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 미셔너리에 실린 이수정의 편지를 본 가우처 목사는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를 쓴다.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여 달라는 가우처 목사의 편지를 받은 매클레이 전도사는 즉시 한양에 도착한다. 당시 1866년 병인박해를 시작으로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등 조선은 외부로 인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외세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이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로서는 매클레이 선교사가 한양에 선교사라는 개인의 신분으로 입성하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담보 하여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884년 한양에 도착한 매클레이 전도사는 일본에서 이미 교류하며 알고 지냈던 김옥균과 만난다. 혁명가 김옥균은 수 차례 도일하여 문물을 배우고, 세계 사정을 귀동냥 하며 세계정세를 살폈고, 일본 개화가를 비롯하여 서양인을 만나 교류하여 왔다. 매클레이 선교사, 김옥균, 이수정은 일본에서 교류하고 있었던 지기들이었다.
일본으로부터 17만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하고, 일본 개혁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지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갑신정변의 삼일천하의 주역, 일본의 정치 망명객 제1호, 상하이에서 맞이한 비극적인 죽음 등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 김옥균의 선 굵은 삶은 마음의 한쪽 구석에 짐을 지우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김옥균은 조선 개화 자금으로 일본에 가서 조선의 일년치 예산과 맞먹는 300만원을 차관을 요구할 정도로 배포가 컸다. 어느 누구 보다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시대를 앞서간 김옥균의 삶은 조선이 가야만 할 길을 제시하였음에도 역적으로 몰려 생을 마감한 그에게 연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안동 김씨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에 열린 사고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김옥균은 일본 바둑명문 4대 가문 중 하나인 본인방 슈에이와 둔 바둑 기보가 남아 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천연두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 밖에는 치료법이 없었고, 현대식 교육은 전무했던 당시 매클레이는 병원과 학교를 통해 선교를 구상하게 된다. 김옥균을 찾은 매클레이는 고종을 만나 학교와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한다.
김옥균은 기독교인은 아니다. 젊은 날 한동안 절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세계정세와 시대와 흐름을 통찰하고 있었던 김옥균은 조선에 개신교가 절심함을 깨닫고 흔쾌히 이를 수락한다.
고종을 만난 김옥균은 매클레이의 부탁이 윤허 되었음을 1884년 7월 3일 전한다. 그리고 푸트 공사와 통역 윤치호가 동석한 가운데 조선 정부의 제안서 승인이 이루어진다.
개화 사상가 윤치호의 일기에 제안서 승인의 순간을 남겨 놓았다.
“아침 일찍 궐에 들어갔다. 주상께서 미국상선의 내해 항해를 허락하시고 미국인의 병원 및 학교설립과 전신부설을 허락하셨다.”
구한말 조선 선교의 전초기지는 병원과 학교였다. 배재학당과 세브란스 병원으로 대표되는 교육과 의료의 선교역사는 병들고 배우지 못한 백성에게 다가감으로서 아래로부터 복음이 전해진다. 양반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해진 천주교와는 반대였다.
매클레이는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선교를 확정 짓고 “조선 선교는 우리의 책임이며 이를 위해 교사 1명과 의사 1명을 파견해 줄 것을 희망한다.”라고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보고한다.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매클레이 선교사의 보고를 받고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 해외여선교부 메리 스크랜턴을 교육선교사로 임명하기에 이른다.
아시아 개신교 선교 역사는 중국이라고 할 정도로 19세기부터 한때 중국 현지에 선교사 가족이 2,500명에 달할 정도로 인력과 물량이 집중 되어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은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라고 혹세무민했고, 의화단의 난으로 인해 개신교 선교사들이 길거리에 맞아 죽는 등 중국 선교는 사실상 실패했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개신교 선교 역사였다. 조선은 개신교 선교의 최악의 험지였다. 온갖 봉건 폐습과 적폐가 지배했고 지배층의 무능과 탐욕, 지옥 불길도 태울 수 없는 죄악이 넘치는 사회였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극단적 폐쇄사회였다. 조선의 국가시스템이 북한이 되었듯이 북한을 생각하면 간단한 것이다. 따라서 벽안의 코큰 외국인이 주체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선교 활동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오직 성리학, 오직 공자 선비의 나라 군주 고종은 상국으로 섬긴 중국이 몰락하자 마지막에는 러시아를 상국의 대안으로 삼는다.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왕실의 안위를 보장하고자 했던 고종은 니콜라이2세에게 보낸 친서에 일본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대한제국은 4000년의 역사를 가진 독립국가인 반면, 일본은 1200~1300년대 들어 겨우 국가를 수립했다. 일본의 여러 풍습은 짐(朕, 황제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의 나라에서 유래됐으며, 글자도 짐의 나라 백성이 가르쳤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처럼 짐의 나라를 존경했으며, 짐의 나라와 감히 적대적 관계를 맺을 생각도 못했었다”
일본에 중국문자 한자를 전해 준 것을 자랑하고 있다. 전해 주었는지 역사적 사실은 차치하고 1,000년전 2,000년전 한자를 전해 준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이면에는 일본 위협에 따른 문호개방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역량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조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영조가 망원경을 보자 요망하다고 부러트렸지만 일본은 네덜란드 해부학서를 수입하여 직접 인체를 해부하며 해부학서 해치신서를 발간했다.
조선통신사의 기록에 18세기 조선은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보고하고 있음에도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100만채는 있다고 생각되는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굉장하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 10배 이상의 넓이로 구리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 되어 있다. 이 사치스러움은 비정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40Km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 수 있을 까? 한양 번화가의 만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2천년 동안 이렇게 평화봅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1764년 1월 22일 오사카김인겸 “일동장유가” 중에서 -
조선은 일본 오사카가 상국으로 섬기는 중국 북경을 압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리학 원리주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국가 통치 시스템으로 받아 들이지 않겠다는 수구적 결의를 옹골차게 다짐한다.
"왜인들이 만든 절의 불탑과 큰 다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부처 같은 것을 믿는 것은 성리학의 진리를 따르는 우리 조선에선 용납할 수 없지만, 이들 건물의 화려함과 장대함은 이미 우리 조선을 아득히 뛰어 넘었다."신유한 “해유록”-
일본의 발전은 외국과 교역과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국가의 발전은 포기하고 성리학 원리주의를 고수하며 소중화의 사대주의로 연명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도 천명한다.
“나가사키라는 곳에 도착하니, 기골이 장대하고 눈알에 색깔이 있는 서역인들이 해괴한 깃발을 배에 꽂고 잔뜩 정박해 있었다. 왜인에게 물어보니 그들이 '화란' (네덜란드) 과 '서반아' (스페인) 인들이고 '천축' (인도) 보다도 먼 곳에서 왔다고 한다. 모름지기 세상의 질서는 중화이고 중화가 곧 근본인데, 왜인들이 중국은 멀리하고 이렇게 서역 오랑캐들과 통교를 하는 꼴을 보니 비웃음이 나왔다." 신유한의 해유록 중
보빙사와 신사유람단, 영선사를 미국과 일본 중국에 보내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외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급변하며 천지개벽 하고 있음도 조선시대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 유지를 위한 그들만의 세계를 위하여 백성의 고통을 담보로 잔인하리만큼 집요하게 권력에 집착하고 있었다.
하나님 아래 모두가 평등한 개신교 선교는 군군신신부부자자의 성리학 원리주의 국가 조선에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김옥균이 고종을 설득하여 병원과 학교를 세울 수 있게 한 것은 조선 선교사에게 가장 기념비가 될 사건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