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주일학교는 여성이 모여 시작 된다. 여성 주일학교 교사는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었다. 그녀는 주일학교에 대하여 본국 해외 선교부에 “한국에서의 여성사업”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제출했다.
“1888년 1월에 우리는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조직했다. 물론 구성원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다소의 종교적 교육을 받아왔었는데, 이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리교”에서 말하는 우리의 책무가 학생들을 모으고 가르치는데 있으므로 좀 더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 느꼈고 주장하였다. 이에 주일학교는 12명의 소녀, 3명의 여성. 3명의 선교사 그리고 선교본부의 1명으로 시작되었다.“
여자는 해가 지기 전까지는 문밖 출입 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 일요일 여성들이 모여 신앙과 성경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교육과 각성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성리학적 질서는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수 없게 되자 스크랜튼 대부인은 최초의 여성교회를 설립한다. 최초의 여성주일학교가 개교 되고 얼마 후 자신의 집에 21명의 여성을 모아 여성들만 모여 예배를 시작으로 여성교회가 탄생했다.
여성교회는 순식간에 성장을 거듭하여 90명이 넘는 신도가 되었다. 예배를 나누어 분산해서 보아야 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1892년부터 동대문 교회에 남녀를 합석시켜 봉건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예배를 올렸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과 같이 의료선교사로 건너온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은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다 독립하여 나와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병원을 시작했다. ”시병원“으로 명명하고 진료에 나선 윌리엄스크랜튼은 가난한 백성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했다. 미 선교본부의 지원으로 무상이다시피 진료를 하며 버려진 부랑아도 가리지 않고 데려다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며 치료를 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며 치료 받기를 거부하다 목숨을 잃는 것을 본 스크랜튼 대부인은 본국 선교부에 여의사와 여성병원을 건립할 자금을 요청한다. 본국에서 의사 메타 하워드 선교사가 파송 되어 보구녀관이 출발했다.
몰려드는 여성환자로 인해 메타 하워드 선교사는 과로로 인해 병을 얻게 되면서 2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메타 하워드 선교사 뒤를 이어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여의사가 약혼자인 홀과 같이 조선에 건너와 의료선교를 이어갔고 보구녀관은 20여년간 운영 되다 훗날 동대문병원과 합쳐진다.
스크랜튼 대부인을 시작으로 이 땅에 시작 된 여성선교는 교육과 의료에 그치지 않고 억압의 굴레를 벗고 한 명의 존중 받는 개인으로 주체적인 삶을 통해 사회개혁에 동참할 것을 가르쳤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전도부인을 육성한다. 이 땅에 최초의 여성 전도사를 육성한 것이다. 전도부인은 그 당시 해지기 전에는 문밖 출입 조차 하지 못하는 집안의 여자들을 찾아 다니며 한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어주었고, 찬송가를 가르치며 성경책을 팔고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교리의 전파가 아니었다. 여성으로서 닫힌 세상과의 소통, 기독교적 세계관을 이식하는 여성에 대한 문명개화의 시작이었다.
처음으로 2명의 전도부인이 탄생했다. 그녀들은 먹을 것이 없어 버리듯 이화학당에 맡긴 두 번째 학생 꽃님이의 어머니와 남편에게 버림 받고 콜레라에 걸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모녀를 데려다 치료해주고 학생으로 받아 준 세 번째 학생 별단이 어머니였다.
별단이 어머니는 콜레라로 죽어가다 치료를 받고 살아나 딸을 공부시켜주는 고마움에 보구녀관에서 빨래와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하며 스크랜튼 대부인을 돕다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전도부인이 되어 스크랜튼 대부인의 사역을 돕는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전도부인 양성소를 설립하고 전도활동을 지방으로 넓혀나갔다. 여성 전도인의 활약은 눈부셨다. 기독교는 나라에 흉년을 들게 만든 불길한 종교라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목숨의 위협까지 당했다. 그러나 위생과 불결한 생활여건 개선을 위하여 지도했고, 한글을 가르치며 복음과 문명개화와 새로운 세계관을 전했다. 상이 나면 쫒아가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시체의 염도 직접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서울에서 활약한 전도부인 정마리아는 1930년 1월 1일자 기독신보에 글을 올렸다.
"여전도인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걸네(걸래)’라고요 참 누가 하 셨는지 잘하셨습니다. 그 책임은 참 그러합디다. 아는 집에서 기도하고, 초상나면 염쟁이 노릇하고 또 순산하는 분에게는 산파가 되어주고 경성을 포위하여 삼사십리씩 나가서 촌 교회가서 가정학이라는 것은 가정아해 기르는 것, 성경국문들을 가르치고, 혼인집, 장사집, 낙 심한 집을 두루 다니는 책임이 '걸네'와 같습니다.그러니 걸네 없는 집안은 깨끗지 못합니다. 珠蓮花閣(주연화각)으 로 잘 지었어도 그 집을 잘 소제하려면 청결한 걸네가 요긴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희망은 여기 있습니다.‘마음이 청결하는 자는 하나 님을 볼 것이라고’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이 불결한 세상에서 성결한데 이르기까지 악전고투하다가 승리하여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과 우리 형제들이 死線에 서게 되는 것은 모든 승리의 희망 된 것만큼 내 희망입니다.“
평양에서 전도부인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김세지는 양반 출신임에도 이름조차 없이 김씨부인으로 불렸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일찍 사별하고, 지방관아 하급관리와 재혼하였으나 남편은 주색에 빠져 있었고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교회에 다니면 남편의 외도를 막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 다닌 사실을 알게 된 후 남편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고 강금까지 당하며 바깥 출입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목숨을 담보로 남편에게 맞아 피를 흘리며 교회를 찾아 기도를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콜레라에 걸려 남편이 사망한 후 김씨부인은 노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셰뒤(Sadie)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김세지는 전도부인이 되어 평양 일대에 복음을 전했다. 김세지는 첫해 일 년 동안 2,016회 가정 심방을 하였고 매달 두 번 이상 장례가 난 집을 찾아가 시체를 염하며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김세지는 15년 동안 매년 2,3천 회의 심방을 하고 매년 30여 명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했다. 김세지는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찾은 자유에 감사했다.
"우리 조선에 보내시고 여러 천년 동안 자유 없이 남자의 압박 아래 이름 없이 살던 우리 조선여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밝은 빛을 전파하여 여자의 자유와 그 본분을 널리 가르쳐 깨닫게 하는 동시에 나의 무식한 것을 깨뜨려 주게 하시고...
전도부인의 절반은 상습적 불륜과 축첩한 남편을 두고 있었다. 전도부인은 가정에서의 학대, 남편의 폭력, 사회적 천대를 극복하며 사랑과 헌신, 용서와 화해를 통해 자유를 찾았다.
1918년 3천여 성도 앞에서 설교하며 쪽복음서 1천7백50권을 판매한 원다비, 마적떼가 들끓는 국경에서 활동한 신마리아, 제주도의 전도자로 파송된 김신경, 기혼여성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고,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과 교리를 가르쳐 모임이 커져 '수구문(광희문)교회'의 모태를 만든 김세라, 양반출신으로 600여명을 전도하고 학동교회와 숭덕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이 된 전삼덕 등 전도부인들의 활약은 눈부셨고 편견과 냉대는 문제 되지 않았다.
스크랜튼 대부인으로 인해 시작 된 초기 한국교회의 전도부인은 사역을 돕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전도부인 1천2백 15명 중 스크랜튼 대부인이 속한 감리교회 소속이 7백17명으로 60%를 차지하고 있다.
오뉴월 서릿발 보다 무서운 여인의 한을 스크랜튼 대부인은 용서와 사랑으로 극복하는 삶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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