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기독교관을 비판함(45)
도올은 교부 터툴리안Florens Tertullianus의 유명한 명제인
“불합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를 트집하면서 여기에 ‘불합리하기 때문에’가 기독교 신앙이 엉터리 내용이기 때문에 억지로 믿게 하려고 이 명제를 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수운에게는 이런 불합리가 존재할 수가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종교에서 ‘믿음’이란 것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도올의 <동경대전>2,p.187,188)
여기서도 도올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터툴리안의 그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도그마가 부실하거나 미흡해서가 아니라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를 전제한 명제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형식을 믿음으로 정초한다. 이성은 초월자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우리 인식 능력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말하듯 고작 현상계에 국한돼 있다. 하나님은 초월적 주체이시고 영으로 계시는 절대자존자 되신다. 현상계 밖의 차원을 알 수 없는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 오성의 범주 안에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다. 그 계시의 내용에는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초월자요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의 계시가 당연히 초이성적 내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의 한계 내에서 보는 한 불합리 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홍해를 건너고 태양이 정지되며 요단강이 마르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지는 역사를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가? 인간 이성이 천지창조에 참여했었나? 아니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고 객체이다. 지구란 별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다. 인간중심적 사고는 기독교신앙이 아니다. 만일 우리 이성이 가진 인식능력에 딱! 들어맞는 거라면 그건 수학이나 물리학 등의 과학적 영역일 수 있다. 그건 그냥 현상계의 스토리일 뿐이다. 우리의 유한성을 초월해 계신 분의 계시에 대한 응답은 믿음이다. 믿을 내용이 아니고 쏙쏙 이해가 되는 내용이라면 이 땅의 것이요. 피조물의 한 파편에 불과할 것이다. 이성으로 납득 못할 내용이니까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지 과학, 수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라면 필자부터도 안 믿겠다.
터툴리안의 명제는 정확하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성경에 불합리한 내용이 없고 인간의 범주적 인식구조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믿거나 신뢰할 게 못 된다. 그건 시공간 안에서 부패하고 죽어가는 것들의 일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성에 합치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계시에는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고 성령으로 성도의 내면에 내주하시고 감동감화 하심으로 믿게 하신다.(롬8:16) 우리 이성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이 보증으로 우리에게 계셔서 우리 이성이 믿도록 인도하시는 역사다.(요14:16,고후5:5) 그래서 성령 안에 있는 이성은 초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도 아멘! 하게 된다.
교회신앙은 계시신앙이지 인간이 도를 닦아서 깨달은 것을 추종하는 그런 체계가 아니다. 인간이 셀프 깨닫거나 지혜를 얻었다든지 하는 것에 궁극적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게 교회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은 시작에서 끝까지 하나님 중심인데 그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내용을 믿음으로 붙잡고 천국까지 간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요 진리인 것이지 모두 합리적이고 잘 이해되는 것들이라면 그것은 그냥 세상의 지식 나부랭이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히11:1) 도올은 믿음에 대해 오해 없기 바란다.
도올이 이원론적 사유라면서 성경의 하나님을 비난하는 투는 곳곳에 산재한다.
“...본질을 말하고 본체를 말하고 초월자를 말하고 천당을 얘기 하고, 불변을 신봉하며 인생은 부운(뜬구름)같이 허망한 것이라 말하면서, 오직 영원불멸의 진리로 향해야 한다고 구라치고 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이 이 간판 하나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라고 외친다(p.208) 그러면서
“하느님을 숭배하여 떠받드는 제식이란 있을 수 없다. 수운은 하느님을 객화시켜 존재자로서 숭배한 적이 없다” 고도 한다.(p.210)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본질과 본체, 불변, 천당, 초월자, 영원불멸 같은 궁극적 질문들을 외면할 수 없다. 도올이 이원론이라며 미워하는 이 개념들은 이성 가진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주제들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이에 대한 답이 없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인생살이를 한단 말인가? 초월자이시고 영원불변하시며 자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거나 천당과 지옥을 말하면 대놓고 거부반응 보이는 자들이 자유인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원론을 거부한답시고 전인구원이나 사회구원을 외치며 천당 지옥과 내세 영혼구원과 심판을 무슨 신화나 미신같이 여긴다. 하지만 하늘과 땅은 다른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은 더욱 다르다. 육체가 있으면 영혼이 있고 물질적 세계와 영적 세계는 차원이 다른 세계인데 이를 무시하고 모든 걸 하나로만 파악하려 들다가는 범신론 또는 유물론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도올이 거부하고 비난하는 그 내용들을 성경은 모두 답하고 있다. 교회신앙은 영원을 추구하고 천국을 사모하며 인생의 궁극적 목적과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 구원 받은 영혼이 천국소망 하는 것은 성경신앙의 요체다. 영원불멸하는 진리 추구를 “구라 치고 있는 거”라며 먹고살기 위한 사업 정도로 여기는 건 신앙을 잃어버린 영혼의 허무감에서 나오는 탄식소리일 것이다.
도올은 그가 숭상하는 기氣철학이나 주역 또는 노장사상 등에 구라 치고 있는 게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진리 외의 모든 지식과 구도행위에 ‘구라’가 녹아있을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철학을 헛된 속임수의 일종이라고 하신다. 이 철학이란 범주에는 인간이 땅에서 만들어낸 모든 지식과 정보들이 포괄된다.(골2:8) 도올은 세상지식들과 구도행위, 각종 종교들 안에 잠재하고 있는 ‘구라’들을 찾아내고 이를 저격해야 지성적 주체자로서의 몫을 감당하는 것이다. 엉뚱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비난할 게 아니고!
“수운이 하느님을 객화客化시켜 존재자로서 숭배한 적이 없다.”
고 한 말도 도올의 논리를 불신하게 만드는 소리다. 수운은 상제라는 신을 만나 존재자로 숭배 같은 걸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 만년 동안 기다렸다 만났다느니 부적을 먹게 하는 등 객화 된 존재로 섬기지 않았냐 말이다. 어디까지나 객화 된 존재자로 상제를 섬긴 것을 도올이 얼마나 많이 강의 했는가? 수운이 상제를 만나 영감을 받고 21자의 주문을 만들었다고 해놓고 왜 객화 된 존재로 숭배 한 적이 없다고 하는가? 도올은 자기 말에 모순을 자주 일으키고 있다. 자신이 한 말도 부정하고 있으니 무슨 돌변인가?
도올은 주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데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복음서 기자들이 그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주예수의 이적을 사용하였지만 수운에게는 그런 게 없다면서 그럼에도 (수운을) 주 예수 이상의 하느님의 기화현신氣化現身이란 것을 선포해야 한다. 고 하였다.(p.226)
말하자면 복음서 저자들이 주예수를 선포하기 위해 기적을 이용했다면서 그런 게 없는 수운을 주 예수 이상의 존재로 선포해야 한다는 논지다. 이야말로 도올의 커다란 착각이다. 수운은 그냥 인간이다. 혁명을 도모했던 투사였을 뿐이다. 주 예수는 성삼위일체 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신 분이 구주예수님이시다. 도올이 아무리 무엄하기로서니 참 하나님이신 구주를 죄인인 사람과 비교, 논한단 말인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모두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대적한 원죄(original sin)의 소유자들이다.
이 땅의 어떤 인간도 이 원죄를 벗은 자 없다. 오직 동정녀에게 나시고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만이 원죄 없으신 참사람 되신다.(마1:23) 천상천하에 주 예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참 하나님이 참사람 되신 사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킬 화목제물도 주 예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화목제물로 하여 인간을 만나시고 구원하신다. 수운 아닌 그 누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대행하거나 모방할 자 없다. 도올이 거룩하신 구세주를 경홀히 여겨 수운과 같은 인생 중 하나로 논하려는 처사는 마귀가 시키지 않고는 못할 일이다. 도올은 사탄의 정체를 바로 인식하기 바란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도 가장해 나타나고(고후11:14)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된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후3:4)
도올이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험담할 수 있는 것은 사탄의 미혹과 그 영향을 이기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기적을 무슨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조작품인 것처럼 말하는 습관 폐기해야 한다. 도올은 사도들이나 복음서 저자들이 주예수를 미화하기 위해 기적설화를 만들어 냈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착각일 뿐이다. 성경의 내용은 일점일획도 오류나 인간적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진리자체다. 구원 받지 못하고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성경이 믿어질 수가 없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연인이 보면 성경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도올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 성령의 감화가 있는 영혼이라면 이런 주장은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도올의 성경관은 그냥 세상 사람들, 그 중에도 악의를 품고 교회와 성경을 해치려는 자들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현재 도올의 의식을 형성한 배경에는 청소년기 함석헌 옹과 그 주변인들에게 영향 받은 게 있다. 함 옹이 천안에 ‘씨알농장’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도올은 어려서부터 이 농장에서 함옹을 만나 훈도를 받는다. 함옹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칸조오內村鑑三의 영향을 받고 무교회無敎會 신앙을 배운 분이며 성경신앙에서 멀리 나간 분이고 나중에는 종교다원주의 발언을 서슴없이 하신분이다. 그는 “모든 종교는 구경究竟에서는 하나다”고 하여 종교다원론의 선구자가 된다.(<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1989 p.395) 이는 모든 종교를 연구 하다 보면 끝에 가선 하나다“라는 선언인데 함옹의 그런 선언은 한국 신학계에 다원주의 문호를 열어낸 외침이었다. 그 함옹이 청소년기의 도올을 향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만 가능한 것이다”라 했다고 회고 한다.(위 도올의 책 p.248)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요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고 흔한 선생이나 도덕가로 격하시키는 망령됨인 것이다. 누구나 그리스도라면서 복음진리를 희석시키고 인간을 신으로 격상시켜 심판받게 하는 사탄의 장난이다.
아울러 함석헌 옹의 열열한 팬인 민중 신학자 안병무 교수는 “ 독일에서 아무리 심오한 대가들의 강의를 열심히 들어도 함석헌 선생 밑에서 공부하는 것만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라 했다고 한다.(위, 같은 페이지) 도올의 운명이었을까? 그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자유주의적 다원가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 어린 시절 머리에 박힌 반성경적 의식을 가진 채 자유주의의 원산지인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 성경비평학을 배웠을 터이니 신앙이 배겨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의 도올을 만들어낸 배경에 자유인본주의 신학도들과 그 문화가 있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도올이니까 감히 성자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인간 최 수운보다 못하게 취급하려고 안달인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 참 하나님이 참사람으로 오신 유일한 구주는 주예수 오직 한분이시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인생은 원죄를 짊어진 죄인들이다. 죄인들로서는 구원이 이뤄질 수 없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한다.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는 창세 이래 원죄 없으신 유일한 구주이심을 성경이 증거 하고 있다.(히4:15)
도올은
“ 서양의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관심이 없다. 일차적인 그들의 관심은 인간의 구원, 개체적 삶의 존중이 아니라, 에클레시아(교회),즉 회중의 확대이며 교회권위의 확충이다. ......예수교 사람들의 전도행위를 보면 그들은 인간의 현세적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세상의 종말에 한사람이라도 더 참여할 수 있도록 그 동반자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의 전도는 같이 살자는 전도가 아니라 같이 죽자는 전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의 모든 종교는 죽음의 종교이지 삶의 종교가 아니다.....”
라고 한다(p.253) 도올의 이 말은 횡설수설이다. 기독교가 인간의 구원에 관심이 없고 교회권위의 확충에만 관심한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구원의 복음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고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심은 철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66권 성경은 모두 구원의 복음으로 짜여있다. 세상의 종교들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지만 안 되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은혜로만 구원 역사가 이뤄진다는 게 성경의 복음이다.
도올이 “서양종교는 인간의 구원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아마도 구원의 복음에 내포된 천국과 재림 심판 등의 도그마에 대한 저항감의 표현일 것이다. 즉 도올이 보기에 교회 신도들은 천당에 가는 것과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 구원받는 것을 구원의 본질로 여긴다는 인식이다. 이를 두고 “같이 죽자는 전도”라고 나무라고 있다. 하지만 이 복음이 담지하고 있는 구원의 콘텐츠는 지극히 복되고 당연한 필연성이다. 인간의 고통은 죄와 사탄마귀 죽음으로부터 온다. 이것이 인간실존의 비극을 이루는 원천이다. 구원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죄와 사탄과 죽음이란 원수를 두고는 참 평안과 행복은 물론 삶의 의미와 가치, 목적추구를 할 궁극성이 없다. 구원이란 이 문제를 해결함이다. 죄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사탄의 참소가 없어야 하며 죽음이란 원수로부터 해방되어 영생 얻어야 한다. 기독교회의 복음은 이 문제들을 원천적으로 해결함이다. 즉 이 문제들의 해결이 구원인 것이다. 도올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같이 죽자” 라고 이해한 것은 사회구원론 자나 인본주의자들이 초월적인 것 모두 배제하고 땅의 것, 유한 한 것들 속에서 안 죽고 견뎌보려는, 소위 현세주의 적 구원관에서 나온 발상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 있으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구원과 심판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신다. 수운 동학교의 구원론이라면 혁명을 통해 지상낙원을 이루는 꿈 일 텐데 그건 마르크스주의의 아류는 될지언정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구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에 소망을 둘 수밖에 없는 피조물이요 유한자다. 다른 구원의 길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죄인들이다.(행4:12) 성경은 구원의 복음이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있다고 한다면 모방하고 미혹하는 것들일 뿐이다.
도올은 수운의 구도행각을 칭송하는 중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My God, my God, why hast thou forsaken me?"
를 언급하면서 예수는 배신감에 죽었고 수운은 확신과 희망 속에 죽었다며 예수가 느꼈던 배신감을 승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노예처럼 암송할거냐고 다그친다.(p.262) 여기서도 도올은 오해에 근거한 선동을 하고 있다. 위의 십자가상 외침은 성경을 응하게 하신 일이다. 주님 오시기 천 년 전에 다윗왕은 오실 메시야께서 죄인을 대속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고난 받고 죄인을 대신하여 버림받게 되실 체험을 그의 삶을 통해 예언 했다. 이것이 시편 22편이고 이 시는 메시야 예언시 중에도 메인에 속한다. 그 1절을 응하게 하신 외침이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 다니“
인 것이다.(마27:46)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옷이 제비 뽑혀 나눠질 것까지 예언됐다. (시22:18) 우리 인간의 죄를 지시고 우리가 받을 고난은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받을 버림받음을 대행하신 역사이지 배신감으로 외친 말씀이 아니다. 십자가상에서 여섯 번째 말씀이 ”다 이루었다“(요19:30)인데 어떻게 배신감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
그리고 여기서도 도올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며 나무란다. 주 예수께서 느꼈던 배신감을 승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또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노예처럼 암송할거냐고 윽박지른다. 케리그마가 주예수의 배신감을 승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은 도올의 망상에 기인한 것이다. 주님은 배신감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에 따라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구원역사를 다 이루셨다. 사도들의 케리그마는 모두 현장 목격자들로서 성령의 감동과 계시를 따라 일점일획도 착오 없이 선포하셨다.
도올이 교회신앙 파괴를 목적해 쏟아내는 말들은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들이고 악감정을 토대로 한 자타에 해로운 담론이다. 도올은 같은 페이지에서 자신의 체력의 한계와 피곤을 말하면서 자신의 ”청춘은 한계에 도달했나 보다“고 토로한다. 그렇다! 인간은 죽음을 정복할 수 없는 유한자이고 그냥 피조물일 뿐이다. 도올이 자신의 한계를 말하듯 인생이 그러한 한계상황에 던져진 실존이다. 그러므로 두려우신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의 부르실 날에 대비해 하나님 말씀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핍박한 것 모두 천상에 기록된다. 도올은 성경 전도서 12장 말씀대로 청년의 때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곤고한 날이 이르고 아무 낙이 없어지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 설 정 해야 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 하시리라.“(전12:13,14)
도올은 또
“수운은 우리나라 종교문화의 원점이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실제로 예수에 뿌리를 두었다기보다는 ,수운에 뿌리를 둔 것이다. 동학의 발전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발전한 신흥종교인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를 노장철학에 기반 하여 해석하곤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는 수운의 정신으로 회귀하여야 한다. ...갈릴리 예수의 원형도 우리는 수운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어찌하여 내 몸이 이리도 아프고 괴로울꼬!”
하였다.(p.264) 이 무슨 망발인가 한국의 기독교가 수운에게 뿌리를 둔 것이라니? 우리나라 종교문화의 원점이 수운이고 예수의 원형도 수운이다? 모든 종교는 수운정신으로 회귀해야하고 갈릴리 예수의 원형도 수운에게 찾아야 한다? 이야말로 도올의 지성과 판단력을 의심케 하는 괴설이다. 왜 이렇게 이상한 말씀을 골라가면서 하시는지 이 멘트의 끝에 “어찌하여 내 몸이 이리도 아프고 괴로울꼬!” 한 외침이 영혼 속마음에서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로 온 고통은 아닐까? 물론 누구나 몸도 마음도 아프고 괴로운 게 인생살이지만 도올은 너무나 하나님 영광을 훼손하기에 하는 말이다.
수운이 어떻게 종교의 원점이 되며 2 천 년 전 갈릴리 예수의 원형이 어떻게 수운정신이란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주 예수는 천지만물은 물론 수운의 영혼까지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요1:1-3,골1:16) 어떻게 죄인이고 인간이기만한 수운정신이 종교의 원형이란 말인가? 종교의 원점이 수운이다? 그 상제라는 이상한 영과 접촉해 부적을 삶아서 먹는 등 괴이한 액션 주인공이 종교의 원점? 도올께서 이런 주장 하시면 지성자체를 의심 받을 것이다. 수운과 같은 투사는 많고 많았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이 땅에 오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참사람이시다.(빌2:6) 그리고 함석헌 옹은 앞서 말했듯이 한국 근현대사에 종교다원론을 앞서 주창한 분이셨고 그분의 종교관은 혼합종교 그 자체였다. 그분이 노자장자 강의하며 그리도의 유일성을 훼손했다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For who is God, except the Lord?
And who is rock, except our God? (시18:31)
영광 받으실 성삼위 여호와 하나님과 유일한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 세상에
소망과 의미, 인생살이의 궁극적 가치를 찾을 길이 없다.
이 큰 구원의 복음과 은혜의 진리를 거부하거나 비난하는 영혼이야말로 불행한 인생일 것이다.
안티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