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진실규명도민연대 창립기념
현길언 교수 초빙 4·3강연회
할아버지 이도종 목사와 제주4‧3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대표 이동해
안녕하십니까?
4‧3진실규명을 위한 도민연대 공동대표 및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동해입니다. 오늘같이 뜻깊은 자리에 여러분 앞에서 강연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감개무량합니다. 막상 이 자리에 서니 열악한 환경에서 4‧3역사바로세우기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를 이끌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그 마음이 더합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은 저희 조부이신 이도종 목사와 관련된 내용 입니다. 제주도 1호 목사이며 기독교 불모지인 제주도에서 16년간 10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모금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는 독립운동가 이도종(李道宗) 목사를 1948년 6월 16일 남제주군 대정읍 신평리 인향동 인근 중산간 도로에서 무장유격대들이 납치하여 생매장한 사건이 그것입니다.
경찰과 서청 탄압에 항쟁하고 친일파를 배척한다는 사람들이 왜 독립 운동가이며 성직자인 목사를 생매장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산주의 이론의 지침서를 만든 칼 마르크스는「헤겔 법철학 비판」서문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습니다.
4.3사건의 직접 원인 제공자인 남로당의 총책 박헌영도 1925년에 “적극적인 반종교운동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반기독교대회에서 이를 역설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글도 쓴 바 있습니다.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증오하는 기독교 목사이고(4.3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다수 희생되었음), 비협조자였기 때문에 생매장하였던 것입니다.
▪ 이도종 목사의 출생 배경과 가족상황
- 이도종 목사는 1892년 9월 13일 애월읍 금성리에서 부 이덕연과 모 박열선 사이에서 5남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으며 8남매가 잔병없이 장성했습니다.
▪ 학문 수학 배경
- 1910년 평양숭실중학교 입학, 1914년 졸업했습니다. 이 후 1922년 평양신학교 입학, 1926년 평양신학교 20회 졸업(2년 휴학)했습니다. 동생인 2남 의종도 정주 오산학교 1917년 졸업했지만 3.1절 만세운동 이후 행불되었습니다.
오산학교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이전부터 오산학교 학생 300여 명이 오산학교 졸업생과 지역주민 1,000여 명이 동원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입니다. 경찰에서 주동자급 90여 명을 검거했는데 이때 희생되지 않았나 사료됩니다.
동생인 차녀 자민은 일본 유학을 보냄. 일본에서 결혼하여 살게 하였고 막내 딸 공민은 목포에서 매산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은 당시 일반 가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어째든 개화사상에 일찍 눈을 뜬 증조부님이 선각자 정신으로 딸까지 교육시킨 것입니다.
▪ 제주 군자금 모금 사건
- 제주의 3.1운동은 1919년 3월 21일~24일까지 조천을 중심으로 4일간 행해졌습니다. 5월 7일 독립희생회 본부요원 김창규가 내도하여 조봉호를 만나서 제주에도 독립희생회가 교회조직을 중심으로 조직됩니다. 성내지역 김창국 목사, 대정지역 윤식명 목사, 정의지역 임정찬 목사를 중심으로 회원 4,450명 가입. 회원 1인당 의무적으로 2원 이상 씩을 납부하게 하여 1만원 모금. 7월에 상해 임시정부에 무사히 송금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쌀 1가마(80Kg) 당 4원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정식, 신현범, 김치백, 3인이 독립군에 가입코저 모금 명부를 지니고 가다가 발각된 사건입니다.
▪ 평양 신학교 졸업과 목회활동 내용
- 이도종 목사는 1926년 12월 평양신학교를 20회로 졸업하고 전북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합니다. 과거 산남(대정)지역에서 7년간 목회하고 군자금 모금사건에도 연루되었던 윤식명 목사가 김제에서 제일 큰 김제읍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던 시기였습니다.
1927년 6월 26일 김제 주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제3대 목회자로 시무하게 됩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독립의 염원과 나라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일념으로 교회청년회 집회 때는 음으로 양으로 독립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설교했는데 여러번 경찰에 불려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회안에도 일본 정보망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제 경찰서에서는 이도종 목사를 아예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도록 형사를 비밀리에 미행시키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김제읍내의 한 유지 집안의 결혼식 주례를 하다가 시국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게 되어 경찰차에 태워져 연행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고향 제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 제주에서의 목회 내용
- 1929년 제주로 내려와서 전도 목사로 활동하면서 제주에 온 후에도 시국과 관련된 내용을 말씀을 했었는데 어느날 표선 공회당에서 강연을 하시다가 시국과 관련된 연설을 하다가 행사가 중지되고 주최측 인사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게 되고 결국은 단발령까지 받아서 머리를 빡빡 깍이게 됩니다.
▪ 당시 신앙생활의 어려움
-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후 제주도에서도 신사참배가 행해졌는데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교인학교 아동들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기 때문에 신앙적 양심에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특히 예배시간에 일본경찰이 입회해서 일본어 사용, 일장기에 대한 경례, 천황사진에 절하기 등 어려움이 뒤따르자 더 이상 신앙적 양심에 따라 교인들을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제가 멸망할 때까지 그냥 숨어 지내면서 목회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이런 어려움 때문에 조용히 초야에 묻혀서 지내는 목사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 조국 광복과 이념투쟁의 극한
- 드디어 해방이 되어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목사님의 기쁨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시기 해방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국민각성을 위한 게몽강연을 요청받고 이동네 저동네 다니면서 감연하게 됩니다. 주제는 ‘건국과 민주주의' '건국과 기독교 사상'이었습니다. 당시 좌우익 대립이 극한으로 달렸기 때문에 우익편에 선 기독교를 좌익들이 그냥 좌시하지 않았는데 삼양지역 등에서 강연회가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 폭도들에 의한 생매장
- 문제의 6월 18일은 박진경 대령이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암살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도종 목사는 6월 20일 주일 예배를 드리기로 되어 있으므로 통상 하루 전 19일 토요일에 가서 하루 밤 자고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는데 어느 교인의 집에서 하루를 더 묵겠다고 하면서 18일 금요일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습니다. 무릉 2리를 향하여 가던 중 고산지서에서 나온 토벌대와 만남. 그래도 계속해서 인성교회로 향하던 중 무릉 2리 인향동 부근 속칭 '고진다리' 근처에 왔을 때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폭도들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 맺음말
- 성경말씀 민수기 13~14장
가나안 복지를 바로 앞에 두고 각 지파에서 제일 용감무쌍한 12명을 선발하고 가나안 복지를 40일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10개 지파는 ×, 2개 지파는 ○. 10개 지파의 백성들이 돌을 들어 2개 지파 지도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1일을 1년으로 계속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유리하게 했지만 다수의 잘못된 결정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현재 4.3의 진실도 이와 똑같은 모습이 아닐까요?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사람 12,000명(84.3%), 폭도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 1,756명(12.3%)<제주4.3평화재단에서 2016년 4월에 발행된 「제주4.3바로알기」 44쪽 참조>
끝으로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성경을 인용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신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