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상(戰狀)에서 최초의 희생자는 병사가 아닌 진실이다」영국 언론인 필립 니이틀리의 말이다. 사건의 성격 상 장황하게 전개할 수밖에 없는 4.3사건을 핵심을 비켜나지 않고「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원칙에 준해 명료하게 정리한「제주4.3사건 문(問)과 답(答)」을 원작자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글은 제주4.3사건에 대한 왜곡과 좌편향성 자료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현실에 4.3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배우는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이해를 돕기위해 종전의 형식을 탈피해 '문(問)과 답(答)‘이라는 형식으로 전개시켜 비경험세대인 젊은이들의 접근성을 보다 쉽게 한 글이다. 젊은 세대들이 4.3사건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제주4.3사건의 정의(定義)
문, 도대체 '제주4.3사건'이란 어떤 사건입니까?
답, 제주4.3사건의 정의나 성격은 4.3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약칭, 남로당중앙당)와 남조선노동당 전라남도위원회(약칭, 남로당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은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약칭, 남로당제주도(島)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남한을 북한에 수립된 김일성 공산주의 정권의 통치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반란으로써, 1957년 4월 2일 마지막 인민유격대원을 체포하여 사건을 완전 종결할 때까지 만 9년간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라고 하겠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제주4.3사건은
첫째,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반란이고,
둘째, 진압과정에서 선량한 도민 다수가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3. 해방 전후 국내외 정세
문, 4.3의 정의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 전에 4.3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랄까 해방 전후 국내외 정세에 대해 간단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답, 4.3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제주도 지역에 국한하거나 민중사관이나 지역저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일부분만 보게 됩니다. 국제정치정세를 파악하고 북한과의 관련성을 반드시 확인해야 전체적 맥락과 전모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 되고 남북한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강대국의 의도와 그들의 목표를 폭 넓게 들여다보아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해방 전후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적 주요 사실들을 개관해 보겠습니다.
(1)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여 대한제국이 멸망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혹독한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 남북분단의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에 있다 하겠으며, 이로 인한 민족적 고난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2)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났고,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3) 1941년 12월 7일(일본 시간 8일)일본군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이른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됩니다.
(4) 1943년 11월 22일~26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국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와 일본이 패전할 경우 영토 처리에 대한 연합국 기본방침을 논의했는데, 그 결과를 12월 1일 발표한 것이 '카이로 선언'입니다.
이 선언 특별조항 중에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당한 시기에(적절한 절차에 따라)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한국 독립을 최초로 거론한 선언입니다.
때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2차 세계대전 주축국 중 이탈리아가 1943년 9월 8일 이미 항복한 상태였고, 독일도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하여 연합국 승리가 예상되던 시기였습니다.
(5) 1945년 2월 4일~11일 소련 흑해연안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소련 스탈린 수상이 회담하여 독일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 해당지역(주축국에 의해 패전국 또는 광복을 맞은 민족)의 모든 민주세력을 폭 넓게 대표하는 인사들에 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인민의 뜻과 합치되는 책임 있는 정부를 수립한다.
-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한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 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였으니 이제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6) 1945년 7월 26일 미국트루먼, 영국 처칠(도중 아트리로 교체), 중국 장개석(蔣介石)이 (소련 스탈린은 늦게 참가해 서명했음) 독일 브란덴부르크 주도(州都)인 포츠담에서 회담하여, 패전국 독일 처리 방침과 카이로회담에서 선언한 한국 독립을 재확인하고,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경고하는 등 13개항의 '포츠담선언‘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였습니다.
(7) 1945년 8월 6일 08:16 미국은 히로시마(廣島)에 '작은 소년(Little Boy)'이라는 암호명의 우라늄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14만 명이 사망하였으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고 비티었습니다.
(8) 1945년 8월 9일 11:02 나가사키(長崎)에 '뚱뚱한 남자(Fat Man)‘라는 암호명의 풀루토니움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7만4천명이 사망하였습니다. 3일 간격으로 인류사 최초의 원자탄 2발에 총214,000여 명이 일시에 사망한 것입니다.
(9) 소련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 12시간 후인 8월 9일 24:00에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주소일대사 사토를 외무부로 불러 '일소중립불가침조약'을 파기 선언하고, 치스치아코프 대장이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면서 북한으로 진격했습니다. 이 날은 얄타회담에서 독일 항복 후 3개월 내에 대일참전하겠다는 약속 만기일인 9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김학준 박사의「북한의 역사」에 의하면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대일참전비밀협정(공식명칭은 일본에 대항하는 전쟁에의 소련참전에 관한 협정)에서 사할린의 남쪽과 치시마열도를 얻고, 외몽골(공식명칭은 몽골인민공화국)의 소련 위성국으로의 존속, 다렌항의 국제화, 뤼순항에 대한 조차권 회복, 만주철도의 중국과의 공동운영 등의 다양한 권익을 보장 받았습니다.
(10)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고 우리는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반도 대일전에서 소련은 참전 6일 만에 희생도 별로 없이 승전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해방 10일 후인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하여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완전 점령하였습니다.
반면, 미국은 진주만 피습으로부터 3년 8개월 동안 일본과의 치열한 전쟁을 하면서 미군 10만여 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희생 끝에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항에 정박한 미 군함 미조리(Missouri)호 함상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일본의 전권대사 시게미스 마모루(重光葵)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습니다.
또한,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인솔한 미 제24군단은 9월 5일 오키나와(沖繩)를 출발하여 8일 인천에 도착하고, 9일 서울에 입성하여 조선총독부에서, 하지 중장이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볼 때 누가 우리를 해방시켰습니까?
사실상 소련 보다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미군에 대해서는 '미제 식인종'이라 매도한 반면, 소연군에 대해서는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쳤습니다.
(11) 이처럼 우리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고, 갑자기 미국의 원자탄 2발에 의해 해방된 것이고, 우리의 힘으로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군의 무장 해제 능력도 없었습니다.
결국,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미국과 소련의 속셈은 달랐습니다.
조지 맥쿤(George M. McCune)과 아더 그레이(Arthur L. Grey)가 표현한 말을 빌리면,
“미국은 자신의 이익에 유리한 코리아정부를 세우려고 결심했다. 소련은 똑같이 소비레트 지향적인 코리아국가를 마련하려고 결심했다”
이처럼 미소 강대국의 대립하는 틈바구니에서 새 나라를 건국하는데 있어, 우리나라 지도자는 그리고 국민들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택할 것이냐? 소련식 공산주의를 택할 것이냐? 를 놓고 남한과 북한 간에, 좌익과 우익 간에 사생결단 충돌했습니다.
여기서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미소공동위원회 합의가 결렬되고 남북 왕래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군이 점령한 남한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 정부 건설이 운명이었고, 반대로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은 당연히 소련식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있는 남로당은 UN결의에 대한 대한민국 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무모하게 소련과 북한의 노선에 따라 적극적인 대한민국 건국저지투쟁을 전개한 것이 제주4.3사건이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이 제주4,3사건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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