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으로 중계 될 상하원 의원이 모두 모인 이승만의 의회 연설을 듣기 위해 T.V 화면을 응시하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의 질겼던 인연을 생각했다. 전쟁과 기아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한 국가를 책임진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미국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은 일응 이해는 되었지만 10만명이 넘어가는 전사상자와 막대한 전비 등 그 큰 희생을 치룬 미국과 그토록 집요하게 싸우 것이 싫었다.
특히 한미 상호 방위조약에 대처하는 이승만의 뻔뻔하리 만큼 당당 했다. 국민소득 80불에 불과한 한국과 패권국 간의 최악으로 평가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이 돕겠다는 명분까지 넣어 군사보호조약에 불과한 군사동맹을 상호 방위 조약으로 명명하며 자존심까지 톡톡히 챙겼다.
한미상호방위 조약 뿐만 아니라 휴전협정을 위한 미국이 댓가는 컸다. 경제원조, 한국군 약 20개 사단 증강 등 철저하게 실리를 챙기며 아이젠하워의 자존심을 긁었다, 그리고 미국 정가를 흔들었던 것은 또 있었다. 휴전선 안의 군사분계선은 미군이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즉 크레모아의 뇌관을 격발하는 인계철선선(Tripwire)은 미국이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휴전선 안의 경계는 미국의 몫이 되었다. 그것은 휴전선을 넘는 그 어떤 세력도 미군이 겨눈 총구와 만나야만 했다.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누구든 패권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려야 하는 것이다. 미국법에는 전쟁은 의회의 권한이었다. 즉 미국의회의 승인 없이는 미국은 참전이나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미군이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의회 승인 없이 전쟁이 가능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승만은 남침하는 그 모든 세력은 미군과 만나야 하고 미의회 승인 없이 자동참전하는 효력이 발생하게 한 것이다.
1. 미 제2보병 사단은 철책선 최전방에 근무해야 한다.
2. 한국이 성장하기 전까지 모든 비용은 미군이 부담해야 한다.
3. 한국이 전쟁나면 미군은 한국군 10배에 해당하는 군사를 보내야 한다
4. 미국은 한국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
5. 이 조약은 영구하다.
다만, 한국 미국이 둘 다 협의하면 파기 된다.
그렇게 마무리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승만은 국민에게 그 가치를 설명했다.
"우리의 후손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다."
미국은 분노했다. 6.25 사변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가감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이승만 그 날강도에 또 당했어! 도대체 한국이 무슨 힘이 있다고 미국에 전쟁 나면 한국이 도와줄 테니 한반도에 전쟁 나면 한국 병력의 9배 이상을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거야? 또 인계철선(tripwire)은 뭐야. 우리 젊은이들을 북한이 내려오는 길목에 박아 놓고 공격받으면 미국이 자동 참전해야 된다니. 그리고 한국이 제자리 잡을 때까지 한국 국방비를 미국이 전액 대라는데 아무리 스탈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이런 조약에 사인을 하고 온 거야?”
휴전을 조건으로 바리 바리 선물 폭탄을 주었음에도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끝까지 휴전 반대 의사를 꺽지 않았다.
“한국의 해방과 통일문제를 평화리에 해결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휴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1953.07.27. 이승만 대통령, 휴전조인에 즈음한 담화문).”
협상에 있어 이승만에게 아이젠하워는 족탈불급이었다. 실리와 명분, 정치역학, 언론전, 자존심 등 이승만의 완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패권국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까지 동원된 강력한 경고에도 이승만은 물서섬이 없었다. 그것을 회상하던 아이젠하워는 왠지 모를 탄식이 절로 나왔다.
1954년 7월 28일 이승만의 미국 의회 연설이 시작되었다. 상하원 의장, 부통령 닉슨, 후에 대통령이 되는 린든 존슨 등 거물 정치인과 상하원이 모두 모였다. 각국 대사들도 이승만 연설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아들을 기꺼이 한국전에 내준 미국의 어머니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자유 수호의 맹주 미국에 대한 감사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 소련 공산세력에 대한 강력한 대응의지를 천명하고 공산세력과 강력하게 싸울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포기하고 휴전협정 나선 아이젠하워에 대한 질책은 매서웠다, 연설을 지켜보는 아이젠하워는 분단위로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가 자신의 따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이승만은 팽창하는 공산세력과의 대결에서 미국이 가야할 길과 팽창일로에 있는 소련과 중공을 대처하는 전략을 조언하였다.
“대만에 있는 중화민국정부도 또한 여러분에게 무장군 63만 명과 그 위에 예비병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중국 본토의 공산정권은 극히 취약한 발을 가진 괴물인 것입니다. 이 정권은 대중의 증오를 받고 있읍니다. 중공은 그들을 반대하는 자를 150만 명이나 학살하였지만, 아직도 허다한 자유중국 유격대들이 중국 본토 내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중공의 육군은 200만이라는 군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의 충성은 결코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에게 포로된 중공군 출신자 중 14,369명은 대만으로 갈 것을 택하였으며, 중공으로 귀환하는 길을 택한 자는 불과 220명이였다는 사실이 입증한 바입니다.
그 위에 중공의 경제상태는 극도로 취약합니다. 중공에 도달되는 수입물자의 60퍼센트는 해로를 거치고 있으며, 연안 해운은 그들의 남북교통의 최주요 방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미국해군이 중국 해안을 봉쇄한다면 중공의 교통망에는 일대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 중국정권에 대한 반격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필요할 것이나 미국의 지상군은 필요치 않을 것이라 함을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중국본토가 자유진영의 편으로 환원하게 된다면 한국 및 인도지나의 전쟁은 자동적으로 승리적 귀결을 짖게 될 것이며, 세력균형은 소련에 대해서 극히 불리하게 기우러지게 되어 소련은 감히 민국과의 전쟁위험을 기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는 한 자유진영의 궁극적 승리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1954년 7월 28일 이승만의 미의회 연선 중에서)”
국부 이승만을 공부하며 개인적으로 소름이 돋았던 순간이 수없이 반복 되었다. 공산당의 필연적 실패, 태평양 전쟁, 한국독립, 태평양 시대의 도래 등 성경 속 선지자의 모습이 투영되며 모골이 송연했다.
이승만은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설파하고 있으며, 중공을 고사시키기 위한 남지나해 봉쇄는 해군과 공군만 동원한 군사적 압박으로 충분하고 그 효과는 동남아의 공산화까지 막을 수 있음을 예견했다, 중공을 자유진영으로 끌어 앉지 않는다면 공산세력과 대결은 힘겨울 것이라 경고했다.
이승만의 예측은 오늘의 미중 패권전쟁의 양상과 정확하게 들어 맞고 있다. 1972년 미국의 대중국 핑퐁외교의 목적은 소련에서 중공을 디커플링 시켜 소련을 고립 시키기 위함이었다. 소련 붕괴는 중공을 소련으로부터 떼어 놓음으로 가능했다
동남아 공산화의 백미는 베트남전이다. 베트콩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은 미국의 폭격을 피하여 소련과 중공이 공급하는 무기와 군수 물자를 호치민 루트를 통한 원활한 보급선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퐁을 통한 소련의 군수품 보급은 막을 수 있었지만 육로를 통한 중국 → 철도, 도로 → 하노이 일대 → 호치민 루트 → 남부전선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놓침으로서 베트남 공산화를 막지 못했다.
이승만이 미의회에서 역설한 중공의 해안봉쇄 전략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수십년을 내다본 전략이었다. 지금의 미중 패권경쟁에서 중공이 남지나 해를 넘어 군사적 힘이 태평양으로 투사 되는 것을 막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중공의 목줄을 죄고 있는 미국의 남지나해 압박에 맞서 중공은 제1도련선, 제2도련선을 긋고 죽자 살자 태평양 진출에 목을 메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해안 봉쇄는 해마다 강화되고 있다. 대만 인근 해역까지 항공모함을 보내 끊임없이 중국을 압박하고 있고 그럴때 마다 중국은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발작하고 있다. 남지나해 봉쇄는 미중 패권경쟁에서 최우선 전략이다. 정찰자산을 통하여 남중국해 일대 중국 군사 기지와 함대의 움직임을 상시 감시하고 있으며, 원거리 투사 및 폭격기 순환 배치도 강화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일본과 협력하여 주일미군을 통한 원거리 타격 자산은 중공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강화 되고 있다. 이승만의 남지나해 봉쇄가 얼마나 혜안이었는가를 지금 시대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미의회 연설 당시 소련은 핵전력 증강 및 수소폭탄 개발에 모든 역량을 갈아 넣고 있었다. 이승만의 미의회 연설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은 성공적인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이승만의 북진의지에 맞춰 남지나해 봉쇄에 나섰다면 분명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소련을 곤궁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동남아 공산화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국제사회에 생양아치가 되어 버린 중공으로 인한 골치를 앓는 일은 사라 졌을 것이다.
이승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담대함과 용기는 패권국 의회에서 패권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정면으로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그 우방들은 지금 소련의 공장들에 대해서 폭탄을 투하해야 할 것입니까? 또는 도살장에서 주검을 기다리는 거세우(去勢牛)처럼 우두커니 서있어야 하겠습니까?(Does this necessarily mean that the United States and its allies must either drop bombs now on the Soviet factories
or stand like steers in a slaughterhouse awaiting death?)”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세우(去勢牛)는 아무리 유화적(柔和的)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도 공산세력과 싸움에서 물러난 아이젠하워이다. 야! 이 비겁한 놈아! 라고 소리치는 이승만의 일갈에 아이젠하워는 시청하고 있는 T.V를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끓어 올랐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반미하면 어쩔 것이냐 또는 할 말은 하겠다 라는 안방 여포짓을 하며 큰소리 뻥뻥 쳤지만 정작 미국에 가서는 비굴하고 불쌍할 정도로 저자세로 기어 다녔던 좌파 대통령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패권국 대통령을 향하여 거세우라고 소리칠 배포가 있는가 묻고 싶다.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아니었으면 북괴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 것이라며 반미 한 것에 대한 반성문을 쓰고 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이승만 부부와 아이젠하워 부부
뚝심의 오성장군 출신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 정상회담장에 들어서며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안방으로 불러들인 이승만에게 결코 눌리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을 것이다. 대화 중 벌떡 일어나 화난 모습으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는 정치쇼까지 벌렸다. 그러나 결과는 이승만의 뜻대로 되었고 7억불의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한 한국군 장교를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학교와 군사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로 했다. 학비, 체류비까지 미국이 부담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 된 군사유학은 2만여명의 군장교가 도미했다. 유학생 중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다. 그렇게 선진교육을 받은 그들은 싸우며 건설하여 산업화 시대를 열었다,
공산세력으로 인해 멸국의 문턱에서 섰던 한반도를 구한 미국이었다. 그 패권국 의회에서 패권국 대통령을 거세우라고 질타하는 범인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형수로 수감 된 한성감옥에서 고종의 명령으로 출옥을 하였다. 도미하여 망국의 문턱을 넘고 있는 조선을 구해 달라고 씨어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야 했다. 출국을 앞두고 고종은 사람을 보내 이승만을 만나려 했다. 이승만은 즉석에서 단칼에 거절했다. 봉건국가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군주의 청을 거절하는 그 용기와 담대함은 어디서 기인(起因)하는 것인지 내게는 풀 수 없는 화두(話頭)였다.
인간 이승만은 시련이 쌓아 올린 삶이었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하와이에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이승만에게는 늘 시련이 함께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시련과 타협하지 않았다. 시련과 양심을 바꾸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옛말에 고문을 받다 죽으며 물고(物故)가 났다고 했다. 물건이 썩어서 없어지다라는 뜻으로 사람이 죽었다라는 표현을 유화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죄인의 자백을 받기 위해 죽을때까지 고문을 했다. 특히 역모 혐의는 고문해서 죽이거나 또는 자백 후 사형 당하거나 죽음으로 결론이 난다. 따라서 역모죄에 대한 고문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추대 하려는 음모 사건에 연루 되어 역모죄로 한성감옥에 수감 된 이승만은 탈옥사건까지 겹쳐 감내하기 어려운 고문을 받아야 했다. 박달북에게 받았던 끔직했던 고문은 얼마나 지독했는지 50년이 지난 70대가 되어서도 자다가 고문 받는 꿈을 꾸다 깰 정도로 트라우마였다. 양아들 이인수 박사는 목욕을 돕다 본 고문으로 한쪽 엉덩이 자체가 없어진 고문의 상처를 고백하기도 했다,
한성감옥에서 5년이 넘도록 수감 생활을 하며 절반이 넘는 죄수가 콜렐라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어가는 아우성을 들어야 했다.
“옥중에 괴질이 먼저 들어와 사오일 동안에 육십여명을 목전에서 쓸어내일 새, 심할 때는 하루 열일곱 목숨이 내 앞에서 쓰러져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곧 시신과 함께 섞여 지냈으되 홀로 무사히 넘기고....”(리승만 ‘옥중전도’ 1903년 [신학월보]“
평생을 같이한 극단의 시련이 강한 이승만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련만으로 담대함과 용기를 얻을 수 없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문제를 두고 6.25 사변과 같이 동족상잔 전쟁을 벌려야 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링컨은 북군을 지휘하며 엄습하는 극한의 인내를 견뎌야 했다. 개전 후 주요 전선에서 6번이나 연속 패배했고, 남부는 리장군 홀로 전선을 지휘하며 승전을 이어 갔지만 링컨의 북군은 6번이나 지휘관을 갈아 치워야 했다. 링컨은 프레더릭스버그 참패 후 절규했다.
“지옥보다 더 나쁜 곳이 있다면, 내가 지금 그곳에 있다(If there is a worse place than hell, I am in it)”
불행은 덮쳐 불리한 전황 속에 재선은 불가능 해보였다. 백악관에서 같이 살던 11살의 아들도 전쟁 중에 죽었다. 연속되는 패배로 워싱턴이 함락되고 링컨이 남군에게 생포되면 남부의 링컨에 대한 국단적 증오에 의해 즉석에서 총살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극한의 공포와 인내가 끊임없이 시험했다. 링컨은 기도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는가가 아니다. 내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기 때문이다(Sir, my concern is not whether God is on our side; my greatest concern is to be on God's side, for God is always right)”
링컨은 항상 스스로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가를 고민했다.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벗어나지 않았는가를 물었다. 재선 취임식에서 연설했다.
“양쪽 모두 같은 성경을 읽습니다. 양쪽 모두 같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그러나 양쪽의 기도가 모두 응답될 수는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70만명이 전사 했다. 미국 역사상 미국이 치룬 전쟁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고 또한 증오까지 깊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의 모든 고통은 링컨이 떠안아야했다, 4년의 임기 기간 동안 수십년의 노화가 그에게 닥쳤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키가 컸던 193cm의 거구에 레스링 선수로 활약하며 수백번의 경기를 치루며 단 한번만 패배할 정도로 링컨은 스토롱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중 4년의 임기는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링컨은 담대했다.
취임 당시 건장했던 링컨은 전쟁이 진행될수록 깊은 주름이 패이고, 머리가 하얗게 세며, 눈 밑이 쑥 꺼지는 등 몰라보게 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극심한 불면증과 만성 피로, 체중 감소 등에 시달렸다.
국부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학하던 젊은날 아들 태산을 미국으로 데려갔으나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아들이 사망했다. 링컨 역시 대통령 집무 중 백악관에서 아들이 사망하는 비운을 맞이 했다. 어느 한 개인의 인생사에 자식을 잃는 것보다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 시련의 시간 속에 이승만과 링컨은 손에서 성경책을 놓지 않으며 끊임없는 간구와 기도 속에 신앙생활을 했다. 링컨의 낡은 성경은 박물관에 보관 되었고 미국의 모든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링컨의 성경책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그들의 고된 삶은 극복한 원동력은 신앙이었다.
프레데릭 해리스 목사
아이젠하워를 만나 피말리는 신경전 속에 정상회담을 마치고 이승만은 마지막 방미 일정으로 워싱턴의 어느 교회로 향했다. 자신이 미국에서 살면서 프란체스카 영부인과 같이 신앙 생활을 했던 파운드리교회였다. 담임 목사인 해리스는 이승만의 영적 동지이며 친구이며, 상원 전속 목사로 미의회를 설득하여 한국파병에 결정적 기여했다. 또한 전쟁 중에도 모금활동으로 한국을 도와준 은인이다,
파운드리 교회에서의 연설
이승만은 파운드리 교회 연설에서 자신의 삶을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였음을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비난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잘못했다고 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I know God will not tell us what we are doing is wrong. He is a God not only of love but a God of righteousness. I am not afraid. Let them all criticize me.But as long as God does not condemn me, that is all)”
세상의 모든 비난 속에 있어도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라면 그 것이 가야할 길임을 고백하고 있다. 순종 즉 That is all은 이승만의 양심이었고 담대함과 용기였다. 그 용기가 자유 대한민국을 창조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자유(自由) 그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이승만은 마지막 기도를 남겼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굳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이승만의 마지막 기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
유교와 성리학은 조선을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봉건국가로 만들었다. 극악하게 부패하고 썩은 관료제 속에 동족이 동족을 노예로 부리며 악귀가 지배하는 사회 인류사에 찾아 볼 수 없는 죄와 악을 시대였다. 북괴는 조선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악의 임계점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전히 우리는 자신이 양반의 후예라고 자랑하며 그 부패하고 악취 풍기는 봉건적 관습을 자랑 하곤 한다. 북괴와 똥팔육을 비롯한 좌익 세력들이 그토록 이승만을 지우려 발광하는 이유인 것이다.
국부 이승만 그는 한반도에 하늘이 내려준 자유 즉 천부인권(天賦人權)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소망이 담대함과 용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땅에 자유인이 되는 길을 선물했다. 한반도 문명은 그렇게 창조 된 것이다. 국부의 유언은 여전히 우리를 때리고 있다.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 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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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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