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이 유명을 달리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애도하며 추도사를 썼다.
“그가 우리 한국민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 영원한 벗으로 누구보다도 한국을 이해해 주었고,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기구한 운명에 동정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우리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함으로써 극동의 평화와 인류의 자유를 위한 불후한 무훈을 남겼다”
짧고 간략하게 남긴 박정희 대통령의 추도는 개인적으로 맥아더 장군이 대한민국에 남긴 업적과 은혜를 사실 그대로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담았다고 생각 한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패륜이 이 시대 좌파들에 의해 저질러 지고 있다. 인간이 건설할 수 있는 유사 이래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평가 받는 북한을 추종하는 그들은 대한민국이 북괴처럼 지옥으로 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먼저 그 자들의 부모와 자식을 북괴로 보내 북돼지 3부자 치하에 살게 한 후 맥아더 장군에 대한 패륜을 저질렀으면 좋겠다.
6.25 사변 발발 3일 후 맥아더는 전선 시찰을 위해 동경에서 서울로 날라왔다. 한강 방어선 시찰 중 일등병을 만난다.
언제까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명령이 있을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 소총 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 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 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지상병과 병기를 보내 주겠다. 용기를 잃지마라.
맥아더와 만난 일등병은 북한에서 탄압 받는 월남한 기독교인이 조직한 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3사단 백골부대 소속 신동수 일병이었다.
맥아더는 그날을 회고록에 남겼다.
"당시 한국군은 무기와 장비가 매우 열세인 상황이었지만, 싸울 의지가 강하게 남아 있어 불리한 상태에서도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일등병의 용기에 감명 받은 맥아더는 약속대로 트루먼에게 긴급전보를 보내 재일 미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고, 신동수 일병과 만나고 돌아서며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미국 정부의 참전 결정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한국군 지원 명령을 내리는 맥아더 장군에 극동사령부는 극심한 반발을 하였고 이에 맥아더 장군은 단 한마디로 제압했다.
"민주주의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군대는 있어도, 군대에 민주주의는 없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구상이 미군부에 전해지자 미합참과 해군은 극렬 반대에 나선다.
인천 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최고 9m 최저 7m에 이르고,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만 했다. 밀물 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때까지 좌초하므로 북한군의 반격시 탈출길이 막히고 몰살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미터 이상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갯벌에서는 도보 및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인천 앞바다는 협소한 수로가 이어져 있다. 만조 시 선박이 통과할 수 있는 수로는 ”비어수로“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 되어 있어 상륙작전에 동원 된 군함과 지원 선박은 모두 좁은 단일 통로에 밀집하여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좁은 수로에 몰린 군함은 고정 표적이 됨을 의미 했으며 비어수로의 물살은 매우 빨라 군함도 떠내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건은 최소 9시간 동안 상륙부대는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을 받을 수 없었고 더욱 끔찍한 것은 인천 앞바다에는 갯벌 이외에는 모래사장 조차 없이 상륙지 주변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가 구축 되어 있었다. 상륙작전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바다였다.
상륙 작전에 있어 가능한 모든 지형적 최악의 조건을 갖춘 인천 앞바다이고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방파재와 축대는 또 다른 심각한 난관 이었다. 이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맥아더 장군은 안시성 전투에서나 나올법한 사다리를 타고 넘어 갈 것이라고 했다. 항공모함과 전투기가 바다와 하늘을 지배하는 시대에 사다리를 동원하겠다는 맥아더의 구상에 모두가 경악했다.
상륙전은 은폐물을 통해 공격하는 방어군에 비하여 모든 것이 드런난채 싸워야 하는 상륙군에게 극단적으로 불리한 전투이다.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인천에 미군이 상륙 할 것이라는 경고를 끊임없이 하여 왔고 북괴는 인천항에 이에 대한 어느 정도 경계심과 방어적 대비도 하고 있었다. 방어시설이 갖추어진 항구에 상륙하는 것은 2차대전 당시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금기시 되어 있었다. 상륙이 성공 되었다 하더라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루며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들은 미극동군 해군사령관 터너 조이는 ”성공확률이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에 나섰고 미합참을 비롯한 군부와 정가는 결사 반대에 나서며 평택 포승, 군산, 삼척 등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인천상륙은 적 후방을 완전하게 단절 시켜 보급선을 완벽하게 끊을 수 있으며, 적의 허리를 잘라 유기적 군사활동을 차단할 수 있으며, 적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고, 퇴로가 막힌 적을 적을 포위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서울과 가까워 신속한 서울탈환을 할 수 있는 것은 인천 밖에 없었다.
극렬하게 반대하는 미군부와 정가에 맞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극동사령관을 사임하겠다고 맞섰다. 태평양 전쟁에서 개구리 뜀뚜기 전술로 총 87차례의 상륙작전을 전개하고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 태평양 전쟁을 승리를 이끈 당대를 아우르는 상륙전의 명장 맥아더를 미국도 꺽을 수 없었다. 결국 미합참은 ”인천상륙이 여의치 않으면 군산에 상륙한다“라는 조건부로 작전명 ”크로마이트“를 승인했다.
1/5000 확률의 인천상륙작전에 맥아더는 극단적 불리함을 극복할 모든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2020년 6월 23일 동아일보에 ”일본 민간인 60명 6.25때 미군과 함께 싸웠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부제로 ‘2020년 6월 22일 마이니치신문, 美 문서입수, 민간인 전투참여 최초로 확인돼’가 달렸다. 6.25 사변에 일본인이 참전한 것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입수한 문서에 일본 방위성에 ”사실관계를 알고 있지 않으며 대답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발표했고, 미군부 또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어 공식적인 확인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간 한일간의 역사적 문제, 미국과 소련, 중국 일본의 국제 역학적 관계 때문에 비밀에 붙혀져 쉬쉬 했던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여전히 미국과 일본 정부는 함구하고 있으며 일본 민간인이 6.25 사변에 참전한 것을 북한과 중공, 소련은 지금까지도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다. 난마 처럼 헝클어진 당시의 국제 정세가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흘러 갔는지 짐작 된다.
인천상륙작전은 인천이라는 밀물과 썰물의 변던스러운 바다, 갯벌과 높은 방파제라는 지형적 악재가 겹쳐 상륙에 있어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따라서 전투와 화력의 군사적 문제를 떠나 변덕스럽고 거친 바다라는 자연적 조건, 극단적 불리함에 놓은 지형을 극복하는 것이 상륙작전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조선은 바다를 모르는 바보였다, 조선시대 배를 띄워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항해술 또한 없었다. 삼국시대 장보고가 배를 띄워 일본과 중국, 동남아와 중동의 바닷길을 장악하고 호령했던 그 시대보다 퇴보한 멍청하기 그지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고 선비와 사대부의 수준이었다. 바닷길은 고사하고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의 백성을 불러들여 무인도를 만드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이 시작 된 것이 태종때 부터 시작되어 고종에 와서 폐지가 된다. 조선시대 전기간 바다와 바닷길은 막혀있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너무나 흔한 국가 생존전략이다. 조선은 바닷길을 개척하여 지경을 넓히는 것은 고사하고 있는 바닷길도 틀어 막아 공도정책으로 멀쩡한 영토도 버렸다.
일본은 에도시대 이전부터 바닷길을 개척하여 동남아와 활발한 무역을 하였다,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아 국제무역에 종사하는 인원만 10만이 넘었다. 그들은 국가에서 허가를 받은 무역선 ”슈인센“을 타고 동남아를 누비며 대만과 마닐라, 루손섬, 아유타야 왕국, 프놈팬, 베트남 호이얀에 수천명이 거주하는 일본인 타운을 건설했다.
그렇게 진출한 사무라이 야마다 나가마사는 태국에 정착하여 군인이 되고 에스파니아 함대를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권력서열 3위에 올라 왕녀와 결혼하고 국왕이 죽자 후계자 문제로 권력다툼에 참여할 정도로 뱃길을 통한 일본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메이지 유신 후 나라의 문을 열고 서양을 배우는 첫걸음이 배를 띄워 바닷길로 이와쿠라 사절단을 서양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한 청나라는 아편전쟁으로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자 세계열강에 체면을 세우고자 조선과 중국 상인이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을 하자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는다. 그러나 조선에는 중국으로 건너갈 배 한 척 없었고 중국으로 무역품을 실고 건너 갈 항해술 조차 없었다, 그 시대 그 잘난 지엄한 상국 청나라가 자신의 바다를 허락하여 주었음에도 조선은 배와 항로, 항해술이 없어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바닷길을 포기하고 6개월에서 1년이 걸리는 육로를 걸어 만주를 돌아 수만리길을 걸어 중국으로 갔다.
일본에 주둔 중인 미7사단이 인천상륙작전의 주축이 되었고, 미7사단은 일본에서 군함을 타고 6만여명의 병력이 서해안을 통과해야만 했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좁은 수로와 암초를 피해 대군단은 곡예하듯 항해를 해야만 했다.
맥아더는 공도정책에서 이제 벗어난 한국으로부터 뱃길에 대한 도움도 자료도 받을 수 없었다.
일제 시대에 생겨난 신조어 중 하나가 신작로 이다. 일본은 조선에 도로를 건설했고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신작로라고 했다. 구한말 조선을 찾은 수 많은 외국인은 나귀조차 교행하는 것이 버거운 조선의 좁은 길을 보고 한탄했다.
일제는 신작로를 건설했고 철도를 놓았으며 항만과 등대를 건설했다. 땅과 바다에 동맥과 같은 길과 항로를 개척했다. 그렇게 조선에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일제의 그 목적이 자신들의 이익이었든 아니었든 별론으로 하고 봉건사회 조선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일제가 건설한 땅의 길, 바다의 길이었다.
경부선 철마가 달렸고, 남북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신작로가 놓였고, 일본과 중국으로 가는 항구가 건설 되고 중국과 일본 홍콩과 만주를 잇는 뱃길이 열렸다. 일본은 도로와 바닷길을 개척하며 한반도 길을 손바닥 보듯 볼 수 있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군함의 포문을 열은 것은 인천 팔미도 등대가 점등하는 순간 이었다. 팔미도 등대는 1902년에 착공해서 1903년에 준공되었다. 최초 점등일은 1903년 6월 1일이다.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등대의 총 높이는 약 8m이며, 형태는 지름 약 4.67m의 원통형이다
일제는 청일전쟁 이후 이시바시 아야히코, 야마사끼 노소구라, 야마사가 쯔도무를 시켜 한국 연안의 해류와 수심, 암초 등 조선의 바다를 조사하게 했다. 이시바시 아야히코는 영국에 유학하여 등대건축을 공부하였고 수중에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1884년 일본 최초의 등대인 안기등대를 만들었다.
일본은 고종을 압박하여 조선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를 세우게 하였고, 이시바시 아야히코의 설계와 기술로 조선 최초의 등대가 세워졌다.
그렇게 세워진 팔미도 등대는 인천에 도착한 UN연합군 함대의 눈이 되었다.
조선의 지배를 시작한 일제는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모든 분야의 전문가를 조선에서 근무하게 했다. 해운업과 해상운송이 본격화 되면서 그에 필요한 전문인력이 일본으로부터 건너왔다.
사농공상의 신분질서 속에 전문인력에 대한 천시가 만연한 봉건조선을 대신하여 전문적 기술적 업무를 담당하게 된 일본인은 조선 사회를 깨웠다. 그렇게 조선의 바닷길과 해운이 깨어났다.
인천상륙작전과 연합군의 군사적 지원을 위해 미 해군은 일본정부에 요청하여 일제 시대 활약한 전문인력을 모아 극비리에 해상보안청의 특별소해대가 편성 되었고 그들은 한국의 항구에서 기뢰제거 작업에 투입 되었고, 함대가 이동할 바닷길을 안내했다. 인천 바다에 도착한 일본 민간인들은 어뢰탐지와 기뢰제거,수심탐지를 도왔고 인천에 상륙하는 전차상륙함(LST)의 60%를 일본인이 조종했다. 한국 사정과 지형에 밝은 일본인이 차출 되어 육상전투에도 동원 되었고 통역과 후방지원에도 동원 되었다. 인민군의 포로가 된 윌리엄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인민군 10여명을 사살한 일본인도 있었다. 원산, 해주, 군산, 남포 등에 부설 된 기뢰는 한반도의 해안의 지형에 밝은 일본인에 의해 모두 제거 되었다. 일본인 기관사들은 경부선에 투입되어 열차로 미군을 실어 날랐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정권현은 인천상륙작전에 일본인 2천명이 참가하여 57명이 전사했다”라는 사실을 NHK 특집 다큐멘터리를 인용하여 말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민국으로부터 거칠고 변덕스러운 서해안과 인천 앞바다를 제압 할 도움을 받지 못하자 일제 시대 조선의 바다를 관리한 일본인 전문인력의 도움을 받았다.
미군함정에 오른 일본인들은 인천 앞바다까지 안내는 물론이고,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상륙에 주어진 2시간 안에 작전성공을 위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쏟아 부었다. 일본인은 미군이 탄 상륙정 LST를 조종하여 악랄한 인천 앞바다의 비어수로를 통과했다. 일본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불과 주어진 작전시간 2시간 안에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긴박함은 극복할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최대 난제인 바닷길을 안내한 일본인 해양전문가, 인천항에 근무했거나 선원이었던 일본인 3천명이 연합함대에 승선하여 인천에 상륙했다.
그렇게 상륙한 일본인과 연합함대의 함포 포문을 열어준 식민시대 유산인 팔미도 등대가 성공적 인천상륙작전을 안내한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어렵다. 그 어떤 예측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함으로서 기독교 문명으로 문명사적 대전환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된다. 더욱이 일본은 식민시대 가장 지독하게 박해하고 괴롭힌 것이 다름 아닌 한반도의 개신교 세력이었다는 것에 역사의 주관자는 따로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의도로서는 할 수 없는 역사의 주관 말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바탕은 기독교 문명 전래라는 문명사적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기독교 문명 전래의 교두보가 일본이었다. 요코하마에 도착한 언더우드를 비롯한 수 많은 선교사들을 이 땅에 새로운 문명을 가져왔다. 일본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일어난 유럽의 기독교 문명의 하드웨어를 그대로 흡수했고 그 하드웨어를 한반도 식민지배를 통해 한반도에 유산을 남겨 주었다.
일본이 남긴 식민지배의 유산이 옳고 그름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을 통한 새로운 역사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세계를 지배했고 진보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였다. 그 시류에 대한민국이 편승할 수 있는 자격을 남겨 주었다는 것이다.
구한말 그 시대는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이다. 식민지 확보가 그 나라의 국력을 가늠하던 시대였다. 조선은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고 수 많은 열강이 조선에 눈독을 들였다.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함포를 무장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포격하고 왕족의 무덤을 파헤치고 조선왕조실록을 강탈해갔다.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며 조선의 영토를 무단 점령했다. 러시아는 대 놓고 군사력을 투사하며 마산에 육군 주둔지와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중국의 위안스카이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겠다고 본국에 포부를 밝히고 고종에게 왕위를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모두가 조선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될 것을 내다보고 있을 때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하여 중화질서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을 벌린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일본은 영국의 대리인이 되어 러시아와 전쟁을 벌려 승리함으로서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쫒아 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하여 대륙세력으로부터 넘어오는 세력을 모두 쫓아 냈다. 그리고 그 댓가로 한반도를 식민지배 한다. 이것은 한반도가 기독교문명으로 문명사의 대전환을 맞이하는 중대한 갈림길이 된다.
만일 기독교 문명의 중심에 있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세력, 또는 러시아가 한반도를 지배하였다면 우리는 기독교문명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기독교 문명에 대한 반발과 적개심이 생겨 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러시아의 공산세력의 무신론적 세계관이 이식 되었을 것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같은 기독교 문명의 중심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면 그에 대한 반발과 적개심은 결코 이땅에 복음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마도 문명사적 대전환은 어림 없거나 최소한 수십년은 늦춰졌을 것이다.
여전히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거짓이 판을 치고 그런류의 거짓 각색된 역사가 횡행하며 매일 같이 역사적 저주가 뿌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의 또 다른 열등감의 단면이기도 하다. 아마도 충분히 한반도의 문명사적 대전환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거나 좌초되었을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 하면서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게 하였고, 부패하여 역겨운 냄새나는 중화문명을 한반도에서 몰아냈고, 러시아 공산당의 붉은 혁명의 피가 한반도를 덮지 못하게 했다. 당시 일본이 국력은 중국과 러시아에 비해 절대적 열세에 놓여 있었고, 국제사회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곳은 없었다.
일제 시대 공교롭게도 일본은 기독교 문명을 흡수하여 열강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모시며 미신에 미쳐 한반도의 기독교 세력을 집요하고 지독하게 핍박했다,
우상과 미신에 지배당한 일본은 종교개혁의 산물로 탄생한 미국에 의해 파국을 맞이했다.
그렇게 파국을 맞은 일본이 팔미도 등대를 세웠고 인천상륙작전의 길잡이가 되어 한반도를 침범한 공산세력을 물리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을 역사적 우연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 무엇인가 역사를 주관하는 절대자를 생각하게 한다.
인천상륙작전의 기적에 일본인이 동원 되었다, 역사에서 누구를 들어 쓸지는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뜻이 주관하는 것 같다. 절대자는 대한민국을 위하여 일본을 들어 썼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사무엘상17장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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