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이 견인한 1차 산업은 프랑스 독일 등을 거쳐 꽃을 피웠다. 오로지 인간의 머릿수에 의해서만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던 인류는 산업사회에 진입함으로서 경제성장이라는 거대한 경제적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했다.
송나라 시대 철을 제련하는데 석탄이 사용되었다, 민가에 석탄이 보급되어 음식 조리에 사용 되는 등 일상화 되어 있었다. 서해안에서 고려시대 석탄을 수송하던 침몰한 상선이 인양 되고 있다,
송나라 주자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500년간 앵무새처럼 떠들며 자랑하던 조선이다. 그러나 고려가 남겨 준 학문적 다양성, 철학적 사상적 포용성, 금속활자, 요업기술, 최첨단 에너지 석탄 사용 등 화려한 문화와 문명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인류사에 있어 이보다 더한 문명적 퇴보를 본 적이 없다.
연산군 이후 조선은 더 이상 국가로서 기능은 하나 둘 무너졌고 임진왜란 이후 가속화 하며 구한말 고종에 이르러서는 국가라고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러시아 짜르의 절대권력을 가지고 싶었던 고종은 러시아를 모방하여 기상천외한 시스템의 대한제국을 출범시킨다. 그시대 미국은 석탄 에너지가 끌고가는 근대문명을 석유와 전기라는 안정적인 에너지로 끌고가는 2차 산업혁명을 일으킨다. 이는 유럽이 주도했던 문명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고종과 민미를 우상화 하며 오만가지 왜곡과 날조로 미화 되는 시대이다. 그 숱한 전설 속에 고종과 민비를 직시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아무리 왜곡과 날조로 우상화 한들 고종과 민비의 죄악을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종과 민비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이 돈이 되고, 반일 감정을 부추킬 최고의 재료이지만 고종과 민비의 무능과 탐욕, 부패와 죄악을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시대 궁궐에서는 무당의 푸닥거리가 일상이었고 왕과 왕비가 나서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어느해는 호조판서가 1년에 스물몇번이 바뀌기도 했다. 고종과 민비는 돈되는 것은 모두 팔았다. 팔다 팔다 요즘 동네 동사무소 9급직에 불과한 참봉, 감역까지 팔았다. 그마저도 밑천이 거덜났는지 다음은 대과에 응시하는 자격까지 팔았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과거시험장에 들어설 수 없었다.
당시 얼마나 고종의 벼슬장사가 호황이었는지 충청도의 늙은 과부가 데리고 사는 ‘복구(福狗)라는 개’에게 관급공사 노가다판 십장격인 감역(監役)을 파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1900년 12월 청나라 공사 서수봉이 본국으로 귀환하며 고종의 벼슬장사를 조롱한다.
“처음 고종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조선의 운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습니다.”
고종은 그 연유를 물었다.
“본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귀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나 됐는데도 제위(帝位)가 아직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서수봉은 매관매직 10년만에 한 때 세상의 최강국으로 군림했ㄷ전 청나라가 수명을 다하고 있지만 30년이나 왕이 나서서 벼슬을 팔아 먹는데도 망하지 않은 것은 운좋은 국가이고 백성이 착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조롱했다. 고종은 칭찬인줄 알고 좋아했다고 한다. 고종의 지능을 반드시 확인 해봐야 할 대목이다.
청나라 최전성기 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의 강건성세(康乾盛世) 시대 청 조정은 전쟁, 하천 공사등 국가 재정이 필요할 때 가격과 절차를 정해 관직이나 품계를 판매하는 연납(捐納)을 제도화 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에 오면서 연납은 과거제와 경쟁할 정도로 매관매직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뇌물과 청탁과 수탈이 횡행했다.
조선은 왕와 왕비가 벼슬 장사를 했다. 인류사에 왕이 벼슬을 파는 시장난전에 앉아 과일을 팔듯 파는 역사는 없을 것이다. 매관매직으로 나라가 망해 간다는 청나라는 최소한 왕이 벼슬장사를 하지 않았다. 중앙정부에서 벼슬을 팔았고 관료끼리 주고 받는 뇌물이 넘쳐났을 뿐이다. 그것도 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는데 30년간 고종은 능력 있는 영업사원이 되어 벼슬장사치로 호령했는데 나라가 유지 된 것이 기적이라 할 것이다.
벼슬을 팔고 사고는 그들만의 리그만은 아니었다. 거금을 들여 벼슬을 구매한 벼슬아치들은 막대한 자본이 투입 하였는데 밑지는 장사는 할 수 없었다. 결국 흡혈귀가 되어 백성의 피를 아귀처럼 빨았다.
1874년에 파리 외방 선교사로 조선에 온 달레 신부는 코리아의 교회역사라는 책을 썼다.
”창고에 저장은 장부상에만 있다. 지방 병기고에는 쓸만한 탄약도 무기도 없다. 관리들이 다 팔아먹고 누더기 몇 조각과 고철 나부랭이를 대신 갖다 놓았다. 아전과 수령은 그들 마음에만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강탈한다. 백성은 하도 곤궁하여 서해안 사람은 밀수업자에게 어린 딸을 쌀 한말에 팔고 있다. 길마다 송장이 널려있다.“
발품을 팔아 조선을 샅샅이 뒤지며 여행을 다녔던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써서 양평군을 여행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양평은 나름의 중요성을 지닌 읍내이다. 이곳을 책임지는 관군수는 800명에 달하는 아전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월급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을 쥐어짜서 수탈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고작 수천명 밖에 되지 않았을 그시대 양평군에 800명의 아전이 흡혈귀가 되어 백성의 피를 빨고 있었다. 비숍여사는 많은 당시의 관료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관료는 흡혈귀였다. 그것은 조선사회를 지탱했던 관료주의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음이기도 했다.
비숍여사는 만주를 여행하며 조선인이 모여 사는 마을을 방문한 후 충격을 받는다.
"러시아 경찰 서장이 나를 조선인 마을에 안내해 주었다. 그곳 조선인 농부들은 생활이 부유한 편이었다. 일부는 러시아 군대에 말과 곡식을 납품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을 능가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야윈 소를 사들여 살찌게 키워 팔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조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것이다. "어느 여행자도 내가 (연해주) 조선 사람의 가정에서 받은 것 보다 더욱 좋은 환경에서 더욱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이 곳 남자들은 국내와는 달리 남성다움과 독립심이 강하다. 양반의 거드름과 농부의 어슬렁대는 태도가 여기에선 민첩한 행동으로 바뀌었다. 여기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번 돈을 짜내는 양반과 관리는 없다. 예전에 나는 조선인들이 열등 민족으로서 삶의 희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연해주에서 생각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근면하고 품성이 우수하다. 국내의 조선인들도 정직한 정부가 있고 수탈만 없다면 발전할 것이다."
한국을 여행한 벽안의 외국인이 남긴 기록이다. 이해관계와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는 제3자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에 왜곡 된 역사가 판을 치는 지금 시대에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완역하여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에 들어가서 기근, 흉년 등 연관 키워드로 검색하면 수천 건의 참상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 참상 속에서 조정 차원에서 구제책을 논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시대에 이르러서는 구제책은 고사하고 흡혈귀처럼 뜯어 먹는 지옥을 그리고 있다.
“조병호가 상소를 올려 정사에 대해 의논하다
화폐의 통용은 줄곧 막히고 물가가 폭등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곤경에 처하니, 나라의 형편이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적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서 말하면, 수령(守令)이 탈취하고 군사들이 침탈하며 기근이 연이어 닥쳤기 때문입니다. 살 곳이 없고 곤궁에 빠진 백성들이 전혀 살아나갈 방도가 없는데도 혹은 의병이라고 하면서 갖가지로 위협하고 약탈을 합니다. 그런 다음 며칠 안 되어 또 어떤 무뢰배들이 몰려와서 의병과 호응했다고 하면서 묶어놓고 때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재물까지 거의 다 가져가 버려도 이 불쌍한 시골백성들은 호소할 곳이 없으니, 백성들의 생활이 고통스러운 것이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고종실록47권, 고종 43년 9월 24일 양력 9/9 기사)”
고종은 벼슬을 팔아 뜯어 먹고, 벼슬이라는 자본을 축척한 관료와 수령은 백성을 뜯어 먹었다. 그리고 국난 극복을 명분으로 일어선 의병은 양반 관료가 뜯어 먹고 난 후 백성을 또 뜯어 먹었다. 다음은 의병을 사칭한 동네 양아치 조폭이 와서 뜯어 먹었다. 완벽한 다단계 착취와 수탈 속에 백성의 피와 살은 뜯겨졌다.
고종의 벼슬 영업 수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 났다. 일년에 호조판서가 스물 몇번이 바뀌고, 벼슬을 구매한 지방 수령이 지방 부임지에 도착할 때 쯤에 같은 벼슬을 또 제3자에게 또 팔았다. 그렇게 긁어 모은 돈으로 매일밤 연회를 즐기고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 민비는 매일 수십가마니 쌀로 밥을지어 한강에 뿌리며 잉어에게 잔치상을 차려주었다.
고종시대는 불교 천년 유교 천년의 모든 적폐가 켜켜이 쌓여 퇴적되고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고구려를 시작으로 고려시대를 거치며 불교는 이땅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당대의 유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며 유교는 불교의 대안으로 이데올로기를 지배했다. 정확히 불교 천년, 유교 천년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으로 또 무당 푸닥거리로 기괴한 변종으로 진화하며 고종시대 화려한 꽃을 피웠다.
진령군이라는 희대의 무당은 한양에 중국에서 숭배 되는 관우를 모시는 서낭당을 짓고 요령을 흔들었다. 진령군이 궁궐에서 푸닥거리를 하며 점괘를 던져주면 다음날 고종이 주재하는 어전회의 안건이 되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고종은 궁궐 기둥 밑에 솥뚜껑을 묻으며 왕실의 안위를 빌었다.
꺼져가는 조선의 등불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죽음의 날을 기다릴때 고종은 망해가는 청나라 바지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살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조선 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한마리 개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 틈만 나면 위안 스카이는 폐위 시키겠다고 고종의 귀싸데기를 때렸다. 위안스카이와 왕서방으로 통칭 되는 화상의 경제적 수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오직 국가만이 판매할 수 있는 인삼까지 화상이 나서 밀수를 했다. 그것도 부족해 인천의 인삼창고를 습격해서 강탈하기도 했다.
고종이 진령군을 통해 천지신명과 영혼의 대화를 할 때 바야흐로 세계는 제2차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전기에너지와 석유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과 대량생산 체제가 급격히 발달한 제2차 산업혁명 시대는 제1차 산업혁명의 경공업 중심에서 철강, 화학, 전기, 석유 등 중화학공업 분야가 급격히 성장했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에서는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며 끊임없이 자동차가 쏟아져 나왔고 한양은 2층집도 찾아 보기 어려울 때 수십층의 고층 건물이 뉴욕을 장식했다.
혼란과 혼돈의 고종 시대 5세의 이승만은 영양실조 등으로 심한 눈명 앓고 실명할 위기를 맞이했다. 한의학이나 민간요법으로 효험을 보지 못하자, 그의 아버지는 진고개에 있는 일본인 의사를 찾아가 신식 안약을 받아와 눈에 넣어주었다. 안약을 넣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극적으로 어린 이승만은 시력을 회복한다.
동서양을 아울렀던 지성인(知性人) 이승만은 어려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수 없이 과거실험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고종이 벼슬 장사꾼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그 시대 절대로 이승만은 과거에 합격할 수 없었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시엄은 폐지 되었다.
유교 천년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서삼경이 전부였던 이승만은 입신양명(立身揚名)과 출세(出世)가 살아가는 목적의 모든 것이었다. 더욱이 반상의 서열이 지배하는 계급주의 사회에서 몰락한 왕가의 몰락한 후손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시험 밖에는 없었다.
1875년 음력 3월 26일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이승만은 왕족인 양녕대군파의 16세 손으로 태어났다. 손이 귀한 집안의 6대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은 집안의 모든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나의 출생은 우리 집안에 너무 큰 기쁨이었고 그래서 우리 집은 이웃사람 들을 초청해 큰 잔치를 벌였다.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이제 비로소 이씨 집안제사를 잇게 되었다고 칭찬 하였다. 조상 제사는 그만큼 중요하다. 조상 위패를 모실 자손이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반면에 아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것이 자신의 위패 뿐 아니라 죽은조상들의 위패를 자식과 그 후손들이 계속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출생을 가장 기뻐한 이는 물론 나의 어머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산다. 자기 남편의 대를 끊어 놓은 여인으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정체성의 정점인 종법(宗法)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였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당해야 하는 비참한 사회적, 관습적 테러에서 벗어난 어머니를 통해 이승만은 자신이 살아갈 성리학적 질서를 말하고 있다.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李敬善)은 풍수지리에 깊이 빠져 있었다. 가세를 돌보지 않고 조상의 묘자리를 찾아 이장하고 가문의 재흥(再興)을 꾀하려 했다. 그로인해 이경선은 재산을 탕진하며 방랑 생활을 했다. 성장기 영양실조로 실명위기까지 겪어야 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 속에 이승만은 성장해야 했다.
성리학에 무속(巫俗)은 귀신에게 빌어 복을 구하거나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막는 것은 성리학에 어긋나는 미신으로서 이단 또는 음사(淫祀)였다. 풍수지리 또한 인간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술법으로 술수적, 점복적인 행위로 강력하게 배척하는 미신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조상의 발복을 빌기 위해 조선시대 모든 양반들이라고 할만큼 소위 명당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대원군은 명당을 찾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사람을 풀어 조선팔도를 뒤졌다.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대원군은 멀쩡한 가야사를 불태우고 탑을 헐어내며 이장했다.
풍수지리는 것은 비참하리만큼 허망하다. 대한민국의 주거문화를 규정한 것은 아파트이다. 전국적으로 1200만호가 넘어간다. 아파트를 짓기 위하여 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수십미터에 이르는 콘크리트 기둥을 수백개를 박는다. 수십미터에 이르는 수억개의 콘트리트 말뚝이 38선 이남 땅에 박혀있다. 풍수에 따라 우리나라 혈을 끊기 위해 일제가 두세뼘의 철근을 박았다는 쇠말뚝 파동이 김영삼 시대 한창 시끄러웠다. 그 쇠말뚝은 북한 땅에만 박았는지 동토(凍土)의 제국이 되어 지구상에 가장 비참한 삶을 자랑하며 기근과 굶주림에 죽어가고 시체가 길거리를 덮고 있다.
넓이만 50킬로제곱미터가 넘는 진시황릉이다. 그런데 고작 진나라는 40년 만에 멸국하고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수천개인데 이집트는 왜 그 꼬라지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당 푸닥거리와 풍수지리가 지배하는 구한말 1000년 불교, 1000년 유교의 썩은 모든 퇴적물이 켜켜이 쌓여 악취를 풍겼다. 의사보다 무당이 흔하고, 임금과 정승들이 푸닥거리 하는 무당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궁궐 옆의 대형 신당은 국가 재정을 움직일 정도였다.
구한말 성리학과 불교가 퇴적한 썩은 똥덩어리와 악취는 어쩌면 이승만에게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아이를 얻으려면 대부분 절간이나 이웃마을 언덕에 가서 제물을 바쳐야 했다. 내 어머님도 종종 하시는 말씀이 서울 서쪽에 있는 절간에 있는 부처님이 나를 낳게 해주었다 하셨다. 어머니가 그 절간에 가서 제를 올린 직후 밤에 용 한 마리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셨다고 했다. 그래서 내 아이 때 이름이 용이였다”
풍수(風水)에 미쳐 가계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로 인해 이승만은 독실한 불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녔던 절에 대한 감흥을 남기고 있다.
“절간에 가까이가면 주변이 있는모든 것들이 영적이고 거룩하게 느껴졌다.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멀리서 종소리와 징소리가 들리는 중 탑과 부도 등을 보노라면 내가 마치 속세를 떠나 별세계에 있는 느낌을 가졌다. 웅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 높은 제단 위에 금빛 찬란한 부처가 내 앞에 버티고 앉았다. 제단 아래 늙은 승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반쯤 감고 염주알을 돌리며 불경을 외우고 있다. 천장과 벽은 온통 상징과 그림들로 가득 차 있다. 한쪽 벽에는 윤회를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뱀이나 소, 혹은 곤충으로 변하는 사람들도 그려져 있고 또 다른 쪽에는 부처와 함께 착한일을 한사람들이 연꽃이 만발한 가운데 구름 속에서 천상의 선녀들과 즐겁게 사는 극락이 그려져있었다”
이승만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시작했고 과거시험에 뜻을 두었다. 이미 6세 한시를 지어 남길 정도로 이승만은 기재(奇才)를 보였다.
“風無手 搖樹木 月無足 橫蒼空(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
이승만이 성년이 이르렀던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 될 때까지 이승만 삶의 목표는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시험이 폐지 되었다. 이승만이 겪어야 할 좌절감은 세상을 잃은 것과 같았을 것이다.
한반도 역사상 탁월한 매관매직 영업왕으로 군림 했던 고종시대 이승만이 합격할 수 있는 과거 시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맞았을 것이다. 이승만의 나이 10살 때 제물포항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대부인이 도착한 후 본격적인 복음이 한반 한반도에 폭발하며 새로운 이념과 문명의 싹이 심어졌다. 성리학과 불교적 세계관이 전부였던 이승만은 조선에 뿌려지고 있는 복음의 밀알에 적의(敵意)를 드러냈다.
“내가 아이 적에 미국 선교사들이 도라단니며 길가에셔 복음을 전도하는 것을 흔히 보앗으나 우리는 그들을 몹시 업수히 녁엿스며 나는 스스로 항샹 생각하기를 ‘다만 무식하고 빈한한 사람들만 저 선교사들의 말을 들으러 단니고 나는 공자와 석가여래의 일과 이 세상 여러 종교를 다 알지라’ 생각하고 우리는 저선교사들을 지목하여 ‘양고자’라고 부르고 우리의 고유한 신령들에게 지셩으로 긔도하여 아못조록 저 예수교가 우리나라를 위해하기 전에진즉 이것을 망하게하여 달라고 하엿노라”
서양 선교사를 서양귀신(양귀자, 洋鬼子)으로 불렀던 당시 이승만의 눈에도 선교사는 서양에서 온 코큰 귀신일 뿐이었다. 이승만이 젊어서 과거시험을 통해 출세를 하고 성리학적 질서 속에 편입 되어 평생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승만 없었던 한반도는 유교 공산주의가 다스리는 조선인민공화국이 되었으며 극악한 봉건질서 속에 북한동포처럼 신음하며 하루 하루를 생존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해방 후 국민 80%가 공산주의에 함몰 되어 유토피아를 꿈꾸던 그 때 오직 이승만의 신념 하나로 국가 이념과 정체성을 만들었다, 한반도를 하나님이 돌보시고 있음이었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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