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 사실인가? 부산 강연
1. 부마사태에 따른 위수령 선포와 공수부대 투입으로 부마사태는 조기에 진정되었다.
2. 군은 공수부대의 탁월한 소요진압능력을 과신했고, 민심은 반대로 흘러 강경시위진압의 공수부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문제점 >
1.
5.18 광주사태에서의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보이지만 잘못된 분석으로 보인다.
2.
부마사태, 사북탄광소요사태, 광주사태는 애초부터 여느 민주화운동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 출발부터 거침없이 파출소를 전소시키는 등 폭력적인 소요사태로 내달렸다는 점이 그것이다. 민주화운동의 틀을 가볍게 벗어난 것이었다. 경찰력의 한계가 노정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게된 것이었다. 공수부대의 부마사태 과잉진압이 군에 탁월한 소요진압능력을 확신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은 무리한 분석이다. 내부분열이 일어나 박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사태를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박정권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3.
산발적 증언에 따르면 부마사태 폭력화에는 침투된 북괴간첩의 공작이 개입했다. 이들중 7명은 이후 광주로 침투한 것으로 주장된다. 사북사태 역시 북괴의 개입이 있었지만 부마사태와 광주사태와의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주장된다. 별개의 조직이 개입한 것으로 설명된다. 이 당시 북괴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대남총책)은 김중린이었으며, 79년 5월이후 북괴 특수군 총책(인민군 제2 총참모장)은 김철민 상장이었다.
1. 공수부대는 시위진압훈련을 받은 부대가 아니었다.
2. 공수부대는 자신만만했었다. 계엄령하에서 공수부대가 출현하면 시위가 없을 줄 알았다.
3. 공수부대는 방석모가 없었고, 실탄없는 총에 곤봉과 대검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4. 학생시위대가 공수부대에게 투석전을 펼치자 자기보호구가 없는 공수부대가 강경진압에 나섰다.
5. 광주사태 민간인 희생자 166명중에 27구가 사망자 검안결과 곤봉에 의한 두부손상과 대검에 의한 자상으로 나타났다.
6. 금남로에서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강경진압은 시민을 흥분시켰다.
7. 광주사태의 발발 및 폭동화 원인을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이를 본 흥분한 시민의 궐기에서 찾고 있다.
<문제점>
1.
5.15일 서울역 대규모 시위도 김대중의 국민연합이 배후조종하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김대중의 국민연합과 학생들은 국민적 합의로 볼 수 있는 직선개헌을 반대하고 계엄령 철폐와 최규하정부의 무조건 퇴진을 요구했던 것이다. 직선개헌-대통령선거-새정부구성이 아니라 정권퇴진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전국적인 정권타도 총궐기투쟁을 벌이겠다는 내란선동과 협박을 정치노선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학생10만,시민 30만이 있었지만 학생시위를 지켜보는 시민의 시선은 냉랭했다. 학생들을 꾸짖는 시민도 있었다. 서울시위는 경찰력이 무력화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대규모 학생시위로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데 실패했다.
2.
광주에서는 5.16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화형식을 치뤘다. 5.16이후 대한민국의 헌법적 질서를 통째로 거부한 것이었다. 전국적인 정권타도 총궐기투쟁의 선봉은 광주가 될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에 속한 것이었다. 그만큼 서울 민심이 안 좋았고 부마사태로 10.26이 야기된만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이번에 광주가 큰일을 해야한다는 정치적 역학도 작용하고 있었다. 김재규 선고와 처형일 등이 점화기폭제로서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였다.
3.
호남을 제외한 전국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 80년 서울의 봄이 닫힌 것으로 인식했다.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민주화의 봄 공간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국민의 공감없는 시위로 소일하고만 것이었다. 반면 광주를 위시한 호남은 정권타도투쟁의 시작으로 보았다.
4.
5.17비상계엄 확대조치는 전군지휘관회의 소집후 결정된 국군에 의한 3김의 정치적 영향력의 붕괴이며 답없는 혼란 분열의 청산조치였다. 87년에서 보듯 직선제 합의개헌으로 수렴시키지 못하고 5.16이후 헌정질서를 통째로 부인하고 정권타도투쟁의 기치를 내세운 국민연합의 공공연한 과격노선에 대한 선제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5.
광주 5.18은 이와같이 서울의 봄이 국민적 합의의 결실을 보지못하고 닫혀버린 공간에서 일어난 정권타도 폭력노선의 분출이었던 것이다. 계엄군에 대한 투석전은 그 이전까지 빈발했던 경찰과 학생의 투석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전자가 투석전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이라면 후자는 내란,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선도적 투쟁이었던 것이다. 시위대는 이미 시민군으로 조직돼 무장할 만반의 사전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한 각종 증언이 존재하는 것이다.
6.
경찰관이 이미 4명이나 시위대에 의해 사망하고 공공건물에 대한 방화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경찰력이 무력화되어 계엄군이 투입된 상황은 민주화운동을 진정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내란봉기를 강경진압하는 수순으로 자동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실탄이 지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폭력적 소요에 대하여 군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강경진압밖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다.
결론
광주사태의 총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공론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사실과 증언들을 합리적으로 포섭하지 않으면 아전인수 궤변으로 전락한다.
성역화 아니면 폄훼가 목적이 아니라 진실규명을 통한 재조명 및 제자리 찾기가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