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8월 1일 일본 시모노세키에 마련 된 회담장에 이홍장이 들어섰다. 72세의 노쇠한 이홍장의 몰골은 비참했다. 지난밤 일본 극우세력의 단원인 로쿠노스케의 권총에 저격을 당하는 변을 당했고, 얼굴에 총알이 박힌채 피 묻은 붕대를 감고 회담장에 나타났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중국의 개혁에 일생을 바친 이홍장은 만감이 교차 되었다. 전력을 다해 육성한 북양함대는 영국함대와 견줄 수 있는 최신식 함대와 무기로 무장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에 전력적 우위는 무용지물이었고 함포 한번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궤멸을 당했다. 격침 되지 않은 군함 12척도 모두 나포 되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나포 된 12척의 군함도 일본이 압수하였다. 전투 중 사망한 함대제독 정여창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하라며 내어 준 한척만 쓸쓸하게 귀항 했다.
육군은 더욱 비참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사상자를 내며 항복했고 1만5천의 군사 중 살아서 만주로 후퇴한 병력은 2천에 불과했다. 요동에서는 2만이 넘는 군인과 백성이 전사했다.
병사는 훈련 되지 못했고, 군대의 부패와 무능은 극에 달했다. 압도하는 함대와 병력을 갖추었으나 봉건국가의 고약한 버릇 앞에 고작 신식군대는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에 불과했다.
오래 된 문명은 고약한 버룻만 남는다.
치유 불가한 고약한 버릇은 극단적 부패로 직결 되었다. 청나라의 민비 서태후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입맛에 맞는 조카를 골라 4살짜리 황제를 옹위하고 온갖 전횡을 부렸다. 필요하면 황제도 갈아 치웠다. 혀를 내두룰 사치는 피부관리를 위해 하루에 2번 6시간을 화장하는데 국고를 탕진했고, 한끼 식사에 농민 한명의 1년 치 끼니에 해당하는 128가지 음식을 올려 먹어 치웠다. 이화원(황실정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가예산의 30%를 탕진하였으며, 생일잔치를 벌리기 위해 최신식 군함 2척을 배치할 수 있는 군비를 빼돌려 탕진했다.
승전국 일본은 청나라를 철저하게 모욕했다. 강화조약 주관한 외무장관 무쓰 미네미쓰는 일개 장관 따위와는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며 재상인 이홍장을 불러 들였다.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모든 영향력을 거두고 물러날 것” “전쟁 배상금으로 3억냥(일본 1년 예산의 6배)을 배상할 것”,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등 국토를 할양할 것” 등 주권국으로서 받아 들일 수 없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홍장 저격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고에 일본의 고민은 깊었다. 본국을 방문한 사자를 저격한 것은 비겁한 행위였고, 세계여론의 악화가 두려웠다. 우발적 테러를 가한 저격범을 무기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부족했다. 얼굴에 총알이 박힌채 회담장에 나선 노쇠한 이홍장의 피 묻은 붕대를 바라보며 선심 쓰듯 1억냥의 전쟁 배상금을 깍아 주었다.
청나라는 한 때 세계 GDP의 30~40%를 차지하며 세계의 질서 중심에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개막장 국가 명나라에 비하면 월등했던 청나라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문명개화의 신천지에서는 한 마리 사냥감에 불과했다.
조선개혁과 문명개화의 마지막 불꽃이 될 수 있었던 갑신정변은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고종과 민비는 혁명가 척살을 위해 청나라에 구걸 했다. 이홍장이 내정간섭을 위해 조선에 주둔 시킨 고작 2,000에 불과한 위안 스카이부대에 매달렸다. 아무리 세상물정에 청맹과니 고종과 민비라 하더라도 폭풍처럼 불어 닥친 문명개화의 거대한 폭풍을 감지하지 못할 수 없었다. 거대한 폭풍을 감지하고 청나라를 불러들였다면 삼척동자 지능도 되지 못하는 천치이고 감지하였음에도 청나라를 불러 들였다면 자신의 개밥그릇을 지키기 위하여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탐욕에 미친 한마리 개에 불과한 것이다.
김옥균 등의 개화파에게 문명개화의 새로운 세상을 알려 준 것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개화파와 후키자와 유키치의 교류는 국가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들의 우정은 순수했다. 후키자와 유키치는 개화파의 주살에 식음을 전폐하고 삼일을 울었다. 김옥균 등 개화파를 신사유람단으로 선진 일본에 파견한 것은 조선이었다. 그들은 전지개벽한 일본을 보고 개화하지 못하면 조선은 필경 멸국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보빙사로 떠오르는 패권국 미국을 시찰한 이완용 또한 개화의 필요성을 조선에 알렸다. 이완용은 당시 조선 최고의 영어 능통자였다. 정작 일어는 단 한마디도 못했다.
친일파로 온갖 몰매를 맞고 있는 박중양은 일찍이 조선의 개화를 위해 분전했다. 그러나 희망이 없었고 조선을 병합하여 달라고 일본으로 달려가 청원했다. 고종과 양반이라는 기생충에게 빨리며 개돼지처럼 사는 백성은 차라리 그편이 훨씬 나았다. 박중양의 조선에 대한 질타는 매세웠다. 조선을 일본에 팔고 이완용을 매국노의 굴레를 씌운 비열한 고종에 대한 질타였다.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떄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1910.08.27. 한일합방에 대하여 일갈했다.
“조선의 국정은 희망이 없는 혼란 상태이다. 정부는 부패하고, 국민들은 노력을 하고자 하는 자극이 전혀 없다. 조선의 화폐시스템에서는 정직한 거래가 불가능하다. 또 국민이 부자가 되면 그 재산은 모두 기부하는 형식으로 강제적으로 국가에 몰수된다. 조선은 차라리 외국으로부터 현대적 행정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조선 국민들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면 대한제국 황제는 권력을 남용하여 국민들 착취하지 못하게 된다. 양반들도 더 이상 백성을 착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합병이 되면 조선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없어지지만 조선국민들은 일본의 지배하에서 보다 더 잘 살게 될 것이다”
참으로 통렬한 일침이었다.
고종은 을사보호조약이 자신의 의지와 달랐다면 스스로 배를갈라 군왕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개화파 삼족을 잡아다 죽이고, 서재필의 2살짜리 아들은 굶겨 죽이는 천인공노할 짓도 서슴치 않았다. 이런 권력이 미친 한 마리 짐승 보다 잔인한 악은 없었다. 청나라의 개를 자처하며 개화파를 척살한 그 죄는 만고를 이어 단죄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