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비서였던 장준하는 광복군의 아이돌이다. 게다가 미군 OSS 훈련을 받은 일당백의 용사로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한반도 곳곳에 침투하여 첩보활동을 하고 유격대 대장으로 일본군 군사시설을 파괴하려는 전설의 용사이다. 그런데 장준하는 계급이 고작 준위에 불과하다. 장교로 임관하면 받는 첫 번째 계급이 소위인데 그보다도 못한 준위였다.
일본으로 유학간 후 일본 동경에서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하여 전쟁터에 나선 후 개인적으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살길 찾아 탈영하여 임시정부로 도망친 길을 구국장전 6천리라고 미화하는 것도 너무 나간 미화 아닌가 싶다. 하기사 자원해서 일본군 학도병으로 입대하고 임시정부로 가기 위하여 탈출 한 것으로서 기획입대이고 기획탈출이라고 우겨되는 것에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온갖 고초를 겪다 결국 순교까지 하는 그 엄혹한 시대 신학대를 다니기 위하여 일본으로 유학 간 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다. 일제는 한국인 지식인을 강제징집에 대한 반발을 우려하여 조선인 대학생은 자원입대 외에는 강제징집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장준하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라고 추켜 세우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너무 미화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광복군을 미화 칭송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광복군의 규모가 어떻게 되었기에 흥분하냐고 물으면 몇만명 쯤 되는 것으로 답한다. 그런데 참 비참한 것은 3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전투요원은 훨씬 줄어든다. 소총을 지급 받은 광복군은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김구는 장개석으로부터 돈을 타 쓴다. 장개석은 해방 후 한국에 군사를 주둔할 목적으로 광복군 운영자금을 주었지만 무장할 정도의 돈도 되지 않았고, 광복군의 지휘관은 무조건 중국인이 한다는 조건으로 몇푼 되지 않은 돈을 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광복군에는 장교가 한명도 없고 가장 높이 진급한 사람이 소위 보다 낮은 계급을 가진 준위 장준하이다. 지휘관 한 명 없는 장개석의 예하부대 광복군의 초라한 현실을 이제는 제발 그만 뻥튀기 했으면 좋겠다.
이승만은 시종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한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상대로 무장독립투쟁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승만의 옥중동지인 박용만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각별했다. 박용만은 독립정신 원고를 가방에 숨겨 미국에서 출간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절친한 지기였다. 그러나 극단적 무장독립투장을 주장하는 박용만과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독립노선을 두고 격한 갈등을 겪게 되며 헤어지게 된다. 중국 상해로 건너간 박용만은 독립자금을 요구하는 이해명에게 암살 당한다. 이해명은 임시정부와 광복군 창설에도 참여한다. 박용만의 암살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김구에게 책망하는 편지를 쓰자 김구는 이승만에게 “박용만의 제거는 친일행위를 응징한 것이므로 형님이 간여하지 말라”라고 답장을 보낸 것으로 보아 김구 계열의 인사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김구도 매우 몽상주의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조선이 해방 된 것은 미국의 원자폭탄 2방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김구는 원폭으로 해방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한다.
"왜적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 국내의 중요한 곳을 파괴하거나 점령한 뒤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 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과연 김구의 계획이나 바람처럼 광복군이 국내진공이 가능했을까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소총조차 소지 하지 못한 300명이 되지 않는 광복군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는 각자의 생각일 것이다.
김구가 한탄하는 미 육군성과의 약속은 국부 이승만이 미국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군사협력이었다. 국부 이승만은 CIA 전신인 미국의 전략첩보국 OSS 부국장인 굿펠로우에게 대일전쟁 첩보부대에 한국인 100명을 참여 시켜 줄 것을 요구하여 받아들여졌고 장준하가 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광복군의 참여는 첩보부대 요원에 한정 된 활동을 두고 김구는 마치 전투병력의 국내진공을 통해 한반도 수복을 하는 것처럼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소수의 한인특공대원을 뽑아 한반도에 투입하는 냅코작전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50여명 정도로 한정 된 후방 교란 작전 정도에 불과한 계획이었다. 700만의 일본군대와 당장 만주에만 100만이 넘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몇십명이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타격을 줄지는 의문이다.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려 가미가제 특공대 등을 앞세우는 일본의 발악전술에 인명이 손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식민국 영토에 불과한 한반도에 미군을 상륙시키거나 투입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김구의 국내진공을 통한 수복을 이야기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 일 뿐이다.
국부 이승만은 1937년 중일전쟁이 확대되고 있었고,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면서 미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1939년 본격적인 외교독립활동을 위해 워싱턴으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 미일간의 태평양 전쟁에 대한 예언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2년여에 걸쳐 집필한다.
마침내 1941년 7월 영문으로 출판이 되었고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며 하와이 또는 알라스카를 공습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공격목표까지 예언한다. 책이 출판되자 평화주의자들은 조소를 보냈지만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는 서문에 ” 이책이 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으나, 오직 너무 진실인 것이 두렵다“며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은 조소를 보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책이 출판된지 반년만에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 된다. 이승만은 세계적 예언자가 되었고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특히 군장교에게는 필독서가 되어 국부 이승만은 정가와 군부에 일약 스타가 되었고 베스트 셀러 작가에 오른다. 이는 국부 이승만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미국 정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국부 이승만이 태평양 전쟁을 예견한 것은 일본의 문화와 습성 종교를 철저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은 신도를 숭상한다. 일본의 토착신앙인 애니미즘이 종교화 되고 생활화 되었고 교리나 경전이 없이 불교와 유교 등과 혼합 되면서 발전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천황이 신이 되어 체계화 되고 야스쿠니 신사가 만들어지고 일본의 신도로 자리 잡는다. 천황은 살아 있는 신이 된 것이다.
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항을 하고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일본 신도는 복잡하고 체계화 되어 천황에 대한 숭배는 절대적으로 굳어진다. 특히 일본신도가 자리잡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은 자그마한 학당 ”쇼카손주쿠“를 열어 일본의 대부분 유력인사를 길러낸다. 유신삼걸을 비롯하여 이토 히로부미 등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그의 제자이다.
요시다 쇼인은 덴노(천황) 아래 일본의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르친다. 그는 일본의 개방화를 위하여 평생을 부르짖었고 존왕양이파를 이끌며 일본 근대화를 위해 싸우다 반대파에 숙청당하여 처형된다. 그는 미야모도 무사시에 버금가는 검술을 가진 무인이었다. 그러나 서세동점의 시대 칼을 버리고 국제법을 공부하라고 가르쳤다. 칼의 시대는 지나갔다. 국제법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과 사상은 낮은 계급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하급 사무라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많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몰려들었다.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 일본 육군의 교황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92명의 문하생 가운데 총리 2명, 장관 4명을 포함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낸 영웅으로 평가되는 22명의 엘리트들을 배출했다. 제자 중 20명은 메이지유신 성공을 위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바쳤다.
야스쿠니 신사 위패 중 최상단에는 '요시다 쇼인'의 위패가 놓여 있다. 요시다 쇼인이 죽은 지 150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지금도 일본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으며 일본 최고의 부자로 명성을 얻은 한국계 손정의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며 손정의 집에는 요시다 쇼인 초상화가 걸려 있다.
신도의 특징은 죽은 사람 즉, 선조를 신으로 모신다. 요시다 쇼인이 개화인사를 길러낸 쇼카손주쿠 옆에는 그의 신사가 세워져 있고 일본에 백자 굽는 방법을 알려 준 한국인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모시며 신사가 세워져 있다.
존왕양이파였던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카도이즘(御門, 帝)'을 완성시켰고 사무라이는 천황을 위해 죽으면 신이 된다는 사상이 군대로 흡수 되면서 자연스럽게 군국주의 일본이 탄생한다.
이슬람은 포교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 이를 지하드(성전)라고 부른다. 성전을 위해 죽으면 알라신에 대한 최고의 경배이며 천국에 가서 72명의 가슴 큰 미인의 수발을 받는다고 믿는다. 신을 위해 죽고 천국에 이르는 맹신으로 자살특공대가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가제 특공대 또한 천황을 위해 죽으면 신이 된다는 맹신에서 비롯 된 것이다. 국부 이승만은 이러한 맹목적 믿음이 천황보다 높은 것은 용인할 수 없고 외부로 분출 되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예언했다.
알라신 보다 높은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이슬람처럼 이러한 맹목적인 천황 숭배는 천황보다 높은 미국을 두고 볼 수 없고 태평양을 두고 미국과 일본은 전쟁을 벌릴 것이라 예언한 것이다.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카도이즘(御門, 帝)'과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의 제국주의가 머지않아 태평양을 놓고 미국과 전쟁할 것이라는 예측했다. 그것이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핵심이다.
국부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이미 독립정신을 통해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될 것이며 태평양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태평양전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태평양 시대를 예견하고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미신으로 인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 인간이 노력하여 습득한 지식으로 통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깊은 신앙적 영성훈련을 통한 영적 각성과 천재적인 국부 이승만의 지식과 통찰력으로 이루어진 예언이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으로 한반도는 독립할 것을 알고 있었다,
김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모두 중국국적을 취득한 중국인들이다. 국부 이승만은 미국 국적 취득을 끝까지 거부하며 무국적자로 살았다.
살아 있는 사람을 신으로 숭상하는 미개한 일본의 종교를 두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조소를 보낼 때 위험성을 알아 본 것은 단 한명 국부 이승만이었다.
태평양전쟁을 예언이 적중하면서 국부 이승만은 미국 정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그의 이러한 영향력은 미 첩보국을 움직여 광복군의 훈련 및 무기 지원을 약속 받을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영향력으로 광복군에게 지원을 하려 한 것을 철저하게 숨기고 김구는 마치 자신의 역량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 것처럼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개전 되면서 루즈벨트가 의회에서 참전법을 통과시키고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중경의 임시정부 김구에게 급전을 날린다.
“임시정부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미국에 모든 협조를 하겠다는 성명을 만들어 나에게 보내 달라.”
김구는 12월10일자로 대일선전성명을 발표하였고 외교부장 조소앙이 루즈벨트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성명서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이승만은 전보를 받은 후 미국무부를 찾아가 “한국인은 일본인이 아니다” 라며 ‘한국인’으로 대우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진주만 공습 후 미국은 일본인을 적성국 주민으로 간주하고 수용소를 만들어 강금하고 은행계좌를 비롯한 재산동결 조치를 취했고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인에게도 일본인에 준한 처우를 하려 했다. 이승만의 강력한 항의로 적성국 국민에서 제외 된다.
독립군과 광복군은 정식 교전단체가 아니다. 독립군은 팔로군 소속이였고, 광복군은 국민당 소속 즉 모두 중국 소속부대였다. 양반들은 독립군이 중화질서 회복을 위해 싸웠고 그 비참한 고종의 대한제국으로 회귀하려는 복벽주의자들 이었다. 결정적으로 광복군이나 독립군의 활동이 태평양전쟁의 전세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고작 300명에 불과한 광복군을 5만명이라며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달라고 미정부에 요구 했고 한국독립을 보장하여 달라고 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말을 믿었고, 이러한 노력으로 간신히 조선이 전범지원국의 혐의를 벗게 되며 독립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임시정부 승인은 소련의 간첩 미 국부부차관 엘저 히스의 방해로 무산된다.
조선은 전범지원국으로 일본과 같은 운명을 맞을 운명이었다. 일제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을 대상으로 육군특별지원병을 모집했다. 조선인의 일본군 편입은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만 조선내에서 전쟁에 참여함으로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려는 여론이 거세지면서 조선에서 먼저 징병제를 요구했다.
조선인의 일본육군 모집 경쟁률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에 60대 1에 이를 정도로 경쟁은 치열했고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하기 위하여 인산인해가 이루어졌다. 고작 300명에 불과한 광복군은 교전단체로서 인정 받지 못한 군대에 비하면 2만명 가까이 조선인은 자원해서 태평양전쟁에 나섰다. 전범지원국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2차대전 때 독일국민의 8%에 불과했던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 전범국 대접을 받은 것을 보면 전범지원국에서 제외 된 것은 Japan Inside Out 출간 후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국부 이승만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정치적 영향력을 앞세워 광복군이 5만명이 된다는 국부 이승만의 말을 미국은 믿었다.
더욱기 일본군에 편입 된 2만여명의 군인은 광복 후 창군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전쟁 중 북괴로 넘어간 이적행위나 저지른 광복군 출신 송호성 같은 인사들에 비하여 그들은 6.25 사변에 투입되어 치열하게 싸웠고 혁혁한 전공도 세운다.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전투, 김종오 대령의 춘천전투는 전세를 역전시키는 분수령이 된다. 그리고 박정희, 정일권, 이종찬, 채병덕 등 그들이 없었으면 적화가 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누가 보아도 조선은 전범국을 도운 지원국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더욱이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간 홍사익 장군 같은 경우는 전범으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역사라는 것은 그 시대를 기준으로 그 시대를 살은 인물의 선택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국부 이승만과 박정희가 세운 지금의 평강한 세월에 그 시대를 보지 않는 무식이 횡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몽골의 압력으로 고려는 여몽연합군이 되어 일본 본토를 처들어갔다. 고려는 전범국에서 제외되는 것이 옳을까?
미국의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라는 한 명의 개인적 역량으로 조선은 전범지원국에서 빠져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배은망덕 하는 후손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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