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Digest-65-
로도스島 유학길에 해적에 포로되어 <내 몸값이 고작 그거냐? 더 올려라 기엄...>
카에사르가 돌아온 로마에는 민중은 있으나 <민중파>는 척결되어 사라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싹은 조금 자랐지만 아직 두 장의 떡닢이라는 것을 그에게 깨닫게 해준 것은 어머니였다. 스쯔라의 죽음을 알고 급거 귀국은 했으나 그에게는 귀국 후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카에사르 집안 쪽은 민중파 두목 마리우스에 의해 가장 둘이 살해된 후로는 침묵했으나 어머니 친정 오빠 아울레리우스 곳타가 있었다. 곳타가 3년 후 BC.75년 집정관에
선출된다.
BC.78년 집정관이었던 레피도우스가 속주총독 부임차 편성한 군단을 사용해서 스쯔라체제를 실력으로 몰아내려다가 젊은 무장 폼페이우스 휘하 군단에 의해 간단히 제압되고 레피도우스는 사르데니아로 도망가 거기서 병사하고 만다.
카에사르가 자중했다는 것은 그가 레피도우스의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근신 중이던 카에사르는 타고난 논리력을 가지고 변호사로 입신할 것을 결심한다.
로마의 변호사는 피고 측에 서면 변호사가 되고 원고 측에 서면 검사가 되는 이중역할을 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약관 23세의 젊은 변호사가 설 자리는 좁았다.
첫 수임 사건은 피고측 변호사로서 패소했고, 두 번째는 일약 법조계 스타덤에 오를 욕심으로 스쯔라의 측근으로 알려진 거물을 물었다.
집정관을 지내고 小아시아 속주총독으로 부임해서 부정축재를 한 도라베쯔라를 기소하는 검사로써 법정공방을 벌였으나 호루텐시우스 같은 쟁쟁한 명변호사들과는 싸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法理論만으로는 부자들로 구성된 陪審員들을 감동시킬 재주가 없어 결국 패소하고 말았다.
두 번의 송사에서 모두 실패했을 뿐만아니라 두번째 재판은 여전히 살아있는 스쯔라의 원로원파를 자극한 결과가 되어 압박해 오는 후환을 피해 변호사업을 포기하고 제2의 망명길에 오른다.
해외유학은 로마의 양가 출신 24세의 카에사르로서는 달리 바랄 것없는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30세가 출세의 시발점인만큼 20대까지는 아직 충전기로 생각해야했기 때문이다.
혹시 카에사르가 주위의 평판이나 타인의 영달에 민감히 반응하는 기질이었다면 20대는 아직 충전기로 알고 기다리는 인내를 수용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불과 6년 연배의 폼페이우스는 로마 정규군 4만을 이끄는 총사령관으로 스페인 원정길에 오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기다릴 줄을 아는 낙천적이기도한 카에사르였으나 대학에서 학업에 전념하기 전에 海賊을 만날 줄이은 꿈에도 예상하지 않았다. 목적지 로도스島로 향하는 해상에서 해적선의 기습을 받고 포로가 되고만 것이다.
포로가 된 승객 하나하나에 몸값을 매기는 중 자기에게 20탈렌트의 딱지를 붙인 해적을 향해 크게 웃으며 내 몸값이 고작 그거냐? 50탈렌트로 올리라고 되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시 그리스 출신 해적들의 잔학상는 악명이 높았다.
카에사르는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싸구려 몸값보다 비싸야 殺害 공포 없이 대접 닫을 수있을 것이라는 것을.....
38일만에 시종이 가져온 몸값 50탈렌트를 내고 풀려난다.
인질 생활 38일간 카에사르는 해적들의 무술훈련니아 오락에 참가하며 때로 잠능ㄹ 방해하는 해적들을 향해 조용하라고 소리르 지르기했다. 해적들 데리고 연설 연습도 하고 어떤 경우는 농담조로 해적들을 향해 말 안들으면 목을 조르겠다고도 해서 해적들의 우슴을 사기도 했다.
자유몸이 된 카에사르는 가까운 밀레토스항으로 달려가서 배를 빌리고 사람들을 모아 이끌고 해적 정벌에 나섰다. 미레토스 근처 강 어구에정박 중인 해적선을 급습하고 전원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했다.
해적들의 탈취한 재화도 압수했으므로 몸값으로 빼앗긴 50탈렌트 쯤은 충분히 벌충했을 것이다.
해적들을 감옥에 가두고 소아시아총독에 보고했으나 총독은 해적의 재화에만 관심이 있는듯, 해적의 처치는 승리자의 권한 소관이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카에사르는 감옥으로 돌아와 해적 소탕의 의미로 모두 교형에 처했다.
인질 때 해적들에 한 농담이 진담이 된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로도스도에 도착한 카에사르는 지성을 샇는 학문 탐구에 정진한다.
지성이 성숙해지는 20대 중반의 카에사르는 로도스 섬 체재 중 따뜻한 기후에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항구에 정박 중인 로도스의 자랑 군선단을 견학하는 한편 지금은 바티칸미술관의 지보 중 하나인 <라오콘의 群象>을 조각한 로도스 섬의 예술가들도 만났을 것이다.
그는 때로 작은 배로도 수 시간이면 닿는 소아시아에 출몰하는 해적떼를 소탕하기 위해 사병 조직을 이끌고 가서 칼을 휘둘렀다.
스쯔라에 눌려 잠복했던 폰토스왕 미토리다테스가 불온한 움직임을 시동하고 있을 때
BC.74년 외숙 아울레리우스 곳타가 비티니아지방 속주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카에사르는 유학생 신분의 로도스의 대학을 포기하고 19세 때 군사사절로 가서 만났던 왕의 나라 비티니아로 총독 외숙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법학자 출신으로 군사경험이 없는 곳타총독은 바로 동쪽에 인접한 폰토스왕 미토리다테스의 침입으로 임지에서 탈출, 현지에서 병사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총독이 急死하자 수도 로마로부터 급전이 전해졌다.
외숙 곳타총독 밑에 막료로 있던 카에사르가 공석이 된 곳타의 후임 신시관에 임명되었다는 전보였다.
로마의 祭司 계급은 最高神侍官- 神侍官- 祭司- 占師 순의 히에라르키(서열)로 이어진다. 외숙의 죽음으로 생긴 공석을 조카가 이어받음으로써 27세의 카에사르는 자연스레 신시관이 되었다.
카에사르의 3년만의 귀국은 신시관 서품 이외 또 다른 의미가 따른다. 그는 순백 토가로 몸을 감싸고 市民集會 개회 중에 포로-로마의 연단에 섰다. 순백을 의미하는 캔디드란 말은 오늘날에도 구미에서는 입후보 캔디데이트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다.
출세기점을 30세로 하는 로마에서 27세가 입후보 할 수있는 관직은 군단 내의 고급장교에 해당하는 대대장이 고작이다. 하지만 대대장은 百人隊長 6명을 거느리므로 6백명의 병사를 지휘할 수있으며 1개 군단에는 10명의 대대장이 종군한다.
카에사르는 이 대대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28 29세 나이가 될때까지 건강은 좋았지만 종군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스쯔라 이후가 그에게 아직은 봄이 아니었다.
BC.71년 로마를 공포 속에 몰아 넣었던 스파르타쿠스 노예의 반란이 크락수스에 의해 완전 진압되고, 스페인전선이 폼페이우스에 의해 평정되어 로마에 다시 평화가 온
BC.71년에 장래 트로이카 카에사르 29세, 폼페이우스 35세, 크락수스 43세였다.
늦깎이 카에사르는 여전히 잠룡에 머물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