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촛불집회에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참석한 어머니들을 보며 한탄한 적이 있었다. 유년기의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콤플렉스가 있다.
나이 70을 넘기면서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듯싶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평생을 잠재의식으로 지니고 살아온 열등감이었을 것이다.
그 콤플렉스란 우습게도 여성기피증이다.
지구인구의 반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말도 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이상한 기피증이 생긴 원인을 스스로 찾아보기는 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남녀 분반(分班)을 시키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교육 때문에?
너무 가난했던 청소년시절 먹고살기도 바빴기에?
나이 스물에 한쪽 다리를 잃는 불구자가 되었기에?
평생을 전쟁하듯 치열하게 사느라 바빠서?
혹 나에게 호머기질이라도 있어서?
글쎄, 유교적 교육 때문이라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당시 나만 그런 교육을 받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뭐, 여성들에게 인기 얻을 성격이 되지 못했는지, 내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남녀공학인 대학 다닐 때에도 여학생들과 친했던 기억이 없기로는 마찬가지기에 하는 말이다.
가난했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밥벌이에 학비 버느라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지만 툭하면 텐트 치는 바람에 난처하던 그 팔팔한 청소년시절, 여학생과 데이트하는 상상조차 못했다면 말이 되는가.
여학생과 데이트 하다가 걸리면 처벌로 정학받던 시절이었으니까 핑계거리는 될 듯싶기도 하다.
장애자가 된 것 역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내가 장애를 입은 것이 60년대. 당시에는 대중목욕탕이라도 갈라치면 마치 흉물스런 파충류라도 들어온 듯 사람들이 나를 피하던 시절이었으니 나를 상대해줄 여자가 있으리라 기대할 수도 없었을 터.
그러나 장애를 입어 함께 해군병원에 입원했던 전우들이 멋진 아가씨와 데이트했던 것을 보면 그 또 한 결정적인 원인이 아닌 것 같다.
직장생활에 바빴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바쁜들 연애할 시간조차 없었겠는가.
평생 담당했던 일이 문화예술관련 업무였던 데다가 특히 국내, 국제적인 공연예술 기획업무를 맡았었으니 어차피 일 자체가 여자들과 무관할 수 없었다. 전통무용단을 인솔해서 국내와 해외순회공연을 한두 번 다녔는가.
그럼에도 일밖에는 몰랐으니까. 오죽하면 별명이 일 중독자였을까.
호머기질은 더더욱 아니다. 나만큼 남자다웠던 친구들이 드물었던 데다 의리나 우정 따위는 엄청 찾았어도 단 한 번도 남자를 대상으로 성적 호기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뭐,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의리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을 정도니까 동성애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신앙은 없으되 평생 성서말씀을 삶의 판단기준으로 삼았던 내가 동성애라니 말이 되겠는가.
갑자기 명예퇴직이라는 걸 한 뒤 그동안 쓰고 싶었던 소설이나 써볼까 싶어서 강원도 정선 산골에 폐가 하나를 빌어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세 달 간 파묻혔었다.
쓰고는 싶었으되 문화예술인들을 돕는 직책을 맡은 자가 스스로 이름을 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에 미뤘던 일이었다.
소설이라고 해봐야 고작 자서전 수준이었을 텐데 지난 과거를 더듬던 어느 순간 갑자기 터진 슬픔에 걷잡을 수 없는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어떤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휴전 직후였을 것이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가 부산항만사령부에 근무하실 때, 부산 범일동에서 살았었는데 우리 집에는 누런 똥개 한 마리가 있었다.
덕구라고 불렀던 이 누렁이는 큰 귀가 축 늘어지고 덩치가 송아지만큼은 커서 어린 내가 말 타듯 타고 다니던 녀석이었다. 워낙 내가 좋아하는 개라서 아버지가 전속 갈 때마다 가족과 다름없이 군용 지프에 태워 이사 다닐 만큼 오래도록 키웠더니 이 녀석이 늙어갈수록 눈치가 빤해져서는 능글맞게 구는 통에 이제는 처분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을 때였다.
그렇게 능구렁이던 덕구가 내게만은 어찌나 충직했던지 앉으라면 앉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만큼 말을 잘 들었고 혹여 머리가 큰 아이들이 나를 해코지할라치면 여지없이 물어버리는 바람에 어머니를 곤혹스럽게 만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개에게 물렸을 때에는 그 개의 털을 태워서 상처에 붙이는 것이 덧나는 것을 방지하는 비법이었기에 덕구는 늘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털이 깎여 군데군데 속살이 보이던 그런 녀석이었다.
"허 그놈 참말로 맛있게 생겼데이."
워낙 덩치가 큰 누렁이인데다가 이마에 흰점까지 박혀 있어서였는지 지나가고 오던 보신탕 파들이 너나없이 그렇게 군침을 흘렸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아버지가 의논한 끝에 덕구를 하필이면 앞집 보신탕집에 팔기로 합의하자 눈치 빠른 덕구가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계약금을 보신탕 집 주인에게 되돌려주면서 난처해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덕구가 집을 나간 후 나는 밤마다 부엌에 잘 모셔둔 밥을 훔쳐서 이웃동네 다리 밑에 숨어있는 덕구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
꼬리도 길면 밟히는 법. 이상하게 생각했던 어머니가 형에게 내 뒤를 밟으라고 말씀하셨던 모양이다. 갑자기 내게 협상을 걸어오신 것을 보면 말이다.
"덕구를 팔지 않을 터이니 데리고 들어와."
"정말요?"
"그럼, 엄마가 약속할게."
어머니는 그렇게 다짐했었다. 물론 내가 아니면 누구도 약아빠진 덕구를 잡을 수 없었기에 그런 약속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약속을 믿고 덕구를 데리고 들어온 나나 내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온 덕구, 우리 모두가 배신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처음 경험하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집 마당 옆 보신탕 집 뒤뜰에서 덕구 목에 철사 줄을 걸어 나무에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죽일 것은 무엇이었을까. 처절하게 깨갱거리며 피를 토하듯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덕구 몸에 매달려 몽둥이찜질을 대신 당하겠다는 듯이 울부짖는 나를 떼어내느라 동네 장정들이 다섯 명씩이나 동원되었다던가.
"요게 옆집 그 누렁이라 이거제 참말로 오늘 몸보신 제대로 하겠데이."
지껄이며 낄낄거리며 얼굴에 번질번질 흘러내리는 개기름을 닦아내며 걸신들린 듯 덕구를 먹어대던 장정들이 내 눈에 얼마나 미워 보였던지.
나는 덕구가 이미 사람들의 뱃속에서 소화되어 변이 되고도 남았을 몇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었다.
어느 날 눈물을 거둔 이후부터 그렇지 않아도 말이 없었던 내가 아예 입을 봉하고 혼자만의 세계를 형성해 버린 애어른이 되고 말았던 것이 이곳 평창에 정착하여 마음을 열기 이전까지의 성격이었다.
혹 나의 여성기피증은 덕구를 팔아먹은 어머니로부터 기인했던 것은 아닐까? 철도 들기 전 처음으로 경험했던 배신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여자, 여자는 믿을 수 없는 존재, 그런 잠재의식이 나를 지배했던 것일까.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판단능력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었기에 여자는 신뢰할 수 없다는 그런 잠재의식이 마음 속 깊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는 여자라면 여동생도 있고 함께 일했던 여직원들도 있으며 이래저래 여러 가지 일로 만났던 여자들이 없지 않지만 평생 여자로 만났던 상대는 마누라밖에 없었을 만큼.
하기야 그 마누라도 어느 순간부터 여자가 아니라 그냥 마누라로 정착하고 말았지만.
평창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암말기로 투병하시던 어머니를 모시고 이런저런 옛이야기들을 하던 차에 덕구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어머니와 나, 집사람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해할라치면 모두가 어려웠던 전후시절에 덕구를 팔아먹은 것이 그리도 가슴 아픈 문제였을까. 북한 동포들은 형제조차 먹이로 보일만큼 굶주림에 죽어가던 적도 있었다는데. 듣는 분들에 따라서는 사춘기 청소년들도 아니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일로' 라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모두가 한바탕 울고 난 이후에서야 내 마음에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잘못된 기억은 이렇듯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일까.
이미 지난 일임에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서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옛날 애기지만 이명박 대통령 취임초기 광우병 촛불광란을 보고 느낀 거다.
간난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앞세우고 촛불시위에 참가 하는 어머니들과 어린이들에게 전경을 욕 하도록 부추기는 어른들, 어린이들에게 대통령을 욕하도록 사주하는 인간들을 보았던 기억이 10년이 지났음에도 선명하게 기억할 만큼 오싹하는 전율을 느낀다. 이미 인성이 마비된 괴물을 만난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나쁜 사람일지라도, 전경들이 아무리 원수처럼 보이더라도 내일의 이 나라 주축이 될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을 욕질하게 가르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혹 그들이 사회를 장악하더라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자들이 주인이 된 이 사회가 어떠하리라 생각하는지 의문이었었다.
더구나 태아교육까지 하는 시대에 아직은 자의식이 갖춰지기 전인 간난아이를 시위현장에 앞세우는 어머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머니는 그런 기억이 잠재의식으로 정착해버린 자신의 아이들이 어떤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종북반역세력들이 퍼뜨린 헛소문을 듣고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듯 간난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시위현장에 나온 어머니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었다.
간난 아이기에 기억에 없을 거라고?
과연 그럴까?
굳이 아동심리학까지 동원할 생각 없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부모의 심적인 동요가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논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어머니와 어른들, 그들의 목적에 이용당하는 간난아이들과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비록 지금은 나의 오랜 강박관념에서 해방됐다고는 하지만 기억으로 남아있는 덕구와 그로인해 왜곡된 내 삶이 있기에.
그 당시 촛불광란을 펼쳤던 자들과 다름없는 촛불광란이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들의 소원대로 지금 문재인이 정권을 잡아 자유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 사회정의를 망가뜨리고 있음에도 박수갈채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는 정신 나간 무리들이다.
그들은 문재인을 앞세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갓난아이조차 이용하는 냉혹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이지 엉망이 되어가는 한국이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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