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 -Digest 26-
....오는 새봄에 벌어지는 이 百戰의 용병대장의 전략에 말려든 强骨 로마 장군과의 피나는 대결과 로마해군의 大海難 사고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11. 3.자 연재 25에서 여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스파르타人 傭兵隊長 쿠산티포는 고용주 카르타고정부에 이렇게 진언했다.
"로마軍에 패한 것은 병사들 때문이 아니라 지휘관의 무능 때문"이라면서 카르타고
귀족들의 체면을 깎았다.
돌아온 답변은 "그렇다면 네가 해보라"였다.
다음날부터 용병대장은 동맹국 누미디아의 騎兵들을 사들이고 코끼리戰車까지 동원해서 나름의 전술을 훈련시켜 이듬해 봄 로마군과의 회전에 대비했다.
BC.255년 봄이 되자 보병 1만 2천, 기병 4천기에 코끼리전차 백 두를 앞세워 용병대장 쿠산티포가 이끈 카르타고군이 치고나왔다.
코끼리전차는 한마리도 없고 보병 1만에 기병 5백기뿐인 로마군은 여지없이 당하고
로마해군이 대기중인 쿠르베아까지 겨우 2천명이 살아 도망갔다. 戰場은 죽은 로마군 시체로 뒤덮이고 지휘관 레굴르스 이하 5백 명이 카르타고측에 포로가 되었다.
로마군 지휘관 레굴르스가 범한 잘못은 아군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적의 도전을 받아들인데 있다. 오는 3월 15일 임기 만료 전에 공을 세워 개선장군으로 귀국해서 로마시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명예를 빛내고 싶은 지휘관 개인의 욕심이 빚은 참극이었던 것이다.
이미 로마를 뒤로하고 있던 신임 집정관 두 사람은 아프리카로 향하는 도중 기항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이 패전소식을 들었으나 아프리카항로를 바꾸지 않았다. 쿠르베아에 있는 7천 명의 로마병사와 40 척의 군선 그리고 승무원들을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陸戰의 승리에 戰意가 올은 카르타고측은 로마軍의 접근을 알고 네 번째 해전을 걸어올 참이었다. 여기서 승리하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간의 制海權을 찾을 수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灣으로부터 동북방에 삐져나온 헤르마에움곶(岬) 해상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간의 4차해전이 마침내 벌어졌다. 네 번째 해전서도 카르타고측은 완패했다.백 14 척의 배가 격침되거나 불탔다.
지중해 세계 최강 海軍國이라던 카르타고도 경쟁상대였던 그리스가 쇠퇴한 후 敵다운 적을 만나지 않았을 뿐, 이제 海運國일는지는 모르나 해군국은 아니라는 것이 로마군에 의해 입증된 것이다.
敵船을 수장하고 예정항로를 따라 쿠르베아港에 입항한 신임 집정관의 로마함대는 거기에 남아 있던 로마軍 전원을 구출, 前線基地를 뒤로하고 첫 아프리카進攻作戰의 실패를 자인하며 뱃머리를 시칠리아로 돌린다.
로마선단이 시칠리아 南岸 가까이 왔을 때였다.
갑자기 거친 풍랑을 만났다.
주변 해안은 암초로 뒤덮여 있었다.
피항할 가까운 항구도 없었다.
로마함대의 키는 로마聯合의 해양도시에서 참전한 승조원들이 쥐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 경험에 의해 풍랑을 헤쳐 최소한의 안전 항해를 할 줄아는 지혜가 있었으나 그들의 키잡이를 반대한 자가 바다에 익숙치못한 로마의 장군들이었다.
육지도 보이지 않는 해상에서 풍랑에 시달리는 공포를 참지못한 로마인은 해안에 접근하라고 명령했다. 키잡이들은 파선위험을 경고하며 항의했다.
경험이 없는 인간을 향한 설득은 효과가 없다.
그런데, 무경험자가 명령을 내리는 지위에 있으니 탈이다.
230 척으로 이룬 로마함대는 비바람이 포효하는 바다에서 정처도 없는 해안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결과는 지중해 사상 최대 海難事故를 빚었다.
암벽에 부딛치고 배끼리 충돌하면서 230 척 중 시라쿠사港까지 난을 피해 간 배는 80 척뿐이었다.주위 해변은 밀려온 시체로 뒤덮였었다고 한다.
이 해난사고로 로마는 무려 6만의 인명을 잃었다.
집정관 둘이 함께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타고 있던 旗艦에 그나마 숙련된 선원들이 타고 조종을 했기때문이다.
海戰에는 이겼어도 風浪에는 지고만 로마人이말로 어차피 海運의 전통을 가지지못한 민족이었다.
대참사 소식을 접한 로마시민들은 심각한 슬픔에 싸여 초상을 치른 반면 카르타고人들은 좋아 날뛰었다.
로마로서는 참담한 결과로 끝난 그해 겨울 카르타고로부터 講和使節이 찾아왔다.
지금이야말로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맞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화사절은 카르타고인이 아니었다.
감시를 딸려서 포로로 잡힌 로마군 지휘관 레굴르스를 앞장세운 것이다.
로마元老院을 설득해서 카르타고가 바라는 로마의 시칠리아 전면포기조건을 받아드리게 하라는 것이었다. 수락 여부 상관 없이 레굴르스는 카르타고로 돌아가야했다.
아프리카진공작전의 실패에 未曾有의 해난사고로 의기소침한 원로원 의원들은 레굴르스의 진의를 이해는 하나 강화조건은 받아드릴 수없었다.
약속대로 카르타고에 돌아간 레굴르스는 둥군 바구니 안에 갇혀 코끼리들의 축구공이 되어 먼지속에 나뒹굴리며 피투성이로 죽어갔다.
좋은 조건으로 강화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만큼 카르타고측의 사기는 드높았다.
카르타고는 군사력에 의해 시칠리아를 완전제패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BC.254년 봄 일대 양자 대결의 예고였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