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 Digest-69
*카에사르가 헤르베티族의 民族 대이동을 막음으로써 오늘의 스위스가 존속하게 된 역사저 배경
카에사르가 BC.58년 이른봄 간소한 행장으로 국경의 강 루비콘을 건네 갈리아屬州의 임지 라벤나에 도착하지미자 취한 첫 조치는 알프스山族(현 스의스人)인 헤르베티族의 대이동을 막는 일이었다.
그의 갈리아전기 모두에서 밝혔듯이 알프스 넘어 피레네산맥 대서양 도버해협 그리고 라인江을 경계로한 광활한 지역에 흐터져 살고 있는 갈리아族은 대소 백개의 部族으로 갈려 단일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동쪽 게르만族의 침탈에 시달리면서 살어 왔다.
그런 갈라아 지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 못할만큼 미개한 지역이기도 했다.
카에사르는 이 갈리아지역을 로마 패권 하에 넣어 지금의 서유럽을 착실히 로마화 해나간다. 그것이 카에사르가 쓰는 갈리아戰記이다.
라인강 동쪽 게르만족의 위협은 서유럽에 있어 2천년 래 변함 없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 게르만족의 침입을 용이하게 한 것은 통일이나 단결을 모르는 갈리아인의 성향때문이기도 했지만 부족간의 갈등을 틈타 라인강 서안에 들어와 살고 있던 게르만족의 두목 아리오베이토스가 로마 元老院에 <로마와의 우호동맹> 관계를 맞음으로써 로마로부터의 간섭에서 벅아나려 꾀했으나 로마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게르만족의 침탈에 시달려온 레만湖 동쪽에 거주하던 헤르베티族이 살던 곳을 버리고 서쪽 멀리 대서양연안으로의 집단이동을 시도하는데서 카에사르의 갈리아전쟁이 시작된다.
남부여대한 헤르베티족의 이동 총원은 3십 6만 8청명이나 되었다.
그 중 9만 2천이 청장년의 전투요원이기도했다.
이 대이동이 천리 대장정 중 부딛칠 타부족과의 충돌은 말할 것 없고 도착지 원주민들과의 갈등은 불을 보듯 환한데 이를 방관해서 서유럽 일대를 전장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카에사르의 판단이었다.
헤르베티족은 집과 종경지를 모두 불태와 버리고 비장한 각오로 고향을 떠난 유민으로 게르만족의 위협이 없는 새로운 새정착지를 찾고자했다.
그러나 카에사르는 헤르베티족이 떠남으로써 레만호 가까운 빈 자리에 게르만족이 진출해 오는 것을 용납 할 수없었다. 로마는 과거 수 차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유린 당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BC. 58년 4월 카에사르의 갈리아속주 총독 부임 직후 헤르베티족의 대이동은 시작되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대서양 연안의 브리타뉴地方이었다. 내륙횡단에는 많은 부족들의 영지를 통과해야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부족간 충돌은 필지였다.
이를 방지하려면 헤르베티족의 이동 자체를 막아야했고 그또한 전쟁을 불사하는 일이었다.
임지에 도착한 카에사르는 관할 하의 7 8 9 10, 4개 軍團에 긴급소집령을 내렸다.
이탈리아 북동지방에 주둔 중인 나머지 3개 군단은 뒤에 따르록 조치하고 가까이에 있는 제10군단만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레만호로부터 제네바 앞을 흘러 나오는 로누江邊에 진출했다.
그러나 갈리아와 로마속주를 가르는 경게는 넘지 않았다.
헤르베티족은 카에사르의 출현에 놀라 그에게 사절을 보내 재차 로마속주 내 통과를 허가해 주도록 간청했다. 카에사르는 가부 답변 없이 15일 후 다시 오라고 했다.
카에사르는 그 사이 제10군단 병력을 동원해서 갈리아로부터 로마속주에의 침입저지를 위해 28킬로에 달하는 높이 4. 8미터의 방책을 세우고 참호까지 파게했다.
15일 후 다시 찾아온 사절에 속주통과는 안된다고 거절했다.
헤르베티족은 호란에 빠졌다.
진로가 용이하다고 본 로마속주 통과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일직선 통과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 헤르베티족은 로마와 우호관계에 있는 헤드위族에 사정해서 세쿠니아族에 양해를 얻어 세쿠니아족 영지를 통과하기로 했다.
그러나 30만이 넘는 대이동이 카에사르의 예상대로 아무런 지장도 없을리 없었다.
마침내는 사소한 충돌이 확대되어 헤드위족 지방에까지 번졌고 헤드위족은 뒤늦게 후회했다.
카에사르는 남쪽에서 감시의 눈은 떼지 않았으나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종의 문민통치의 <元老院體制> 하에 있는 로마에서는 軍은 국경을 침입 당하지 않는 한 출동 할 수없다는 것이 국방의 기본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르베티족의 이동으로 시작되는 혼란은 혼란을 넘어 전란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자기 영역을 어지럽힌 헤드위족은 동맹관계의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속주총독 카에사르는 시간적으로 원로원 지시를 기다릴 여유 없이 BC.58년 5월 그의 군단은 南佛屬州의 경게를 넘어 지금의 리용 갈리아로 들어갔다. 갈리아에서 로마와 헤드위족의 공동전선이 형성되었으나 카에사르로서는 갈리아人에 도무지 신뢰가 가지않았다.
그러나 敵에 대한 불신만으로 가능한 전쟁과는 달리 정치는 적이라하더라도 신뢰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아니다. 카에사르는 갈리아에서 그런 의미의 전쟁과 정치 양방을 동시에 추진하게되는 것이다.
카에사르는 세쿠아니族과 헤드위族 영토의 경계를 흐르느 로누江의 지류 아라우江 가에 헤르베티族이 무리를 지어 대부분이 건너갔고 일부만이 아직 이쪽 강기슭에 남아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3개 군단만을 이끌고 한밤중에 숙영지를 뒤로 했다.
36만이 넘는 헤르베티족 중 아직 아라우강을 건너지 않은 약 10만이 로마군에 맞섰지만 순식간에 거의 전멸했다. 카에사르는 하룻만에 다리를 놓아 도하를 시도했으나 이를 본 헤르베티족이 講和使節을 보내와 카에사르가 지정하는 땅에 이주하겠다고 순응해 왔다.
카에사르는 人質 제공과 헤드위족에 대한 손해배상을 조건으로 강화를 수락했으나 헤르베티족은 인질을 받는 것은 알지만 주는 것은 모른다며 인질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강화협상은 결렬되고 북쪽으로 이동하는 헬베티족의 뒤를 쫓아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로마군단은 兵站에서 이긴다는 속설이 있다.
적지에서 싸우는 전선사령과으로서 직접적인 과제는 전투지휘와 거의 같은 비중을 갖는 최중요사안의 하나가 軍糧의 확보이다. 전쟁은 죽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죽기 위해 한다고 생각하면 깨어있는 理性도 제 영역을 잃고 모든 것이 미쳐버린다. 살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組織의 건전성도 유지된다. 그것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형상으로 일병졸도 알 수있는 확실한 형상이 식량의 확보인 것이다.
카에사르는 이 중요성을 생애 잊은 적이 없다.
로마군단은 15일마다 하루 1킬로씩 주식인 밀과 기타 부식을 배급받도록 매뉴얼화하고 있다. 밀 850 그람, 식용유 150 그람, 치즈 20 그람에 장유 약간이 로마군 1인의 하루 양식이다. 병사들은 그것을 배급 받아 10명 단위로 자취를 한다.
베급 예정일이 늦어지면 누구라도 군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진로를 바꾼 헤르베티족의 뒤를 쫓는 카에사르가 자주 戰機를 잡고도 추적을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배급 예정일이 이틀 앞인데도 충분한 군량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전기를 잡고도 공격을 미루어 온 로마군을 얕본 탓일까.헤드위족의 수도 오탄 가까이 갔을 때 헤르베티족이 싸움을 걸어왔다 로마군이 중대 대대 군단의 순으로 지휘관이 각각 담당하는 진형인데 반해 갈리아인의 대형은 그리스의 파랑크스를 닮은 全軍 밀집대형으로 맹공을 가해 왔다.
군량이 걱정이지만, 이리되면 싸울 수밖에 없이된 로마군은 보병의 주무기인 투창으로 경사면을 오르는 적의 밀집대형에 적중시켜 전세를 역전시킨다. 전기를 잡은 로마군은 적의 붕괴부분을 노려 전원 칼을 빼들고 육박전으로 나갔다.
수세에 몰린 갈리아군은 로마군의 투창이 방패를 뚫고 들어가서 빠지지 않도록 고안된 것이었으로 방패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없이 되어 거의 알몸으로 로마군의 육박전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3만의 로마군에 대해 3배가 넘는 헤르베티족 병사도 비로서 퇴각, 이를 추격하는 로마군 제1진과 2진에 다른 갈리아족이 베후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정석대로 진형을 갖춘 로마군 제3진이 배후의 적을 포위 공겨하는 제2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3일간의 혈투 끝에 전세는 완전히 로마군 측으로 기울고 4일째 전투에서 헤르베티족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고 생존병만이 링고네스族 영토로 패주해갔다.
그러나 카에사르는 미리 링고네스족에 패주자를 돕는 자도 적으로 간주하여 로마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전하는 전령을 보냈다.
3일간의 휴식 후 로마군이 추격을 재개했을 때 헤르베티족은 남쪽으로도 서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북동쪽으로도 도망칠 곳이 없이된 상화에서 식량 조달조차 안되는 궁지 빠지게 되어 카에사르에 존명을 구걸할 쑤 밖에 없이 되었다.
인질과 무기를 바치고 강화가 성립되었다.
카에사르는 헤르베티족에 일단은 버리고 온 땅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조상 대대 이어 살아온 고향에 불을 지르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고 떠나온 그곳으로
다시 찾아갈 수 밖에없는 처지를 의미했다.
돌아가는 길을 안전과 식량까지 보장 받고 게르만족이 이주해 들어오기 이전에 귀향길을 재촉하게 된다.
36만 8천명이 이동을 시작했으나 고향에 돌아간 생존 귀환자는 11만에 불과했다.
이렇게해서 스위스人도 스위스에 정착해 살게되지만, 그렇치 않았다면 프랑스 어디를 스위스라 부르게 되었을는지 아니면 스위스는 소멸했을는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카에사르의 갈리아戰記 서장의 抄譯은 끝납니다. 오늘은 이만.......
다음은 카에사르가 본 2천년 전 게르만族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