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Digest-62-
*고인, 스쯔라의 遺志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에 있어 행복이, 생각한 바를 실현하고 그 뒤 오는 것이 편한 침상에서의 죽음이라면 루키우스 코르네리우스 스쯔라는 자기평가대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특히 公人으로서 뜻한 바를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고 그 뒤 오는 죽음도 비명의 죽음이지만, 그가 속한 공동체의 장래가 뒤에 그의 뜻한 바를 이룬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인가 불행한 사람인가 나는 스쯔라를 보면서 박정희를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두 번이나 쿠데타를 이르켜 스스로 독재관이 되어 4백 여년 내려온 寡頭政의 共和政體制의 유지를 위해 전제군주 같은 一人 독점적 통치체제를 거부하고자
애쓴 스쯔라의 노력의 결실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쯔라가 유언집행인으로 지정한 오랜 심복 루키우스 리키우스 루크루스는 폰토스王
미토리다테스 제압을 위해 오리엔트에 7년간 발이 묶인 동안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새
로운 심복 폼페이우스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구네우스 폼페이우스 스토라본이 로마 무대에 등장한 것은 스쯔라가 이탈리아에 상륙한 BC.83년 3개 군단을 이끌고 스쯔라軍에 합류한 약관 23세때이다.
스쯔라에게는 제1심복 루크루스와 킨나 독재시절 스페인으로 망명했던 제2심복 마르쿠스 리키우스 크락수스가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 두 심복을 제치고 뛰어난 전술구사로 스쯔라의 핵심이 되고, 이후 지중해전역에 준동하는 해적 소탕전에 성공하고 또 스쯔라軍 철수 이후 再起한 폰토스王 미토리다테스를 완전 제압 함으로써 오리엔트에 평화를 회복하는 등 새로운 로마의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폼페이우스와 크락수스 兩頭의 등장은 앞으로 전개될 공화정로마 세계의 三頭政 시대를 여는 전조이기도 했다.
한편 나머지 一頭가 되는 카에사르는 연령으로 보아 양두보는 6년 이상 아래여서 年功序列이 엄격한 공화정로마의 정치무대에는 아직 으름을 올리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군단 지휘 경험도 쌓지못한 처지였다.
때문에 여기서는 로마의 삼두정 이야기에 앞서 당시 로마의 영웅시 되고 있는 역전의 명장 폼페이우스 이야기부터 들어 보기로한다.
*폼페이우스의 천재적 軍事才能
스쯔라에 의해 일찌기 재능이 발견되어 발탁된 폼페이우스는 內戰이 일단락되자 아프리카로 도주한 反스쯔라파 잔당을 추적, 소탕하고 귀국했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나이 25세, 스쯔라는 이 젊은 용장에 소원대로 개선식 거행을 허가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조차 없었던 로마사상 초유의 쾌거였다. 스쯔라는 폼페이우스를 마뉴스, 영어의 The Great 존칭까지 붙여주면서 극구 칭송했다.
폼페이우스는 BC.77년 전집정관으로서 알프스 서방 갈리아 南佛屬州 총독으로 부임하게된 레피도우스가 집정관으로서 제안한 바 있던 4개 항의 反스쯔라法案을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던 시도를 간단이 분쇄했다.
집전관 카토우루스로부터 실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레피토우스군을 속공전법으로 간단히 제압했고 체포를 모면한 레피토우스는 사르데니아島로 도망갔으나 얼마 후에 병사했다.
레피토우스의 부장 부르터스는 폼페이우스軍에 붇들려 살해되었다. 후에 카에사르 암살 주모자로 이름을 날린 부루터스는 일곱살에 아버지를 잃게된 것이다.
집정관, 법무관, 전 집정관, 전 법묵관에만 戰略軍團의 총사령관으로서 절대지휘권이 부여되는 것이 공화정로마의 규정이지만 폼페이우스는 초기官職인 회계검사관이나
按察官 경력도 없을뿐만 아니라 연령도 약관의 29세였다.
결국은 내전이라는 비상상황 하에서 아무런 관직 경험도 없는 폼페이우스의 등장으로 로마의 전통이 깨지는 부작용을 냈지만 원로원은 방법이 없었다. 공하화정로마에 반기를 들고 스페인으로 도망간 민중파의 전직 집정관 세르토리우스를 치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로마 전통상 자격 미달이지만 전권을 부여받고 스페인에 파견된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에서 스페인까지 보통이면 2개월이면 충분한 거리를 1년에 걸쳐 답파했다. 그는 세르토리우스가 스페인에서 현지 원주민들에게 독립하자며 많은 원주민 병사를 모집하여 로마군에 게릴라전법으로 대항하는 상황에서 보급의 현지 조달이 어렵다고 판단, 로마로부터의 보급로 개척이 설결문제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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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는 보급전략상 얼마 전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토리노를 기점으로 알프스산을 넘어 南佛을 거쳐 피레네山脈 넘어 스페인 戰地까지 도로를 닦으며 진군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지세가 험준한 스페인에서의 반군 토벌은 쉽지않았다.
그러나 현지 전임 군단 메테루스 피우스와의 공투작전으로 스페인 내 세르토리우스反軍 토벌에 성공한 것이 전선 도착 3년째인 BC.72년 늦가을이었다.
반스쯔라였던 것말고는 로마에 충성스러웠던 쿠인토우스 세르토리우스는 그의 부장 페르페르나에 의해 암살되었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 두 장군의 전승보고를 받은 로마 원로원은 안도는 했으나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 1년 전 BC. 73년부터는 로마를 들끓게한 대규모 노예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커스의 亂이라고 사상 유명한 劍鬪士들의 봉기가 그것이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옛날 그리스-로마文明을 접하는 것은 2천 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아 있는 장려한 유적이나 미술관을 가득 메우는 조형미술과 교양으로 배우는 철학이나 역사 문학 등을 통해서이다.
한편 고대 유물들을 감상하면서 감탄과 동시에 의문을 갖게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이만큼 세련된 문화를 구축한 그들임에도 어째서 비인도적 노예제도에는 의심조차 갖지 않았는가?
다음은 우리가 영화로도 충분히 봤음직한 로마의 <스파르타커스의 亂> 이야기를 막간으로 들어볼까 합니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