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독립운동사는 변변한 것도 없고 뭐 하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그만큼 독립운동이 저조했고 한편, 국력차이가 너무나 현격하여 부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열등감 때문인지 유독 독립운동사에 대한 날조와 거짓말이 난무한다. 독립운동의 요체로 자랑하는 임시정부도 만주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임시정부”라는 타이틀만 달고 활동했던 단체는 파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난립하고 분열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맡았던 이승만 대통령도 사분오열 분열하는 임시정부에 환멸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수백명의 군대 조차 조직 하지 못하는 능력으로 강경한 무장독립투쟁을 외치는 임시정부인사들의 세상물정 모르고 공자왈 맹자왈 하는 씹선비 수준의 무개념 구호잔치에 질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양반이 주축이 된 죽창 들은 의병이 독립군이 되었고 씹선비 수준이 그러 했을 뿐이다. 1920년대부터 고려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민국 임시정부 등 이름조차 생경한 임시정부를 표방한 단체는 차고 넘쳤다. 그것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밥그릇 싸움이나 했다.
노선간의 대결, 세력간의 대결, 이념간의 대결은 극심했고 이르쿠츠크파, 상해파, 개조파, 창조파, 현상유지파,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고작 몇 십명, 몇백명에 불과한 독립운동 세력은 그 속에서 갈라지고 갈라지며 끊임없이 분화 되었다. 일본의 중국내륙 침공으로 충칭으로 달아난 김구의 임시정부도 내부적인 노선 갈등으로 지겹도록 대립하자 장준하는 일본으로 돌아가 폭격기를 끌고 와서 임시정부를 폭격하고 싶다고 했다.
독립운동의 날조는 북괴도 전율할 정도이다. 경찰 5명이 근무하는 주재소를 170명의 마적떼가 습격하고 2살짜리 순사의 딸과 민간요리사가 빗나간 유탄에 사망한 지나가는 개도 웃을 동네 보천보주재소습격사건을 두고 노르망디상륙작전 보다 스펙터클하게 날조 하고 있다. 게다가 그토록 북괴가 미화하고 찬양하는 그 알량한 보천보주재소 습격사건의 주동자가 개일성이 아니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의 총아로 대접 받는 광복군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겪어야 했던 허탈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임시정부가 작성한 광복군 명부는 339명이다. 그 중 상당수가 비전투요원이며 실제 전투에 투입 될 병력은 2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게다가 광복군은 장개석으로부터 군사의 급여 및 군비를 지원 받으며 장개석의 요구에 따라 지휘관은 중국군이 맡고 있었다. 그런데 건국 후 광복군에게 수여한 훈장은 564개가 수여 되었다. 당시 빨갱이 김원봉도 광복군 지대장을 맡고 있었으며 광복군 구성원 중 상당수가 좌익계열도 참여하고 있어 귀국하지 않고 상당수가 북괴로 갔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런데 임시정부가 가지고 있는 광복군명부 보다 월등하게 많은 광복군에 대한 훈장이 수여 되었다.
조선이 해방 된 것은 미국의 원자폭탄 2방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이유를 붙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김구는 원폭으로 해방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왜적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 국내의 중요한 곳을 파괴하거나 점령한 뒤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 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도대체 김구는 조선의 해방을 원한 것인지, 알량한 200명의 광복군으로 국내진공을 통해 해방을 시킬 수 있었다고 믿은 것인지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 만주와 중국일대에만 100만명의 제국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은 14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700만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200명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죽창 들고 기관총에 맞선 동학군이나 또는 구한말 죽창 들고 의병활동 했다는 씹선비의 의식세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토록 무지하며 대책 없이 현실감 없는 사람이 임시정부를 어떻게 이끈 것인지 어쩌면 광복에 대한 김구의 대책 없는 발언은 부끄러워 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백번을 생각해도 광복군이 일본제국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북괴가 미국과 전면전을 하는 것 보다 100배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국부 이승만은 조선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일찍이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창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미국에서 베스트작가가 되며 사회적 영향력을 쌓았고 대한독립의 필요성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노력은 얄타회담과 카이로회담에서 조선독립을 국제적 으로 약속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개화기 지식인 윤치호는 무모한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하여 "다스릴 국민도 없으면서 정부 간판을 내걸고 끊임없이 국내에 있는 조선사람에게 돈을 요구함으로써 조선인들을 위험에 노출시킨다."라며 비판했다.
국민교양서로 자리 잡은 김구의 백범일지 또한 김구가 남긴 기록을 이광수가 윤색하고 각색하여 만들어 주었다. 민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군 장교를 살해 했다는 “치하포 사건”도 실상은 쓰치다 라는 대마도 상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고종이 사형선고를 받은 김구를 구명하기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전화를 하였다는 사실도 날조 된 허구이다. 구명전화를 한 때가 1896년 10월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 최초 전화 개통일은 1898년 1월이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며, 전화했다는 당시에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망가 있어 제 목숨 부지하기도 바빴을 때이다. '백범일지'에는 감옥에서 아침에 황성신문을 보니 인천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백범이 인천 감옥을 탈옥한 것은 1898년 3월, 황성신문이 창간된 것은 1898년 9월이다. 도저히 김구의 교수형 기사가 황성신문에 기사화가 될 수 없는 시기이다. 백범일지를 심층 분석한 김상구는 “나중에 공개된 ‘백범일지 친필본’과 백범일지는 너무 차이를 보이고 있고 단순 교열이나 윤문 정도가 아니라 재구성본이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무력투쟁 중 가장 혁혁한 활동으로 알려진 청산리 전투의 전과도 많은 의혹이 생긴다. 박은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1920년)”에 따르면 일본 측 전사자는 카오우신연대장 이하 900명에서 1,200명을 이라고 적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카노우신 연대장을 비롯하여 전사자는 3,300명으로 그 숫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 측 자료에는 일본군 전사자는 11명 부상 24명으로 남아 있고 카노우신 연대장의 전사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청산리 전투의 사상자를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는 11명이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카노우신 연대장은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1920년을 훨씬 지나 1922년까지 연대장을 역임한 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 있어 한국측 기록에 대한 의문성을 던지고 있다. 아무리 그 시대라지만 군인 3,000명이 넘게 전사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군대의 병력관리 기록은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서 왜곡 될 소지가 극히 없다.
영화로 개봉되어 한창 반향을 일으켰던 봉오동전투 또한 일본측 전사자 숫자에 심각한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독립신문 기사에 따르면 일본군 120여명이 전사 했다고 보도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연변대 교수 박창욱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120여명의 사상자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고, 국내의 고구려 연구재단 또한 봉오동 – 청산리 전투는 과장 되었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일본 측의 기록에도 전사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야스쿠니 신사에도 봉오동 전투 희생자 명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미완성 집필본 동양평화론을 들여다보면 언뜻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닮은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선진화 된 일본의 지도 아래 조선과 중국은 경제개발을 하자고 촉구하고 있으며, 삼국이 연합하여 서양세력에 맞서자는 것이 주장의 요점이다. 동양평화론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러일전쟁에 대한 생각을 남기고 있어 안중근의 의거가 나라를 되찾기 위한 또는 한반도에서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항거였는가에 회의를 가지게 한다.
“이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떠있는 조그만 섬나라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 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으니, 누가 능히 이런 일이 있을 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답하는 이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수었으니 가히 천고에 희귀한 일이요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양국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 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政略)이나 일을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대한 반발로 촉발 된 동학난은 순수한 조선 백성의 마음이었다. 그런 동학이 일진회가 되면서 한일합방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단순 선동이나 무지에서 비롯된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일진회는 자발적인 회비를 납부하는 진성회원만 회원만 11만명이 넘고 회원이 120만명에 이르렀다. 그런 거대 조직의 한일합방 지지성명이 몇몇 친일파의 일탈행위라고 주장 할 수는 없다.
3,1운동은 태극기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하지만 독립선언문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와 같이 대한이 아닌 조선을 외치고 있다.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는 너무나 생경하다.
군왕이 이완용을 시켜 한일합방 항복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백성은 어리석고 겁 많은 군주의 매국에 책임을 묻지 않았고, 일본에 총 한방 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식민국민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점령한 요동 반도를 삼국간섭의 압력에 굴복하여 중국에 환부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청일전쟁 참전한 장교, 하사관 등 참천군 100명이 넘게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워 획득한 전리품을 외교전의 패배로 인해 빼앗겼다” 라며 할복자살을 하였다. 전쟁으로 빼앗은 땅을 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되돌려 주는 것에도 저토록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데, 우리는 군왕이 앞장서서 나라 전체를 팔아먹고, 백성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는, 일본의 지배를 환영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회생불가능 한 썩어빠진 나라를 미련 없이 버렸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극심한 반일감정은 당시 조선은 너무나 썩어빠진 나라 같지 않은 나라였고 국권을 빼앗기는데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열등감의 발로가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역사까지 왜곡하며 정신승리 자위질을 하여 본들 결국 누워 침 뱉기일 뿐이다. 과거에서 반성하지 않으면 미래는 반복 된다는 역사적 진실을 맞이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