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도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에게 수당을 지급하기로 했다.
명예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논리의 확장성을 따져보면 기가 막힌 결론에 도달한다.
동학농민혁명 유족 수당 논란... "임진왜란 의병 후손도 줄 건가“
초딩 때 배운 건지 아니면 중딩 때 배운 건지 기억이 아사 무사하지만, 이 땅의 최초 민란은 고려 때 일어났다. 명주(강릉의 옛 지명) 민란(고려 신종 1199년)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1년 앞서 일어난 난이“만적의난(고려 명종 1198년)”이 최초다.
두 난이 약간 성격 차이가 있는 것은, 명주 민란은 이름 그대로 농민의 난이었고, 만적은 순수 농민이 아닌 당시 최고 지도자의 가노(家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적이 동지를 규합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자신들의 신분에 대한 불만이었다. 당시 만적이 부르짖은 구호가“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며 분연히 일떠섰던 것이다.
사실“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는 구호는 일찍이 진시황이 죽고 초한(楚漢) 쟁패 이전 전국이 어지러울 때, 진승 오광 이라는 시정잡배가 영웅호걸의 반열에 오르려고 민중봉기를 일으킬 때,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라며 외친 구호였다.
어찌 되었든, 만적의 난이 더욱 역사적으로 깊숙하게 자취를 남긴 것은, 만적이 난을 일으킬 당시의 고려 세상은, 소위 무신의난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였기에 오늘날 516 혁명이나 12.12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삼엄하고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다.
따지고 보면 같은 군사 정권이라도, 공소권이 있었겠나 재판이 있었겠는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닷~!’ 이 한마디로 참수를 하고 독약을 마시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적은 과감하게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용감하게 일떠섰지만, 봉기를 해 보지도 못하고 함께 봉기하기로 한 동지(?)한 놈의 배반으로 주모자 100여 명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자~! 이쯤해서 동학난이 혁명이라면, 고려 시대 노비 만적의 난은 민중 운동의 창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며 신분 해방을 외친 만적의 후손을 찾아내어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명주민란, 임술민란, 홍경래의 난, 임진왜란 의병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결국 조선과 고려의 모든 민중 저항 사건 후손에게도 보상금을 나눠줘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이다.
이쯤 되면 역사는 보상금 지급 경쟁의 장터가 된다. 혁명은 기념비와 교육으로 계승해야지, 수당으로 거래할 일이 아니다. 동학을 혁명으로 재평가하는 것과 유족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명예 회복을 돈으로 환산하는 순간, 역사는 졸라 욱끼는 풍자극으로 전락한다.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