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산책) 가곡 ‘떠나가는 배’
6.25 사변이 끝나가는 무렵에 한 사내가 난리를 피해 제주로 들어왔다. 사내는 제주에서 비련의 사랑에 빠졌다. 사내는 유부남이었고 여인네는 처녀였다. 이 사실을 안 처녀의 아버지는 분노했고 강제로 딸을 배에 태워 부산으로 보내버렸다. 사내는 부두에서 떠나가는 배를 보며 이루지 못할 사랑, 떠나가는 사랑을 보며 통곡을 터트렸다.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내의 친구는 이 가슴 아픈 사랑의 장면을 시로 지어냈다. 사내의 친구는 시인이었고 교사였다. 친구는 다시 동료 교사에게 이 시에 곡을 지어 붙이게 했다. 그래서 탄생된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떠나가는 배>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오!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 나오라 애슬픔 물결 위로 오! 한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끊이 사라져
나 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 뜬 바다를 지키련다.
제목은 '떠나가는 배', 양중해 시인이 작시하고 변훈 선생이 작곡한 노래로 이별의 정한과 제주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낸 가곡이다. 이 노래는 지금도 국민에게 사랑받는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2007년 4월에 작고한 양중해 선생은 화북동 출신으로 생전에 ‘파도’ ‘수평선’ 등의 시집을 남긴 시인이기도 했으며 평생을 교육에 몸 바친 교육자이기도 했다.
양중해 선생은 제주문화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육지부 문인들과의 교류로 초기 제주문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에 양중해 선생과 변훈 선생은 제주제일중학교에 동시에 교직을 잡고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래서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할 수 있었다.
양중해 선생의 친구로 나오는 사내는 국민 시인 박목월이었다. 박목월은 박두진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교과서에도 그의 많은 시가 실려있다. 박목월과 사랑에 빠지는 처녀는 일부에서는 제주 처녀로 알고 있었으나 제주 처녀가 아니라 박목월 시인을 따르는 여대생이었다. 한편으로는 박목월 시인의 제자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박목월은 피난을 왔다가 제주 처녀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로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박목월 시인은 자식 셋과 부인이 있는 38살의 유부남이었고, 처녀는 20대 초반의 묘령이었다. 박목월 시인이 ‘H양’이라고 알려진 처녀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은 피난처인 대구에서 그가 기숙하던 집의 딸로서 명문대생이었다고 한다. 시인과 문학소녀의 만남이었다. 환도 후에 박목월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우연히 다시 처녀와 재회하게 되면서 처녀의 가슴에는 사랑의 싹이 트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이를 눈치챈 박목월 시인은 후배를 시켜 이를 말리게 했으나 처녀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사라졌던 박목월 시인과 처녀는 제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 거처를 잡았던 곳은 제주시 칠성통 부근의 동화여관이었다. 박목월은 대학에서 시간 강사 자리를 잡았고 여관방에서는 동료 지인들이 모여들어 자주 시 낭송회가 열렸다고 한다. 처녀는 박목월 시인을 선생님이라 호칭했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자주 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박목월은 처녀를 업고 병원에 다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멀리서부터 이 여관으로 한 손님이 찾아왔다. 박목월 시인의 아내 유익순 여사였다. 부인은 시인과 처녀의 겨울옷 두 벌이 든 보따리와 생활비가 든 돈 봉투를 놓고는 말없이 가버렸다. 부인의 이런 행동에 박목월은 잘못을 뉘우치게 되어 처녀를 돌려보내고, 서울로 돌아간 박목월은 바로 집으로 귀가하지는 못하고 두어 달 정도 하숙 생활을 하다가 귀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박목월은 부인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이런 착오는 누군가가 박목월 시인의 사랑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박목월 시인의 체면을 고려한 구성으로 보여진다. 박목월을 서울로 돌아가게 할 결정적인 사건이 그 후에 다시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의 도피가 길어지자 다시 멀리서부터 한 손님이 찾아온다. 이번에는 처녀의 아버지였다. 처녀의 아버지도 쉽게 이들을 갈라놓지 못할 정도로 둘의 사랑은 깊었다. 일설에는 처녀의 아버지가 박목월을 나무에 묶어놓고 매질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박목월 또한 이별을 완강하게 거부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처녀의 아버지도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지는 않으리란 것이다.
처녀의 아버지가 찾아온 3일째 되는 날에야 비로소 이별은 결정된다. 그만큼 이별은 힘든 결정이었다. 가을에 제주에 와서 떠날 때는 유채꽃 피는 봄이었으니, 6~7개월 정도 제주에 머문 셈이었다. 처녀가 이도하는 부두에는 박목월 외에도 양중해 선생과 여관집 아들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시인과 처녀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박목월은 떠나가는 부두에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를 처연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양중해 선생은 떠나가는 배를 쳐다보던 박목월 시인의 처연한 표정을 보며 그 아픈 사랑의 시 ‘떠나가는 배’를 썼다. 이별의 아픔을 직접 겪었던 시인도 그 아픔을 시로 만들어 내었다. 박목월 시인의 '이별의 노래'는 그 아픈 사랑의 결과물이다.
<이별의 노래>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도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박목월은 백발이 된 말년에 옛 사랑의 주인공의 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숙제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지 모른다. 그 자리에서도 간단한 인사 외에 둘은 말이 없었다고 한다. 붉은 홍차 한 잔과 담배 한 대, 그리고 다시 찾아온다는 인사의 말은 영원한 작별의 말이 되었다.
‘떠나가는 배’는 전쟁통이라는 유폐의 시간에 불안한 영혼들이 제주도라는 유폐의 땅으로 모여들어 서로 따듯이 몸을 부비며 만들어진 노래다. 박목월은 78년, 작곡자 변훈은 2000년, 작시자 양중해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 노래의 주인공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지만 노래는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이별의 정서에는 기차역보다는 부두가 어울린다. 부두의 이별은 순식간에 오지 않고 천천히 찾아오고 천천히 떠난다. 배가 부두를 벗어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별의 아픔은 천천히 그러나 아프게 별리자의 가슴을 후빈다. 사람의 삶 중에 가장 뜨게운 게 사랑이고 사랑의 일 중에 가장 뜨거운 것이 이별이다. 이별의 정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가 바로 ‘떠나가는 배’이고, 이별의 장면에 가장 어울리는 곳이 바로 제주 부두이다.
‘떠나가는 배’의 노래비는 제주부두와 탑동공원에 서 있다. 제주부두의 노래비는 아직도 그때의 아픔을 잊지 못하는 듯 검은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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