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은 네덜란드이다. 신이 내려 준 땅, 세계 최고의 농업기술을 가진 미국에 어느 국가도 농업을 추월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1세기 이내에는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미국의 농산물 수출액에 비견 될 정도로 연간 1,000억불에 이르는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땅덩어리와 인구는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의 면적에 우리나라 인구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 인구밀도 또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러한 네덜란드가 미국에 이은 농업국가라는 것을 경이로운 것이다.
네덜란드는 유리온실에 관한 독보적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노지에서의 토마도 수확은 평당 3kg에 불과하지만 네덜란드의 유리온실은 평당 80kg의 토마토를 생산해낸다. 이러한 기술과 단위면적 당 막대한 농업생산성이 네덜란드를 연간 1000억불에 이르는 농산물을 수출하는 농업대국으로 만들었을까?
물론 네덜란드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강국은 맞다. 그러나 단 한톨의 카카오를 생산 하고 있지 않은 네덜란드는 연간 수십억달러어치의 카카오를 수출한다. 즉, 세계의 카카오를 사들여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중계무역을 통해 세계 담배 시장도 장악하고 있다. 네덜란드 농부는 직접 농사도 짓지만 국내생산량의 몇배에 달하는 농산물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중계무역을 하는 철저한 농사꾼이자 장사꾼이다.
중계무역으로 미국에 비견 될 정도로 농산물 수출대국이 된 네덜란드는 상업에 있어 타고난 민족이다. 유전자 자체가 다르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장사에 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항해시대 고작 인구 120만의 소국으로, 해수면 보다 낮은 국토로 인해 농사지을 땅 조차 변변치 않았다. 살아남기 위하여 중계무역에 뛰어들은 네덜란드 상인은, 뛰어난 항해술과 신용을 바탕으로 세계의 중계무역을 장악했고 바다의 마부로 불렸다. 상인정신으로 일군 네덜란드는 지금도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농사짓는 장사꾼, 네덜란드 농부는 그렇게 탄생 된 것이다.
16세기 네덜란드의 상인 빌렘 바렌츠는 고객의 상품을 싣고 항해를 하던 중 북극의 유빙으로 인해 섬에 갇히게 된다. 유빙이 멈춰지기를 섬에서 정박하고 기다렸지만 멈추지 않은 유빙으로 장기간 고립되었다. 싣고 온 식량은 떨어졌다. 섬을 탈출하여 유빙을 피하며 곰을 사냥하여 허기를 채우며 다시 항해에 나섰지만 곰 사냥이 끊기면서 17명의 선원 중 8명이 굶어 죽었다. 선장인 바렌츠도 결국 굶어 죽는 죽음의 항해 끝에 러시아 선박에 구조되어 간신히 네덜란드에 귀항했다. 항구에 도착한 선원들은 고객과 약속한 화물을 무사히 전달했다. 고객에게 전달할 화물에는 고객으로부터 주문 받은 식량과 모포, 옷들이 가득했다. 고객과 약속한 화물 중에는 식량도 있었고 그 식량을 먹었다면 8명이 굶어죽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굶어 죽을망정 고객과의 약속, 고객의 화물은 손대지 않는다는 상인정신은 네덜란드의 정신이 되었고 120만명의 소국이 세계의 중계무역을 장악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은 바렌츠 선장의 얼굴은 10유로짜리 동전에 새겨 숭고한 상인정신을 기리고 있다.
네덜란드 상인의 활약은 세계 문명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다. 일본에 유럽의 학문과 의술을 전해주어 난학(난카쿠, 蘭學)이 발전하게 하였고, 개항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 또한, 일본의 이마리 도자기를 유럽에 내다 팔아 동서문화 교류의 첨병이 되었고 호주 남쪽 태즈메니아 섬을 발견하여 호주와 뉴질랜드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상인이 남겨 준 인류 최고의 유산은 “투자”가 상품이 되는 시장경제의 젖줄인 주식투자라는 선물을 만들어 주었다. 네덜란드 상인과 무역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이 몰려 들었다. 투자자들이 몰려들자 네덜란드 상인은 그들에게 신뢰라는 상품을 팔았고, 그 상품은 정교하게 가공 되어 세계 최초로 암스테르담에 현대적 의미의 증권시장이 만들어졌다. 왕족과 귀족, 거상에 의해 장악 된 투자는 누구든 증권을 사면 투자가 되는 자본주의 꽃 대중투자시대가 열린 것이다.
증권시장이 열리고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VOC) 설립하여 한 때 전세계 무역선의 절반을 장악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시가총액은 지금가치로 환산하여 7조달러에 이른다. 이는 애플사의 시가총액 1조달러의 7배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큰 주식회사였다. 동인도 회사의 선원 일만이천명이 매일 항해를 했고 전세계에 66개의 무역기지를 두고 세계의 무역을 장악했다. 5만명의 고용인과 1만명의 군대를 거느린 동인도 회사는 자국민만 고용하는 다른 나라의 무역선과는 달리 16세기에 고용인 절반을 외국인으로, 현지인으로 채워 글로벌 경영을 했다.
대항해시대와 제국주의 시대를 지배한 것은 상업이었다. 그 상업이 동서양을 넘나들며 거대하고 글로벌화 된 것은 다름 아닌 필요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증권시장이라는 사회적 메카니즘 때문이었다.
풍랑과 해적,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해 무역선은 늘 리스크를 안고 항해를 해야 했다. 경쟁으로 점차 상단은 대규모화 되었고, 리스크를 떠안으며 거대한 상단을 꾸려야 하는 막대한 자본은 부자 한명의 힘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생겨 난 것이 여러명의 투자자를 통한 위험의 분산이었다. 무역선에 투자하는 투자자에게 투자금을 적은 보관증을 교부한 것이 증권이 되었고, 무역선이 들어오기 전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투자자는 보관증을 내다 팔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증권거래소이다.
증권을 통한 자본의 거래는 투자가 하나의 상품이 되었고, 세계의 무역을 더욱 확대시켰으며, 모든 나라들은 자국에 남는 것은 팔았고 부족한 것은 사들여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팽창했고 시장경제는 거대해지고 정교해졌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일찍이 인류가 누리지 못한 풍요를 가져다 주었고, 풍요는 보다 많은 인간이 지성을 갖추게 하였고, 보다 많은 인간을 먹고 마시는 본능적 삶에서 벗어나 문화를 상품으로 소비하게 만들어 주었다.
만주를 가지게 된 일본은 만주국을 근대국가로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것이 동인도 회사에서 방법을 찾았고 시장주의와 자본주의, 국가통제가 혼합 된 네이션빌딩을 구상했다.
일러전쟁의 전리품으로 남만주철도 얻는 일본은 1906년 6월 7일, 일본 천황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성립의건”을 반포하고 일러전쟁의 뤼순공방전의 영웅 고다마 겐타로를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창립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중국 동북지방을 운항하는 남만주철도 본선 외에, 안봉철도(안동-봉천), 무순철도, 우장철도 등도 건설했다.
그러나 만철은 단순한 돈벌이 기업이 아니었다. 만주국 건설의 씽크탱크로서 만주국 건국과 공업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만철은 “만철조사부”를 만들어 자원탐사, 산업개발, 경제, 안보 등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력한 씽크탱크로 만주국의 두뇌가 되었다.
이 싱크탱크는 일본의 수많은 학자와 두뇌를 끌어들였고 만주국을 동아시아에서 최첨단, 최신의 정책과 건축기술, 도시계획 등을 입안하여 만주 자체를 국가건설의 거대한 실험장으로 삼았다. 만철은 질풍노도와 같이 팽창했고 대련에서 선양, 하얼빈, 상하이, 난징, 뉴욕 그리고 파리에 까지 지부를 두고 글로벌네트워크를 갖추고 세계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흡수했고 6000건이 넘는 모든 분야를 망라한 분석 보고서를 생산한다.
만철은 인재를 모음에 있어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각을 모두 수용하며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만철은 1908년에 1억 6천만엔의 자산가치를 1930년에는 10억엔으로 성장했고 연간 이윤은 2억180만 엔에 달했으며 만철에 고용 된 인원은 2만명이 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혼합 된 만주국 산업화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물론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이 국가주도 계획경제의 만주국 건설과 공업화였지만 소프트웨어는 만철을 통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했다.
만주국의 시장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수많은 조선인이 일자리를 찾아 만주국으로 갔다. 시장경제의 발달로 일제시대 만주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잡곡이 수입되어 배고픈 조선인의 허기를 채워 주었다.
일제시대 쌀수탈로 인해 조선백성이 굶주렸다는 역사왜곡이 판을 친다. 우리나라 쌀자급자족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70년대이다. 일제시대에도 쌀은 부족했고 민초가 쌀밥을 먹을 수 없었다. 비싼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만주국으로부터 갑싼 잡곡을 수입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다. 조선으로부터 쌀을 수입한 일본은 쌀값 폭락으로 일본농부들이 연일 데모를 했었다.
쌀수탈이 아니라 일본에 비싸게 쌀을 팔아 값싼 잡곡을 수입한 시장경제의 메카니즘을 쌀수탈이라고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일제시대 경제가 고종시대 보다 4~5배 성장했고 해방이 되었어도 60년대에 겨우 일제시대 경제력을 회복한다.
만주국은 서세동점, 대결의 시대에 동서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일러전쟁의 일본승리에 기뻐한 안중근의사는 그의 저서 동양평화론에서 승전을 축하하고 있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서세동점의 시대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동양이 일치단결하여 막아내자는 동양평화는 어쩌면 만주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방문을 저격한 하얼빈은 동양의 파리로 불리며 번영을 구가했다.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를 통한 만주국의 경영은 동양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국가건설 실험장이었다. 조선인은 불과 십수년만에 이씨조선 500년 동안 이룬 성취의 수백배가 쏟아지는 것을 만주국의 심장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만주국, 그 거대한 국가건설의 실험장, 그것을 묵묵히 지켜본 조선인의 가슴에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꿈과 희망은 불길처럼 솟아 올랐을 것이다.
지독하게도 가난을 싫어했던 청년 박정희 그의 가슴에 만주국이 던져준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시대의 희망은, 5.16혁명일 강건너 총구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혈혈단신 한강대교를 건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