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Digest-67-
*카에사르, 폼페이우스, 크락수스 三巨頭에 의한 삼두정치 본격 가동
원로원 중심의 소수 寡頭政이 지배하는 고대 로마는 조직과 매뉴얼에 의해 이끌어
진다.
共和政 로마의 최고위 관직은 元老院의 입후보 승인 하에 市民集會가 선출하는
1년 임기의 2명의 執政官(Consul)이다.
집정관이 임명하고 全權이 위임된는 최단 임기 6개월의 獨裁官 제도가 있으나 이는
국가적 위기에 한하고, 공화정 사상 독재관은 카에사르 등 극히 소수에 그쳤다.
BC.61년, 1년 임기의 法務官을 마치고 遠스페인(지금의 포르투갈) 屬州總督을 1년
간 역임하고 귀국한 40세의 카에사르는 名譽냐 權力이냐 택일의 기로에서 야심가
답게 권력을 택한다.
이듬해 BC.59년 집정관 입후보를 위해 戰勝 장군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凱旋式을
포기하고 백마를 몰아 카피토리노 언덕으로 달렸다.
집정관 입후보 등록을 할려면 본인이 직접 입후보 등록서류를 國家公文書館에 제출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로원에 의해 民衆派로 낙인 찍혀온 카에사르가 개선식을 희생하면서까지
집정관에 당선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 현실을 알고 있는 카에사르는 純白(Candid) 토가를 입고 로마광장의 연단에 서는
것만으로는 당선 확신이 서지않았던 것이다.
한니발을 제압한 스키피오나 지중해를 석권한 폼페이우스 같은 약관의 선배 명장들과 달리 불혹의 40대에 겨우 머리를 쳐든 카에사르는 그러나 정치 군사 감각이 뛰어난
늦깎이 천재였다.
그 카에사르는 집정관 당선 전략을 구상한다.
당대의 위인 폼페이우스의 願望을 채와주고, 로마 최대의 갑부 크락수스의 야심도
해결해 주고, 무적의 원로원 논객 키케로를 회유하면 집정관 당선은 가능 할것이라
보았다.
카에사르는 촉박한 선거일을 앞두고 이들 3인을 각기 만나 집정관에 당선되면 그들
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든 입법 또는 정책적으로 해결해 주겠다고 서약했다.
카에사르가 집정관에 당선되면 우선 폼페이우스가 귀국하며 휘하 장병에게 약속한
定着地 토지배당 현안을 입법화를 통해 해결해 주고, 경제계 대부 크락수스에게는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확대하고 동방 각국과의 통상 활성화를 통해 상인들에 상로를
넓혀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로마 역사상 유명한 카에사르가 구상한 三頭政治의 예고탄이다.
폼페이우스 휘하의 10개 군단 6만명의 유권자와 크락수스가 대표하는 경제계 유권자들을 모으면 집정관 당선은 확실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원로원 대변인격인 키케로는 또 다른 인센티브로 회유에 성공한다.
카에사르의 삼두정치 기본 이념은 利己 利他 公益 3대 이익의 다목적 추구에 두었다.
요약하면 삼두정이라는 새 시스템의 수립으로 얻어지는 카에사르의 이익은 집정관
당선과 예상되는 원로원파의 반격에 대한 임기 중 강력한 여당동지의 확보에 있었다.
타익은 폼페이우스와 크락수스에 대한 이익 공여이며 공익은 간단히 설명 할 수없는 시민 모두를 위한 국가적 이익을 의미한다.
BC.59년도 집정관에는 카에사르가 최다 득표로, 원로원파 비부루스가 차점으로 당선되었다.
명문귀족 출신이면서 몰락한 집안으로 빈민가에서 자란 카에사르는 가까이는 평민 이익 도모를, 멀리는 국가 미래를 내다보았다.
*율리우스 카에사르, BC.59년 집정관 취임

統治者의 器量은 첫 뚜껑이 열리면서 백년 앞까지 계량 할 수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40대에 들어선 카에사르로서 BC.59년은 로마의 일반시민들에 그의 재능은 돈과 女人뿐 아니라 그밖에도 능력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해였다.
원로원파는 물론 온건 시민들까지도 보기드믄 急進派의 등장에 불안을 느꼈으나, 카에사르는 취임 초 맨 먼저 로마의 傳統 파괴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2명의 집정관은 득표수에 관계없이 군단 지휘권은 1일 교대, 정무는 1개월 교대의 공화정 초기에 엄수하였던 전통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리고 1개월의 비정무기간에는 12명의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 공권력의 상징인 權標도 없이 일반 시민의 신분으로 행세하는 전통도 부활시켰다.
이렇게해서 로마의 전통 수호자라는 인상을 각인시킨 그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못한 爲民政治에 발을 내딛는다. <악타 디우루나>라고 하는 집정관 通報 형식의 이른바 議政日報 제도를 채택한 것이다.
직역하면 <元老院 議事報告>가 되는 이 제도는 요새로 치면 대자보라 할까, 원로원에서 이루어진 토의안건을 다음날 로마광장 벽면에 게시하여 시민 누구나가 원로원 정치과정을 알수 있게한 소위 언론공개 제도로서 후세 학자들은 新聞의 嚆矢라고 했다.
사실상 원로원의 국정논의 과정은 유권자에 일절 차단된채 市民集會에 회부하여 승인을 받아야하는 때에만 의결사항을 알수있었다. 어느 사항에 대해서 어느 의원이 어떤 발언을 했는지는 전연 알려진 바없었다. 그것이 카에사르의 <악타 디우루나>시행에 의해 원로원의 동정이 천하에 공개되게된 것이다.
카에사르의 이 위민정책에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은 감히 아무 없었다.
이미 共和政 로마는 政體를 바꾸려는 카에사르의 장 중에 들어 온것이다.
카에사르는 임기 1년의 집정관 재임 중 農地改革을 비롯, 稅制, 社會間接資本 투자 등 경제시스템의 전반 개혁입법을 통하여 폼페이우스와 크락수스에 대한 약속도 착실이
이행하는 한편 종래의 소수 이익에서 다수 이익정책으로 전환하는 법제화를 하나하나 실철 해간다.
공화정 로마의 2인 집정관 제도는 본질적으로 1인 독재를 견제하는 시스템이다.
집정관 일방이 발의한 의안이 원로원에 의해 의결되더라도 다른 일방의 집정관이 반대하면 집행할 수없는 거부권(Veto)시스템이 작동한다.
카에사르는 원로원에 의해 부결되거나 일방의 집정관에 의한 비토권 발동으로 부결되는 정책은 비토권이 인정되지 않는 護民官 立法制度를 이용하여 시민집회의 승인을 받아 법제화 해나갔다.
카에사르가 입법 시행한 많은 정책 중 해 묵은 農地改革法과 國家公務員法이 그 대표일 것이다.
소수 귀족층에 편중되어 있던 농지를 일정한도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나머지 농지는 국가에 귀소시켜 서민에 분배하여 줌으로써 도시 실업자를 일소하고 로마 전통의 農耕立國을 장려했다.
도시국가 시대를 지나 이탈리아반도 전역은 물론 제대군인들이 入植하는 거의 유럽 전역에까지 통치가 미치는 시대가 도래, 공무원 수요가 급격히 늘어 이들의 관리가 절대 필요하였다.
카에사르는 본토 행정은 물론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 국가공무원법을 제정, 세금 부과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일정 액수 이상의 뇌물 수수를 엄금하는 일선공무원들의
윤리규정을 엄격히 제정 시행하였다.
이 국가공무원법은 7백년 뒤 帝政 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皇帝가 편찬 보급해서 유명한 세계 법체계의 토대가 되는 <로마大法典>에까지 수록되는 법의 고전이다.
카에사르는 BC.59년 첫 집정관 1년 임기를 제정으로 가는 삼두정치 기초를 은밀히 닦고 다음해 갈리아(현 알프스 이북 라인강 서안, 다뉴브강 남안의 유럽)總督으로 부임
하여 8년 戰爭 끝에 전유럽을 평정하고 反카에사르파의 원로원의 탄핵을 받아 국적으로 몰린 뒤 마침내는 투비콘江을 건넌다.
이 글 쓰며 망상 해본다. 이시대 우리에게 카에사르 같은 지도자 어디 없을까.
그래 이 글을 쓴다.
다음은 카에사르가 8년간 치른 갈리아戰爭에 관한 그의 수기 <갈리아戰記>편을 봅니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