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중국도 가지지 못한 고려청자의 상감기술을 가졌다. 고려의 기술력은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으로 넘어와 차란한 기술을 가졌던 도공은 양반의 노예가 되었고 피를 빨렸다. 관요에서 도공 수십 명이 굶어 죽는 참상 속에서 조선의 왕과 양반은 세계 최고의 신비한 비색을 창조한 고려청자의 안료 조차 수입할 줄 모르는 천하의 무능한 쓰레기였다. 고려시대 기술직이 벼슬에 출사하면 얼마든지 고위직으로 올라갈 기회를 주었지만 천하의 쓰레기 이씨조선의 성리학은 도공을 천민으로 삼았다. 그런 이씨조선 500년 동안 도자기 기술은 퇴보를 면치 못했고, 일본은 도자기로 떼돈을 벌어들여 부자 되어 고종이 팔아 먹은 조선을 사들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호의호식 한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도자기 회사의 '노리다케'의 그릇을 수입하여 황실의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나라 팔아먹은 고종은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남긴 아름다운 일제 도자기를 쓰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 갔는지 모르겠다. 고종과 같은 등신새끼가 군왕으로 있는 조선은 백번을 생각해도 불 질러 태워 버려야 할 수치의 역사일 뿐이다.
백자를 굽는 기술의 핵심은 백자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는 것과 청자를 굽는 800도의 가마온도를 1,300도까지 올리는 것이 핵심이었다. 조선도공이 전수 한 가마기술은 일본은 더욱 발전시켜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제철소 용광로 건설에 도공이 참여한다. 2,900도까지 온도를 올리는 가마기술을 가진 일본은 독보적인 세라믹기술 종주국이 되었다. 일본 세라믹 단열기술 없이 나사의 우주선을 띄울 수 없고, 삼성은은 수 만개로 쪼개진 세라믹 소재 없이 스마트폰을 생산을 하지 못한다.
성리학이라는 해괴망측한 궤변이나 일삼은 조선과 실질과 실용, 지식을 중시한 일본의 사무라이는 애시당초 경쟁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는 근거 없는 정신승리만 했다. 아직도 우리가 일본에 문화를 전수 했다는 무지몽매한 헛소리를 하는 자들을 보면 재수 없다. 기원전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 이야기가 언제적 이야기 이고, 우리가 가진 문화와 지식이 뭐가 있다고 전수해 줄 것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전수해 준 것이라고는 죄다 중국에서 받은 것 넘어 간 것이고 그것이 생색거리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살면서 더욱 코웃음 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동양은 정신문화 서양은 물질문화라는 근본 없는 속설을 통해 서구세계에 대한 질투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허황된 요설을 늘어 놓는 정신빠진 그자에게 도대체 동양의 정신문화가 서양보다 우수한 것이 무엇이냐고 수백번 물어 보았지만 단 한사람도 대답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기껏해야 중국의 미개한 유학, 인도의 잡동사니 모은 미신적인 다신교 정도를 동양의 정신문화라고 지칭하는 것 같다. 기원전 그리스 로마신화부터 따진다면 뭐 딱히 동양이 정신문명이 오래 된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그 품질에 있어서도 서양의 정신문화와 가치에 비해 동양은 미개하고 어리석은 수준일 뿐이다. 그리스 로마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그토록 자랑하는 석굴암은 아이들 장난감 수준이고,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품 만큼 뛰어난 동양의 조각품은 딱히 보이지 않으며, 같은 시대 지어진 유럽의 건축물에 비하여 동양의 건축물은 크다는 것 빼고는 아름다움에서, 기술적인 면에서 새발에 피에 불과할 뿐이다.
같은 도자기 기술인데 조선은 양반의 기름진 배를 채우는 착취의 수단에 불과했고 일본은 근대화의 종자돈이 되어 국가를 개혁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그러한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고스란히 국가적 유전자로 남아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만들어 놓았다. 삼성은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하여 일본의 반도체 기술 및 소재, 세라믹 기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고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있다. 세라믹 기술이 곧 반도체 기술이다. 전세계 반도체 중 일제 웨이퍼가 7할이다. 스마트 폰 제조 원천기술 삼분의 일이 일본기술이다. 당장 무라타 제작소에서 적층세라믹콘덴서를 사들이지 않으면 삼성을 비롯한 대한민국 전자회사는 문 닫아야 할 판이다.
반일불매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주제를 알고나 깝치던가 개뿔도 없는 것들이 정신승리 자위질이나 하며 개돼지로 미쳐 돌아가는 것을 보고 배꼽 잡고 웃었다.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킬 때 일본의 공격은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슈 정도 만들고 더 이상 일본은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은 짱깨처럼 막 돼먹은 양아치 새끼가 아니기 때문에 경고 정도에서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큰 나라다. 만일 일본이 경제를 무기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하였다면 6개월도 못 버틴다. 예상대로 더 이상 일본은 경제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고작 3가지 품목 수출 중단도 아니고 수출절차를 까다롭게 한다는 것 이었을 뿐인데도 난리가 났었다. 일본은 그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연습 삼아 잽 한번 던져 본 것에 대한민국은 쌍코피가 터졌다. 그것이 현실이다. 제발 주제 좀 알고 깝치자. 아직도 짱깨에 공녀 바치며 비굴하게 사대하고 일본을 조롱하던 미개하고 무식한 조선의 과거적 버르장머리는 언제나 고쳐질 것인지, 아마도 일본에 대한 돼먹지 목한 그 버르장머리 고치는 날이 선진국이 되는 날일 것이다.
지구상에는 유럽국가 몇 나라, 일본,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식민지 국가였다. 심지어 선진국인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싱가폴, 대만도 식민지국가였다. 그 나라들은 철저하게 지배국가에서 배워 선진국이 되었다. 그리고 지배국가와 과거 따위는 묻어 버린지 오래이고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이 되었고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50년 이상은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똑 같은 조선 도공이 조선과 일본에 있으면서 이토록 극단적 차이를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은 정당한 댓가를 받으며 경제적 자유와 사유재산을 가졌다. 조선의 도공은 양반과 국가의 노예였고 그들의 재산권이었다. 재산을 가질 수 있는 도공, 양반의 재산권이 된 도공 그 한가지 차이가 문명국가와 개돼지국가를 만든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후 즉시 1912년 조선민사령을 공포하여 단군 이래 처음으로 국가가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했고 사유재산권을 공인했다. 즉 지위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사유재산권을 확립했다. 즉, 부도덕하고 악질적인 노예경제 수탈경제가 종식되고 무능하고 게으르면 굶어 죽고 노력하고 능력 있으면 그 능력에 맞게 잘 살라는 경제정의가 시작 된 것이다.
조선민사령의 공포와 때를 같이 하여 일제는 조선부동산등기법을 공포하고 토지조사사업을 벌렸다. 그리고 토지주에게 국가에서 공인한 땅문서를 만들어 국가 공증의 소유권을 부여했다. 누구든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할 경우 국가가 재산권을 지켜주겠다는 소유권 절대의 원칙이 뿌리를 내린 것은 단군 이래 가장 혁명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다. 토지조사 사업에서 일제는 신고 된 토지 99.5%를 주인에게 찾아 주었다. 입이 마르도록 그토록 울궈 먹는 일제가 수탈한 40%의 토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일제가 수탈한 40%의 토지를 찾아 입증한 사람은 없다. 그만큼 토지조사사업은 정확하고 공정했다.
조선의 경제는 어떠했을까?
조선의 토지제도는 과전법을 토대로 한다.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주어 수탈을 정당화 하는 빨갱이 경제로 출발한다. 퇴직한 관료까지 연금을 주기 위해 수조권을 주면서 나라 경제가 거덜 나자 직전법으로 바꿔 현직관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양반과 관료들은 집요하고 잔인하게 백성의 토지를 수탈했다. 하등에 쓸모가 없는 쓰레기 양반과 관료의 나라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희대의 괴물을 통해 착취와 수탈을 정당화 했고 백성의 피를 빠는 것에 죄책감이 없었다. 그 어느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찬란한 노예경제시대가 펼쳐졌다. 동족이 동족을 노예로 부리며 아비규환의 지옥이 펼쳐진 것이다. 오죽하면 양민이 굶어 죽기 않기 위하여 양반을 찾아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다.
조선시대 백성의 삶은 어떠했을까?
숙종 19년에서 숙종 22년까지 3년간 백성의 절반인 220만명이 굶어 죽는다. 220만명이라는 수치가 현실감이 와 닿지 않는다. 6.25. 사변에서도 220만명씩 민간인이 죽지 않은 것 같다.
소빙하기라 불리는 기상이변으로 전 세계가 기근에 시달렸던 경신대기근때는 한해 100만명이 넘게 굶어 죽었다. 현종실록에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은 당시의 참상을 남기고 있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에서는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粥所]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근(饑饉)” 발생에 대한 기록이 1794회나 나온다. 그 많은 기근에 대한 기록은 이씨왕조 조선 500여년간 매년 3.5회나 사람이 집단으로 굶어죽었다는 것이다. 신분제 굴레 속에 백성의 경제활동은 철저하게 양반들의 개밥그릇 논리에 따라 지배를 받았고, 사람이 재산권의 주체가 된 노예경제에서 사람이 굶지 않는 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공산주의와 맹자는 성선설을 따른다. 즉 북괴의 빨갱이와 조선의 양반과 사대부가 4%의 귀족이고 그 귀족이 나머지 백성의 피를 빠는 악의 세상이 북괴와 조선인 것이다.
고종과 민비, 양반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스스로 신분제를 혁파 할 수 있었을까?
민비암살은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이 3개 대대의 훈련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공격하면서 시작 된다. 일청전쟁 후 민비는 일본에 신식군대 육성을 부탁했고 일본의 도움으로 3개 대대의 훈련대를 육성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굶어 죽어갈 때 민비는 수백만냥을 뿌려 굿을 하고 사치를 부렸고 민비척족들은 국가에 들러붙어 횡령하고 매관매직을 통해 국가예산과 맞먹는 돈을 탕진했다. 돈이 궁해진 민비는 당시 일본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300만엔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의회에서 이를 거절하자 민비는 육성중인 훈련대를 해산시켜 버린다.
훈련대 해산에 불만이 쌓인 우범선에게 가택연금 중인 대원군이 합류하여 민비암살을 지시했다. 여기에 이노우에 가오루가 합류하여 민비가 암살 된 것이다. 즉 돈이라면 환장하는 민비년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다 실패하자 앙심을 품고 일방적으로 군대를 해산시킴으로서 불만이 쌓였고, 갑신정변으로 민비년이 끌어들인 청나라군에 4년간 억류 된 후 풀려 난 후 또 다시 가택연금 당한 대원군의 지시로 촉발 된 것이 민비암살 사건이다. 이런 막장 집구석의 개싸움으로 민비가 암살당한 것인데 개뿔이나 대한제국이고 명성황후는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
서슬퍼런 세도정치가 횡행했던 조선에서 고종과 민비가 저토록 사악한 짓을 벌렸음에도 양반들이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양반들도 고종과 민비처럼 백성을 피를 빨았던 아귀였기 때문이었다. 즉 동업자끼리 제지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백성에게 꽃은 빨대가 군왕 것이 다를 것이고 양반 것이 다를 이유가 없었다.
백성 절반이 노예이고 양민조차도 노예에 불과한 조선이, 더구나 야차와 같이 백성을 뜯어 먹겠다고 고종과 민비, 관료와 양반이 으르렁 거리는데 조선이 스스로 개혁을 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똥개가 스스로 깨우쳐 부처가 되는 것 보다 가능성이 없었다. 신분제의 철폐는 역사가 그러하듯 피바람 부는 혁명 없이 불가능했다. 남북전쟁이 그러했고, 유럽의 수 많은 혁명이 신분제 폐지를 위한 투쟁이었고 전쟁이었다.
단군 이래 최초로 신분제 폐지가 선언 된 갑오개혁도 일제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제가 뿌리를 내려 준 근대사법 정신과 자유로운 경제활동, 사유재산권의 확립 없이는 단언컨대 조선의 신분제 폐지는 불가능했다. 노예제의 폐지로 영국의 산업혁명의 위대한 불꽃이 피어 올랐듯 일제의 신분제 혁파는 국민의 경제의 주체가 되는 단군 이래 가장 역사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신분제 폐지는 일제가 내려준 민족적 축복이다. 일본이 싫다고 부정해본들 바뀔 수 없는 역사적 사실 앞에 추한 모습만 각인시키는 꼴이 된다.
양반들에게는 지켜야 할 나라도 없었고 국가도 없었다. 양반과 선비들에게 성리학이란 개밥그릇을 내려준 중국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작자들이 일제에 의해 하루 아침에 양반이라는 개밥그릇을 잃어버리자 시작 된 것이 의병이고 독립운동이다. 그 독립운동 조차도 가소롭게 알량할 뿐이다. 마적떼 170명이 순사 2명이 근무하는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이 북괴의 건국신화이다. 너무나 대단해서 고소를 금할 수 없다.
짐바브웨 독립의 아버지 무가베가 그러했듯이 독립운동가 출신이 권력을 잡으면 그 나라는 독재와 가난으로 망했다. 독립운동가 호치민은 베트남을 지옥의 나라, 거지나라를 만들었다. 하지만 싱가폴의 이광요와 대만의 장개석은 지배국가의 옥스퍼드와 일본육사를 나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나는 일본이 고맙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나라를 팔아먹은 고종과 야차 같은 양반을 몰아내 준 것이 고맙다. 김구가 통치해서 거지국가로 사느니 이완용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잘사는 나라에 사는 것이 선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