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기독교관을 비판함(33)
도올은 주님이 어린아이를 사랑하신 말씀인 막10:13-16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무소유의 심볼리즘이다.“
라고 했다(<도올의 마가복음강해>p.497) 어린이와 무소유가 무슨 관계일까 주님은 당시 여성과 어린이를 경시하던 문화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사 어린이를 축복하시고 사랑하셨다 어린이가 무소유의 심볼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무소유는 법정스님의 전용어이기도 한 전형적 불교 용어인데 왜 불교용어를 마구 끌어다가 성경과 조합 하려는가? 그게 타당키나 한가? 공연한 정신 낭비다
어린이는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일 뿐 소유하고 무관하다. 아예 소유를 모르는 어린이를 모델로 산다? 그럼 생산 활동도 포기하고 산속에 들어가 도나 닦으란 말인가 그럼 소는 누가 키우고 공장은 누가 돌리나? 그래서 불교는 퇴행을 요구하는 허무종교인 것이다 무소유를 주장했던 법정 스님은 진짜 무소유로 사셨나?
지만원 박사에 의하면 무소유의 대명사 법정스님도 수십억 원의 인세를 받았고 신도들로부터 각종 보시도 받았으며 그가 다니는 곳에는 비서들이 있었고 보시자들도 있었으며 자유자재로 여행을 다니면서 호화여객선도 즐겼다고 한다( 시스템크럽 2010.5.16.일자) 그러면서 지만원 박사는 법정이 말하는 무소유라는 것은 거짓이요 그의 통장에 돈이 많았고 무소유란 말은 그저 불교의 가르침을 선동적 용어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지만원의 같은 글)
이렇게 무소유란 게 허망한 것인데 이런 불가능한 요구를 도올이 성경 관련 남발하고 있다. 지만원 박사에 의하면 그 유명한 법정 스님마져 무소유에 실패했는데 범부중생이 어떻게 무소유하란 말인가 소유는 자유와 밀접하다 소유의 자유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게 자유민주주의고 이것을 뺏고 자유마저 박탈하는 게 공산사회주의다 도올은 아무 현실성도 없는 무소유 같은 것들 성경에다 들이대는 행위 (기독교인 중에는) 알아줄 사람 없으니까 참고하기 바란다
.
도올은
“무소유에 대한 미래적 보상을 필연시 한다는 것은 인도인의 윤회사상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고 한다(도올의 책 p.502) 이것은 아마 막10:17-31의 부자 청년 기사를 말하다가 29-31절의 금세와 내세에서의 보상을 말씀하신 것에 대한 해석인 모양이다 이 또한 도올의 무모한 생각이다 윤회사상이 왜 나오는가?
성경에 윤회란 일점일획도 없다 그리고 이 본문은 29절에서 “나(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보상을 백배나 받고 핍박도 겸하여 받되 영생마저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에 무슨 윤회가 있단 말인가? 성경에서의 내세란 천국생활과 지옥형벌이다. 무슨 사람이 동물 되고 짐승이 사람으로 나온다는 등 허망한 얘기 성경에는 전혀 없다. 도올은 주역이나 기氣 철학 또는 윤회 같은 거 논하려면 그것 하는 동네에 가서 놀든지 해야지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성경에 이상한 것들 끼워 넣으려고 하는가? 그것도 무슨 연관성이 있거나 학문적 연구의 가치라도 있는 것이면 혹 모를까 아무 상관도 없는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집적대냔 말이다 그리고 도올은 이 부자청년 기사를 설명하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교회를 따른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십자가를 메는 새로운 삶을 산다는 뜻이다.”
라고 반교회 선동 빼놓지 않는다(p.501)
도올은 왜 이렇게 교회에 대한 증오를 멈추지 않는가 뭐 교회 때문에 피해라도 입었나? 좌파 아이콘 되면서 안티교회 됐나? 어머님의 새벽기도로 자란 아들이 왜 교회를 이토록 미워하나? 자유주의신학 접하면서일까?
도올선생은 교회를 미워하는 만큼 마귀와 가까워지는 것 유념하기 바란다. 마귀는 지상에서 교회 없애려고 발광한다. 그래서 마귀와 공산주의가 반교회 동맹인 것이다 성삼위 창조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며 교회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
교회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곧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일 수밖에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엡1:23) 신부이다(고후11:2) 누구든 자기의 몸과 신부를 미워하거나 핍박하면 참지 못한다. 누가 자기의 몸이나 아내를 괴롭히는데 그냥 두겠나? 그래서 역사상 교회를 핍박한자들의 심판이 이어져 왔다 도올선생은 성경 비난 끊고 교회신앙 회복하고 삼가 조심하여 복된 미래가 될지언정 심판받는 일 없기 바란다.
그리고 도올은 교회 나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메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게 주님의 뜻인 양 말했는데 공허한 얘기다 교회 없이 어떻게 십자가를 메는 새로운 삶을 산단 말인가 세상살이는 몰라도 십자가를 메는, 즉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삶을 사는 일은 교회 없이 안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인데(롬10:17)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들어가고 구원 받으며 십자가 메는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도올은 교회는 가지 말라면서 십자가는 메라고 한다. 모순이요 불가능한 주문이다 혼자 도를 닦거나 주역공부 같은 것으로 십자가 멘다? 역사상 교회 없이 믿어보겠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끝이 좋지 않았고 신앙 실종이었다. 우리나라에도 함석헌 옹을 비롯한 무교회주의가 있었으나 함 옹만 하더라도 종교다원론으로 기울어졌으며 무 교회 시도 하던 분들 사실상 해체되었다 봐야 할 것이다.
도올은 또 주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지 않았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예언은 사전 예언이 아니고 사후예언a prediction after the event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예언이 사건 이전에 주어진 게 아니고 사건 일어난 후에 그것을 미화하기 위해 미리 예언 한 것처럼 기록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런 예언들은 하나의 문학양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부활절 이후에 교회의 담론이라고 하며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 형 받을 것 예언하시지 않았으며 그런 디테일은 알았을 리도 만무하다고 했다(p.505) 그러니까 주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 형 받으실 것을 알지도 못하셨고 그런 말씀하시지도 않았으며 부활에 대해서는 더욱 말씀하지도 않으셨는데 교회가 후에 이를 각색, 기록했다는 게 도올의 얘기다
그런데 도올은 같은 책에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예수는........사람의 아들로서 그 실존적 결단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 할 것이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이 한 목숨을 인류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물로 바치겠노라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
라고 해 자신이 앞에서 한 말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p.510)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강연에서 한 말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불과 5페이지 앞에서 한 자신의 말을 뒤집고 있다 앞에서는 “주 예수는 십자형이나 부활을 알지도 못했고 말하지도 않았다”해 놓고 다섯 페이지 뒤에서는 “수난과 부활을 직접 말씀하셨다”고 하니 도올은 아무래도 마음속이 좀 혼란한 모양이다
주님께서는 마 17;22,23 막9:30-32 눅9:44에서 수난과 부활을 친히 말씀 하셨다 성경의 기록을 모두 후에 교회가 만들어낸 얘기인 것처럼 말해놓고 또 어떤 데서는 달리 말하는 등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는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스토리들로 요란한 토크다 성경은 영감 된 계시이다 인류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것이며 일점일획이라도 오류 없는 말씀이다 성경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 통로요 구원의 메시지다.
마귀가 파괴하려는 첫째 번 것들이라면 성경과 교회를 파괴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유일 구주되심과 삼위일체 되심을 불신케 한다. 인간이 성경을 비난 하거나 교회를 없애려 하고 주예수의 구주되심과 삼위일체 되심을 훼방하고 다니면 이는 마귀의 일을 대행하는 셈이 된다. 자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말이다
성경이 도올의 말대로 구라가 많고 공동체들이 수군거리며 만든 것이고 도마책과 큐Q란 것에서 따온 것들이고 신뢰할 수 없는 문서의 집합이라면 이런 책을 이천년간 믿어왔으며 지금도 수십억의 인구가 믿고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지구촌 전역의 언어로 번역된 것과 서양사에 끼친 기독교와 성경의 엄청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양지성사는 찬성이든 반대든 기독교와 성경의 역할을 부인 못 한다 기독교와 성경이 없는 세계사는 생각할 수 없다
성경이 도올의 말대로 신뢰할 수 없는 잡동사니라면 그 수명과 영향력이 지속적이며 거대할 수 있는가 도올이 성경 붙들고 씨름 하는 자체가 성경이 불변의 진리임을 웅변 한다 성경이 그렇게 가볍고 신뢰할 수 없는 문서라면 왜 도올은 마가복음 하나가지고 600여페이지나 써 대는 수고를 하는가? 성경을 까고 무슨 각광(spotlight)을 받아보려 그러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성경은 도올 같은 사람이 흔든다고 흔들릴 수 없는 초강력 신적 파워이기 때문에 성경과 싸우다 보면 영육간 피곤하고 망가져갈 수 있다 성경에 대드는 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과 싸우는 행위다 물론 도올의 탐구심과 진지한 열정은 좋다 목회자 신학도들 중에도 그런 파토스 찾기 어렵다.
하지만 성경에서 계시와 진리를 찾고 은혜 받기 위해 탐구하는 것과 비난을 위한 탐색과는 다르다 후자는 저자이신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만용이며 이단사이비화 하는 코스다
도올은 막12:28-34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편적 선의지(guter Wille)에 나를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하나님께 절대 복종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비운다는 것이며 나의 이기적 아상我相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결국 무아無我이며 나의 십자가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수교정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마가복음서를 쓴 가장 근원적 동기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다(p.549) 도올의 이 말을 보면 그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드러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보편적 선의지에 나를 전적으로 맡기는"거라는데 이게 오해가 아니면 뭔가 선의지(guter Wille)란 Kant의 말대로 마음속에서 옳다고 믿고 따라서 행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의지, 즉 경향성傾向性에 따르지 않고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의지를 말할 것이다. 이건 도덕준행을 종교행위로 착각한 발상이다 도덕은 신앙의 결과물일지언정 종교행위의 궁극성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란 글자그대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행위다 도덕은 그 사랑행위 다음에 따라오는 과정이다 도올의 이런 생각은 도덕을 종교의 본질로 여긴 Kant의 종교관은 될지언정 神을 만난 영혼의 삶은 아니다 마가복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보편적 선의지를 실행하는 거라고 말하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나?
만일 도올의 해석대로 하자면 이렇게 말씀했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도덕적 이성에 충실 하는 것이다. 너희 마음속에서 나오는 선의지를 행해야 하느니라.” 그러셨어야 맞는 거 아닌가? 주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도올의 말대로 하자면 첫 계명은 없애고 둘째 계명을 행하되 도 닦고 수양하면서 선의지를 행하라는 뜻이 되고 만다. 도올은 종교행위를 도덕이나 내면 정화의 트레이닝 정도로 이해하는 모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이 땅에 오신 하나님Jesus:The presence of God on Earth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구주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영혼이 예배와 말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이지 선의지 계발로 되는 거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1계명인 막12:30을 말씀하실 때는 그 속 함의에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심이 내포돼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 도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선의지善意志를 행하는 것이란 말은 동양식 도 닦음을 훈계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려면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傾向性을 제거해야 선의지를 행 할 텐데 그게 가능하려면 산속에 들어가거나 절간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악의지惡意志를 죽여야 할 것 아닌가. 그런다고 악이 죽고 선의지가 발산되느냐 아니다! 평생해도 안되는 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구주예수님 보혈의 은혜를 통해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을 통해 선의지가 나올 수 있으나 그마져 완전선이 거나 오류 없는 인생으로의 완성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도 자주 실패 한다 그만큼 악과 죄의 뿌리는 깊은 것이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이며 믿음으로 구원이고 택하심에 의한 선물로서의 구원인 것이다 도올은 불가능한 썰로 성경 도그마를 해치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선의지 구현이 하나님 사랑이란 말은 뜬구름 잡는 허상이고 바다 한가운데서의 쟁기질 하겠다는 격이다
게다가 도올은 하나님 사랑하는 일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며 아상我相을 포기하는 거라는데 이 또한 맹물 같은 소리의 반복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게 뭔가 도올은 마음을 비워본 적 있는가? 마음은 인간생명체가 살아 움직이는 근본 메커니즘이다 그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생명현상을 중지하라는 거다 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척 도를 닦아서 어느 정도라도 비워진다면 사탄마귀의 영이 들어와 장악하는 게 마음의 실상이다
마음을 비울 게 아니라 주 예수 믿고 구원받고 성령의 충만을 통해 마귀를 물리치고 죄와 싸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아상我相을 없애고 무아無我가 되라는 것도 허황한 스토리다 도올은 무아가 돼 본 적이 있나? 무아라면 내가 없어지는 건데 (무아가 됐다면) 이 땅에서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도올은 지금도 큰 소리 치며 벙커1인지 하는 데서 아상我相을 뽐내고 있다 無我라는 건 백성들 홀리는 얘기다.
어떻게 살고자 애쓰는 범부중생이 생업 포기하고 앉아서 무아지경 되려고 부처에 빌고 아상이 나타나면 회초리로 때리면서 고행하라는 말인
가? 아니! 그게 그런다고 정말 무아지경이 돼 무슨 신선이라도 되면 모르지만 필자의 과문 탓일까 일평생 살면서 무아지경無我地境에 이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 거 했다면서 우주의 기를 받았느니 해탈했느니 만유와 하나 됐느니 주역에 통달했느니 하는 사람들 어쩌다 보면 정신이 몽롱했거나 사기성이 있다든지 일상에서 일탈된 자들 다반사다. 그러면서 도올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위한 무아無我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예수교정신의 핵심이고 이것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근원적 동기라고 했다(p.549)
도올은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건가 마가복음이 이웃사랑위해 무아지경無我地境에 이르라고 기록됐단 말인 모양인데 건강한 지성이면 아무리 신앙이 없다 기로서니 이런 무책임 낭설 못 한다 마가복음이 무아無我 훈련용이라고? 이런 얘기는 불교 법당에서나 할까 성경가지고 할 얘기는 아니다 도올은 차라리 절 같은 데 가서 주역과 무아지경 도법을 강설하든 해야지 왜 성경과 교회가지고 난리 법석 대는가. 복음이나 성경은 물론 그리스도의 말씀에 무아지경에 이르란 말씀 없다. 이건 순전히 도올의 고약한 창작일 뿐이다
도올은 막13장을 논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언을
“단편으로 존재하던 교회 내의 여러 이야기를 마가가 긁어모아 예수의 성전담화들 이후에 편집한 예언담론으로 보인다........과연 예수가 성전파괴와 예루살렘도시의 재난을 예언 했을까? 예수가 아무리 대단한 예언가라 할지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허물고 있다(p.563) AD70년의 성전파괴 예언은 단지 성전파괴와 예루살렘 수난만을 말씀한 게 아니고 종말기의 사회상과 심판에 관한 말씀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는 마24장과 눅21장의 병행구절이기도 한데 중요한 종말담화이고 역사적으로 70년에 로마군에 의한 성전 파괴사건에 대한 예언은 성취되었고 종말에 있을 예언들은 성취를 앞두고 있는 계시이다.
도올은 본능일까 어느 텍스트에서나 성경의 계시성을 무력화시키려 애쓴다. 마가가 이것저것 긁어모아서 마구 편집한 것처럼 말하는 건 도올의 심상에서 발생한 허구일 뿐이다. 도올의 말대로 하면 마태 누가 모두가 다 마가가 만든 것에 프러스 마이너스해서 조합해 낸 거란 말 될 것인데 성경기자들이 무슨 도올님 같은 심보 소유자셨나? 신약의 저자들은 무두가 당대를 살고 경험한 장본인들이다
영감 받고 팩트만을 기록했다 복음서 저자들이 인간적 계산을 했다면 이렇게 성경을 적나라하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메시야가 눈물을 흘렸다거나(눅19:41,42) 사람을 피하여 숨으신 일이나 십자가를 앞두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
를 왜 기록할 것인가. 성경의 특징은 인간적 계산에 의한 기술과 편집이 아니인 것을 담보한다. 물론 도올씨처럼 마구 성경을 헐뜯으려거나 비평학이라면서 별별 트집으로 성경의 무오류를 흔들려는 자유주의 신학도들이 즐비하지만 그 들의 수명은 짧고 성경은 항상 승리 한다.
도올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일관되지 못한 말로 둘러대고 있다 그는,
“(예수가) 죽었다 살아난다는 사태는 인간 예수의 삶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중에 케리그마의 영향으로 삶속에 부활이 침투하는 사태와는 별개다”
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케리그마(복음선포,설교)에서 선포되는 내용에 불과하다는 투다(P.49) 그러면서 마가복음은 스토리story 문학이지 히스토리history가 아니다. 라고 해 복음서를 문학작품 취급 한다(p.74) 마가복음 후반부 설명에서도 ,
“예수의 부활은 통지 되지만 부활한 주님은 몸을 드러내지도 않고 제자들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고 하면서 부활 후 40일 간 그리스도가 현현하신 기사가 마가에 없다며,
" 마가드라마에서 복음서 양식의 오리지날리티와 장엄미 ,엄숙미 ,숭고미를 발견 한다 마가드라마를 독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
라고 한다(p.568) 막 16:9-18에는 도올의 말과 달리 부활하신 주께서 현현하신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도올이 이 부분을 무시하는 것은 이 텍스트가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해서 마가에는 다른 복음에 있는 부활현현 기사가 없는 마가를 칭송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엔 괄호로 돼 있는 부분도 모두 팩트다.
텍스트가 어떤 사본에는 없고 다른 사본에 있다면 당연히 있는 사본이 정본이다 없는 것은 필사과정에서 누락된 것뿐이다. 막16:9-18은 당연히 마가복음이고 정경 텍스트다 도올에게 이 텍스트를 무시할 권세가 주어졌나? 왜 엄연한 텍스트를 애써 무시하는가? 도올은 성경을 넣고 빼고 할 권세를 부여 받았나?
여기 도올의 말투에서 보여주듯이 도올은 마가복음을 ‘드라마’라고 한다. 하지만 그저 문학적 양식의 스토리란 투다 이런 도올의 의식 속에는 부활기사 모두가 드라마일 뿐인데 마가복음엔 이런 기사가 없어서 심플하고 좋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마가를 모델로 하고 다른 복음서들의 부활현현 기사를 무시하라는 암시를 한다. 그는 또,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이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갈릴리로 간다 갈릴리서 부활한다. 갈릴리서 예수는 오클로스(민중)의 마음속에서 부활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해 주예수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 아니고 그냥 민중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희망개념 정도라고 뇌까린다(p.578)
그렇다! 성경도그마 파괴를 미션으로 뛰는 도올이 주님의 부활을 이해하거나 믿을 리 만무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히11:1) 영혼이 구원 받지 않았으면 성령의 감화가 없기 때문에 성경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이 없으므로 실상으로 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갈릴리 민중의 마음속에 일어난 희망일 뿐이었다면 그야말로 기독교 로마권력 앞에 사라졌을 것이고 2천년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도올이 이런 낭설 퍼뜨린다고 성경의 권위가 일점일획 변동되지 않는다. 발람은 자기 앞에 천사가 칼을 빼들고 섰으나 영혼의 눈이 어두워 안보이니까 나귀만도 못한 존재가 됐다 나귀는 천사를 보는데 사람인 발람은 캄캄했으니!(민22;21-41) 인간의 영혼이 흑암상태면 나귀만도 못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도올은 막16:1-8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장인 ‘빈 무덤’을 논하면서도 주의 몸의 부활, 즉 역사적 사실로서의 부활을 부정하느라 애 쓰고 있다
“빈 무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한다. 성전의 죽음, 이스라엘의 종료 율법의 종언, 기존의 모든 권력의 종언을 의미한다. 예수는 갈릴리로 갔다 빈 무덤의 ‘빔’이야말로 모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다”(p.604)
했는데 한마디로 주예수의 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몽롱한 담화로 흐리고 있다 그의 말 “예수는 갈릴리로 갔다”는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하지 않고 어떻게 무엇이 갈릴리로 갔단 말인가 마가복음을 드라마로 여기고 부활도 케리그마 속에만 있다고 하면서 무엇이 갈릴리로 간단 말인가
이건 소위 불트만Bultmann식 실존론적 해석 부류가 만드는 모호성이다 몸의 부활을 불신하면서 부활을 계속 토크하고 있으니 모순 아닌가? ‘빈 무덤’이야말로 생생한 부활의 증거인데 그것을 무슨 성전의 죽음이니 이스라엘의 종언이니 권력체계가 사멸 됐다는 등 낭설이 필요한가? 그리고 갈릴리 민중들인 오클로스의 마음 속에 부활 했다는 등 이상한 소리 연발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몸으로 부활하셨지 갈릴리 오클로스의 마음속에 부활하시지 않으셨다 또 갈릴리에 가셔서도 부활하신 몸으로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과 만나셨고 153의 고기를 낚도록 도우셨으며 생선과 떡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셨다 또 베드로에게
“내양을 치라”
하시면서 베드로의 미래운명도 말씀하셨지 민중들 속에서 선동하시거나 그러신 적 없으셨다(요21장) 그놈의 갈릴리 오클로스(민중)소리는 아무 성경적 근거가 없는 민중운동가들의 셀프 토크일 뿐이다
도올은 마가복음 강해란 것을 마치면서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말을 인용한다.
“안병무는 예수의 삶이 노자가 말하는 물과도 같다고 말했다 예수는 물과 같이 자기를 낮추고 무화無化시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구주가 되었다고 했다 마가의 빈 무덤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우주의 빔 곧 모든 생명의 근원, 끊임없이 회귀하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위대한 생명력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라고 말한다(p.605) 민중신학자가 노자를 끌어드려 그리스도를 물과 같다느니 무화 無化 했다느니 ‘우주의 빔’이 어떻고 한 것은 견강부회요 불필요한 서비스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무화시키는 일 하신 적 없으셨고 도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반대의 상태로 바뀐다는 '반자도지동'과도 무관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성삼위일체 되신 성자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현존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도올이 동양철학 가져다가 함부로 믹스작업 할 대상 아니시다.
도올이 마가복음을 가지고 무슨 금강경이니 동학의 해월이니 무화無化 한다느니 수고 했지만 아무 이익이 없는 토크였다 도리어 성경신앙을 해치고 교회를 잔해하는 데 쓰여 질 서책일 뿐이다 우리는 도올이 왜 이렇게 무모하고 해롭기만 한 작업에 진을 빼야 하는지 의문이다
안티다원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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