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뇌로 바꾸기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있다. 입으론 달콤한 말, 뱃속엔 날카로운 살육의 칼. 언어와 행동이 다른 이율배반의 얼굴을 뜻하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붉은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전략 혹은 세뇌와 포섭을 위한 좌익들의 행동 속에는, 반드시 이러한 구밀복검(口蜜腹劍) 식의 간계가 숨어있었다.
좌익은 반드시라 할 만큼 이중적인 모습으로 산다. 포섭할 대상을 향한 겉모습은 항상 미소를 짓는다. 미소와 따뜻한 배려. 그것을 흔히 위선(僞善)이라 부르지만, 웃는 얼굴에 숨어 있는 무서운 음모를 일반 대중이 알 까닭이 없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이 무엇을 알 것인가. 다만 웃으며 다가오는 교사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교사가 전교조인가, 아니면 비전교조 교사인가를 가름하는 기준이 있다. 웃음으로 다가온 선생님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순수의 눈빛으로 학생의 미래를 염려하고 꿈과 이상과 희망에 대해 마지막 당부를 하였을 때, 그는 진정한 선생님이다.
그러나 전교조 교사는 다르다. 웃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같으나, 마지막에 이르러 미군을 저주하고 투쟁을 선동하면서 젊은 피와 용기를 요구한다면, 그는 전교조다. 전교조는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부자를 증오하게 하고, 엔지니어와 농업인을 핍박받는 노동자라 부르게 한다. 세상이 다양성으로 가득하여야 할 때, 좌익은 노동자의 세상만을 가르친다.
1. 좌익들은 공격의 대상이 정해지면, 먼저 그 대상에 대한 전제 조건을 부정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예를 들면 미국에 대한 예를 보자.
‘미국은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원흉이다.’는 전제로 논리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미군은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로 결론을 맺는다. 그리고는 미군철수라는 선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군은 점령군이다. 물러가라.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맥아더다. 동상을 부숴라.’
(그러나 미국에 대한 전제조건은 어디까지나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국가로서 우리를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국가라는 점이다. 좌익들은 바로 이 시각에서 일탈한 논리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억지논리인 것이다.)
2. 노동자 농민이 핍박받는 계층이라는 논리도 부자와 자본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억지논리이다.
‘노동자 농민은 저소득층으로서 부자들로부터 노동력을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대상이다.’로 전제에 대한 부정적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해방되어야 하고, 이 해방은 자본가들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대개의 사람들은 이 논리의 전제 조건이 잘못되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세뇌되는 것이다. 그러면 좌익들은 여기에 투쟁의 당위성을 불어넣는다.
‘자본가는 스스로 그들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빼앗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투쟁이고 진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대개의 부자는 가난한 서민에서 출발한다. 일제시대 6.25를 거치는 동안 전통적인 지주는 산업화 시대와 맞물려 모두 사라졌다. 토지로 나타나는 전통적인 지주 계급의 부자는 사라지고 맨주먹으로 일어선 정주영과 같은 사람들이 재벌로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좌익들은 과거 농민이었던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농민이 가난하다는 단정도 수긍할 수 없는 조건이다. 쌀 직불금만 수천만 원에서 억대를 넘기는 농민도 있다.
이렇듯 진정한 선배나 교사는 국민과 학생의 미래를 진정으로 염려하여 아름다운 꿈과 용서와 포용을 가르치지만, 좌익들과 전교조 교사는 증오와 미움을 가르치고 학생과 서민을 투쟁의 이용물로 선동한다. 선(善)과 위선(僞善)은 이렇게 그 마지막이 다르다.
필자(筆者)는 북한의 말기적 현상을 깊은 통찰로 비판하는 좌익들을 본 적이 없다. 세상 어느 곳, 2300만을 노예로 부리는 나라가 있을 것인가. 그것도 세습노예로 말이다. 이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나라, 북한과 김정일에 대해 함구(緘口)로 일관하는 대한민국의 정당과 당원들.
자유대한민국의 풍요와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위선(僞善)의 탈을 쓰고 나라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그들이 바로 이 나라와 민족을 도탄에 빠뜨리고자 하는 우리 주변의 좌익들인 것이다.
(2008년에 쓰고 2020년에 다시 발표함)
2020.1.22.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