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등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마무리가 지연되었습니다.
이후 더 4회에 걸쳐 시리즈-75로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등극을 끝으로 이 연재를 마감하고 다음 기회에 천년 帝政로마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찾아뵈울까합니다.--
歷史교훈 로마史 Digest-72
루카(Lucca) 3巨頭會談과 알레시아(Alesia)전투의 승리로 카에사르,帝政로마에의 길을
열다.
지금의 북이탈리아는 당시 <갈리아 치자르피나>라고 해서 알프스 이쪽의 갈리아라고
불리는 屬州였으며, 이 지방 통치와 방위를 담당하는 속주총독은 로마본국과 경계를
이루는 루비콘江으로부터 35킬로 북쪽에 위치하는 라벤나(Ravenna)에 주재했다.
BC.57~56년의 겨울을 속주 순회로 보낸 카에사르는 해가 바뀌면서부터 여기 라벤나에 머무르며 수도 로마에서 일어나는 政情 변화에 주의를 기우리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BC.56년 3월 카에사르는 여기 라벤나에 3두 중 하나인 크락수스를 초빙,정중히 맞았다.
43세의 카에사르는 57세의 크락수스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채무 채권자 관계였지만 로마 경제를 주름 잡는 크락수스는 채무자의 부름에 쾌히 응락하여 스스로 라벤나에 온 것이다.
3월 말경, 양 거두는 라벤나를 뒤로하고 同途, 에밀리아街道를 서북쪽으로 향해 로마군기지가 건설된 모데나(Modena)를 거쳐서 아페닌山脈을 남쪽으로 넘어 루카(Lucca)에 도착했다.
지금도 로마네스크樣式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조용한 작은 도시 루카는 피렌체에서 피사를 통해 티레니아海에 河口를 여는 아르노江 조금 북쪽에 위치한다. 동쪽 아드리아海로 빠지는 루비콘江과 서쪽 티레니아海로 흐르는 아르노江은 로마와 속주의 경계를 이룬다.
카에사르는 在任 속주총독으로서 국법을 준수하여 本國領에 발을 들이지않고 외지에서 巨頭會談을 성사시킨 것이다. 속주총독은 군사지휘권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임지를 벗어나 非軍事지역 로마本領에 발을 들이면 속주총독의 권리를 상실 할뿐만 아니라 國賊으로 단죄되는 국법이 당시 존재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에서 오는 또 하나 거두 폼페이우스와 만나기에는 최적의 지점이
루카였다.
회담시기도 4월초로 잡아 食糧廳長官 역을 맡은 폼페이우스에게는 小麥수입원인 사르데니아島 시찰이 예정돼 있었고 해상여행 시즌도 때맞췄으며 출항지도 최근거리 피사港으로부터 회담장 루카까지는 아울레리아街道를 북방으로 20킬로 달리면 충분했다.
루카 3거두회담안은 카에사르가 案出한 최적의 위치이며 절묘한 시기였을뿐만 아니라 당시 발표된 것은 없었으나 회담 이후의 사태진전을 추적하면 3자회담 합의 내용도
하나하나 카에사르의 의도대로 결과가 들어난다.
카에사르의 의도를 압축 요약하면 로마의 존립은 共和政의 寡頭政治로는 더이상 연장이 어렵고 지중해를 制覇한 광역 로마로서 효율의 통치만이 살길이라며 帝政으로의
政體 변화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
루카 3거두회담은 3인共益의 결과를 차례로 가져온다.
첫째,
BC.56년 중에 시행되어야할 이듬해 55년도의 집정관 선거에 폼페이우스와 크락수스
둘이 입후보하여 폼페이우스는 당선이 확실하지만 대중에 인기가 없는 부자 크락수스는 당선 가망이 희박해 선거기간을 여름을 피해 겨울로 연기한다.
군의 휴가가 불가능한 春夏秋절기의 전투시즌을 피해 군단병들의 휴가기간인 겨울에
선거를 치르면 카에사르 휘하의 병사들을 휴가로 귀향시켜 선거에 참가해서 크락수스에 투표함으로써 둘 다 당선을 보장한다는 계략이었다.
둘째,
집정관 임기 1년이 끝나면 이듬해는 前집정관 자격으로 속주총독으로 부임한다.
속주총독의 1년간 임지는 당사자가 집정관에 선출되기 전에 원로원이 미리 정해 시민집회의 인준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루카회담에서는 원로원을 배제하고 3거두가 결정했다.
BC.54년에는 전집정관이 되는 폼페이우스 담당 속주는 遠-近스페인 2개 속주, 크락수스 임지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地方이 결정되고 임기는 관례의 1년이 아닌 5년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서 카에사르의 갈리아속주총독 임기도 당연 4년 연장하여 BC.50년 말까지로 확정했다.
세째,
카에사르, 폼페이우스, 크락수스 3인 모두 각 10개 군단의 병력을 보유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로마의 北은 카에사르, 西는 폼페이우스, 東은 크락수스가 통솔하는 각 10개 군단의 병력은 수도 로마에 무언의 압력이 아닐 수없었다.
폼페이우스의 군사력, 크락수스의 경제력, 카에사르의 민중 동원력으로 합체된 3거두의 위세에 대해 원로원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 三頭政治를 얼핏보면 3인 私慾의 정략으로, 분명 3인의 실력자는 각각 元老院체제를 넘어선 데서 힘을 갖는 私益强化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국가
로마의 防衛線을 확립한다는 公益에 귀결되어 있었다. 특히 폼페이우스의 스페인 통치는 지브롤터해협을 건너면 北아프리카 연안국들까지 수중에 넣는 결과가 된다.
3인의 속주총독 임기 각기 5년, 각기 10개군단의 대병력은 로마防衛線을 확립하는데 필요조건이었다.
카에사르는 大帝國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형식적 양보와 관용은 당연한 자기윤리라고 생각했다. 원로원의 시끄러운 입, 키케로의 입을 함봉하기 위해 그의 인사청탁을
모두 들어주었고 그의 동생 퀸티우스 키케로에게는 화려한 전선지휘관 軍團長 대임까지 맡겼다.
그뿐아니라, 승승장구하는 카에사르의 군사적 공훈은 심지어 원로원 반대파들까지 감동시켜 전례없는 15일간의 諸神에 대한 감사축제를 베풀기까지 했고, 출세길을 내다 본 군단 지망 청년들이 쇄도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 삭여온 그 많은 로마의 애인들의 청탁을 받아들여 젊은이들을 군단장이다 대대장이다 지휘관급 한 자리씩을 주기도했다.
(그의 암살자들 중 부르투스 등 다수가 여기서 나온다)
자식복이 없던 카에사르이기에 애인들의 2세들에게 거는 기대도 컸으리라.
어떻든, 명지휘관 밑에 로마 良家의 젊은이들이 참집한 카에사르군단의 戰績은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을 破한 스키피오 이래의 快哉였다.
선출이 좀 늦어졌으나 루카회담에서 합의한대로 BC.55년도 執政官에 당선된 폼페이우스와 크락수스는 삼인 합의사항들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간다.
일인독재를 방지하기 위헤 쌍두체제로 운영되는 집정관 밑에 8명의 법무관 전원과 10명중 8명의 호민관이 三頭派로 메워져 삼두정치에 의한 국정지베는 완벽했다.
루카회담 이후의 수도로마의 정정을 원로원의 입,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군사력과 돈을 가진 동지가 로마人의 倫理까지 지배하게된 것은 그들의 힘에 의해서라기보다 그들의 적의 우유부단과 저능함 때문이다.
두 사람은 원로원에서 거의 반대되는 일 없이 소망대로 얻었다. 市民集會에서조차 이렇게 간단히는 되지 않았었는데....
이제 카에사르도 임기종료를 목전에 두고 연장이다 후임선발이다 하는 따위의 잡음없이 순탄히 지나겠구만....> 사업가 친구 렌토울스에 보낸 편지의 사연이다.
폼페이우스가 세워 로마시민에 바친 로마 최초의 화려한 석조 야외극장도 완공되고
수도 政情변화에도 신경 쓸일 없이 갈리아(Gallic battle)전투에 전념 할 수있는 해,
BC.55년은 카에사르에 있어서는 그의 꿈 帝政로마 元年의 해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홀어머니 아울레리아의 訃音을 전장에서 들은 해이기도 하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