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청나라 육군에 일방적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요동 공략을 서둘렀다. 두만강을 도하하는 일본육군에 방어선을 치고 저항을 했던 청나라는 더 이상 제국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요동에서 2만여명의 군민이 전사하며 청나라는 저항을 포기했다. 해전에서도 연전연패를 당하며 항복할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일청전쟁이 한창인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군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화승총과 활,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우금치고개를 넘기 위하여 대오를 갖추었다.
3,200명의 조선관군은 이규태와 이두황을 지휘관으로 양분하여 우금치 좌, 우측에 포진했다. 관군의 지원을 위해 나선 일본의 후비보병중대는 우금치 최고봉인 견준봉에 포진했고, 동학군 토벌대의 지휘권은 후비보병 중대를 이끌고 있는 미나미 고시로 소령의 지휘 하에 있었다. 우금치를 향해 오르는 동학군을 내려다 본 조선관군의 게틀링건 조준간은 동학군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고지를 타고 오르는 동학군을 향해 분당 600발을 난사했다. 배치 된 2대의 게틀링건에서 쏟아지는 기관총 탄알은 밀집한 동학군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이어 영국제 스나이더소총으로 무장한 관군의 소총수도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고,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도 동학군 학살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독일제 크루프 야포의 파괴력은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공포였다.
일본군이 무장한 무라타 소총은 메이지 유신의 심장 샤쓰마번 출신 무라타 쓰네요시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을 개량하여 개발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압도했던 무라타 소총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열강으로 등극한 일본의 힘을 상징하고 있었다. 1만여명의 동학군은 조선관군의 게틀링건에 속절 없이 쓰러졌고, 몰살을 당했다. 살아 남은 500명은 전우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 이유 조차 모르고 있었다. 3,200명의 조선관군의 일방적 승리, 아니 일방적 학살로 전투는 마무리 되었다.
우금치전투에 참여한 일본중대는 후비보병으로서 전역한 군인을 모아 청일전쟁에 대비한 예비부대였다. 일본의 주력군은 일청전쟁 전선에 모두 투입 되어 있었다. 일본의 후비보병은 소총만 무장한 경무장 부대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독일에서 수입한 크루프 야포, 게틀링건으로 무장하고 동학군 학살의 주역이었다. 크르푸 야포는 대한제국이 1890년 독일에서 12,000원에 도입하였다. 여러개의 총열이 돌아가며 사격을 하는 게틀링건은 조선에서 회선포로 불렀다. 고종실록에 일본사신으로 선물을 받고 처음 알게 되었다. 고종실록에는 비적들로부터 회선포를 노획한 장계가 남아있다.
1890년 조선 정부의 크루프 야포 구매 문서
그간 우리는 우금치 전투의 동학군을 학살한 것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에 의해 자행 된 것으로 사실을 날조하여 왔다. 그러나 고종의 요청에 의해 일본이 참전했고, 참전한 군대도 예비군에 불과한 후비보병중대였다. 크루프야포, 게틀링 건 등으로 중무장한 조선관군은 동학군 학살의 주역이었다.
우금치전투가 부끄러운 것은 따로 있다. 조선시대부터 도참서를 통해 내려 온 ‘궁궁을을(弓弓乙乙)’의 주문을 부적에 적고 그것을 태워 마셨다. 그리고 영생을 기원하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의 주문을 외며 기관총탄알이 쏟아지는 전장을 뛰어 다녔다. “궁궁을을” 동학의 시조 최제우가 하늘의 지배자로부터 받았다는 선약(仙藥)의 형상이 마치 궁궁(弓弓) 글자 모양과 닮았다 하여 불사조처럼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영생을 기원하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을 목청 껏 외쳤다.
그토록 허망한 죽음을 명령한 것은 전봉준이었다. 부질없는 주문을 외며 허망하게 모두가 죽어갈 때 전봉준은 살아남았다. 전봉준은 비겁했다. 그는 그토록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버림 받은 농민이 아니었다. 전봉준은 조선시대를 지배한 양반의 후손이다. 가세가 기울었지만 글줄이나 읽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였다. 전라도에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약방문을 쓰며 한의사 생활도 하였다. 혹세무민 풍수지리도 보고, 길흉사 택일도 하고, 일자무식 농민의 편지를 대필 해주기도 했다.
전봉준은 입버릇처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떠들던 자이다. 즉, 지극히 소영웅주의에 빠진 허황된 공명심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풍수지리와 동학이라는 미신을 숭배하던 자였다. 우금치에서 자신의 부하 9,500명이 죽어갈 때, 살아남은 500명 중 자신이 포함되었을 때 전봉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 했다. 그 어떤 이유를 불구하고 지휘관이 전쟁에서 패배했으면, 대부분의 부하가 죽음을 당했으면 응당 그 책임을 지고 자살을 해야 했다. 여의치 않으면 곡기라도 끊고 굶어 죽어야 했다. 동학의 중심은 교주 최시형이 속한 북접이었고 최시형은 폭력투쟁을 반대하며 전봉준의 무모한 전투를 말렸다. 그러나 개인적 독선과 소영웅주의가 낳은, 미신이 지배한 우금치 전장에서 자신의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민비 민자영과 고종은 미신에 대한 맹신은 상상을 초월했다. 민비는 그 이름만 들어도 재수 없어 편의상 민자영으로 부른다. 임오군란으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민자영은 피붙이 민응식이 목사로 있는 충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민자영은 여자 무당 박창렬을 만난다. 무당은 8월 보름이면 환궁 하여 한다며 민자영의 혼을 빼앗았다. 실제 환궁보다 15일이 늦어졌지만 민자영은 개의치 않았다. 무당 박창렬은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주며 궁궐로 불러 들였다.
진령군은 민자영과 고종의 위세로 호가호위 하며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궁을 제집처럼 드나 들었고, 민자영 침소는 진령군의 안방 이었다. 진령군의 세도는 하늘을 찔렀고 “어젯밤 진령군이 창덕궁에서 한 말이 다음날 아침에 어명으로 내려 온다”는 말이 생겼다. 수 많은 백성이 굶주림으로 죽어갈 때 세자를 위한다며 진령군이 시키는데로 금강산 일만이천봉 봉우리마다 쌀과 돈을 뿌렸다. 관우의 딸 진령군을 위하여 관우 사당까지 지어서 바쳤고 시간만 나면 고종과 민자영은 관우사당을 찾아 푸닥거리를 하고 점을 쳤다.
백성과 고종, 민자영은 모두 동학과 무당에 미쳐 있었다. 일개 처세학에 불과한 유학이 우주질서와 만물의 이치를 지배하려 한 교언영색의 거대한 사기, 죽은 귀신 불러다 제사밥 먹이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친 미신이 성리학 이다. 성리학은 도교와 불교를 미신이라 치부하며 허황되다며 배격했다. 내세를 인정하는 것은 사문난적이라며 그토록 배격하였음에도 귀신을 불러다 지내는 제사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 대단한 이황도 “사람이 죽으면 기가 흩어지는데 어찌 귀신이 있겠느냐”라더니 “사람이 죽어도 기가 흩어지지 않고 뭉쳐 있는 경우가 있으니 귀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현학적 말장난으로 끝을 맺는다. 이렇듯 성리학은 온통 모순 덩어리다. 충(忠)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며 유교탈레반들은 자신의 개밥그릇을 지키기 위하여 반정을 통하여 군왕을 갈아 치웠고, 성리학의 가치기준에서 군왕을 쫒아낸 역적들을 공신이라며 온갖 국부를 빨아 처먹었다. 이러한 유교탈레반의 신물 나는 자기모순과 구역질 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백성들은 성리학적 질서를 거부했다. 양반들은 백성이 글을 쓰고 맹자를 읽는 것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다.
백성들이 성리학적 질서에 저항하는 방편은 누군가 조선을 뒤집어 군왕과 양반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희망했다. 홍경래가 정감록으로 혹세무민 했듯 그렇게 백성은 미래를 갈망했다. 모든 종교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내세를 앞세운 혹세무민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동학은 내세가 아닌 현세에 구원자가 나타난다는 혹세무민을 근본으로 한다. 그때까지만 살아남자는 후천개벽은 전형적인 패배주의적 세계관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귀신도, 하느님도 예수도 아닌 살아 있는 자가 바꾸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달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과 같은 사악함과 미개함을 몰아냈다. 계급해방은 대중이 돈을 가지면서 사악한 귀족을 몰아냈고, 미개한 천동설을 깨부순 것은 과학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질서가 세계를 지배할 때, 스스로의 노력 없는 누군가 나타나서 군왕과 양반을 몰아내고 천국이 열릴 것이라는 허망한 믿음, 패배주의적 세계관이 동학이다.
아직도 골목 골목 어김없이 무당집이 들어서 있고, 경치 좋은 산 밑에는 발 끝에 채이는 것이 무당들의 암자와 불상을 앉혀 놓은 굿당이다. 산속에서 얼마나 촛불 켜고 푸닥거리를 했으면 산불조심 기간에 무당들 잡으러 다니느라 산림청이 바쁠 지경이다. 국가는 국민의 수준에 결정된다. 아직도 국가를 바꾸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하늘에서 내려와 대한민국을 바꿀 것이라는 허망한 믿음은 문재앙과 같은 사기꾼을 만들었다. 역사는 우연과 요행을 주지 않는다.
에디슨은 1,000번의 실패 끝에 탄소선 필라멘트전구 만들었다. 세일가스를 캐내기 위하여 미국은 63빌딩 7배가 넘는 지하를 파들어 가며 1948년부터 60년간 수압파쇄공법에 도전하였다. 국가운명을 결정한 것은 에디슨의 전구와 세일가스이다. 실체도 없는 만져 볼 수도 없는 내세의 삶도, 어느날 갑자기 나타날 전지전능한 선지자도, 하늘에서 내려올 메시아도, 후천세상을 열을 현인도 아니다. 그것들은 망상에 불과한 허상이다. 고종과 민비를 쫒아낸 식민시대는 계급해방과 소유권을, 이승만 시대의 투표권과 자유에 대한 가치를, 박정희 시대의 능력주의에 따른 자본주의가 있어 산업화를 이루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