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Digest-60-
<역사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그 교훈을 배우지 않는 자를 罰하다.>고 했습니다. 크게는 국가, 작게는 개인 모두에 주는 클리체브시키의 경고입니다.
반대파 일소작전에 나선 스쯔라의 殺戮은 마리우스의 怨恨에 찬 행위와는 달리 반대파의 인물들을 물리적으로 抹消할 목적에 따른 점이 다르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먼저 로마성곽에 몰려서까지 저항을 계속한 정규군 중 사무니움族 병사 4천 명을 경기장에 모아놓고 처단했다.
단말마의 비명이 원로원이 열리고 있는 신전에까지 들렸다.
새파랗게 질려 헛된 공론을 하는 의원들에게 스쯔라는 차갑게 내뱉았다.
<정당한 벌을 받고 있는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우릴 필요 없다>
스쯔라는 건장한 육체의 노예 1만 명을 해방해서 그들에게 코르네리우스 家門名을 주고 반대파 일소하는데 별동대로 사용했다.
별동대는 먼저 마리우스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신을 태와 그 재를 테베레江에 뿌리고 마리우스의 전승기년비를 파괴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리우스의 손자까지 학살했다.
마리우스와 킨나에 연결되는 이른바 民衆派 소속 인물들의 이름이 스쯔라의 殺生簿에 오른다.
일단 여기에 오르면 어디에 숨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현상금 밀고제도를 쓰기때문이다.
그리고, 지목된 사람들을 죽인 자에게는 죽임 당한 자의 자산 중 막대한 금애이 포상금으로 주어진다.
이 스쯔라의 살생부에는 80명 가까운 원로원 의원과 1천 6백명의 騎士級 경제인을 포함해서 4천 7백명이 등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재판 없이 사형과 함께 재산몰수 두 가지를 당하거나 아니면 죽거나 재산몰수이거나의 세 유형의 징벌을 받았다. 전원이 자손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문자 그대로의 민중파일소작전은 로마의 著名人에 한하지 않고 이탈리아 각 지방에까지 파급되었다.
로마정규군에 가담해서 스쯔라에 대항한 중부 이탈리아와 에토룰리아, 남부의 사무니움과 루카냐의 사람들은 <율리우스시민권법>으로 보증되어 있는 로마시민권을 회수당했을뿐만 아니라 유력 인사들은 사형에 토지몰수 처벌까지 받았다. 스쯔라는 민중파의 지반을 철저히 파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살생부에는 젊은이 하나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마리우스의 조카이며 킨나의 사위가 되는 젊은 카에사르도 스쯔라가 보면 일소해야할 민중파에 부족함 없는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친도 없는 율리우스 가문의 후예로서 이제 나이 18세일뿐인 그가 정치적으로 뭣하나 행동한 것이 없다며 스쯔라 주변인들의 간곡한 구명 탄원에 힘입어 처음에는 고개를 저었으나 마지못해 명부에서 젊은이의 이름이 지워진다.
그러나 쓰쯔라는 탄원을 받아드리면서 말했다.
<당신들은 모르는가. 저 젊은아이의 속에는 백 명이나 마리우스가 들어있는 것을....>
非凡한만큼 비범을 洞察했을 것이다.
탄원을 받아들였으나 한가지 조건만은 분명했다.
<킨나의 딸과 이혼하라>였다.
3개 군단을 자비로 편성해서 스쯔라를 돕고, 이프리카까지 원정해서 민중파 잔당을 토벌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도 스쯔라의 명령에 굴복해서 민중파로 살해된 사람의 딸을 이혼하고 스쯔라의 권유로 그의 처조카와 재혼한 처지였다.
카에사르에게서 돌아온 답은 노우였다.
스쯔라는 격분했다.
18세의 카에사르는 로마에서 도망쳐 이탈리아를 전전했으나 집요한 추적에 한계를 느끼고 그리스로, 小아시아로 도피행각을 벌인다.
57세의 스쯔라는 반대파 일소 후 국정개혁에 전념한다.
스쯔라는 집정관이 공석인 상황에서 원로원 유력자 바레리우스에 다음 서한을 보냈다.
<현상황이 극가에 있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이상, 이와같은 사태의 타개에는 비상시 대책만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즉, 평시의 집정관으로는 불충분하고 비상시의 독재관 그것도 종래와 같이 6개월 임기가 아닌 사태 수습시까지의 무기한 임기가 허용되는 독재관이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시민이 바란다면 나로서는 그 무거운 짐을 질 각오가 되어 있다.> 10만의 병력을 배경으로 한 스쯔라의 示唆였다.
마키아벨리의 설명에 따르면 독재관은 로마共和政의 3대지주인 市民集會와 元老院과 執政官제가 손이 미치지 않는 다른 모든 결정권이 부여된 대권을 갖는 관직이다.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한 그만큼 임기는 짧아 통상 6개월이다.
그런데 무기한 독재관을 요구한 스쯔라였다.
원로원에 요청하여 합법적으로 無期限의 獨裁官이 된 스쯔라는 비로서 폰토스王 미토리다테스를 두 번이나 제압한 전승 장군으로서 2일 간의 성대한 凱旋式을 가졌다.
BC.81녀 1월 27일과 28일 거행된 개선식에는 그해 165회 올림픽을 치르려던 그리스에서는 경기를 다음 해로 미루면서까지 선수 전원이 참석하는 등 대규모 죽제행사였다.
개선식 후 곧 개혁작업에 착수한 스쯔라의 개혁은 정치 경제 행정 사회 군사 등 각 분야에 걸친 거의 완벽한 국가개조였다.
개혁 내용은 그 2천년 후의 우리 현실에 비춰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고 없고 간에 우리로서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고할 그 옛날에 저토록 국가 시스템이 갖춰졌는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 내용을 일별할 가치가 있지않나 생각한다.
1. 시민권 및 선거제도
로마市民權을 이탈리아반도 전역의 주민에 개방한 <율리우스市民權法>을 인정한다는 약속은 지켰다.
그리고 호민관 스루피티우스가 성립시키고 킨나가 확립한 <신시민>은 35개 선거구 어디서든지 투표 할 수있다고한 법도 확인하였다. 스쯔라가 단지 수구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노예도 <신시민>과 독같이 35개 선고구 어디서든지 투표권을 인정한다는 킨나의 법은 폐기시켰다.
종전대로 35개 중 4개 구에서만 투표할 수있도록 했다.
그리고 율리우스시민권법에 명시되어 있던 로마에 적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조건에 주목했다.
이탈리아반도 전주민에 대한 로마시민권 취득은 인정하나 그것은 로마에 적대행위를 한지않는 자에 한한다는 항이다. 이 항목을 방패로 한 스쯔라에 의해, 이탈리아 상륙 후의 스쯔라를 요격한 로마 정규군에 참전한 에토루라아와 남伊의 많은 부족이 취득하고 있던 로마시민권은 박탈되었다.
2. 복지정책
40년 전에 가이우스 그라쿠스에 의해 시작된 이래 배급가격이 계속 하락하기만해서 결국 社會福祉化한, 빈민계층을 위한 <小麥法>을 전폐했다.
보수파 스쯔라로서는 복지보다도 국가재정의 건전화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법에 의해 이익을 얻는 도시무산자의 표가 <민중파>의 지반이 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스쯔라는 실업자는 군대에 흡수하는 것 이상 효율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스쯔라의 개혁의지를 보면서 2천년 전의 로마인들이 국가경영에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며 실업대책 군사개혁 등 나머지 개혁안은 다음 회에서 참고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