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길을 통해 입신양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성리학질서에서 과거에 합격하면 중앙정치로 진출하여 사대부가 되고, 과거를 통과하지 못한 양반은 고향으로 돌아가 선비를 자처하며 사족(士族)이 되었다.
사족은 재지지주(在地地主)로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기반으로 경제력을 키웠다. 사족의 막대한 토지는 노비와 소작농을 통한 경작을 통해 막대한 수확물을 확보하며 지역경제를 장악했다. 상인의 부가가치를 사기꾼의 돈 정도로 여기며 천민으로 삼은 농자천하지대본 사회에서 토지는 곧 가장 큰 권력이었다.
조선건국 후 토지개혁을 주도한 조준은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으로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주 최부자 또한 12대에 걸쳐 부를 대물림한 땅부자였다. 상업활동을 통한 부가가치가 아닌 순수하게 땅을 늘림으로서 안정적인 부를 대물림할 수 있었던 최부자의 가훈이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였을 정도로 토지에 집착했던 부자였으며, 그 유명한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관직생활을 통한 부정축재를 통해 어마 어마한 토지를 마련하고 순수 경작 토지 소득으로 부를 늘린 부자였다.
상공업을 통한 부가가치가 전무했던 토지에서 나오는 제한 된 생산물에 의존한 국가운영으로 조선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가난한 역사였다. 유일한 생산물이 나오는 토지조차 세월이 가며 경작가능한 토지가 줄어들었다. 이런 해괴망측하고 괴이한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한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방에서 사족의 막대한 경제력은 지방 권력의 장악으로 이어져 향청(鄕廳)과 유향소(留鄕所) 등을 통해 사족끼리 모여 지방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여 사족의 이익을 도모하고, 지방민을 통치함으로서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臣權)의 든든한 배후가 되었다.
사족이 모여 만든 향청은 지방 자치 기구에 불과하지만 지방 양반들이 지방 행정을 담당하며 중앙에서 파견하는 향리(지방 관리)를 감독하는 역할까지 했다. 낙향한 벼슬아치가 모여 동호회가 된 유향소는 중앙 정부와 지방 사회를 연결하는 기관으로 향청과 같은 권력을 얻었다.
사족들은 향청을 통한 향회(鄕會)를 조직하고 지방통치를 위한 회의체로 만들어 사족의 이익도모, 지방 사회의 정책을 결정, 왕권에 도전하기 위한 중앙정책에 대해 비판 등을 통해 영향력을 늘렸고, 사족들은 혼인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양반의 씨를 보존함으로서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지방권력을 세습하며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권력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사족들은 국립지방교육 기관인 향교(鄕校)에 맞서기 위하여 지방에 서원(書院)을 설립하여 성리학 헤게모니를 위한 이념 전쟁에도 뛰어 들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로서 학문의 권위를 양분한 이황과 이이의 명성은 사법시험 학원을 즉, 서원을 설립하여 학원생을 끌어 모으고 일타강사로 명성을 날렸기 때문이다. 이황이 안동에 세운 도산서원으로 대표되는 서원은 지방 교육을 장악하고, 지방의 성리학적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서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臣權)의 든든한 사상전(思想戰)의 지원 부대였다.
이황과 율곡은 자신들의 명문 과거학원에서 일타강사로 명성을 날릴 당시 율곡의 자운서원 출신의 권력자는 김장생, 송시열. 이항복, 정철 등이 있고, 이황의 도산서원 출신의 권력자는 김성일, 류성룡, 이산해 등이 있다.
사족들이 모여 만든 서원이 중앙권력에 공급되는 인재까지 길러내며 성리학의 헤게모니를 주도하게 되면서 그 세도는 하늘을 찔렀다. 그 대단한 권력으로 한시대를 풍미한 대원군을 쫓아낸 것이 유생들을 선동하여 올린 최익현의 상소문 한 장이었다. 서원의 권위는 국립교육기관인 향교(鄕校)를 압도했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아성도 흔들었다. 당쟁으로 아버지가 죽은 정조가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국립도서관 규장각 강화에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서원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족은 지방의 경제, 교육, 권력을 장악함으로서 사족의 경제적 권익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무위도식하며 토지와 노비를 통한 경제력, 서원을 통해 성리학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권위, 향청을 통해 행정적 권력은 오로지 사족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소비 되었다. 사족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지방 사회를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여전히 텃세라는 날라가는 새도 떨어트릴 세도가 농촌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족이 남겨준 유산인 것이다. 텃세는 농촌사회 뿐만 아니다. 한국인이 모인 집단이라면 그것에 불과 두세명에 불과할지라도 텟세의 갑질은 없는 곳이 없다.
반면, 200여개의 번으로 나뉘어 분봉제 국가로 통치된 일본은 지방권력이 국가 발전의 핵심이었다. 지방을 통치하는 다이묘(大名) 간의 경쟁으로 자신의 영지 발전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 농업 생산성을 확대, 성곽 건설, 관개 시설 확충, 농업 기술 발전, 상업적 교역을 장려 등을 통하여 영지 내의 자원 활용을 최대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이러한 다이묘들의 노력은 일본에 전파되는 모든 외래문물이나 서양문물이 지방권력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왔다. 나가사키를 통해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 등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던고,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가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나가사키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일본에 조총이 전래 된 것은 18세에 불과한 지방영주에 의해 전파 되었다. 이러한 발전에 자극 받은 각지의 다이묘들은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서양의 과학, 의학, 항해술 등을 도입하였으며 지방정부에 의해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이 꽃을 피웠다. 사쓰마 번과 조슈번을 통한 서양문물의 대거 도입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냈다.
조선시대 농업생산성이 명나라와 에도시대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은 그 비참했던 당시의 사정을 대변하고 있으며 이러한 참혹한 그 시대가 만들어진 이유는 불문곡직 지방 사족들의 기득권에 대한 이기심, 폐쇄성에 있는 것이다. 여전히 성리학 탈레반적 습성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누구의 몇 대 후손 양반이라고 그 무능하고 무식하며 잔인하고 흉폭했던 사족출신을 자랑하는 창피한 문화는 사라 졌으면 좋겠다,
조선시대에는 참으로 많고 많은 서자(庶子)와 얼자(孽子)가 있었다. 서자는 양반 남성과 첩(側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이며 신분상 아버지 계급을 물려 받아 명색은 양반이었음에도 과거 응시권도 상속권도 없었다. 양반과 노비 또는 기생 등 천한 계급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얼자라고 불렀다. 얼자는 천민으로 취급 되어 서자 보다 더 많은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조선시대 순수한 양반은 대략 4% 내외였고 서자와 얼자가 대략 그 정도 였다. 남녀유별한 지엄한 성리학 탈레반 사회에 서얼의 숫자가 대략 양반의 숫자만큼 된다는 의미는 얼마만큼 양반의 성적타락이 심각했는가를 방증 한다. 양반이라면 첩을 두고 기생과 놀아나 서자와 얼자 한명을 두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조선의 하늘은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한이 덮고 있었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황은 첩을 두어 이적이라는 서자가 있으며, 이율곡 또한 서자를 두고 있다. 성리학 탈레반이 자랑하는 성현 이황과 이이가 첩을 두고 서자를 두었으니 조선시대 첩을 두지 않은 양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반 한명이 서자 한명만 두어도 그 어마 어마한 숫자는 양반의 숫자만큼 되었다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산수(算數)이다.
서자는 철저한 차별 속에 살아야 했다. 특히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어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다. 자랄 때부터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행여 똑똑한 서자가 출세하는 것이 배아픈 양반들은 서얼방금법(庶孼防禁法)을 만들어 국법으로 그 많은 서자들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다. 개인적으로 어느 역사에서도 서자 차별의 역사는 발견할 수 없었다.
주자학이 만들어진 송나라 때 법적으로 노비제는 폐지 되어 소작농 경제로 전환 되었고, 서얼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송나라의 경제적 성공은 노비제를 폐지하고 소작농을 통한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린 결과이기도 했다. 주자와 송나라를 그토록 무지몽매하게 추앙하는 조선의 사대부는 공자(孔子), 맹자(孟子). 주자(朱子)가 살아 나와도 서얼차별이나 노비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명종 8년 어전회의가 있었다. 명종은 인재중용과 억울한 사람을 없애자는 의미로 서얼방금법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밝힌다. 그러자 죽기 살기로 사대부는 자신의 밥그릇을 위한 결사항전을 부르짖는다.
“중국에서는 적서(嫡庶)를 차별 없이 인재로서 다 쓸 뿐 아니라 노주(奴主, 노예와 주인) 사이에도 정해진 분수가 없어서 문무(文武)에 능하면 천한 노예라도 벼슬을 할 수 있고, 문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관인의 자식이라도 천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라 기자가 들어와서 노예와 주인을 엄격히 구별했음에도 이따금 기강(紀綱)과 상도(常度)가 무너지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지금 노주 사이에 정해진 분수가 없는 중국 법을 흉내 내면서 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적서의 구분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아 아내가 반드시 모두 좋은 집안의 딸은 아니고 첩이 반드시 아내보다 비천하지는 않으며, 선후나 후박(厚薄)으로 적첩(嫡妾)을 구분합니다. 중국에서 따로 서자의 출사(出仕)를 방금(防禁)을 하지 않아도 폐단이 없음은 대개 그래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작고 예의가 없으면 상하가 어지럽게 되므로 적서를 구분하고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세습법을 역대로 행하였으나 오랫동안 아무런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양법(良法)이라 할 만한데, 지금 한두 사람의 호소로 인하여 허물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중국을 위해 소중화를 타는 목마름으로 외치던 사대부들이 서얼차별과 노비제는 역사적 근거도 없는 기자조선까지 들먹이며, 조선인의 민족성까지 들먹이고, 제나라 국격과 인격까지 비하하며 중국을 깍듯이 올리며 서얼차별과 노비제 옹호에 나서는 참으로 잘난 사대부를 보게 된다, 저토록 이중적이고 사악한 인간 군상을 역사서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찾을 수 없다.
서자는 자식이고 형제이다. 사회적 매장을 통해 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는 이런 패륜은 그 어느 역사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 짐승의 동족포식(同族捕食)도 자식과 형제는 포식하지 않는다.
국법까지 만들어 서얼을 차별한 것은 기득권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과거시험을 통해 진출할 수 있는 관직도 고작 900개에 불과했다. 조선시대는 끝없는 국가 역량의 축소시대였다.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신라시대보다 못한 한심한 국가역량과 문화수준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기회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가 되는 길은 너무나 좁았다. 3~4%에 불과한 조선시대 극소수의 양반이지만 관료가 되는 길은 좁았고 그 좁은문은 극소수의 양반에게도 좁은길이었다. 따라서 서자에게 과거응시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양반 기득권의 심각한 도전인 것이다.
성리학 탈레반의 시대 입신양명(立身揚名)과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 과거 합격이었다. 한명의 과거 합격자는 가문의 권력이고 먹여 살리는 길이었다. 그 기회를 서자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어느 역사에서도 동족의 절반을 노비로 부리고, 배다르다는 이유로 형제와 자식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사실상 숙청하는 이런 패륜은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성리학 탈레반의 잔인함을 대변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양반이라도 벼슬길에 올라 사대부가 되지 못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면 양반사회에서 도태 시켜 벼슬길과 출세길의 경쟁을 줄였다. 같은 양반끼리 기득권 전쟁의 대표적 사건이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당쟁을 통한 숙청이었다. 양대세력으로 갈라져 싸우면서 한쪽은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전쟁이었다. 그렇게 양반의 숫자는 조절 되며 살아 남은 양반들의 기득권이 지켜졌다.
조선개국의 기득권충인 훈구파와 그에 맞선 사림파는 권력을 두고 싸웠다. 성리학 원리주의를 앞세운 사림파는 도덕성을 앞세웠지만 지방권력의 중앙진출을 위한 싸움에 불과했을 뿐이다. 양반으로 지방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사림파의 도덕성이나 개국공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구파의 도덕성이나 한치 건너 두치일 뿐이다. 사림파가 만든 세상 또한 끊임없이 조선을 퇴행으로 몰아 넣었을 뿐이다. 고려시대 국력이 그나마 남아 있던 개국 시대에는 대마도 정벌이라는 국력이라도 있었지만 사림파가 지배한 시대는 착취와 굶주림의 시대가 지속 되었을 뿐이다.
본격적인 당쟁의 시대를 열은 동인과 서인의 대결은 동인 김효원과 서인 심의겸이 좁디 좁은 벼슬길의 입구를 틀어쥐고.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이조정랑이라는 정5품 관직을 두고 서로의 상투를 잡고 진흑탕의 막장싸움을 벌린 것일뿐이다. 성리학 탈레반들의 이상향 안빈낙도의 성인군자가 되는 길은 놀고 먹을 노후를 보장할 벼슬길부터였다, 당쟁을 통한 숙청은 한세력을 몰아 내며 과거시험 응시생을 줄이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이 되는 세습 신분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올라 사대부가 되지 못한 양반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점차 상실 되고 도태되었다. 사대부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중심 세력이었고, 사대부로 진출하지 못한 양반들이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면 도태 되었다. 따라서 사족의 양민에 대한 착취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별볼일 없는 벼슬아치에 불과했던 이황은 낙향하여 명문 과거학원 도산서원을 세워 성리학 탈레반의 헤게모니를 주도한 것은 600명의 노비와 30만평에 달하는 토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나 손자 정도만 지방관 정도만 했을 뿐이며 두각을 나타낸 이황의 후손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이황의 막대한 재산이 그의 이름을 높이는 주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망조가 가속화 된 조선시대 중, 후기 세도정치와 관직의 독점 속에 이황의 가문의 돌춤함은 보이지 않는다. 몰락하는 양반은 과거시험 응시생을 견제하는 주요한 수단인 것이다.
권력과 부를 쥐지 못한 양반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딸깍발이로 상징 되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 시험에 붙었다는 미담은 들은적이 없다. 개천의 용이 되려는, 그래서 죽으면 죽었지 일을 하지 않는 딸깍발이 선비를 양육한 선비의 부인이 삭바늘질과 고된 노동으로 평균수명이 매우 짧았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결국 과거시험은 돈과 권력을 쥔 일부 양반층의 전유물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가장 큰 기득권인 과거시험은 끊임없는 부정시험으로 홍역을 앓았다. 조선왕조실록을 “과거시험부정”으로 검색하면 125회가 검색된다. 대과는 3년에 한번씩 치루었고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과거시험 부정으로 시끄러웠다는 이야기다.
성종실록 성종 19년 9월 27일 기록에 의하면 “향시(鄕試)의 부정이 심하니 다시 시험하게 하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향시는 대과 시험을 위한 몇 단계의 시험 중 최초로 실시되는 예비고사이다. 그 예비고사부터 부정을 논하고 있다. 그것도 시험문제지가 사전에 유출 된 부정시험이다. 그러한 시험문제지 유출은 경기우도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일이라며 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공정한 과거 시험은 오래전부터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경기우도의 문과 향시의 시관(試官)은 출제(出題)를 삼가 비밀히 하지 않고 무릇 서책(書冊)에서 글제를 표출(標出)하는 일을 배리(陪吏)에게 맡겨서 배리가 몰래 그 글제를 써서 거자(擧子)775) 에게 보였으므로, 이 때문에 강서(講書)에 입격한 자가 30여 인이 되도록 많았으며, 경중에서는 최세보(崔世寶)·신영철(申永澈) 등이 법을 어겨 어지럽힌 일이 근고(近古)에 듣지 못하던 것이니, 신들이 들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다른 도에서도 반드시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올해의 시험에는 생원(生員)·진사(進士)로서 거관(居館)776) 하여 원점(圓點)777) 이 차서 관시(館試)에 나아갈 자 39인이 다들 향시에서는 간위(奸僞)가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떼 지어 다투어 갔으니, 그 외람된 것을 알만합니다. 시장(試場)이 외람한 것은 올해부터 비롯한 것이 아닙니다.
숙종실록 숙종 3년 10월 7일 “과거 시험에서 부정을 한 민주도·김인걸을 하옥시키다”라는 제목의 기록이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답안지 바꿔치기 시험부정이다, 저 정도 부정이 왕에게 보고 될 정도이면 얼마나 많은 부정시험이 횡행했을까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그날 등록관(謄錄官)179) 이 신 등에게 말을 전하기를, ‘사동관(査同官)180) 이 거느리고 있던 서리(書吏) 김인걸(金仁傑)이 육조(六調)의 시권(試券)을 가져다가 그 첫 번째 폭(幅)에 붙어 있는 곳을 잘라내고 다른 종이를 다시 붙여 다른 문장을 썼는데, 첫 폭에 씌어져 있는 앞머리 귀절을 또 도찰(刀擦)181) 하여 장차 글자를 고치려고 할 때 관원(官員)에게 붙잡혔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그 시권(試券)을 가져다가 세밀히 살펴보았더니, 새것과 옛것의 명지(名紙)182) 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는 첫 폭의 도찰(刀擦)한 곳의 미처 글자를 메꾸지 않았고 비편(裨篇)도 메꾸지 않았으며, 다시 붙였다고 말하는 곳의 뒷면에 있는 도장의 흔적은 반은 남아 있고 반은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두 번째 폭 이하의 것만 남아 있었는데, 종이의 길이와 도장의 흔적을 첫번째 폭과 맞추어 보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으므로, 이는 잘라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새것과 옛것의 명지(名紙)에 써 있는 문장은 한 귀절도 서로 같은 것이 없었으나, 글씨는 분명히 한 사람의 필적이었습니다. 신 등이 그 봉미(封彌)183) 한 것을 뜯어서 보았더니 바로 통덕랑(通德郞) 민주도(閔周道)의 시권(試券)이었습니다. 김인걸(金仁傑)은 본래 교서관(校書館)의 서리(書吏)로 성균관(成均館)의 서리 라고 거짓말을 하고 함부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막중한 국가의 시험에 이러한 농간이 있었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민주도·김인걸은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사하는 곳에 가두어 두게 하소서."
과거제에 대한 가문과 사족들의 암투는 조선후기로 오면서 외척과 세도정치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급기야 세도정치와 외척이라는 조선을 대표하는 권력지도가 만들어진다. 몇몇 가문에 의해 장악 된 과거시험과 국가권력은 심각한 왕권약화와 민생도탄으로 이어졌다.
과거시험이 극단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고종시대 왕과 왕비가 직접 나서 매관매직을 하는 어느 역사에도 발견할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진다. 전국 지방수령의 절반이 민비 민자영의 피붙이 민씨로 채워졌고, 고종의 극심한 매관매직으로 인해 호조판서의 평균 재임기간이 15일에 불과했으며. 급기야 과거시험 응시자격까지 돈을 받고 팔았다.
지방 향반에서부터 중앙관료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과거시험을 두고 연합하고 갈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며 싸웠다. 그 싸움은 자식도 형제도 인륜도, 천륜도 없었다. 오로지 권력에 미친 짐승들의 난전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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