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 Digest-32-
하밀카르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탁월한 조직력으로 스페인 원주민들과 싸와 이기고 그들을 용병으로 만들어 세력을 확장해갔다.
카르타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장을 경영하고 많은 광산을 개발하면서 식민지 건설에 성공, 이주 10년째인 BC.228년에는 스페인 동해안에 新 카르타고로 불리는 도시도 건설했다. 지금의 카르타헤나가 하밀카르의 바르카系 一門이 지배하는 스페인 식민지의 본거지였다.
신도시 건설의 완성을 1년 앞두고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하밀카르가 전사하자 아직 어린 18세의 장남 한니발 대신 사위 하슈도울바르가 총독 자리를 이어받아 식민지 개발을 완성시켰다.
BC.221년, 부려먹던 종을 하대하던 끝에 하슈도울바르가 원한을 품은 갈리아人 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해 한니발이 26세의 나이로 카르타고政府로부터 3대 총독에 임명된다.
여기까지가 하밀카르, 사위 하슈도울바르 장남 한니발로 이어지는 바르카 일문의 스페인 식민지 정착과정이다.
먼저 해둘 이야기는 로마가 당시 한니발은커년 스페인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그것을 십분 이용한다.
아직 로마가 北方 방위체제를 확립하기 전 BC.221년 全權을 장악한 한니발은 스페인의 에브로江 이남을 완전 제패함으로써 스페인 전역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이 된다.
한니발은 28세 나이가 되면서 BC.219년 가슴에 새겨온 숙원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뒤에 알게된 일이지만 당시는 로마도 카르타고본국도 이 젊은이의 진의를 전연 알지 못했다.
그해 한니발은 近西 스페인 동해안의 항구도시 사군토를 공격했다.
사군토는 마르세이유와 더불어 로마와는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리스人들에 의해 세워진 사군토도 西지중해역에 사는 그리스人들과 마찬가지로 강국 카르타고에 대항책으로 로마와 밀접했다.
사군토 주민은 동맹국 로마에 구원요청을 해 왔다.
메시나를 구원하기 위해 시칠리아島에 개입하였듯이 이번에도 로마로서는 구원요청을 거절할 수없었다.
제1차 포에니전 이후 북방 방위에 국력을 쏟고 있던 로마는 갈리아人들의 출몰을 제지하기 위해 알프스 밑 포江邊의 피아첸차와 크레모나에 식민도시를 건설했을뿐 아직 軍 이동 街道網 건설은 착공조차 못한 상태여서 이 지역에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가 있었다.
遠西 스페인까지 지원군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외교로 해결하고자 사군토에 元老院 의원 2명을 사절로 보냈다.
로마사절의 사군토공격 중단요청은 한니발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여기서 서성거리면 분노한 병사들에 의해 목숨마저 보장할 수없다는 한니발의 협박에 로마사절은 급히 자리를 떴다.
다시 카르타고로 직행한 사절에 앞서 한니발로부터 온 편지를 먼저 받아본 카르타고정부도 공격중단 요청을 거절했다.
첫번 사절이 귀국하고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 5명으로 구성된 두번째 사절이 카르타고를 찾았다. 결정권까지 위임받은 사절단이다. 로마로서는 이 시기에 전쟁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스페인 식민지에서 농장경영 등으로 부를 축적한 카르타고의 유력자들은 한니발이 사군토공격을 중지하거나 한니발의 身柄을 인도하라는 로마의 요구를 일소에 붙일뿐이었다.
그러나 국내파의 영수 한논만이 불길한 예감을 하고, 로마의 명예를 손상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거드름 피는 동포들의 눈을 뜨게하려고 애썼다.
그는 말했다.
<저 거치른 기질의 젊은 것이 바르카 家系의 인간이라는 데서 이중으로 위험하다.
로마의 동맹도시 사군토를 공격하는 것은 로마와의 전쟁 재개로 이어지리라는 예감을 지울 수없다. 우리가 지금 해야할 것은 한니발로하여금 사군토에서 손을 떼라고 명령하는 일이다>
그러나 소수만이 스긍할뿐 한논의 설득은 먹혀들지 않았다.
카르타고정부는 로마사절을 향해 한니발의 사군토공격은 사군토측이 먼저 걸어온데서 발단된 자위조치라며 철수를 거절했다. 뻔한 거짓말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로마人들은 요청을 단념하고 사군토에서 군대를 빼느냐 아니면 로마도 전쟁에 들어가느냐의 양자택일을 카르타고에 촉구했다.
카르타고정부의 답변은 <사군토에서 군대는 빼지않는다>였다.
이렇게 해서 로마는 시민집회의 최종결정에 따라 한니발과의 전쟁을 공식선포하게된다.
사절단의 귀국을 전후해서 사군토失陷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BC.219년, 8개월 간의 攻防속에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BC.218년 나이 29세의 한니발은 준비한 全軍을 이끌고 카르타헤나를 출발했다.
에브로江 북쪽으로 건너 피레네山脈을 넘고 지금의 프랑스 땅 갈리아에 들어가 로누江을 다시 건너서 프랑스를 횡단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는 것을 후세 사람들이나 알게된 일이지 당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코끼리까지 데리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이야말로 그 후 2천 2백년, 역사에 흥미를 가진사람들도 이야기는 듣고 있는 유명한 史實의 인물이다.
왜 그 어려운 모험을 감행했는가?
한니발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하밀카르의 유지를 받든다 하더라도 한니발의 최종 목적은 로마의 擊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밖에서의 전쟁으로는 로마에 승리할 수없다는 것을 시칠리아에서 제1차 포에니전쟁이 실증하고 있다.
때문에 戰場은 로마의 땅이 아니면 안되었던 것이다.
지중해 한가운데에 삐져나온 이탈리아 반도를 공격할려면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는 로마 屬州가 된 시칠리아가 가로막고, 制海權도 로마의 손에 있었다.
동쪽으로부터라면 로마聯合 도앵국 앞을 지나야한다.
아드리아海에 침입하더라도 거기 그리스 서안의 이리리아지방까지 세력 하에 둔 로마 해군을 피할 수없었다.
스페인으로부터라면 西地中海를 횡단하면 되지만 서쪽으로부터의 侵攻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사르데니아島, 코르시카島 모두가 로마의 속주였고 거기 로마軍이 주둔해 있었을뿐만아니라 대병력의 수송에는 수 백척의 배가 필요했다. 한 두척도 아닌 대선단이 제해권을 쥔 로마해군에 무사할 리없을 것이었다.
BC.218년 시점에서 로마의 방위망은 東西南이 철벽이었다.
한니발은 아직 로마가 식민지 건설 단계에 있던 이탈이아 북부에서 방위선 돌파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로마를 적대시하는 북방의 미개한 갈리아人들을 회유하여 우군으로 삼을 수있다고 본것도 한니발의 周到한 전략의 일면이다. 진군 도중 수년 전 로마군과 싸운 경험 있는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도 얻고 수 천의 갈리아인들을 한니발 휘하에 끌어모아 함께 싸우게된다.
북방 진로를 택해 보에니江을 건너고 피레네山脈을 넘어 森林 우거진 넓은 갈리아 땅을 지나 험주한 알프스산을 넘어서 이탈리아領으로 침입하기까지의 한니발의 행로에 관한 이야기는 한니발이 대동한 시레누스라는 記錄者와 한니발의 동시대인 로마원로원 의원 파비우스 픽토르의 생생한 기록을 근거로 그리스人 폴리비우스와 로마人 리비우스 두 歷史家의 저서에 의해 전헤지고 있다.
알프스를 넘기까지의 한니발 이야기는 여기에 근거해서 상술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