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오응선을 통해 동학에 입도한 후 김창암에서 김창수로 개명까지 하며 동학에 심취했다. 훗날 김구는 동학접주가 되어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습격하였다. 반면 안중근은 동학은 일진회의 무리이며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횡행하며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는 도적떼라며 아버지를 따라 동학난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동학은 "조선의 좀도둑 동학당"이라고 악평하고 있다. 동학을 두고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극단적으로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사람의 악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은 이토 히로부미 아들 이토 분키치와 화해를 하고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각을 참배한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화해이고 참배지만 그렇게 안중근의 아들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은 화해를 했다. 그렇다면 안중생은 아버지의 이름을 후세에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자결을 하여 대를 끊거나, 아니면 화해하고 집안을 보존하여야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안중생 개인 선택이다. 지금에 와서 안중생의 선택을 두고 손가락질 하는 천치바보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손가락질 하는 당신들은 당신의 조상들이 얼마나 일제 시대 독립투쟁을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당신의 조상은 일제에 순응하거나 또는 부역하여 당신의 대를 이어줘 당신이 있게 한 것이다. 독립을 위해 당신의 조상이 최소한 자결이나 또는 폭탄투적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친일이라는 개소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치판의 개들 중 유독 친일청산 부르짖는 놈들일수록 지 조상은 일제 시대 호의호식했던 집구석이었다. 김구는 안중생을 두고“호랑이에게서 개의 새끼가 낳다”라며 극단적인 모욕을 주었다. 김구도 안중근처럼 일제 전범 한명 찾아 저격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자신의 아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대라도 끊었으면 안중생을 비난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김구도 살아남았고 김구의 아들도 살아남았다. 어느 모로 보나 김구의 안중생 극단적 비난은 주제 넘은 오버였다.
동학의 시조였던 최재우는 자신을 중심으로 후천세상이라 칭하고 현인의 심판을 통해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며 모두가 평등한 평화로운 세상이 열린 것을 예언하며 동학을 창시했다. 후천개벽, 천지개벽은 전형적인 미개 조선으로부터 전승되던 도참서 또는 도참신앙에 근거한 동종 이류의 예언에 불과하다.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깨우침을 얻은 최재우는 예수와 모하멧과 같은 권능을 부여 받는다. 모든 종교는 미래가 구원 된다는 희망으로 혹세무민이든 포교든 교세를 불린다. 미륵불, 메시아, 현인, 천사 등 비현실적이고 미신적이기까지 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종교의 본질이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은 어디까지 믿는자의 개인적인 영역에 그쳐야 한다. 종교가 사회의 가치를 지배하게 되면 미개한 중세시대의 암흑기나 현세의 중동 무슬림 사회를 만든다. 그러나 동학은 종교의 영역에 불과한 개인의 영적수련을 국가개조의 일환으로 삼았다. 동학의 천지개벽은 일어나지 않았고 수없이 분열하며 보천교, 신천교, 제우교, 증산교, 대순진리교, 원불교 등 숱한 아류 종교를 만들어 냈다. 동학은 사회개혁의 기치를 들고 갑오년에 천지개벽을 일으키겠다며 "갑오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라며 혹세무민 하더니 결국 우금치전투로 동학은 그 이름을 다시 부활시키지 못한다.
우금치 전투 후 교주 최시형의 처형 후 동학의 법통을 이어 받은 손병희는 탄압과 살해 위협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으로 살았다. 동경에 도착한 손병희는 문명개화의 천지개벽이 일본에 있음을 보며 경악을 한다. 동학이 그토록 꿈꾸던 천지개벽이 일본이었다. 역관 오세창과 개화파 박영효 등과 교류하며 손병희는 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한 개화론자가 된다. 손병희는 일본의 문명개화를 조선에 이식하기 위하여 고민했다. 그러던 중 러일전쟁의 전운을 감지한다. 손병희는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는 순간이 문명개화의 절호의 기회로 보고 1만엔의 군자금을 일본군에 헌납한다. 그리고 국내에 있는 동학 두령 40명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일본을 도우라고 지시한다.
손병희는 같이 도일 한 동학의 2인자 이용구에게 조선으로 돌아가 동학교도를 모아 진보회를 조직하고 러일전쟁을 도울 것을 명령했다. 귀국한 이용구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동학의 포접제(抱接制)를 활용하여 진보회를 조직한다. 진보회는 10만명이 넘는 거대 조직으로 확대 된다(전봉준이 남접의 동학농민을 모아 우금치에 참전한 병력이 1만이다). 진보회는 다시 송병준의 유신회와 합쳐 일진회로 개명하고 이용구는 회장이 된다. 검은 옷을 입고 단발하고 러일전쟁에 나선 일진회는 군자금을 모아 헌납하고 3천여명이 동원 되어 보급선을 확보하고 전쟁기간 내내 보급활동을 지원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쟁이 조선선지배권을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진회는 러일전쟁 후 한일합방의 첨병으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고 이용구는 일진회를 대표하여 1909년 12월 한일합방 직전“우리나라와 일본은 지리상, 인종상, 역사상, 종교상, 문학상, 풍속상, 경제상, 정치상 서로 일치합니다. 나뉘면 약한 나무처럼 흔들릴 수 있지만 합치면 엄연한 하나의 큰 나라로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이미 먼저 세계 1등국의 대열에 들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며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천명하며 성명서를 발표한다. 일진회의 성명은 곧 고종에 한일합방의 촉구이자 협박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종편에 다음과 같이 이용구가 한일합방 성명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진회장(一進會長) 이용구(李容九)가 100만 회원의 연명으로 된 일 한 합방 성명서(日韓合邦聲明書)를 중외(中外)에 발표하였다”
서세동점 시대 서양문물을 “서학”이라 부르고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동학”이라 명명하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려던 동학의 천지개벽 종착지는 일본의 심장에서 손병희가 보고 경험한 일본의 문명개화였다.
손병희는 조선 최초로 민간인이 승용차를 도입 한 역사적 인물이다. 당시 손병희는 자신의 자동차가 고종의 어차 보다 좋을 수 없다 하여 캐딜락 2대를 도입하여 1대는 고종에게 바친다. 또한 조선의 손꼽히던 거부였던 손병희는 고급 요정을 드나들다 부인 주옥경을 만났다. 청주에서 아전의 서자로 태어난 손병희가 쌓은 부는 통상의 경제활동과 부의 축척과는 어딘가 거리감 또는 괴리가 드는 것은 사실이다.
동학의 법통은 손병희의 천도교와 이용구의 시천교로 갈라져 분열했고 시천교는 천도교를 압도하며 교세가 절정에 올랐지만 이용구의 사후 제우교 등으로 분열을 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이 바뀐 것인지 천도교가 동학을 흡수 한 것인지 속사정까지 알지 못하나 동일한 종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사실상 동학은 그렇게 소멸 되었다.
손병희는 동학의 교주 또는 최고 지도자로서 배움과 학문이 없고 미개하며 썩어빠진 조선의 개혁을 꿈꾸었던 후천개벽이 문명개화임을 깨달았다.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이 동학이 되었든 문명개화의 일본이 되었든 부국강병을 위한 합목적성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방법론 즉, 가는 길에 대한 다툼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동학은 민족운동, 동학이 주체가 된 일진회는 반민족적 매국 이라는 상반된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회원이 10만이 넘어가고 동학교도가 절대다수를 점한 일진회를 동학과 분리하여 바라본다는 것은 지적장애 수준의 멍청한 역사인식이다. 또한 손병희를 일진회에서 분리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지적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유아기적 발상이라 할 것이다.
역사인식에 있어 지적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좌파진영과 빨갱이들이 요즘 동학군을 찾아 국가에서 돈까지 준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두뇌수준은 유아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조선 씹선비처럼 미개하고 무식한 지적수준이 아직까지 대물림 되고 있음에 고소를 금할 수 없다. 앞으로 정치인은 기본적인 지적수준을 갈음할 수 있는 면허시험을 도입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최소한 개조선 씹선비 지적 수준은 넘는 인간들만 추려 정치판에 머물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