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라면과 관련된 아주 특별한 추억이 있다.
내가 라면을 처음 만난 곳은 진해 해군병원 2병동 병실이었다.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라면이라고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귀국해서보니 매일 밤 전우들이 라면을 끊여먹더라는 거다.
그날 밤도 다른 날과 다름없었던 것이,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이 퇴근하고 밤이 깊어지면 우리 2병동 대실에서는 늘 그렇듯이 위생병들과 합작하여 라면 파티가 벌어진다. 경환자들이 주동이 되어 파티에 참여할 환자들에게서 돈을 모아 병원 PX에서 라면을 사서 끓여 먹는 식이었다.
원래 2병동이라는 곳이 정형외과여서 환자들 대부분이 팔다리가 잘렸을지언정 위장에는 별 이상들이 없었기에 소화에는 무리가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에 더하여 밤만 되면 상처가 쑤시는 바람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낮잠을 자게 되어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환자들의 잠버릇이 매일 밤 라면 파티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워낙 피를 많이 흘려 너나할 것 없이 갈비씨들이 되어있는 터라 밤중에 먹는 라면에 살이 찔까 두려워할 필요조차 없었을 거다.
그러나 라면 파티가 진행되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내게 있는 돈이라고는 입대할 때, 어머니가 주신 돈 500원짜리 지전뿐이었다. 어머니가 광주리장사를 하여 뼈 빠지게 고생하며 번 돈이다 싶어서 훈련소에서조차 아무리 배고파도 결코 쓸 수 없었던 500원짜리 지전을 마치 부적처럼 왼쪽가슴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가슴에 박힌 파편 때문에 피로 얼룩진 그 돈을 라면이 먹고 싶다고 쓸 수는 없었다. 피곤에 지친 어머니의 얼굴이 차마 쓸 수 없게 만든 거다. 그러니 내게는 그 빌어먹을 국수가 한 마디로 그림의 떡일 수밖에.
어머니가 진해해군병원으로 면회 오셨을 때, 그 피 뭍은 500원짜리 지전을 보시고는 얼마나 서럽게 우시던지 왜 잘 숨기지 못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나의 조심성 없음에 많이도 후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밀가루 음식을 엄청 좋아했던 내가 삼양라면이라고 이름 붙여진, 마치 곱슬머리처럼 꼬불거리는 라면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신 수병, 니는 와 라면을 싫어하노?”
불구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아서겠지만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하고서도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 내게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없는 터에 입대 동기 기수라 하여 친하게 지내던 경환자 전우의 질문이 철이 없이 느껴져서 웃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 되고는 했었다.
“아이고 내 아들아, 얼마나 아팠노. 전쟁이 뭐간데 내 아들 손가락을 잘라갔단 말이고.”
팔다리가 잘리고 허리가 꺾어진 병사들을 옆에 두고도 고작 엄지손가락 하나 잘린 자기 아들만이 안타까운 것이 어머니들의 마음인가. 침대 앞에 제사상 차리듯 통닭이며 소고기며 기름기 잘잘 흐르는 온갖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통곡을 거듭하는 어머니들이 허다했었다.
경환자 전우의 질문 끝자락에 그런 어머니들이 연상되어 오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아마도 철없기로는 그 어머니들이나 경환자 전우가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있어서 그랬을 거다.
베트남에서 같은 중대 RKT무반동총 사수였다가 오른쪽 팔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고 나보다 먼저 후송되었던 최 수병이 외출에서 귀원하면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신 수병. 라면 싫어한다며?”
“먹어본 적도 없는걸요.”
“……돈이 없구나?”
가진 돈이 없음을 간파해낸 최 수병에게 씩, 웃어주는 것 외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파월부상병들 대부분이 보상금을 은행에 맡겨놓았기 때문에 이자가 나오고 있지. 그래서 이 방에는 용돈 없는 병사가 없는 거야. 우리병동 전우들이 신 수병도 파월 전상자기 때문에 당연히 용돈이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배려하지 못한 거지. 아직 보상금이 나올 시기가 아닌데 말이야.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군.”
“그런데, 왜 제가 라면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지요?”
“권 수병에게 들었어.”
최 수병은 천 원짜리 몇 장을 내 손에 쥐어주고는 거절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돌아섰다. 당시 화폐가치로는 몇 달 이상을 라면파티에 참가해도 남을 돈이었다.
‘이것 참.’
당시의 나로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정말이지 이 돈을 써도 되는 것인지조차 걱정스러웠다.
어쨌든 최 수병 덕분에 나도 매일 밤, 라면파티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 기막힌 맛에 살아 돌아오기를 잘했다 싶었는데 그런 라면이 지긋지긋한 혐오식품이 되어버린 건 대학 다닐 때였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비야, 국가에서 부담해준다지만 먹고 자는 것이 문제였었다.
강원도 춘천 변두리의 지긋지긋하게도 가난했던 우리 집 경제형편에 서울에서 하숙이나 자취하라고 방을 얻어줄 처지가 되지 못 했기에 학교 야간 경비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의과대학 반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명색이 국가유공자라고 학교에서 크게 배려해준 셈이었다.
낮에 강의 들으랴, 밤에는 그 드넓은 캠퍼스를 네 차례 순찰 돌랴, 정신이 없었다. 뭐,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족을 착용한 다리로 그 넓은 교정을 어찌 다녔는지 어이없게 느껴지기는 한다.
더구나 학비 외에 평균 B학점 이상이 되었을 때 보훈처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이 가난뱅이 고학을 하는 늙은 대학생에게는 책을 사볼 수 있는 너무나 큰돈이었기에 학점관리를 하느라 죽사사자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
잠잘 시간마저 4시간 이하로 절약해야 했으니 밥과 반찬 만들 시간조차 없었다.
그 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 라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렇지 4년 내내 라면만 먹어보라. 냄새조차 싫어지는 게 당연지사.
나중에는 라면 특유의 냄새를 없애느라 북어도 넣어보고 수위아저씨들에게 얻은 김치를 왕창 넣어보기도 했지만 그 맛이 어디 가겠는가. 그런 처지에 어쩌다가 수위아저씨네 집에 초대되어 밥이라도 얻어먹는 날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내 체질과 라면의 궁합이 맞지 않아서였는지 나중에는 얼굴이 검게 변질되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라면을 사절하고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기도 했었다.
어쨌든 나의 대학생활 4년 간 나로 인하여 수위아저씨들과 학생들 간에 끈끈한 정이 싹트는 등,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었지만 허구한 날, 라면만 먹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우리 과 학우들이 가끔 식당에서 백반을 사주기도 했으니 청소년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나머지 삶은 나도 남을 도우며 살자,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건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을 돕기는커녕 여전히 도움을 받는 처지인 것만 같아서 씁쓸하기는 하다.
지금의 내 생활을 영위시켜주고 있는 국가유공자 연금이라는 게, 우리 국민들 모두가 내준 세금임에야, 결국 국민 덕분에 먹고 사는 게 아니겠는가.
그럼 대학 4년 간 열심히 먹었던 라면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라면은 중국과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 하면 자장면부터 생각날 만큼 면이 흔한 나라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우리가 먹는 인스턴트라면은 일본에서 개발되었다고 한다.
어원으로 보자면 중국어 ‘라미엔’을 생각하게 되는데 ‘라미엔’이란 면발을 뽑을 때 가닥수를 늘려 뽑는 면을 말한다. 그 ‘라미엔’이 일본으로 건너가 ‘라멘’이 되고 한국으로 와서 ‘라면’이라는 호칭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건 내가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렇다고 쓴 걸 읽은 것이니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은 라면을 아예 가까이 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이 아니라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라면과는 안녕을 고하고 말았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매우 끈질겨놔서 지금도 라면을 먹는 사람들을 볼라치면 뱃속이 니글거리는 느낌이다. 마치 경끼를 하듯 몸서리가 쳐진다는 거다. 뱃속이 니글거리는 거로 친다면 라면뿐만이 아니다.
나에게는 돼지 삼겹살도 라면만큼이나 혐오식품이다.
삼겹살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 직원회식 때마다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는데, 베트남에서 고기에 질렸는지, 쇠고기는 그나마 먹겠는데 기름기 있는 음식은 그야말로 질색일 만큼 싫어졌었다. 고기를 애써 피하지는 않지만 돼지고기만은 여전히 무의식중에 사양하게 된다는 거다.
글쎄, 누군가 ‘많은 사람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개고기는 먹으면서 삼겹살이 싫다고?’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지 어쩌겠는가.
요즘 나는 느끼는 게 있다. 라면이나 삼겹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강박관념이 아니겠나 싶다는 거다.
나의 삶에 강박관념이 어찌 라면이나 삼겹살에 국한하겠는가.
내가 어느 순간 ‘이건 이래’라고 정해버리면 그것이 진리인양 다른 것을 보려하지 않음을 나 스스로 알아차리고 쓴 웃음을 머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정한 원칙에 나 스스로를 결박하는 감옥생활을 자청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나이 70 넘도록 무던히도 생각했건만 여전히 이리도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으니 한심하기는 하지만, 뭐, 내가 그렇다는 걸 알아차렸으면 변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내가 싫어해왔던 모든 것들……, 또는 좋아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의 관념을 깨부숴보고자 한다.
시작은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보자. 오늘, 동네 어르신께서 족발 먹으러 가자하시니 우선 돼지족발을 먹는 것부터 시작해봐야겠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