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제기] 濟州 4·3평화공원 ‘不良 위패’ 논란
“폭동 주도자·적극 가담자 위패 900基 있다!” (제주 4·3정립연구유족회)
글 : 朴熙錫 月刊朝鮮 기자
⊙ 金大中, “제주 4·3은 공산당 폭동으로 일어나”(1998.11.23, 美 CNN과의 인터뷰 中)
⊙ 폭도 수괴 李德九, 1948년 10월 “大韓民國은 괴뢰”라며 선전포고
⊙ 南勞黨 간부, 폭동 주도자, 프락치까지 安置
⊙ “4月 3日 추념일 지정은 憲法정신 否定하는 것”(朴贊植 前 제주도 부지사)
4ㆍ3평화공원은 위패봉안실(좌)에 ‘4ㆍ3 희생자’ 위패(우) 1만3968기를 안치하고, 이들을 추모하는 시설이다.
정부가 올해부터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를 주관한다. 지난 1월 17일, 안전행정부는 매년 4월 3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을 입법예고했다. 국가기념일 명칭은 ‘4·3 희생자 추념일’이다.
안전행정부는 ▲법제처 심사 ▲차관회의 ▲국무회의 ▲대통령 재가 및 공포 등의 절차를 거쳐 오는 4월 3일 이전에 국가기념일 지정을 완료할 계획이다. 안행부가 갑자기 4·3 국가기념일 지정에 속도를 낸 이유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朴槿惠) 새누리당 후보의 공약이었기 때문이다.
‘4·3 희생자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면 제주도 제주시 봉개동 소재 4·3평화공원에서 봉행하는 위령제는 국가 단위 행사로 격상한다. 정부가 행사 기본계획을 세우고, 소요 경비를 국고(國庫)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같은 정부 조치에 대해 새누리당은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월 16일 새누리당 제주도당은 “도민들의 숙원이 풀리고, 100% 도민 화합의 위대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주당도 이날 논평을 내고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할 일”이라며 “4·3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일부라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4·3사건 발단은 南勞黨 무장대의 ‘建國 방해’ 폭동
그런데 ‘4·3 희생자 추념일’ 지정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목소리도 있다. ‘기독교사회책임’ 상임대표 서경석(徐京錫) 목사는 인터넷매체 《업코리아》에 “왜곡된 4·3보고서에 기초해서 잘못 결정된 희생자를 작년 6월에 여야 합의로 추념하기로 한 것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큰 잘못”이라며 “안행부에 ‘4·3 희생자 국가추념일 지정 연기촉구 의견’을 보내달라”는 호소문을 올렸다.
이 같은 의견은 제주도에도 없지 않다. 4·3사건 당시 군경(軍警)·양민 희생자 유가족이 결성한 ‘제주 4·3정립연구유족회’도 “아직 제주 4·3사건 성격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념일 지정을 선행하는 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며 지정 연기를 촉구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선 ‘4·3’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4·3’의 성격을 공식적으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3년 12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고건(高建) 당시 총리조차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서문에서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며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결국 4·3은 부르는 사람의 이념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백비(白碑) 앞 표지석 문구가 대변한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백비,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 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표지석의 문구처럼 우리 사회에선 자신의 이념에 따라 ‘4·3’을 폭동 혹은 민중항쟁이라 칭했다. 그러나 ‘4·3’은 ‘항쟁’의 성격을 갖지 못한다. 사건의 발단이 남조선노동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제주도당 유격대 400명이 김달삼(金達三)의 주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자 일으킨 무장 폭동이기 때문이다.
4·3평화공원 內 위패는 총 1만3968基
1998년 9월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개막식을 찾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 그는 두 달 뒤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ㆍ3은 공산당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남로당 중앙의 지령이 있었다는 증거는 자칭 ‘제주인민해방군’이 자신들의 비밀 문건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서 수차례 언급했다. 이 문건은 4·3 주동자인 ‘제1대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이 1948년 8월 월북할 때 가져가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폭도들이 남긴 유일한 기록이다.
4·3 당시 폭동에 참여한 김봉현, 김민주(본명 김태봉)가 1963년 발간한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에도 ‘중앙당 지령’을 언급하는 부분이 수차례 등장한다. 4·3의 시작은 분명히 공산폭동이란 얘기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도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騷擾)사태’라고 규정했다. 소요의 정의는 “여러 사람이 모여 폭행이나 협박 또는 파괴를 함으로써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집단적 폭력 행위를 통해 사회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폭동과 유사한 개념이다. 김달삼의 뒤를 이어 폭도 수괴(首魁)가 된 이덕구가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 정부’로 매도하며 선전포고한 것을 감안하면, 이는 폭동을 넘어 반란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군경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한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4·3 당시 제주도는 준전시 상황이었으므로 양민을 폭도로 오인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폭도의 가족들을 연좌제로 묶어 처형하거나, 소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폭도로 간주해 죽였던 것도 실례가 있다. 따라서 국가가 이에 대해 반성하고,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추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제주 지역 신문 《한라일보》에 의하면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도 1998년 11월 23일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당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정부는 2000년 8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발족해 ‘4·3 희생자’를 선정하고,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 위패를 안치했다. 4·3평화공원 사이트에 따르면 현재 이곳에 안치된 위패는 총 1만3968기다. 그런데 문제는 ▲폭도 수괴 ▲북한 인민군 사단장 ▲남로당 핵심 간부 ▲군경 내 남로당 프락치 등 폭동을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들이 ‘희생자’로 둔갑해 이곳에 안치돼 있다는 것이다.
이를 조사한 제주 4·3정립연구유족회는 해당 위패를 ‘불량 위패’라고 명명했다. 이 단체 관계자는 “지금까지 밝혀낸 ‘불량 위패’만 약 900기”라며 “정리 작업이 끝나는 대로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일차적으로 ‘불량 위패’ 53기를 공개했다. 제주 4·3정립연구유족회는 ▲제주자유수호협의회-《제주도의 4월 3일은?》 ▲제주 4·3연구소-《이제사 말햄수다》 ▲아라리연구원-《제주민중항쟁》 ▲《제주일보》 4·3취재반-《4·3은 말한다》 등 좌·우파 단체가 발간한 자료를 토대로 이를 정리했다. 《월간조선》은 이를 ‘4·3위원회’가 펴낸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내용을 덧붙여 종합했다.
김의봉, 金達三·李德九 뒤를 이은 폭도 首魁
1948년 ‘4ㆍ3’ 발발 후 정부 당국 관계자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진상조사를 하고 있다.
‘4·3 폭동’에 가담했던, 김태봉과 김봉현이 쓴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 따르면 북제주군 조천면 신흥리 출신 현복유는 4·3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경리부장이다. ‘현유복’ ‘현보규’로도 불린다.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해 1946년 3월부터 조천중학원 교장을 지냈다. 4·3 발발 후 입산해 3·1지대장으로 활약하다 제2대 폭도사령관이 된 이덕구는 조천중학원 부교장이었다.
2011년 3월 신흥리 출신 이용국씨가 《제주도의 4월 3일은》에서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현복유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서울에 갈 계획이었지만, 남로당 관계자들이 ‘대의’를 위한다며 붙잡았다고 한다. 이씨는 “현복유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이 좌익으로 휩쓸리고 말았다”고 언급했다. 즉 그에게 배우던 학생들, 마을 청년들이 유격대가 됐다는 것이다. 4·3 당시 현복유도 입산해 활동했다.
〈제주지검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현복유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실제 형이 집행된 건 아니다. 그는 행방불명자로 처리됐다. 현재 4·3평화공원에 김의봉이란 이름을 가진 ‘희생자’의 위패는 4기다. 이 중 북제주군 조천면 와흘리 출신 김의봉은 4·3 당시 남원면에서 폭도 50여 명으로 구성된 ‘제3지대’를 이끌었다. 그는 1949년 6월 경찰 토벌대가 앞서 언급한 이덕구를 사살하자, 이른바 ‘사령관’직을 이어받아 4년 동안 저항했다.
김의봉에 대해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좌파 측 자료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후 잔존 인민유격대는 1950년 7월 하순부터 통일적인 작전계획 아래 적극적인 공격을 가하여 7월 25일에는 중문면 하원경찰지서를 습격하고, 김의봉을 중심으로 한 부대는 조천면 농촌지대에 침투해 주민들에게 조국해방전선에 단결·투쟁해 인민군 진격에 호응하자는 정치사업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4·3 당시 제주도 지역에서 유일한 일간지였던 《제주신보》는 1953년 4월 17일 김의봉이 경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김의봉은 같은 해 4월 15일 조천면 와흘리 부근에서 박원협 경위가 지휘한 경찰대와 40분간 교전하던 중 총을 맞고 도주했지만, 시체로 발견됐다.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출신 김완식은 무장대 참모장격 핵심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9년 1~2월 ‘관음사 전투’ 도중 자결했다.
6·25 때 ‘人民軍’ 사단장, 上官 살해 동조자 위패도 있어
김완식과 같은 동네 출신인 이원옥은 이미 1947년에 무장대에 합류했다가 1948년 10월 연락 임무를 맡고 북한에 갔다. 그는 6·25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사단장이 돼 병력 7000여 명을 이끌고 내려왔으나, ‘낙동강 전투’에서 죽었다.
4·3평화공원 사이트에 따르면 ‘고두옥’이란 이름의 희생자가 3명으로 돼 있다. 이 중 중문리 출신 고두옥은 당초 제주도 국방경비대 제9연대 소속 군인이었지만, 부대를 탈영해 폭동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애월면 ▲서귀면 등 6개 면 일대의 무장대 총책으로 활동했다.
백창원은 애월면 신엄리 출신이다.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라산에 있던 폭도 60여 명은 1950년 6·25 발발 소식을 듣고, 향후 진로를 토론했다. 이때 백창원 등 3명의 지도부는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허영삼, 김성규 등은 “4·3을 일으킨 영웅적 전통을 소극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들은 결국 이날 밤 백창원 등 3명을 포박하고, 이튿날 인민재판에 넘겨 처형했다.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의 공범 강자규는 제9연대 소속 군인이었다.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5월 6일 제9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진압작전 공로를 인정받아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같은 달 18일 진급 축하연에 참석해 술을 마신 뒤 막사에서 자다가 이튿날 새벽 3시에 암살당했다. 암살 주모자는 남로당 프락치 중위 문상길과 하사 손선호였다. 동조자는 이등상사 양희천, 일등중사 신상우, 중사 강자규, 하사 배경용 등이었다.
류신출은 대정면 인성리 사람이다. 《제주도의 4월 3일은》 《4·3은 말한다》에 기록된 증언을 종합하면 류신출은 대정면 인민위원회 간부로 폭동에 참여했다. 그는 1948년 5월 10일 무릉지서를 공격했다. 이 습격으로 무릉지서는 불타고, 경찰관 3명이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류신출도 ‘오린당(다이너마이트 같은 사제 폭탄)’을 잘못 터뜨려 폭사했다.
송원병은 앞서 언급한 백창원과 함께 6·25 당시 무장대를 이끈 지도부다. 제주 4·3연구소가 펴낸 《4·3장정 6》에 따르면 송원병은 대정면 인성리 사람으로, 야학 교사를 하던 중 4·3이 발발하자 입산했고, 부락민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 밖에 제주 4·3 정립연구유족회가 주장하는 ‘불량 위패’ 주인은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 이신호(대정면 하모리) ▲김달삼 비서실장 박태전(제주읍 영평리) ▲1951년 당시 폭도 무장대 제1지대장 김만옥(애월면 하귀리) ▲남로당 남원2리 인민위원장 김원부(남원면 남원리) ▲제주지검 내 프락치 이재만(애월면 신엄리) ▲경찰 내 프락치 송창염(제주읍 오라리) ▲제9연대 탈영 후 폭동에 가담한 강기창 등이 있다.
內亂음모, 殺人, 放火해도 ‘4·3 희생자’?
제주 4ㆍ3 정립연구유족회가 지적한 ‘불량 위패’들.
‘불량 위패’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희생자 심사’를 할 당시 ‘폭도 수괴급 인사’만 빼고 거의 모두를 ‘4·3 희생자’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된 2000년부터 예견된 것이다.
2000년 4월 6일 예비역 장성모임인 ‘성우회’ 등은 “제주 4·3사건은 무장인민 유격대의 폭동사건임에도 특별법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진압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폭도들과 유족을 같은 희생자로 규정해 실질적 평등의 원칙 등을 위배한다”며 헌법재판소에 4·3 특별법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했다.
이와 관련, 헌재는 2001년 9월 27일 ‘각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특별법은 4·3사건 희생자의 범위를 확정적으로 규율하지 않고, 희생자 해당 여부를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명예회복위원회에 위임하고 있다”며 “따라서 4·3 위원회에 의해 청구인들의 기본권 침해 여부가 문제가 되는 것일 뿐 특별법으로 기본권이 침해되는 것은 아니므로 특별법의 위헌을 다투는 청구를 각하한다”고 밝혔다. 바꿔 말하면 법 자체는 위헌적 요소가 없지만, 4·3 위원회가 희생자 선정 기준을 잘못 설정하면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소를 제기할 수 있단 것이다.
‘4·3 특별법’에 정의된 ‘희생자’의 범위는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후유장애가 남아 있는 자로서 4·3위원회에서 심의·결정한 자”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심의·결정 기준은 명시돼 있지 않았다.
이에 헌재는 심판 결정문에서 ▲수괴급 공산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 간부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무장 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 및 그들의 가족, 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 등 폭동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자 등을 4·3사건 희생자 심의 제외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4·3위원회 산하 희생자심사소위원회(위원장 박재승 변호사)는 2002년 1월 31일 제6차 회의에서 희생자 선정 기준안을 마련했다. 제주 지역 신문 《제민일보》에 따르면 선정 기준안 마련을 주도한 이는 성균관대 명예교수 서중석(徐仲錫)씨다. 서씨는 박원순 서울시장(당시 변호사)이 남로당 당수 박헌영(朴憲永) 아들 원경과 만든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현재는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학자다.
4·3위원회는 2002년 3월 14일 심사소위가 제출한 안을 의결했다. 그 내용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괴급을 제외한 사람들을 희생자로 인정한 것이다. 강창일(姜昌一, 제주 갑) 민주당 의원이 발의해 2006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 개정안’은 희생자 범위를 수형자까지 확대했다. 이는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당하거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된 이른바 인민유격대원들을 정부가 모두 희생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不良 위패’ 정리하고, 다른 날짜 지정해야
김영중(金英仲) 전 제주경찰서장에 따르면 당시 군법회의(제2연대·9연대)는 총 2531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 중 무기형 이상의 중형은 ▲사형 384명 ▲무기징역 305명 등 689명이다. 죄명은 ▲내란음모 및 소요방조죄 ▲살인 ▲방화 ▲내란방조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희생자로 인정받은 비율은 76.5%다.
이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로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이 ‘희생자’로 둔갑한 것이다. 박찬식(朴贊植) 전 제주도 행정부지사는 지난 2월 19일 인터넷매체 《헤드라인제주》에 쓴 칼럼에서 “국가가 4월 3일을 추념일로 지정한다면 당일에 지서를 습격한 공산주의자들을 추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는 국가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의 칼럼 중 일부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이 참석해 절하며 추념하는 것은 민주주의 헌법 정신에 위배된 직무수행이며, 이는 헌법 제65조1항에 의거 탄핵소추 대상이 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은 대통령 참석을 반대하고 있다.”
그는 또 “박근혜 대통령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소요사태를 일으킨 ‘4월 3일’에 공산주의자들의 위패가 봉안된 4·3평화공원에선 추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비정상 위패 정리 ▲다른 날짜 택일(擇日) 등을 정부와 새누리당, 관련 유족회에 촉구했다.
그러나 우근민 제주도지사, 새누리당 제주도당, 4·3 희생자유족회 등은 오는 4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추념식 행사에 참석해 줄 것을 계속 요청하고 있다. 연초부터 ‘비(非)정상의 정상화’를 역설한,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4·3 추념일’을 재가하고, 행사에 참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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