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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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조선소 건설과 원자력 발전소 건설
박 대통령은 세율을 10% 로 결정하고 7월 시행을 재확인하는 결단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이날 회의는 부가가치세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1978 년 12 월 12 일 시행된 제 10 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여당인 공화당은 68 석, 야당인 신민당은 61 석, 통일당이 3 석, 무소속이 22 석을 차지하게 됐으니,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된 것이다. 경악한 공화당은 선거의 패인을
부가가치세와 물가상승이라고 주장하고, 그 책임을 경제팀에 돌렸다. 사태의 심각성에 충격을 받은 박 대통령은 12 월 23 일, 11 부 장관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그에 따라, 경제장관 대부분이 경질됐고 경제통인 청와대 김 정렴 비서실장도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부가가치세는 살고, 그를 탄생시킨 경제 각료들은 물러나게 되었는데,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떠나게 됐으니 별로 아쉬울 것도 없다고 자위했다.
퇴임 인사를 하러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에게 나의 불민(不敏)을 사과하자, 대통령은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내밀며 의외의 말씀을 했다. “그놈의 정치를 하자니 별수가 없지 않소. 그동안 수고가 많았는데, 한 두어 달 쉬게 할 터이니 그동안에 지방을 돌아보고, 그 실상을 나에게 보고해 주세요.” 경제특보로 들어와 보니 정보보고 읽고, 정국 난기류 실감 朴대통령 “헌법 바꾸고 물러날 것” 법률특보 통해 개헌작업 물밑추진,
나는 비로소 정국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대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끝에 특보들끼리 대통령을 어떻게 보필해야 할 것인지, 토론하기도 했다. 나는 먼저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느 날, 대통령과 특보들이 식사를 같이하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정국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원수 자신이라기보다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36> 안정화 시책과 투자 조정. 재무악화 중화학 구조조정 불가피.
옥포조선소 현장을 둘러본 朴대통령,“조선공사는 그냥 놔두자” 지시도 1978 년 12 월 14 일, 4 년 3 개월 만에 부총리 자리를 뜨게 됐다. 나의 후임자인 신현확 부총리는 1979 년 4 월 17 일 ‘경기안정화 종합대책’을 발표했고, 여기에는 생필품의 수급 원활화 및 이를 위한 규제 완화, 재정 - 금융 긴축, 중화학 투자 조정, 부동산 투기 억제, 영세민 생활 안정대책 등이 망라됐다. 5 월 25 일에는 중화학[重化學] 투자
조정계획을 발표해 발전설비 사업을 현대㈜와 대우㈜로 이원화했다. 디젤엔진 제작을 위한 신규 투자를 인정하지 않고, 현대양행 중장비 엔진공장 건설계획을 백지화하기로 했다. 자기자본 부족과 단기 융자를 장기 투자에 투입한 데에서 온, 재무구조의 악화 때문에 일부 기업이 문제가 되면, 중화학공업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는데 이는 나의 임기 중에도 가장 머리 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당시 한국조선공사 남 궁련 회장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옥포(경남 거제시)에 거대한 조선소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재무구조 악화로 도저히 이 사업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경제장관회의에서 대책을 논의한 결과, 한국조선공사와 옥포조선을 한데 묶어 대우에 넘기기로 결론이 났다. 지난 칼럼에서 1978 년 여름 부동산 투기 방지 대책의 재가를 받기 위해 대통령 피서지인 저도에 갔던 일을 이야기했는데,
그때 옥포조선소에 관한 안건도 함께 가지고 갔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안건을 보고하자, 대통령은“여기서 가까우니 한번 가보지”하고 비서들에게 출발 준비를 명하는 것이었다. 해상에 거대한 부교를 만들어 핵발전소[核發電所]를 건설할 계획이었는데, 원래 이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 여러 개의 원자력발전소[原子力 發電所]를 세워야 하는데, 육지에 건설하자면 주민들의 반발이 예상됐고,
외국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어 하나의 해결책으로 해상에 거대한 부교(浮橋)를 만들어, 그 위에 발전 시설을 올려놓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박사들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때 남궁 회장은 그런 부교를 만들 수 있는 선거(船渠·dock)의 폭이 넓은 조선소를 건설하겠다고 신청해왔고, 정부는 그 점도 고려해 신청을 허가했던 것이다. 대통령은 묵묵히 현장을 바라보더니 “남궁 회장이
그동안 일을 많이 했군, 조선공사는 그냥 두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조선공사는 남궁 회장 손에 남게 됐는데 그가 별세한 후, 결국 한진[韓進]으로 넘어갔다. 박 대통령은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 후 1978 년 12 월 제 2 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신 부총리는 탁월한 행정가였다. 10 월 26 일 박 대통령이 시해되는 비극이 발생한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해, 국무총리로 임명돼
그 엄청난 위기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조용히 물러났다. “대통령특사로 중동에 가다” 쿠웨이트 - 카타르와 협상 퇴짜 맞고 사우디서 “새마을 농민파견” 요청 원유 5 만 배럴 추가공급 약속받아 파드 왕세자를 예방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용건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호의적으로 대답하고 뜻밖에도 한국에서 새마을운동을 하는 농민 몇 사람을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해 줄 수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귀국 즉시 대통령에게 말씀드려, 꼭 보내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기쁜 마음으로 궁전에서 물러나왔다. 곧바로 유 양수 대사는 석유부 실무자들과 협상해 1 일 5 만 배럴의 추가 공급계약을 얻어냈고,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답서를 갖고, 귀국길에 올랐다. 왕의 친서는 매우 정중했고,“각하의 친서에서 언급한 원유 분야에 있어서 특별한 배려를 할 것임을 각하께 다짐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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