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Digest-61-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 스쯔라의 국정개혁
--승 전--
3. 失業對策
스쯔라에 의해 오란만에 新植民地 건설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스쯔라는 실업자 문제 해결책으로서이기보다 휘하의 古參兵들에 대한 퇴직금대책으로 생각 한듯하다.
11개 신도시에 入植者 대부분을 스쯔라의 고참병들이 차지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를 읽을 수있기 때문이다.
중북부의 역사도시 피렌체의 기원은 스쯔라의 식민도시 건설에서 시작된다.
4. 元老院 改革
원로원 의원의 정원은 BC.509연에 로마가 王政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한 시기부터 3백명으로 변함없이 오늘까지 왔다.
그러나 지금 로마는 직접통치 지역인 이탈리아半島를 중심으로해서 지중해 전역에 지배력을 미치는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시민집회에서의 투표권을 갖는 시민의 수도 10배나 증가했다. 원로원도 지배권역에 상응한 규모를 가져야한다는 것이 스쯔라의 뜻이었다.
마리우스와 스쯔라의 5년에 걸친 두 번의 숙청으로 3백명 정원의 원로원 의원 중 백명 가까운 결원이 생겼고 , 우선 결원을 보충하고 이어 3백명 정원을 6백명으로 배증했다. 새로 원로원 의석을 차지한 사람들 대부분은 건국 이래의 명문귀족도 아니며 선조가 집정관을 지낸 평민귀족도 아니었다.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 家門에서 처음이 되는 <騎士階級>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국가 로마의 패권확대에 따른 시장확대로 힘을 저축한 實業人들을 정치세계에 끌어들여 그들에게도 로마사회의 책임을 분담시키려는 취지에서였다. 護民官에 이끌리는 平民勢力의 폭주를 막는 최선의 방책은 원로원 강화뿐이라고 본 것이다.
5. 司法改革
법무관이 수사 지휘도하고 재판도 주재하며, 변호사도 원고측에 서면 검사역이 되고 피고 측에 서면 변호인 역할을 하게되는 共和政로마의 재판제도에서는 판결의 열쇠는 陪審員에 있다. 그러므로 배심원을 원로뤈 의원에 한정하느냐 아니면 기사계급이나 평민도 참여시키느냐는 것이 지금까지 정쟁의 초점의 하나였다.
스쯔라는 그것을 원로원 의원 독점의 그라쿠스兄弟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그로서는 원로원에 다수의 기사계급이 들어가 있기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배심원 구성도 귀족 2분의 1, 기사 2분의1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원로원의 강화라는 그로서는 가장 중요한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6. 行政改革
스쯔라는 강대국이 된 로마의 현실을 직감하고 통치권력의 확립 필요성을 완벽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동시에 원로원 주도의 寡頭政, 즉 로마 특유의 소수 지도형의 공화정에는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소수 지도층에는 실력 위주보다 기회균등이 그 본질이었던 것이다.
會計檢査官을 8명에서 대폭 20명으로 늘리고 자격 연령을 30세 이상으로 했다.
회게검사관 경험자에게는 원로원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法務官은 6명에서 8명으로 증원하고 자격 연령은 39세 이상으로 했다.
법무관 경험자만이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있는 자격이 가춰진다.
執政官은 종래대로 2명 변동이 없고 자격 연령을 42세 이상으로 했다.
이에 따르면 30세에 회계검사관에 선출되어 1년 임기를 마친 단계에서 원로원 의원에 취임한다.
결원이 생기는 전제이지만 사망자는 늘 나오기 때문에 거의 자동적으로 의원이 된다고 보면 맞다.
그 의원이 원로원에서 國政 諸事에 관여하는 8년이 지난 뒤에 법무관에 선출된다.
그 뒤는 전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통치경험을 거친 뒤 집정관 선출 권리를 획득한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면 전집정관 자격으로 역시 속주 통치에 나서며 임기 뒤에는 자동으로 원로원에 복귀한다.
로마 원로원은 실무경험이 풍부한 인재풀이며 여기서 로마의 통치력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집정관 再選은 10년을 기다려야 한다.
출중하다고 해서 특정인이 장기집권 못하게 막은 소수과두정의 핵심 장치인 것이다.
스쯔라는 속주통치의 엄밀한 시스템화도 잊지않았다.
법무관을 8명으로 증원한 것도, 여덟 명의 전법무관과 두 명의 전집정관 계 열 명이 당시 열 개이던 속주에 가각
1년 임기로 파견되는 속주총독의 수와 일치한다.
10개 屬州는,
1. 시칠리아島
2. 사르데니아島
3. 近 스페인(스페인 동부)
4. 遠 스페인(스페인 서부, 현 포르투갈)
5. 갈리아 나르보넨시스(현 南佛 프로방스지방)
6.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지방
7. 아시아속주(현 터키 서부지역)
8. 소아시아동남부 키리키아
9. 아프리카속주(구 카르타고)
10. 갈리아 티자르피나(알프스 이남, 루비콘강 이북)
7.軍事改革
政治力과 軍事力의 분리가 국가 로머의 건전한 발전에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무력으로 독재관이 된 스쯔라가 가기모순일지 모르나 두 번이나 군대를 이끌고 로마進軍을 강행한 그로써 그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군단을 통솔할 자격은 국내에서는 집정관 둘로 하고 4개군단 이상의 상비군은 국내에 두지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상 규모의 군대 지휘권은 속주의 수비임무를 맡는 전집정관이나 전법무관에 한하고 그들도 軍團 이동시는 반드시 원로원의 허가를 받도록했다.
로마 직할령인 루비콘강 이남 메시나해협까지의 이탈리아반도에는 절대로 군대를 데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정했다.
수도 로마와 원로원을 무력 난용자로부터 지키기 위한 조치이다. 최고사령관은 군사임무의 완료와 동시에 군단 해산 의무가 부과되었다. 군단병의 私兵化 방지책이기도 했다.
집정관이나 법무관은 시민집회서 선출하지만 속주통치에 파견되는 총독들의 임지는 원로원 결정에 따른다.
스쯔라는 이 관례를 확실히 법제화 했다.
8. 지방개혁
일종의 연방제도였던 <로마聯合>이 기능하던 시대와 달리 이미 이탈리아人이 로마人이 된이상 로마에는 로마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동맹 제도시의 국내자치를 존중할 의무가 없어진 것이다. 로마동맹 도시들은 국가로서가 아닌 로마의 지방자치체로 바뀐 것이다.
이들 지방자치체에는 프래펙토우스(prafectous)라는 官選知事격의 책임자가 파견되어 당해 지방민 백 인으로 구성되는 지방의원들과 5년 임기로 지방행정을 담당한다. 지방자치체의 주민도 로마시민권을 가지므로 直接稅는 면제되고 間接稅만을 지불할 의무가 있었으나 이 시기의 지방행정 재원은 불분명하다. 어떻든 로마연합 당시보다는 中央集權化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使用語에는 변함 없이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건재했던만큼 지방 특색도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본다.
특히 나폴리 같은 도시는 그리스인의 도시로 자타가 공인하는 도시였다.
9. 護民官制度 문제
로마공화정의 호민관제도는 국정 참여길이 막혀 있는 평민게층의 이익 보호를 위해 BC.4세기에 도입된 제도이다.
호민관은 평민출신의 최고위 관직으로 집정관과 같이 입법권이 주어져 있어 평민계층의 리더로 로마 정계에 막강한 여향력을 행사 해왔다.
지난 1세기간 로마의 혼미기도 원로원의 통치능력 쇠퇴에 반한 호민관의 영향력 강화가 원인이라고 본 스쯔라는 호민관은 존치하되 그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했다.
호민관은 1년 임기 후 자동으로 원로원에 진출하고 원로원 출신만이 입후보 할 수있는 집정관 법무관 재무관으로도 선출이 가능했으나 스쯔라의 개혁 초점은 호민관의 종착지를 원로원으로 한정시킨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량 있는 평민 청년들의 호민관 진출 의욕을 약화시켜 평민세력의 유능한 지도자 배출을 차단하려는 것이 호민관제도의 개혀이었다.
*스쯔라, 개혁완료 즉시 독재관직 下野 후 은둔생활
이상이 로마사상 초유의 무제한 임기의 독재관이 되면서까지 실행하려고 한 스쯔라의 의한 국정개혁의 골자이다.
BC 81년 80년, 2년에 걸쳐 개혁을 완성했다.
로마 특유의 공화정 원로원체제의 강화를 위해 가죽부대를 열심히 보강 수선해서 그 안에 새 포도주를 담은 스쯔라는 무기한독재자의 이름이 무색하게도 어느날 갑자기 사임을 선언한다.
BC.80년 말 다음해 집정관 선거를 위헤 로마광장에 소집된 시민집회에서 연단에 올라가 독재관 사임을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58세의 독재관은 선언즉시 경호원 24명을 현장 해임하고 일개 시민이 되어 연단서 내려왔다.
토가를 길게 두른 장신의 스쯔라는 평소 벗들 몇명과 함께 로마광장을 담소하며 상책하고 어느날 로마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스인들이 많이 사는 쿠마에 허름한 별장 하나를 장만해서 35세의 젊은 부인 발레리아와 함께 1년 여의 은둔생활 끝에 60세의 생을 마감한 그는 평생을 싸움터에서, 말년은 정치일선에서 돈을 모르고 죽으면서 쌍둥이 남녀아와 유복자 자식들의 장래를 심복 루크루스 장군에 의탁하는 유언을 남겼다.
유체는 로마에 운구되어 국장으로 엄수되고 화장한 유골은 로마의 역대 王들이 묻힌 마르스광장 중앙 묘소에 안장되었다. 장에기간에는 평소 그에게서 은혜를 입은 경향각지의 사람들로부터 2천 개가 넘는 黃金冠이 답지하여 인간 스쯔라의 사람됨을 알게했다.
묘비명은 유언으로 남긴 것이 없어 그가 평소 생각했다는 다음 글이 새겨졌다.
<同志들에게는 스쯔라 이상 좋은 일해준 者 없고, 敵들에는 스쯔라 이상 나쁜 일 해준 者는 없다
이것으로 61회에 걸친 로마史 다이제스트는 王政 共和政을 거치며 역사의 고비마다 등장하는 로마의 영웅들 면모를 드려다 보았습니다. 다음은 帝政로마 前夜의 격동기에 등장하는 폼페이우스 카에사르 크라쿠스의 三頭政 시대를 열어봅니다. 오늘음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