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 Digest-63-* 노예 劍鬪士 스파르타쿠스가 74명의 동료 검투사들을 이끌고 훈련소를 탈출하면서 일어나다 로물루스가 3천명의 장정을 데리고 테베레江 가 일곱 개의 언덕에 왕국을 건설하고 7백년이 흘렀다.이탈리아半島를 통일하고 지중해를 內海로 制覇하여 지금의 유럽의 역사를 쓰게 한 로마는 征服戰爭에 항복하는 민족은 同化하고 죽음으로 항전하는 민족은 노예화는 정책을 일관되게 펴왔다.로마의 지배영역은 지금의 북아프리카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발칸반도까지 그리고 서쪽 이베리아半島로부터 라인江 以西를 거쳐 다뉴브江 이남과 黑海연안까지 넓혀졌다.그 힘은 다른 것이 아닌 국가의 組織, 시스템에서 나왔다.BC.1세기 전반 이탈리아반도 내 로마市民權者는 6백만 내지 7백만으로 학자들은 추산한다. 거기에 노예인구가 2백만 내지 3백만, 인구 3명 중 노예가 1명꼴이다.그 많은 노예가 7백 년 동안 복종만 하고 지낸 것은 아니다. BC.135년과 104년 대규모의 농원이 많은 시칠리아에서 農奴의 반란이 있었지만 역사에 기록 할만한 사건은 아니었다.세 차례의 반란 모두가 한니발戰 승리 후 로마의 混迷期에 발생하지만, 이탈리아 본토 내에서 발생한 BC.73년의 반란은 다르다.로마 1호국도 아피아街道와 라티나가도가 교차하는 도시 카푸아는 검투사훈련소가 집중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영리목적의 훈련소들은 노예시장에서 건장한 체구의 노예들을 사들여 훈련 시켜서 여러 도시에서 개최하는 劍鬪士시합에 돈 받고 빌려준다.시합에 지면 죽이지까지는 않지만 결투 자세가 못마땅한 검투사에 대해서는 관객들로부터 없애버리라는 항의는 자주 받는다. 검투사가 꼭 노예들만은 아니고 자유시민 중 검투사를 전업으로 하는 자들도 있다.검투사 임대료가 얼마인지는 불명하나 상당히 고액인 것만은 확실하다.원로원의 유명인사 키케로의 친구이며 당대 지식인이었던 아티쿠스란 사람도 카푸아에 검투사훈련소를 경영했을 만큼 돈벌이가 좋은 장사였다.카푸아의 검투사 훈련소에는 黑海 연안의 트라키아地方 출신 노예 스파르타쿠스란 이름의 검투사가 있었다. 로마군에 붙들려 온 그는 트라키아의 왕자라는 전설도 있으나 왕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방 部族長의 자식쯤은 되는 리더 기질이 있는 사나이였다.이 스파르타쿠스가 두목이 되어 74명의 검투사가 돌연 훈련소를 집단 탈출한 것이 이른바 <스파르타쿠스의 란>의 시초이다.늘 죽음을 등에 지고 사는 노예의 봉기라는 데서 역사상의 한 사건은 현대인의 흥미를 자극한 듯 소설로 쓰여지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스파르타쿠스>란 이름의 영화에는 주인공 스파르타쿠스 역에 커크 다글러스가, 토벌군 지휘관 크락수스에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분하여 史實과는 거리가 먼 현대풍의 인도주의 입장에서 그려내고 있다.그건 그렇고, BC.73년 카푸아의 검투사훈련소를 무기를 가지고 집단 탈출한 스파르타쿠스 일당 74명의 노예들은 근거리의 폼페이 뒷산 베스비오 火山으로 도망했다. 당시의 베스비오 화산은 백 50년 후에 폼페이를 매몰시킨 대폭발 전이므로 후대와 같은 민둥산은 아니었다.수목이 우거진 산 속에 숨어든 검투사의 두목 스파르타쿠스 밑에는 부두목 격의 갈리아人 크릭수스와 오에노마우스란 두 사나이가 있었고, 거기 탈주자 중에는 게르만族이 많았다.각자 출신지는 다르지만 칼싸움에는 일가를 이룬 一當 百의 용맹한 사나이들이었다.이들은 산을 내려와 부근 농장을 약탈하기 시작한다.로마정부는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검투사 봉기를 가볍게 보았다.3천 명이 안 되는 토벌대를 보냈으나 검투사들에 의해 많은 피를 흘리고 패주한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노예 검투사들이 로마 정규군을 간단히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자 캄파냐 지방 농장 노예들이 괭이를 버리고 베스비오 산으로 대거 몰려왔다.노예반란이 아니라 본격 노예와의 전쟁의 시작이었다.원로원은 이번에는 신중히 대처하여 법무관이 인솔하는 2개 군단 병력의 토벌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토벌군은 2개 군단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맥없이 깨지고 말았다스파르타쿠스는 포로로 잡은 로마병들에, 자기들이 로마인으로부터 당한 대로, 검투시합을 시켜 복수했다고 한다.스파르타쿠스의 두 번의 승리는 이탈리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BC.72년 스파르타쿠스는 전국의 농장 노예들뿐 아니라 일반 노예와 하층 농민들까지 가세하여 대세력이 된 노예군을 전투효율상 스파르타쿠스 군과 두 부두목의 양대전렬로 나눠 싸우기로 한다.두 갈리아인 두목이 이끄는 노예군은 아드리아海 연안을 따라 북상도중 토벌군이 가루가노山 중에 몰아넣고 섬멸하여, 노예세력을 반감시키고 부두목 크릭수스도 여기서 전사했다.한편 4만의 동지를 이끈 스파르타쿠스는 추격망을 교묘히 빠져나와 피체노까지 북상한 것을 집정관 두 명이 이끄는 4개 군단의 추격을 받았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군사상 재능은 달을 거듭 향상하여 로마군 무장들을 뺨칠만했다.4개 군단 모두를 상대하는 대신 1개 군단씩 각개 대항으로 전술을 바꿨다.스파르타쿠스는 처음 2개 로마군단과 싸와 격파하고 칼을 돌려 또 다른 2개 군단을 급습했다. 그리고 북행을 멈추지 않고 루비콘江 근처에 이르러 北이탈리아에서 남하 중인 갈리아 총독의 군과 마주쳐서 이 역시 격파했다.로마로서는 면목 꾸긴 것은 고사하고 일대 손실을 입고 대책을 잃었다.스파르타쿠스는 이때 알프스를 넘어 고국으로 갈 길이 열렸으나 돌연 진로를 180도 돌려 남하하기 시작한다.스파르타쿠스는 척박한 산악의 고향을 버리고 차라리 기후 좋고 땅 비옥한 남국 시칠리아로 가서 거기에 정착할 생각으로 4만의 노예군을 이끌고 남하를 결심한 것이다.도중 촌락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반도 최남단 메시나까지 남하한 스파르타쿠스는 거기서 법무관 크락수스가 이끄는 8개 군단의 대병력과 마주쳤다.5만 병력의 크락수스군은 스파르타쿠스 노예군과의 초전에서 큰 희생은 없었으나 패배하고 메시나 해협을 배수의 진으로 다음 전투를 벌였다.戰功에 있어 스페인戰線의 폼페이우스를 제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찬 크락수스는 두 번째 전투를 마지막 결전의 기회로 생각했다.그런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 노예군에 등을 보이고 패주한 중대가 있었다.크락수스는 전군이 보는 앞에서 벌을 내기로 했다.엄한 로마軍律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벌, 10분의 1刑의 벌이 내려졌다.총사령관에 반기를 들 때 내려지는 최고 형벌이다. 도망한 6백 명 1개 중대에서 추첨으로 10명 중 1명씩을 뽑아내 모두 60명을 전 중대원이 태형을 가해 죽이는 사형방법이다. 운 좋아 몽둥이를 들게 된 병사들은 똑같은 죄를 짓고도 동료를 때리는 입장의 자기 양심에 깊은 자책을 느낀다.엄벌의 효과가 있어서였음인지 전 장병이 심기일전하여 은신했던 아스프로몬테(험준한 산)에서 스스로 산을 내려온 스파르타쿠스 노예군을 소탕하는데 성공한다.4만의 노예군 거의가 전사하고 포로가 된 6천의 노예병들은 십자가에 매달아 로마로 압송되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그러나 시체의 산더미 속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크락수스가 8개 군단을 맡아 6개월 만에 이룬 전과였다. 이탈이아 전역을 뒤흔든 반란 2년의 BC.71년 가을도 깊었다.노예반란을 겪은 로마는 다시 한 마디 성장을 한다.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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