 자인하고 전사자 와 포로의 수를 발표한 뒤 판명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나갔다.
그 불과 3일 후 법무관은 시민집회를 재소집하지 않을 수없게된다.
또 하나의 패배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니발을 요격하기 위해 리미니에 포진했던 세르빌리우스 집정관의 2개군단은 어떻게 되었는가? 전황은 위에 암시한대로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