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에사르, 폼페이우스, 크락수스 三頭政의 대두
스쯔라가 국가개조를 목표로 강화한 원로원체제를 무력화하고 카에사르가 주도하는
삼두정체제가 실현되는 과정의 이야기에 앞서 먼저 3인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인 모두가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으로 전권이 위임되는 전략군단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공통점이 있다.
제일 고령의 크락수스는 대를 이은 거부로서 당시 로마의 연간 예산이 2억 탈렌트인데 비해 그의 개인재산이 1억 7천만 탈레트라는 로마 제1의 재산가였다. 貸金業을 해서 부를 축적 해온 크락수스는 스쯔라가 정적 민중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몰수된 숙청자의 부동산을 헐값으로 경락 받아 부를 늘리기도 했다.
젊어서부터 돈에 놀랄만큼 대담한 몰락 귀족가문의 카에사르는 대금업자 크락수스에게서 많은 빚을 진다.
한편, 카에사르보다 6년 연상의 폼페이우스도 대대로 반도의 동해안 지방에 거대한 농지를 소유한 부호가의 아들로 젊어서 自費로 군단병력을 편성할마큼 군사재능이 뛰어났다.
스쯔라가 마리우스의 민중파정권을 타도하는 과정에 私傭兵 3개 군단을 이끌고 합세하여 쿠데타 성공에 일조하고 스쯔라의 촉망 받는 무장으로 성장한다.
그는 국외로 도망친 반정세력을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에서 소탕하는 개가를 올려 스쯔라 허락 하에 감히 스키피오도 엄두를 못낸, 전무 후무한 약관의 나이에 화려한 凱旋式을 거행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후 로마인의 주곡 小麥의 수입항로마저 방해 하는 海賊떼의 출몰을 잠재우고 東域의 反로마세력을 정벌하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그를 匹敵할 자가 없는 30세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三頭政을 이끈 제일 연소한 카에사르는 누구인가?
그에 대해서는 향후 로마史의 전개과정을 감안하여 카에사르가 단지 로마의 영웅이라고만 아는 우리의 피상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 좀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로마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수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상은 멀리 로마건국 40년 3대왕 토우루스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BC.713년, 토우루스王에 의해 로마에 강제 이주 해 와서 일찌기 로마 귀족이 된 아르바族 명문 율리우스家門의 후예이다.
몰락한 귀족으로 로마의 빈민가 스푸쯔라에서 BC.100년 법무관을 지낸 아바지와 명문가계의 어머니 아우레리아 사이에 일남 이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가난하지만 학식이 높은 母系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아머니의 각별한 관심 속에
가정교사 혜택은 받지 못했으나 라틴語는 물론 그리스語 등 인문학에 열중했다.
명문 귀족이지만 카에사르 집안은 元老院派와 民衆派로 갈려 싸우는 정쟁 하에서도
<율리우스市民權法>을 입법화한 伯父가 나오는 등 수구가 아닌 개혁사상을 가진 진취적
가풍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16세에 아버지를 사별하고 소년가장이 된 카에사르는 민중파 집정관 킨나의 딸 코르네리아를 어머니의 저극 권유로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스쯔라에 의해 政敵 살생자명부에 오르고, 주위의 구명운동으로 킨나의 딸을
이혼 조건으로 구제되었으나 스쯔라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동년배의 가정노예 3명과 함께 도피행각 끝에 그리스로 망명을 한다.
그리스에 간 19세의 카에사르는 무료한 유랑생활을 피해 대학 진학과 군입대 중 후자를 택해 에게海 건너 小아시아 西岸 일대의 屬州總督 미누티우스의 본영을 찾아가 軍團 현지입대를 지원했다.
총독은 스쯔라의 부하였으나 관료이기 전에 인품 좋은 사나이였다.
최고권력자의 逆鱗을 거스르고 도피 중이면서도 본명을 떳떳이 밝힌 젊은이를 관례대로 원로원 의원의 자식에 주어지는 당연직 군단참모 자리 하나를 준다.
총독 미누티우스가 군단을 이끌고 東地中海 상의 섬 레스보스島의 반로마군 토벌원정을 결정하면서 군선이 필요했다. 자국의 안전보장을 책임진 로마의 동맹국은 필요시
군시협력 의무가 있다. 형식상 독립국이지만 사실상 로마의 속국인 비티니아王에 카에사르를 군사사절 대표로 파하여 20척의 軍船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사명감에 불타 조속히 임무를 마치고 군선을 이끌고 귀영했어야 할 일이었으나 카에사르는 귀대를 늦추며 비티니아王의 궁전에서 오리엔트의 豪奢를 만끽했다. 매일 밤 열리는 궁전연회에서 왕의 총아들과 어울려 豪酒家 카에사르는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오리엔트의 이색적 호사를 만끽하고 준비된 군선단을 이끌고 귀영하는 카에사르는
黑海에서 보스포로스海峽을 건너 마르마라海를 지나 총독 미누티우스가 기다리는 해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카에사르에 있어 최초의 군사체험이 되는 레스보스島 공방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는 생애 첫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아군을 구한 전사에게 주는 <市民冠> 훈장을 받았다.
레스보스島 전투 이후 카에사르는 소아시아 南岸 키리키아屬州 총독 세르빌리우스 휘하로 자원 전속을 해서 이 이지방 해적소탕작전에 참전한다. BC.78년이었다.
키리키아 주둔 군단에 전속하자마자 군단기지에 로마로부터 긴급사절이 도착했다.
스쯔라의 訃音이였다.
당장 총독에 제대청원이 받아들여지고 2개월이 걸리는 귀국길에 오른 카에사르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스쯔라의 장엄한 국장도 끝나고 지방에서 상경한 스쯔라의 노병들도 모두 떠난 로마 거리는 한산했다.
4년만에 집에 돌아왔으나 스쯔라파의 중진 루크루스와 심복 폼페이우스가 로마광장에 위풍을 들어내고 있었고 그에게 門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빈민촌 스푸쯔라의 집에는 어머니 아울레리아와 처 코르네리아 그리고 처음 보는 딸애기 율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청년 카에사르의 행적은 다음 회에서 한번 더 더듬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