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교훈 로마史Digest-42-
*갈리아族 반란진압전서 2개 군단 희생
칸네의 대회전서 참패하고 돌아온 집정관 테렌티우스 바트로를 위로는 할지언정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칸네의 참패에 이어 악재가 거듭되었다.
한니발의 기세에 편승해서 일어난 북부 갈리아민족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헤 포江우역에 파겨된 法務官 포스토우미우스 인솔 하의 2개 군단이 갈리아반란병 추격 중 거의 전멸하였다.
2개 군단병력 8천 6백명이 갈리아 반군을 추겨하여 울창한 삼림 속으로 진입했다.
갈리아인들이 미리 잘라서 감쪽같이 세워놓은 나무들이 도미노 현상을 이르키며 넘어지면서 모두 나무에 깔려 기동 불능에 빠진 로마병들이 갈리아인들에 의해 모조리 희생된 대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며칠 사이에 남쪽과 북쪽 두 전장에서 모두 8만의 병사를 잃은셈이다.
*한니발의 和解제스쳐?
전승한 한니발 진영에서는 장군들 간에 지체없이 로마공략을 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로마의 붕괴는 <로마聯合> 붕괴로만이 가능하다는 한니발의 기본전략에는 변함이 없었다.
로마라는 나라가 수도에만 기능이 집중된 형태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한니발은 간파하고 있었다.
갈리아병들은 믿을 것이 못되고 정예라고는 하지만 데리고온 겨우 2만 5천의 심복들로 몇년이 갈지 모를 로마攻城戰을 감행하는 것은 자멸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알기에 휘하 장군들의 진언을 일축한 것이다.
칸네회전 후에도 포로는 로마시민병과 동맹국병으로 구별해서 동맹국병은 적이 아니므로 몸값없이 귀향시킨다며 석방하고 로마시민병은 철저히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중남 이탈이아 최대 도시 카푸아가 칸네전 이후 로마를 離反하고 한니발에 강화를 제의 해왔다.
카푸아에서 쾌적한 겨울을 난 한니발은 지금까지와는 사몯 다른 행동을 했다.
예에 따라 동맹국 포로들은 몸값없이 석방한 후 남은 로마시민병 포로들을 대면했다.
그들을 향해 공순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로마人을 전멸시킬 목적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와 패권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1차 포에니저쟁에서는 내 아버지가 여러분의 아버지에 양보했으나 이번은 나의 재능과 諸神의 은혜로운 행운에 의해 양보하는 쪽이 반대로 되는 것같다.
따라서 몸값을 치루면 여러분의 자유회복을 언도한다."
로마시민병 포로는 이때 8천명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네번의 전투에서 잡힌 로마인 포로들은 행군에 장애가 된다며 모두 죽여버렸다.
한니발은 포로들에게 대표 10명을 뽑게하고 심복 하나를 딸려 로마로 보냈다.
한니발의 포로석방 의도가 분명히 밝혀진 것이 없으나 돌아가면 다시 창칼 들고 맞서올 것이 빤한 로마인을 석방한 목적은 첫째 식량 사정이 있어 식구를 덜고 몸값 받아 챙기는 일석이조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둘째로 이탈리아를 침입해와서 처음인 로마인 포로 석방은 로미시민권자에 대한 것이므로 로마에 대한 강화 타진이라는 의미가 있다.
한니발로서는 네번의 패전으로 자신을 잃은 로마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니아 그리고 카푸아 이남의 남쪽 이탈리아를 포기하는 강화에 응한다면 이탈리아進軍의 목적도 상당히 달성되는 때문이었다.
*元老院은 戰意 다지고 전렬 재정비
수도 로마에 귀환한 포로대표 10명은 원로원에서 사정을 진술할 기회가 주어졌다.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대표들은 한니발이 들려준 이야기를 모두 털어노았다.
이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들었다.
포로 중에는 그들의 친족도 있고 칸네에서 감투하다가 포로가 된 의원 동료도 있었다.
그러나 대표들이 퇴장한 뒤 토의결과는 'No'였다.
포로들은 다만 가족들과 만나본 것만으로 만족하고 No의 답을 가지고 다시 한니발에게 돌갔다.
로마인은 포로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인은 8천명의 전사가 필료치 않은 것도 아니었다. 8천명 분의 몸값을 치룰수가 없어도 아니었다.
로마는 한니발의 암시적 講和 제의 압력을 뿌리친 것이다.
로마인 이성적 강인함의 과시였다.
전쟁의 속행 의지를 분명히한 로마에서는 원로원 의원 전원이 부동산 이외의 모든 재산을 바치기로 결의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전비 확보를 위한 戰時國債가 발행되어 무산자 이외 전 시민에 각기 경제력에 상응해서 할당되었다.
동맹 제국들로부터는 兵員 軍량 물자 금화 등에 의한 전쟁지원 제의가 쇄도했다.
그런데 BC.215년 봄 장기간 로마의 신뢰하는 우방 시라쿠사의 僭主 히에론이 90세의 고령으로 타계했다. 로마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없다.
뒤를 이은 것은 15세의 손자였다.
소년이 군주에 올으자말자 내분이 일어난 시라쿠사에 한니발이 군대 대신 공작원을 보냈다.
쿠데타는 성공하고 소년 군주는 살해되고 한니발과는 동맹을 맺았다.
쿠데타세력은 한니발이 제시한대로 카르타고측에 가담하면 시라쿠사를 시칠리아 전도의 주권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미끼를 물었다.
로마측으로서는 또하나의 악몽이었다.
시라쿠사 이외의 시칠리아 전역은 여전히 로마의 영향 하에 머물게 되지만....
흉사는 겹처 이러난다.
한니발도 예정에 넣치 않았던 마케도니아王 필립스5세마자 한니발에 同盟을 요청해 왔다.
이렇되면 한니발과의 전쟁 제2차 포에니전쟁은 양국간 전쟁이 아니라 국제전 양상을 띄게된다.
그해 22세의 필립스5세는 알렉산더대왕 후손을 자처하며 그리스 전역을 제패하고 아드리아해에 출몰하는 해적 퇴치를 이유로 이리리아족을 평정하려면 장애물 로마를 반드시 잡아야하다고 생각했다.
칸네전 승자 한니발과의 공투를 결의하고 한니발 지배 하의 이탈리아 남단에 사절을 보내 마케도니아-한니발의 대로마 공동전선을 펴기로 한다.
마케도니아가 한니발을 도와 로마를 붕괴한 뒤 한니발은 그리스西岸 일대를 마케도니아領으로 인정하고 한니발 자신이 自軍을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하여 마케도니아가 노리는 그리스 전토의 패권 장악을 도와준다고 되어있는 동맹조약이 성립되었다.
로마는 일찌기 양자동맹 내용을 파악했고 로마해군은 한니발을 만나 조약을 맺고 귀국하는 마케도니아 사절을 아드리아海에서 붇잡아 로마로 송치했다.
32살의 한니발에게는 로마를 격파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결문제였다. 로마가 격파된 뒤면 시라쿠사따위는 적이 아니며 마케도니아王과의 약속같은 것 무시해도 될만큼 힘을 얻었을 터다. 그에게 일 끝난 뒤 이 모두 사문화할 가치가 충분했다.
*동서남북에 敵 내부에도 敵
실제로 BC.215년부터 로마는 동서남북으로부터 사면초가였다.
도은 마케도니어, 남은 시라쿠사, 서는 스페인, 북은 갈리아민족.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 안은 강적 항니발이 있었다.
지금 말로하면 합동참모본부가 된 당시 로마원로원은 절망적인 현상타개를 위해 첫술부터 판을 벌리는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
전 전선을 시계에 확보하고 필요에 쫓기는 전선부터 당시 로마의 힘이 감당할 수있는 번위내에서 반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한니발 마케도니아 시라쿠사 3자동맹과의 사실상 국제전 양상이었으나 제1차 포에니전쟁시 창설 육성한 해군력은 여전히 지중해 재해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어도 시라쿠사도 로마에 도전할려면 우선 自軍 함대가 움직일 여지가 없었다.
카르타고는 3년이 지나는 한니발의 원정을 지원할 시도조차 못한 상황이었음에 三者共鬪의 실현은 로마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