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 Digest-59-
*保守의 스쯔라가 小아시아도 평정, 2년 내전 끝에 로마를 완전 지배하고 정적 일소에 착수하다
黑海연안의 강자 폰토스王 미토리다테스를 제압한 스쯔라는 小아시아에 대한 로마통치시스템의 재구축에 나섰다.
먼저, 이 지역 분쟁의 근원이 되기 쉬운 3개 왕국, 폰토스와 비티니아 그리고 카파도키아 간에 相互不可侵條約을 체결시켰다. 그리고 3국은 패권국 로마와의 동맹조약을 갱신했다.
어느 국가도 일국을 침략하면 상호불가침조약의 위반행위임과 동시에 침략 당한 국가와는 동맹관계에 있는 로마까지 敵으로 돌게되는 결과를 낳는다.
스쯔라는 이런 방식으로 屬州에조차 常駐軍을 두지않고 감시의 눈초리를 속주 외관에 위치하는
同盟國에도 효과를 미치게하는 정책을 썼다.
다음,미토리다테스에 점령되어 있던 5년간 무정부화한 舊베르가몽王의 領土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西岸地域의 질서 회복이었다.
그리고 방위비 부담 명목의 屬州稅를 부활시켰다.
소득의 10분의 1을 납부해 왔으나 5년간 미납된 속주세를 일시불로해서 군단 유지비에 충당하였다. 스쯔라다운 단호한 속주통치술이었다.
그런 후, 서두루지 않고 54세의 스쯔라는 막료 중 신임이 두터운 32세의 무장 루크루스에 2개군단과 해군을 주어 소아시아의 안전 유지를 맡기고 3만 5천의 정예를 이끌고 에게海를 건너 아테네에 들어왔다.
스쯔라는 집정관 킨나와 마리우스의 배신으로 國賊에 몰리고도 폰토스征伐 원정에 성공하여 로마에 충성했고, 원정지에서 전후처리까지 완수하고도 이탙리아로 進軍하지 않고 아테네에 근 1년을 머물었다.
표면상 이유는 관절 痛風치료라고 했지난 아테네가 그럴만한 적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亡失된 것으로 알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著作이 로마군에 의해 발견된 것은 스쯔라의 아테네 체재 때였고, 그가 아테네文化를 배우는 학생으로 일변해 있던 사실을 믿는 사람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 스쯔라의 아테네 체재는 전략상의 이유였던 것이다.
만일, 폰토스왕 미토리다테스에게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면 아테네 外港 피레우스로부터 小아시아 西岸까지는 海路 3일이고, 그리스 西岸으로부터 이탈리아반도까지의 거리는 뱃길 2일이면 충분했다. 이런 전략적 위치에서 스쯔라는 폰토스의 미토리다테스와 로마의 킨나에 無言의 압력을 가하고 있던 것이다.
로마에 대해서는 원로원에 다음 서한을 보내 노골적 압력도 가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이룬 나의 공적을 생각할 때, 그런 나를 국적으로 몰고 국외추방과 재산몰수에 처한 시민집회의 처사는 전적으로 납득할 수없다. 스쯔라와 동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논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충실한 부하들과 함께 이 不正을 바로 잡을 결의에 차있다.>
스쯔라는 위 항의서한을 로마에 보낸 뒤 비로서 병사들에게 이탈리아반도 상륙 의지를 밝혔다.
병사들은 충성을 맹서하고 군자금까지 각자 저금에서 갹출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스쯔라는 충성만 받아들이고 병사들의 호주머니는 닫아두었다.
BC.84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스쯔라가 이탈리아반도를 뒤로한지 3년간 킨나는 독재자 마리우스 死後 의외로 온건정치를 펴왔다.
로마도 어디도 정치관련 유혈포동을 한번도 겪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스쯔라의 이탈리아 상륙이 분명해진 다음에도 로마 元老院은 그런 킨나를 쉽게 버리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킨나는 政略的으로 자기 딸을, 죽은 독재자 마리우스의 조카이며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제안자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에사르의 조카이기도한 후대의 英雄 카에사르에게 시집을 보낸다. 이후,그 카에사르는 스쯔라에 의해 이혼압력을 받고도 이에 굴치않고 그리스로 망명한다.
힘과 힘의 격돌이 예상되는 상태에서의 敵對視는 쌍방 모두가 상당한 압력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먼저 행동을 하는 것은 이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않는다고 믿고 決斷했을 때이거나 또는 압력에 견디지 못했을 때이다.
군단 총사령과 경험이 없는 킨나는 집정관의 정당한 권리인 군단 편성애 착수한다.
당시의 도료 집정관은 마리우스의 아들이었다. 둘은 <無法者> 스쯔라를 맞아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스쯔라가 넣는 무언의 압력에 흔들린듯한 킨나는 스쯔라의 이탈리아 상륙 이전에 스스로 그리스로 건너가
거기서 決戰을 내기로 하고 동해안 항구도시 앙코나에 가서 지원병을 집결시켜 군단 편성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킨나 자신이 군단지휘 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래 장관급들이 도무지 신통치 않았기 때문아다.
그러저럭 편성한 군사만을 이끌고 아드리아海를 건넜다.
그러나 후속 도착 예정이던 나머지 군단이 무소식이다.
기다리다못한 킨나가 모병지 앙코나에 돌아와 직접 군단편성을 하려 했으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각지서 모여든 지원병들은 폭동 직전 상태에 있어 통솔이 전혀 불가능했다.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그런 자질이 전혀 가춰있지 않은 킨나는 지원병들 속을 헤치고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시 나오지 않았다. 루키우스 코르네리우스 킨나는 폭도화한 지원병들 속에서 事故死한
것이다. BC.84년 말 그의 나이 50세였다.
BC.83년 이른봄, 아테네를 떠나 강행군으로 그리스를 횡단한 스쯔라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 南端 브린디시港에 상륙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국적으로 낙인 찍힌 스쯔라에게 브린디시 주민은 순순히 성문을 열어주었다.스쯔라에게는 순탄한 출발이었다.
대군을 이끌더라도 15일이면 충분한 로마 行程에 2년 가까이 소비하며 진군을 늦추면서 군사력으로 결착을 내겠다던 각와는 달리 퍽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상륙지 브린디시에서 로마연합의 <新市民>의 기득권은 완벽하게 존중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한 것이다. 골수 보수인물인 그가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
당초의 정예군 3만 5천에 그리스에서 참가한 신병 5천을 합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느린 속도로 아피아街道를 북상하기 시작했다. 4년간 킨나시대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오여들었다.
북부이탈리아로부터는 갈리아 주두군사령관 메테루스 피우스가 휘하 2개 군단을 데리고 왔다.
아버지와 형을 마리우스에게 잃은 후 도망갔던 크락스스도 스페인으로부터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마리우스파에 부친을 참살당한 폼페이우스도 숨어있던 피체노로부터 달려와왔다.
23세 약관의 폼페이우스는 대지주 가문으로 自費로 편성한 3개 군단 병력을 데리고 온 것이다.
스쯔라는 크게 기뻐했다.
이로써 스쯔라 휘하 군사는 모두 보병 11개 군단 6만 5천, 기병 1만으로 7만 5천 병력으로 증강된 것이다.
한편 이에 맞서는 로마 정규군은 총 12만, 그러나 그 구성이 지방 각지에서 모병된 소위 신시민권자들의 오합지졸이었다.
2년에 걸친 격전 중 집정관 스키피오 나시카가 일찍 항복하고 그의 군사도 스쯔라군에 흡수되었으나 다른 군다들은 그 스쯔라에 의한 복수를 두려워한 시령관들의 독려로 필사적이었다.
이탈리아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이 내전도 BC.82년 1월 1일에 로마성벽 앞 전투에서 정규군의 패배로 간신히 막을 내렸다. 정규군 측 사령관 노르바누스는 아프리카로, 세르토리우스는 스페인으로 다망가고 마리우스 아들은 전사했다.
사령관의 총붕괴였다.
피아 모두가 같은 로마시민들 간의 전쟁은 목적은 없고 상호 증오만이 전의를 부추기는 내란 특유의 성격을 띤 2년 간의 동족상잔이었다.
스쯔라는 즉시 젊은 폼페이우스에 아프리카로 도망간 노르바누스 패잔군 토벌을 명령하고 스페인으로 도망간 세르토리우스는 행방을 몰라 방치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후에 禍根이 된다.
56세가 된 스쯔라는 이번만큼은 後患 없는 상태하 로마의 지배자가 되어 반대파 일소작전에 착수한다.
국가간 전쟁보다 怨念에 싸인 동족 간 전쟁이 더 처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 사례이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