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메이지 유신의 대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에도성 무혈입성이었다. 에도성에 입성하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만감이 교차 되었다. 260년간 쌓였던 천추의 한과 무너져 버린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연민이 교차되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의 패전과 죽음으로 일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를 놓고 동군을 규합하여 세키가하라 언덕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는 서군과 맞섰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쓰마번의 영주로 서군에 합류했다. 노량해전에서 2만여명이 전사하며 대패를 당하고 겨우 수백명만 목숨을 살려 간신히 탈출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패주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잔적에 저격 당해 순국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다. 사무라이로서 자결을 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적진의 정가운데를 뚫고 탈출을 감행했다. 적진철퇴를 통해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은 대부분의 부하를 잃었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사쓰마로 귀환했다.
서군으로 참전했던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 사가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 후 영지를 빼앗기거나 대폭 축소 되었고 에도시대 260년간 차별과 핍박속에 살아야 했다. 그들은 260년간 응축 된 차별과 핍박을 삭이며 절치부심 칼을 갈았다. 메이지 유신의 주력군의 주장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도성에 입성하며 장차 일본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도자기는 세계의 부를 좌지우지 하는 국제무역의 총아였고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중국 도자기에 열광했던 유럽은 막대한 금과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파산하는 귀족이 생기고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로 황금덩어리였다.
임진왜란에 4대 메이지유신 주력번은 주된 전력으로 참전하여 전장을 지배했고 수 천 명에 이르는 조선의 도공을 포로로 끌고 갔다. 포로로 끌고 간 조선도공의 장인정신은 일본 도자기를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었다. 에도막부는 개돼지 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천민 조선의 도공에게 영지가 내렸고 사무라이 벼슬을 주었으며 도자기 생산의 전권을 맡겼다.
조선도공 박평의와 심당길은 사쓰마 번에 뿌리를 두고 사쓰마 도기의 시조가 되었고 이삼평과 백파선은 사가번(히젠번)에 뿌리를 내리고 아리타 도기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조슈번에 뿌리내린 조선도공이 만든 하기야키 다기는 일본의 혼을 상징하는 다도의 품격을 높여 주는 최고의 다기가 되었다. 조선 도공에 의해 창조 된 일본의 도자기는 종주국 중국을 누르고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되었다. 도자기 패권을 잃어버린 중국은 종주국의 체면을 내려놓고 일본 도자기를 모방하여 유럽 수출길에 나섰다.
이삼평이 만든 이마리 도자기는 유럽귀족의 권위와 부의 상징이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매년 수만개의 도자기를 유럽으로 실어 날랐고, 일본은 금괴68톤을 벌어들여 메이지 유신의 혁명자금이 되었고 일본근대화의 종자돈이 되었다. 이삼평은 도자기신으로 추앙 받았고 그의 신사가 지어져 지금도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조선 도공이 벌어들인 돈으로 군대가 육성 되었고 대포공장이 세워졌다. 조선도공이 축척한 부는 결국 조선을 침범하는 군자금이었고 사쓰마 번의 구로다 기요타카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 병합의 단초가 되는 강화도 조약을 만들었고 조수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초대 통감이 되며 조선을 병합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은 그렇게 부활하며 일본은 세계 질서의 축으로 올라섰다.
당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곳은 조선과 중국, 베트남에 불과했다. 조선에서 도공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박탈 된 채 개 돼지 취급을 받으며 도자기 굽는 것을 세습해야 했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는 노예였다.
관요에 배치 된 도공은 도자기를 굽는 것 외에는 일체의 생업을 금했고 사사로이 그릇을 만들어 팔 수 없었다. 조선의 법령집 “전록통고”에는 관요의 도공이 도주를 하면 곤장 100대에 징역 3년형에 처했다.
1697년 3월 2일 광주 관요에서 올라온 보고를 기록한 승정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비참한 도공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도공들은 농업이나 상업으로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어, 지난해 개인적으로 그릇을 굽지 못하여 모두 굶주리게 되었나이다.'(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굶어 죽은 자는 39명이었고 힘이 없어 문 밖 거동을 못하는 자는 63명에 가족이 흩어진 집이 24집이었다. 남은 자들도 힘이 없어 그릇 형태를 만들지 못할 지경이었다.(윤3월 2일 '승정원일기')
일본으로 건너 간 도공은 벼슬과 영지를 받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을 때 조선의 도공은 수십 명이 집단으로 굶어 죽었다. 조선의 건국이념 성리학과 농본억상은 조선을 천하의 거지로 만들었고 장인을 개돼지만도 못한 천한 짐승으로 사육 되었다. 양반이라는 쓰레기에게 아귀처럼 뜯어 먹히고 피를 빨렸다. 조선 제일의 도검장인은 양반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팔을 잘랐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지식과 기술은 활자장인, 직조장인, 증포장인의 혼은 에도시대 기술혁명을 일으켰다. 조선으로 건너간 활자기술은 일본에 출판품을 일으켰고, 유럽의 인쇄기술까지 더해져 에도시대의 일본은 거대한 지식사회가 되었다. 국민 75%가 문자를 읽고 쓰는 세계에서 문맹율이 가장 낮았고, 모든 지식이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가장 지적인 백성이 되었다.
그깟 성리학이 뭣이길래 글 몇 줄 읽은 같잖은 유세가 창궐했고, 학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조차 낮 간지러운 지식과 지성이 조선을 지배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문제를 단 한가지도 설명하지 못하는 꿈속의 말장난, 지성이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는 현학전 잔치판이 성리학이다. 수천년 동안 그토록 짖은 “인(仁)”과 “덕(德)”의 정의 조차 없다. 지나가는 똥개나 바닥을 기는 지렁이나 가져다 붙여 교언영색 사기나 치면 되는 그 잘난 “인(仁)”과 “덕(德)”의 정의를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개조선 씹선비의 지적 수준이었고 성리학의 수준이었다.
조선 도공은 세계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축척했고 그 미개하고 질 떨어지는 뒷골목에서나 팔릴 아동잡지 수준만도 못한 성리학은 학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 조차 부끄럽다. 성리학을 풀어쓰면 노트한권이나 분량이나 될지 모르겠다. 도올 김용옥이 나와서 횡설수설 질퍽거리고 떠들지만 핵심이 없다. 그저 공허한 현학적 단어의 나열일 뿐이다. 이토록 무식하고 미개한 조센징의 과거와 오늘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앞으로 어쩌면 영원히 조센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피로인(被擄人)이라 불렀다. 피로인을 조선으로 송환하기 위하여 쇄환사를 파견했다. 어렵게 쇄환사를 통해 조선으로 송환 된 피로인은 동족의 멸시와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왜적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고 여인은 왜적에게 더럽혀졌다며 자결을 강요당하고 평생 멸시와 핍박 속에 살아야 했다. 왜적이 무서워 중국으로 도망이나 가려 했던 천하의 개새끼 선조는 여전히 왕질을 해처먹었고 전란을 책임진 씹선비는 한명도 없었다. 당시 민란을 통해 선조와 씹선비는 찢어 죽여야 역적이었다.
난중잡록에는 피로인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유정(사명당)은 피로인을 통제사 이경준에게 맡겨 휘하의 선단에 명하여 사후처리를 위임했다. 선장들은 피로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맡자 우리가 보는 앞에서 포박했다. 그 모습은 약탈보다도 더 심했다. 신원을 물어 대답하지 못하는 피로인도 있었는데, 어려서 잡혀가 출신지가 조선이라는 것만 알뿐 자기의 족보나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자도 많았다. 선장들은 그들을 모두 노비로 삼았다. 피로인이 미인이면 그 남편을 묶은 채 바다에 던져 그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 이러한 소행은 결코 한두 예로 그치지 않았다.”
피로인의 대부분은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산활동에 참여하면서 정당한 노동의 댓가와 그에 걸맞는 신분을 보장 받았다.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또다시 양반에게 피를 빨리며 수탈 속에 죽을 때 까지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함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피로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고 쇄환사가 나타나면 산으로 도망갔다. 송환 된 피로인은 0.1%에 불과했다.
신비의 비색 고려청자를 만든 것은 아랍으로부터 수입 된 회회청(코발트)에 의해 창조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수입 되어 사용 된 회회청이 조선시대에 와서 수입이 끊겨 버렸다. 농본억상의 조선에서 국가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인은 최하층 천민으로 온갖 멸시와 수모를 겪어야 했다. 온갖 무능하고 무식한 개조선 씹선비는 도자기를 만들 안료를 수입할 지적수준이나 능력이 되지 못했다. 안료를 수입할 돈 없는 거지새끼로 살며 백자를 두고 “여백의 미”라며 정신승리 자위질을 했다. 거지새끼들의 기가 막힌 자기합리화이다.
오늘도 사무관 주제 밖에 안되는 무식한 공무원새끼가 재벌회장을 불러들이는 미개한 대한민국의 조센징 염병지랄은 계속되고 있다. 공무원의 무능함과 나태를 때려 잡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개조선의 관료와 대한민국의 관료와 수준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동네학원 강사 만도 못한 선생에, 아이큐 30만 되어도 처리할 수 있는 업무를 개밥그릇으로 삼아 국부를 빨아먹는 공직 버러지가 천지이다.
능력에 걸 맞는 급여와 신분을 보장 받은 조선도공의 혼이 만개 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품도자기를 만들었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 차이가 일본과 개조선의 차이였다. 조선은 일본에 비하여 지적수준은 발바닥이었고 국가수준이나 품격은 일본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아직도 미개한 대한민국은 일본에 정신승리 자위질이나 하며 조센징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고 있다. 참 불쌍한 조센징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