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 Digest-55-
대저, 歷史敍述이란 일반 글처럼 마음내키는대로 붓가는대로 쓰는 것이아니라 史實에 근거해서 써야하느니만큼 방대한 史料를 뒤져야하고 또 考證을 해야하므로 감히 나같은 문외한이 쓰기에는 너무나 벅찬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연재 첫마디에서 盧武鉉시절을 극복하고자 정신혁명적 발상으로 로마史를 천착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만용이었습니다만 나름 재미도 없는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며 오늘로 로마 2천년사를 5백년 역사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로마사Digest의 1차 붓을 놓을까 합니다.
共和政에서 帝政으로 그리고 衰亡까지 나머지 천 5백년은 한번 더 천착하고 2차 한 달 뒤로로 미루며 이만 줄립니다.
스키피오는 로마의 非常時 언제나 로마 최고의 카드였다
로마人에 있어 스키피오는 백 번을 찬양해도 모자라는 로마의 은인이며 영웅이었다.
한니발과 그의 아버지 하밀카르 父子로 인해 로마人이 겪은 고초는 헤아릴 수 없이 컸다.
포에니전쟁 1 2차 합해 무려 38년간을 수 십만의 인명 희생과 재산상의 피해는 도리킬 수없는 로마의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한니발이 로마로 하여금 단기간에 지중해를 제패하도록 도왔다는 역사평가도 있다. 장기간 고전 끝에 海洋强國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海軍船 10척만을 남기고 나머지 군선을 모두 로마군에
헌납하고 로마의 승락 없이 전쟁을 하지 못하며 향후 50년간 연부로 1만 5천 탈란트의
배상금을 물게하는 강화를 타결하고 전군을 이끌고 로마에 개선했다.
BC.202년,16년만에 로마에 평화를 회복한 푸블리우스 코르네리우스 스키치오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보수적인 로마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고 아프리카를 제패했다는 의미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부르게 된다.
이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15년간 로마 정치의 향방을 좌우하게 된다.
여기서 헬레니즘 제국의 이야기가 좀 필요하다.
BC.323년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지역의 제패를 완성한 알렉
산더大王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해이다.
그의 大帝國은 이후 휘하의 장졸들 간에 분활되었다.
Macedonia의 안티고네스(Antigones)王朝와 Syria의 셀레우코스(Seleukos)王朝 그리고
Egypt의 프톨레마이에스(Ptolemaies)王朝의 탄생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로마가 진출해 나온 BC.200년까지 백 여년간 이들 헤레니즘諸國은 동맹과 항쟁을 되풀이해 왔다.
그 중 BC.190년 이번에는 시리아가 로마에 도전해 옴으로써 로마군은 처음으로 아시아에 건나가게 되었다. 상대가 한번 패했다고는 하나 헬레니즘 제국 중 최대 최강의 시리아다.
여기에 로마는 手中 최고의 카드로 시리아戰線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년 전에 두 번째 집정관을 역임했기 때문에 원칙에 따라 집정관이 아닌 참모로 작전
지휘를 맡는 것이다. 명목상의 사령관은 형 루키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해서 동행하는 형식이었다.
원정 海戰에서 두번 이기고 陸戰에서도 스키피오의 강화조건을 거부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군을 철저히 섬멸하고 시리아가 다시는 로마와 로마동맹국에 도발을 않고 전쟁배상금 1만 5천탈렌트를 12년간 연부로 지불하는 강화조건을 매듭짓고 스키피오는 BC.187년에 귀환했다. 스키피오는 지병으로 건강이 몹씨 악화된 상태였다.
*政治라이벌 카토의 陰謀
누구보다도 훌륭한 업적을 이룩하고 유력한 지위에 오른 사람으로서 질투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없다.
다만 질투는, 그것을 품더라도 당장에 탄핵이나 중상의 형태로 표면화하는 일은 없고 숨겨저 있다가 기회를 보아 나타난다. 기회는 상대에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일 때다.
스캐달은 절대로 强者를 습격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을 받고 원로원의 제1인자 지위를 오랫동안 누리며 여차하면
로마최고의 카드로 추앙 받아온 스키피오의 약점은 그의 건강 惡化에 있었다.
BC.187년 시리아로부터 귀국한 스키피오는 두명의 護民官(平民出身의 최고위직)으로부터
피고로 지목되었다. 형식은 형 루키우스가 피의자신분으로 고발되었지만 표적은 스키피오였다.
시리아왕 안티오코스가 지불하는 배상금 중 직불로 받은 5백탈렌트의 용도가 애매하다는 혐의였다. 실질적으로 원정군을 지휘한 스키피오에 대한 도덕적 약점을 찔러 공금횡령죄로 몰아 그를 실각시키려는 政敵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1만 5천탈렌트의 배상금 중 직불 5백탈렌트는 당시 전선사령관이던
집정관 형 루키우스가 병사들 위로차 군단 내 잔치비용으로 썼던 것이고 스키피오로서는 개인적으로 전혀 아는바가 없는 일이었다.
원로원에서 있은 첫날 증인심문에서 스피키오와 루키우스 형제에게 두 호민관은 번갈아 스키피오의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형 루키우스가 군단 경비지출장부를 들추어가며
조목조목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그자리에서 재판자체에 염기를 느낀 스키피오가 형으로부터 두툼한 장부를 넘겨받아 장부를 모조리 찢어던지고 퇴장해버렸다.
다음 날 호민관들은 스키피오의 첫 집정관 시절인 17년 전 시칠리아 주둔 당시의 행적까지 들추어가며 스키피오가 마치 로마의 독재자행세를 했다느니 경비 지출이 방만했다느니 하며 재판이 아닌 스키피오 성토장으로 만들어갔다.
아무런 대꾸없이 피의자석에 앉아 있던 스키피오는 일어나서 한마디했다.
<거기 두 호민관 그리고 장내 원로원 의원 여러분, 오늘은 내가 15년 전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싸와 행운에 힘입어 승리를 거둔 바로 그날입니다.
그런 기념해야할 날에는 다툼이나 반발같은 것은 거두어두고 諸神께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으면하고 제안합니다.
나는 이제 카피톨리노언덕으로 향합니다.
거기에 모셔진 최고神 주피테르와 유노女神과 미네르바女神을 비롯한 신들께 나와 함께 싸운 모든 로마市民에게 조국 로마의 자유와 안전을 위해 힘 바칠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좋으시다면 나와함께 가시겠습니까?
로마시민인 여러분들이야말로 내가 17세였던 당시로부터 이제 나이도 들어 늙은 오늘날까지 내가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있는 입장을 특례까지 만들어 주며 허락하신 것이 여러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스키피오는 좌중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의 뒤를 원로원 의원들은 물론 방청 시민들 그리고 장내 서기들까지 붓을 놓고 스키피오의 뒤를 따라 카피톨리노언덕의 신전으로 향했다.
따르지 않고 장내에 남은 자는 스키피오탄핵 주도자 카토와 그의 종복 두 호민관뿐이었다.
<이날이 스키피오가 燦爛히 빛난 최후의 날이었다>고 로마史家 리비우스는 쓰고 있다.
그로부터 스키피오는 로마를 떠나 나폴리 방향의 리테르노의 별장에 병약한 모을 으탁하고 4년 후 BC.183년 향년 52세에 생을 마감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정망 공교롭게 스승이자 천적이며 숙적이었던 한니발도 같은 해에 망명지에서 자살했다는 것은 지난번 말한 바다.
로마의 아피아街道 변의 가족묘지에 묻히기를 거부한 스키피오는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은혜를 모르는 내 조국이여, 당신은 내 뼈를 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完
나는 이 글을 마치며 우리를 한번 돌아보고 생각한다.
그 2천 백 62년 후 한국의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내가 잘못했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