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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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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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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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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에 앞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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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구성의 위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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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의 편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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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민의 인권침해사실에 대한 기술의 비형평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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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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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주4․3폭동의 행위주체에 대한 인식착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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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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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주4․3폭동에 대한 소련 또는 북한의 배후지원설 부정의 인식착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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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 및 성격에 대한 진단의 오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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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주민희생자수의 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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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주4․3사태 강경진압의 책임(李承晩 및 미국)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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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의 사실왜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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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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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료 및 증언 선택의 편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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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천면 북촌사건에 대한 편향적 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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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계엄령 선포의 불법성 논란 부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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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폭동세력에 대한 축소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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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4․3사건의 정의에 대한 문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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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다랑쉬굴 사건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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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용용어의 형평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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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끝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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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첨 차 례
별첨 1 (12쪽, 주민의 인권침해 사실에 대한 기술의 비형평성 관련, 폭도의 만행사례)
1 - 1 김덕선 증언(공비의 만행 사례)┈┈┈┈┈┈┈┈┈ 67
1 - 2 강학송 증언(증언록) ┈┈┈┈┈┈┈┈┈┈┈┈┈┈ 68
1 - 3 김문혁 증언(진술서) ┈┈┈┈┈┈┈┈┈┈┈┈┈┈ 70
1 - 4 김경만 증언(진술서) ┈┈┈┈┈┈┈┈┈┈┈┈┈┈ 72
1 - 5 오형인 증언(증언) ┈┈┈┈┈┈┈┈┈┈┈┈┈┈┈ 74
별첨 2 (41쪽,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주민 희생자 수의 과장 관련, 반증자료)
2 - 1 4․3관련 교도소 수감자 북한 거주 확인 사례 ┈┈┈78
2 - 2 4․3희생자로 신고된 자 중 제외 대상자 ┈┈┈┈┈ 82
별첨 3 김덕선 증언(52쪽, 북촌사건 원인(遠因)에 대한 증언) ┈┈ 83
별첨 4 전정택 증언(52쪽, 북촌사건 관련 증언) ┈┈┈┈┈┈┈ 86
별첨 5 한수섭 증언(54쪽, 북촌사건 관련 증언) ┈┈┈┈┈┈┈ 87
별첨 6 (65쪽, 다랑쉬굴 유해 관련 증언 및 자료)
6 - 1 ~ 6 - 5는 참고인 4명의 진술조서 (생략)
6 - 6 4․3사건 관련 유골 처리 동향 ┈┈┈┈┈┈┈┈┈ 89
6 - 7 오길웅 증언(자술서) ┈┈┈┈┈┈┈┈┈┈┈┈┈┈ 95
(1) 성명서(2003년 10월 7일, 보고서 엉터리 심사에 대한 항의) ┈┈ 98
(2) 성명서(2003년 10월 28일, 보고서 확정에 대한 반박) ┈┈┈┈┈ 100
(3) 성명서(2003년 11월 4일, 대통령 사과에 대한 반박) ┈┈┈┈┈ 102
머 리 말
2003년 10월 15일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 고건 국무총리)에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하여 10월 31일 제주도민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공식 사과하였습니다.
지난 3월 29일 최초보고서가 심의 의결된 후 6개월 간 수정의견을 접수키로 하여 9월 28일까지 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 등 각계에서 모두 376건 1,033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수정의견을 접수하였으나 4․3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보고서 집필자 3명에게 일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단기간에 검토하고 극히 지엽적이고 자구 수정에 불과한, 그것도 집필자 구미에 맞는 것 33건에 대해서만 수정안으로 채택, 10월 4일 검토소위원회에 회부, 단 3시간만에 심의를 끝내고 10월 15일 본회의에서도 검토할 시간을 달라는 위원 3명의 건의를 묵살 당해 즉석에서 사퇴성명을 발표하고 퇴장한 가운데 심의를 강행하여 확정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오고 있는 현정부 보고서에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하게 기여한 군경 및 민간인의 희생을 무시하고 진압작전의 불가피성에 대한 언급 없이 폭도들의 만행은 축소 은폐한 채 군경토벌대의 과잉진압 부분만 방대하게 편향적으로 기술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사과를 함에 있어서도 김대중 대통령이 선언한 바와 같이 4․3은 공산무장폭동이지만 진압과정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된 사건임을 선언하고, 건국 과정에서 군경 및 민간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공산폭도들의 책임을 준엄히 추궁한 후 순국영령과 그 유족에게 추념과 위로를 한 다음에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게 순서이고 이 나라 행정수반이며 국군통수권자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엉터리 심의로 통과된 보고서를 인정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왜곡하고 군경 및 민간인의 충혼의미를 퇴색한 대통령의 사과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비록 경우회에서 제출한 반론이 이번 보고서에 반영되지 못하여, 남로당의 내란이며 폭동을 봉기로 둔갑시키고 폭도들에게 희생된 군경과 민간인에 대한 가해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만 그 누가 어떤 필설로 잔재주를 부려도 어디까지나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의 공산무장폭동이라는 엄연한 진실을 영원히 왜곡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면서 우리는 이를 바로잡고 건국과 호국 보국 전선에서 산화한 순국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새로운 자료와 증언을 발굴하여 후세에 남겨 놓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4․3역사를 똑바로 정립하기 위하여 제1차적으로 2003년 7월 9일 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가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제출한 수정의견을 발간 공개하여 많은 비판을 수렴하는 한편 잘못된 시류에 편승 역사를 왜곡하고 진상을 분식하려는 책동에 정정당당히 대응하여 후세에 역사적 사실을 똑바로 알려야 하겠습니다.
많은 지도와 함께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 수집 채록 등 많은 일들이 4․3경험 세대가 생존해 있는 동안 완료되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면서 증언에 적극 참여해 주신 용기 있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3년 11월 21일
충의회제주도지부 회장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년 4월 29일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발행
에 대한 반론
대한민국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
반론에 앞서
1.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작성하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 보고서는 일개의 개인, 학자, 언론사, 연구소가 작성하는 문서가 아니고 작성 주체가 정부 산하의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하는 위원회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정부의 보고서라는 기조하에 작성되어야 한다.
2.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현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후계체가 아니고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승계체라는 점을 인식하고 보고서가 작성되어야 한다.
3. 우리는 남북통일과 민족화해를 지향해야 할 시대를 맞이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함에 있어, 당시 좌익이 추구했던 근본적 목적과 수단 방법을 용인하거나 왜곡미화해서는 안 되며, 건국초기 혼란상을 도외시하고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상황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4. 제주4․3보고서는 폭동국면과 진압국면 쌍방을 공평하게 기술하여야 하며 일방의 주장이나 증언을 편향적으로 인용해서는 안된다.
5.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의 규정과 입법취지에 따라 먼저 제주4․3의 진상을 중점적으로 철저히 규명한 후, 부차적으로 발생한 인권 침해 문제를 쌍방 공히 거론하고 비판해야 한다.
진상규명이 소홀하거나 폭동주체들의 인권침해는 간과하고 진압과정의 인권침해 사실만 부각해서는 안 된다.
6.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확정되면 제주4․3을 경험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보고서를 사실로 믿게되는 중요하고 공식적인 역사서라는 점에서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정확성과 공정성이 보장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요구된다.
1.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구성의 위법성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 “제주4․3특별법”) 제1조(목적)에서 “이 법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또한 동법 제2조(정의)에서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규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동법은
(1)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2) 이와 관련하여 발생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한 것이므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16쪽>에서도 “제주4․3특별법은 제1조에서부터 사건의 진상규명을 제일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진상규명을 통해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두번째 제시된 목적이다. 따라서 특별법은 진상규명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제주4․3보고서」)에서는 마땅히 그 내용이
(1)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이 선행되고 난 후에,
(2) 이 사건 진행과정에서 군경의 불법인권침해행위는 물론 남로당 등 좌익계의 불법인권침해행위 등 인권침해로 인한 모든 희생자와 기타 피해사실을 밝히는 것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동 「제주4․3보고서」(20쪽)에서는 “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이 같은 입법취지에 따라 발발배경, 전개과정, 피해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하되 특히 주민희생 등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을 둔다는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조사에 착수했다.”고 기술하면서, 동 「제주4․3보고서」의 내용을 주로 피해상황(특히 인권침해상황)에 집약하고, 발발배경이나 전개과정의 부분에서도 피해상황(특히 인권침해상황)의 기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또한 남로당과 공산폭도들의 남한공산화기도와 폭동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매우 간결한 반면, 이에 대한 군대와 경찰의 대응의 강경성만을 부각시키면서, 1947년 3월 1일의 경찰발포사건이 1948년 4월 3일의 소요를 야기시키고 제주도민의 반감을 조성시켰으며, 나아가 4․3소요발생후의 군경의 강경진압작전이 무장대(공산폭도)에 대한 제주도민의 동조를 야기시켜 사태를 더욱 확대시켰다는 논조를 택하고 있다.
이러한 「제주4․3보고서」의 내용구성은 “제주4․3특별법”의 규정에도 반할 뿐만 아니라, 사리면에서도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4․3사건의 본질은 “남로당 등 공산계열의 제주도공산화를 위한 폭동”에 있으며, “인권침해”는 우리가 주목하고 비판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는 군경이 동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종적인 부작용이라는 사실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제주4․3사건 당시에도 남로당은 제주4․3사건을 포함한 남한 각지에서의 폭동을, 자신들의 남한공산화계획임은 은닉한 채 남한의 경찰 내지 정부당국의 민중탄압에 대한 “인민항쟁”(소위 “민중항쟁”)이라고 표방하면서, 본질인 “폭동”사실은 무시하고 그 폭동의 진압과정에서 부수되어 일어난 “인권침해”사실만을 강조하면서 민중을 선동했던 사실을 회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정의견 : 군경토벌대의 인권침해 사실과 더불어 남로당 등 공산계열의 남한공산화계획과 폭동에 관한 진상을 설명하는데 주력하여 기술해야 한다.
2.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의 편향성
전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주4․3보고서」의 내용은 “제주4․3특별법”의 규정이나 사리면에서
(1)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난 후에
(2) 이 사건과 관련하여 파생된 토벌군경당국의 인권침해사실을 조사하는 것, 두 가지에 주안점이 두어져야 한다.
첫째의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은 남로당을 위시한 공산계열의 제주도공산화계획과 이에 의한 폭동사실을 자세하게 규명하고, 군경이 이 폭동을 진압한 과정과 아울러 이 폭동진압의 정당성을 적시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보고서」는 이에 대한 내용이 매우 소홀히 다루어져 있다. 「제주4․3보고서」가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남로당을 위시한 공산계열의 제주도공산화계획과 폭동)에는 소홀하고 군경에 의한 인권침해사실의 설명에만 주안점을 두게 되어, 「제주4․3보고서」를 보는 오늘과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제주4․3사건이 남로당을 위시한 공산계열의 제주도공산화계획과 폭동으로 인식되지 않고, 마치 군경이 제주도민을 불법 학살한 사건으로만 비쳐지게 되었다. 「제주4․3보고서」는 특히 군경의 진압작전의 정당성을 명백히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경의 진압작전의 정당성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하지 않고 진압작전의 강경성만을 규탄하고 있다.
물론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군경의 진압작전이 필요이상으로 강경하여 많은 주민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할 수가 있으나, 이 군경의 진압토벌작전 자체를 전적으로 있어서는 안될 악의 진압토벌작전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찰당국은 사회질서가 파괴되었을 때 물리력으로 이를 진정시켜 사회질서를 회복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군당국도 경찰력만으로는 사회질서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이에 개입하여 군사력으로 사회질서를 회복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제주4․3사건에 임하여 폭동을 진압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에 해당된다. 더구나 제주4․3폭동을 진압한 것은 남로당 기타 공산계열의 남한공산화기도를 분쇄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지대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정부의 계승체인 현정부가 작성한 「제주4․3보고서」에 이 진압토벌작전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서 언급이 없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리 일대에서 수거한, 1948년 4월 10일자 해방지구 완전지대에서 인민해방군제5연대가 발령한 포고령을 보면 우리 인민해방군은-----극악무도한 반동을 완전히 숙청하므로서 UN조선위원단을 국외로 몰아내고 양군을 동시 철회시켜 외국의 간섭없는 남북통일의 자주적 민주주의 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 1. 인민해방군의 목적달성을 전적으로 반항하고 또 반항할여는 극악반동분자는 엄벌에 처함. 1. 인민해방군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하야 매국적인 단선단정을 협력하고 또 극악반동을 협력하는 분자는 반동과 같이 취급함(박서동 채록, 영원한 우리들의 아픔 4․3, 월간관광제주. 1990. 12. 1. 표지부터 10매째 전면)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과 다르다고 해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하는 것을 방지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투쟁을 진압한 정당성이 무시되거나 부인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수정의견 : 「제주4․3보고서」에서는 남로당 등 공산계열의 제주도공산화계획과 이에 의한 폭동사실을 자세하게 규명하고 이 폭동 등에 대한 군경당국의 토벌작전과 그의 정당성에 대한 언급이 있은 다음에, 군경의 강경토벌작전으로 인하여 파생된 인권침해사실을 거례(擧例)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해야 마땅하다.
3. 주민의 인권침해사실에 대한 기술의 비형평성
「제주4․3보고서」는 주로 군경당국에 의한 주민의 불법처형 등 인권침해사실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언급을 하고 있는 반면(고문사례는 군경에 의한 고문사례만을 정확성 여부도 불분명한 증언을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음<512~533쪽〉), 남로당 기타 공산계열 내지 폭도들이 군경, 관공리, 및 우익정당사회단체원 내지 일반주민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등의 인권침해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외면하고 있고, 언급을 하는 경우에도 매우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형평성을 잃고 있는 처사이다. 당시 군경당국에 의한 주민의 불법처형 등 인권침해사실에 비해서는 수적으로 월등히 적지만, 공산계열 내지 폭도들이 관공리 및 우익정당사회단체원 내지 일반주민을 살해, 폭행, 협박, 방화, 약탈 등 인권침해사실도 무수히 많거니와 고문 내지 살해방법도 지극히 잔인하였다. “제주4․3특별법” 제2조에서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규정되고 있으므로, 인권침해사실은 군경에 의해서 저질러진 주민인권침해사실만이 아니라 남로당을 비롯한 공산계열 내지 무장폭도에 의해서 감행된 군경, 관공리 및 우익정당사회단체원 내지 일반주민에 대한 인권침해사실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민에 대한 인권침해는 비단 정부당국에 의해서만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시공간에서 지배력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에 의해서도 그 시공간의 피지배인에게 감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쌍방을 비교하여 숫적으로 적다고 해서 참혹한 인권침해행위가 면책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별첨 1. 참조)
그리고 누구든지 제주4․3을 체험한 세대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이 당시는 좌도 무섭고 우도 무섭고 또는 밤에는 폭도세상 낮에는 군경세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은 좌익의 인권침해측면에서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정의견 : 남로당을 비롯한 공산계열 내지 무장폭도의 군경, 관공리 및 우익정당사회단체원 내지 일반주민에 대한 인권침해사실도 자세하게 조사 기술되여야 한다.
4. 제주4․3폭동의 행위주체에 대한 인식착오
1948년 4월 3일의 제주4․3폭동이 남로당 제주도당의 결의에 의해서 단행되었으며, 동 폭동의 주도자인 金達三(본명 李承晉)이 1947년 3월 1일의 3․1절기념행사 때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대정면당의 조직책으로서 시위와 총파업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제주4․3폭동 때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군사책과 유격대 사령관이었으며, 8월에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해서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安堯儉(安世勳)을 비롯한 간부 등과 함께 참석하여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9년에는 金日成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받았으며, 그 후 강동정치학원에서 훈련을 받고 1949년 8월에 남파되어 강원도 및 경상북도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1950년 3월 21일에 강원도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국군에 의하여 사살되었고, 현재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능 묘역에 그의 묘가 있는 점이나, 군경의 폭도토벌과정에서 체포되어 재판(민간재판 및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형언도를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남로당원이었던 점이나, 혹은 토벌작전 당시 포로로부터 구술을 받은 정보 혹은 노획문서 등을 통해서 제주4․3폭동이 남로당 제주도당에 의해서 감행된 것은 분명해지나, 남로당 제주도당의 제주4․3폭동이 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냐, 혹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단행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당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 지령문이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부 문헌(그것도 직접자료가 아닌 간접자료)에서는 제주4․3폭동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없이 제주도당 단독으로 감행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주4․3보고서」(152~156쪽)는 “일부자료에는 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 배후에는 북한과 소련이 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한 글도 있다.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원은 박갑동(朴甲東)의 글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실제 상황과는 너무 동떨어진 내용들이었다. 도꾜(東京)에 살고 있는 박갑동은 문제된 글들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기술하고, 이어 제주4․3사건에 대한 연구자의 연구물이나 제주4․3사건 체험자의 증언을 거례하면서(김남식, 존 메릴, 이삼룡, 이운방, 김점곤, 백선엽 등의 소론), 제주4․3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고 단정하고, 이어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서 푸락치를 통하여 동 폭동에 국방경비대원을 동원하기로 되어 있던 것이 1948년 4월 3일의 4․3폭동 직전에 文相吉 소위가 중앙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국방경비대원의 동원을 거절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 기록은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 무장투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단서가 되고 있다. 따라서 4․3사건은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또한 「제주4․3보고서」(요약부분; 578쪽)에서는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기술하여, 제주4․3폭동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이 없이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규정짓고 있다.
「제주4․3보고서」가 제주4․3사건을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없이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감행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확증이 없는 너무나 자의적인 판단이며, 당시의 국내외정치상황(국제적인 미소간 대립과 국내적인 좌우간 대립)을 무시한 결론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4․3보고서」에서 거시한 박갑동은 1919년생으로서 1945년에 「해방일보」(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의 기자를 거쳐 1947년 및 1948년에 「노력인민」(남로당중앙위원회 기관지)의 부장 및 편집위원을 역임한 후 1949년에 남로당중앙위원회 선전부 간부를 거쳤고, 1949년에 남로당 지하당 임시총책을 역임하였으며, 1951년에 북한의 金日成 정부의 문화선전성 구라파부장을 지낸 다음에, 1953년 남로당 숙청으로 피검되었다가 석방된 후 1957년 일본으로 탈출한 사람으로서, 1948년의 국내정황에 대해서 숙지하고 있던 사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저술한 「朴憲永」(서울, 도서출판 인간, 1983, ▽「제주4․3보고서」는 중앙일보 연재 내용이 그대로 단행본으로 나왔다고 함)에서 당시 제주4․3사건이 터질 무렵 당 군사부책임자 李重業과 군내 푸락치 책임자 李在福(중앙당 군사부원)을 현지에 파견하여 현지 집중지도를 하였으며, 金達三의 장인인 姜文錫을 정책 및 조직책임지도자로 선정하여 현지에 보내었다고 한 기록은 제주4․3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대한 해답을 얻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이 글을 통해서(또한 당시의 국내외 정치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제주4․3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단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도꾜(東京)에 살고 있는 朴甲東이 이런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에 관한 기술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하는 말은(「제주4․3보고서」, 154쪽), 최초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해서 1983년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중간에 내용의 진위여부를 문의하는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왜 해당 신문이나 출판사에 정정요청 없이 가만히 있었느냐는 점에서도 믿기가 어려운 일이다.
1947년의 3․1절기념식 때 제주도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문화부장으로서 동 기념행사 거행의 주역을 담당했고, 그 후 3․1총파업과 남로당의 소위 2․7구국투쟁을 이끌고 있다가 1948년의 제주4․3폭동 무렵에 일본으로 밀항한 金奉鉉(제주4․3폭동 후에 도일했다는 설도 있음, 조총련 오사까〈大阪〉지부 서열 4위)은 일본 문예지 「民濤」와의 대담(1988년 여름호 특집 Ⅱ, “제주도 사․삼사건 사십주년”)에서 “그 당시 무기를 만진 적도 없는 젊은이들이 군사훈련을 어떻게 했습니까?”라는 질문에, “----- 이리하여 제주도의 남로당위원회 안에 군사부가 생긴 이래, 그 군사부에는 3․1부대라든가 2․7부대, 4․3부대라든가가 생겨났던 것이지요. ----- 이 군사부는 동 당(黨)위원회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하는 것은 중앙에서 파견되어온 조직책인 것입니다.”라고 언급하고, “그 조직책은 어디에서 파견되어온 것입니까?”라는 물음에는, “물론 본토인 南勞黨 중앙당에서지요. 그 사람의 이름은 千オソコムサン(천 고무상)이라고 했지요. 별명은 천․가모끼라 했지만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지도를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지요. 군사이론에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점에서, 제주4․3폭동을 남로당 중앙당의 지도하에 단행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가장 직접적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서는 “3․1투쟁에 있어서의 각급 선전행동대의 활동은 기후(其後)의 자위대 조직의 기초가 되었으며, 3․1투쟁 직후 道黨(▲ 남로당 전라남도위원회를 지칭)의 지시에 의하여 각 面에 조직부(面黨) 직속 자위대를 조직하게 되었으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기후(其後) 사태가 거익(去益) 악화됨을 간취한 島 (▲ 제주도를 지칭) 常委는 3월 15일경 道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반대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 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 25일까지를 준비기간으로 하여 島常任(특히 투위<鬪委>멤버)으로서 군위(軍委)를 조직, 투쟁에 필요한 자위대조직(200명 예정)과 보급, 무기준비, 선전사업강화에 대하여 각각 책임을 분담, 예정기간을 넘어 3월 28일 비로소 재차 회합을 가져 기간(其間)의 준비사업에 관한 각자의 보고를 종합 검토한 결과, 4월 3일 오전 2시~4시를 기하여 별항의 전술하에 무장반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음”( 문창송 편. 한라산은 알고 있다. 1995년 8월 15일. 대림인쇄사. 17쪽)이라고 기술하여, 제주4․3폭동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라남도당에서 파견된 올구의 지도에 따라 단행된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따라서 제주4․3폭동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단행한 것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 남로당 전라남도당은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서 제주도당의 폭동을 지도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제주도인민유격투쟁보고서」에 1946(1947의 오기인 듯)년의 3․1투쟁 및 3․10투쟁 직후 때마침 본도 주둔 제9연대가 신설되어(1946년 11월에 창설) 제1차 모병이 있음으로 이에 대정 출신 4동무(高升玉, 文德五, 鄭斗萬, 柳京大)를 프락치로써 입대시켰음. 그 후 5월에 내도한 중앙 올구 李明章 동무에게 이것을 보고하여 지도문제와 활동 방침을 南道(전남)에 가서 지시하여 주도록 요청한바 있었으나----- 그러나 島당부에서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어 독자적으로 선을 확보하였음(문창송 편, 한라산은 알고 있다. 75쪽)이라고 기록되어, 중앙당에서 올구가 왔고, 그로 하여금 전남도당에 가서 지도문제와 활동방침을 지시해 주도록 요청한 사실은 1948년의 4․3폭동모의 때에도 전남도당의 지도와 방침 없이 제주도당 임의대로 활동할 수 없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주4․3보고서」는 동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서 제주4․3폭동 직전에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방경비대(제9연대) 푸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푸락치 2명이 영창에 수감되어 있어 할 수 없이 중앙당 직속의 文相吉 소위를 만나서 구국항쟁(▲ 제주4․3거사)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文 소위가 중앙의 지시가 없다고 하면서 참가를 거절함에 국방경비대 동원에 의한 거점(▲ 제주읍내 경찰관서) 분쇄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는 점을 들어(「제주4․3보고서」, 155~156쪽), 제주4․3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당시 남로당의 군에 대한 지휘계선은 일반 당조직에 대한 지휘계선과 별개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내의 지휘계선상으로 남로당의 지령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반 당조직계선상으로는 지령을 하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남로당은 국방경비대를 경찰과 같이 적대시하지 않았고,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요, 우도 아니다.”라는 불편부당정책을 부대운영시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이 일반 당조직계선상으로는 폭동을 지령하면서(가정할 경우) 군지휘계선상으로 함께 지령을 하여, 국방경비대 내 일부 동조세력을 제주4․3폭동에 참가케 해서 경찰과 국방경비대의 협공을 받을 모험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서는 남로당 푸락치 2명이 체포되어 영창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에서 文 소위가 제주4․3폭동에 참가케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고, 또 폭동에 참여할 병력을 동원할 수 없게 되자 중앙당의 지시가 없다는 구실로 군병력동원을 거절했을 개연성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서 文 소위가 중앙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병력동원을 거절했다는 기록만 가지고 제주4․3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제주4․3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문서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더라도, 남로당은 중앙당만이 아니라 하급당부에서도 중요한 사안일수록 지령은 문서로 하는 경우에도 일단 수신자에게 전달이 된 후에는 즉각 소멸시켜버리며, 문서만이 아니라 구두, 전신, 암호 등의 통신방법을 활용했기 때문에, 중앙당의 지령문이 세간에 노출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적극적인 확증도 없이 몇 개의 간접자료만을 가지고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경솔한 판단에 해당된다. 제주4․3폭동에 관한 많은 문헌(특히 군 및 경찰측의 문헌)에서는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하에 남로당 제주도당이 제주4․3폭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제주4․3보고서」가 제주4․3폭동이 남로당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단행한 것이라는 견해에 동조하고 있는 자료 내지 문헌만 인용하고 이와 반대되는 자료 내지 문헌은 무시하여, 제주4․3폭동은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 없이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감행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제주4․3폭동을 일으킬 당시에 남로당 중앙당의 구체적인 지령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제주4․3폭동은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서 남한의 5․10총선거를 저지하기 위해서 야기한 소위 2․7구국투쟁의 연장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제주4․3폭동은 남로당 중앙당의 별도의 구체적 지령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남로당 중앙당의 2․7구국투쟁에 관한 지령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자연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남로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노력인민」에 의하면, 1947년 7월 15일에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공식적으로는 10월 20일 결렬) 남한의 국제연합 감시하의 단독정부수립계획이 구체화되자,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UNTCOK) 감시하의 남한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게 되고(「노력인민」, 1948년 6월 19일<제95호>, 朴憲永의 “당원동지에게 고함”), 남로당 중앙당(남로당의 실질적 당수인 朴憲永은 북한의 해주에 위치)은 그의 산하 전위조직체에게 경찰관서의 습격, 통신시설의 파괴 등 5․10총선거 저지를 위한 투쟁을 지시하였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공산당,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 폭동지령 수령; 1월 22일에 공산당인 남로당 조천(963-1153)지부의 불법집회를 기습하여 입수한 문서를 번역한 바에 의하면 공산당은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요구하였다. 지시는 또한 공산주의자들에게 ‘경찰간부와 고위관리를 암살하고 무기를 노획할 것’을 지시하였다. 조조(0시)에 회합장소에서 빠져나간 수명의 남로당 간부는 경찰로부터 도망한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회합에 참여하고 있던 106명은 체포되고 추가로 63명도 그 날 정오 전에 체포되었으며, 등사기와 다량의 문서가 압수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752. 6 February 1948)”. 여기에서 “2월 중순과 3월초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요구했다는 것은 남로당이 전 남한에 걸쳐 2월 7일을 기해서 소위 2․7구국투쟁을 전개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제주4․3봉기를 결정한 것은 1948년 2월에 열렸던 신촌(新村)회의로 전해지고 있는데(「제주4․3보고서」, 148~149쪽, 李三龍<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의 증언), 李三龍의 증언에서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신촌회의에서의 무장봉기결정은 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의 집회에서 압수한 문서에 나타나 있는 “2월 중순과 3월초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남로당 간부의 대량검거로 인하여 무장봉기를 단행할 수 없다가, 4월 3일에 이르러서야 소위 2․7구국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도 “그 후 사태가 더욱 악화됨을 간취한 島常委는 3월 15일경 도(道)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 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고 기술하고 있고, 또한 “25일(▲ 3월)까지를 준비기간으로 하여 도상임(島常任․특히 투위 멤버)으로써 군위(軍委)를 조직, 투쟁에 필요한 자위대 조직(200명 예정)과 보급, 무기준비, 선전사업강화에 대하여 각 책임을 분담, 예정기간을 넘어 3월 28일 비로소 재차 회합을 가져 기간의 준비사업에 관한 각자의 보고를 종합 검토한 결과, 4월 3일 오전 2시~4시를 기하여 별항의 전술하에 무장반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음.”이라고 기술하여, 제주4․3폭동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위 2․7구국투쟁의 연장투쟁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제주4․3폭동이 일어난 후에는 남로당 중앙당이 남로당 제주도당과 유격대의 무장투쟁에 격려서한을 보내고, 남로당 중앙당의 고위간부들은 담화를 통하여 제주도당과 유격대의 무장투쟁을 찬양하며 선동 고취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① 1948년 6월에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장문의 격려서한을 보내 인민자위대의 단선단정반대를 위한 무장투쟁을 찬양하고, “우리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여러분과 함께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라고 다짐하면서 “위대한 구국항쟁에 돌진하는 제주도인민에게 승리와 영광을 드리자”고 격려하였다(「노력인민」, 1948년 6월 28일, “제주도인민대중에게 들임”).
② 이 격려서한에 대해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7월에 답례서한을 통해서 중앙위원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우리들은 영웅적 인민들과 함께 어떠한 학살적 폭압에도 굴치 않고 어떠한 달콤한 회유에도 속음이 없이 조국의 민족주권방어의 기빨을 튼튼히 걸머지고 ‘제주인민의 존귀한 구국의 피를 헛되히 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앙위원회의 엄숙한 선언에 대하여 우리들은 ‘조국해방투쟁사상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루는 영예를 실지에 관철할 것을 기표로 하여 망국멸족의 단정분쇄의 가열한 초소(哨所)를 죽엄으로서 지킬 것이며 통일독립을 우리의 손으로 전취할 때까지 과감히 투쟁할 것을 확언하고 맹서합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끝에서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만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라고 기술하고 있다(「노력인민」, 1948년 11월 7일. “학살과 폭압에 항거하며 제주도 인민항쟁 선두에 선 제주도위원회 멧세지”).
③ 그리고 1948년 5월 25일자, 1948년 6월 3일자, 및 1948년 6월 11일자 「노력인민」에서 “조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민족의 선두에서 사투하는 제주도애국동포를 구출하자 !”는 제하에 장문의 호소문을 게재하여, 1948년 4월 3일 이후 이때까지의 인민자위대(▲ 폭도)의 투쟁상황을 소개하면서, 우리 동포들이 이 제주도인민들의 구국투쟁을 지원하여 단정음모를 분쇄하고 미국군대와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을 축출하는 것이 영웅적인 제주도의 동포형제를 구출하는 길이라고 호소하였다.
④ 남로당중앙위원회 위원장이며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인 許憲은 1949년 6월 25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서 행한 보고서를 통하여, “남조선인민들이 조국의 운명과 자기의 장래를 위하여 불타오르는 애국적 정신으로 시종일관하게 미제국주의자들과 李承晩 매국「정권」의 학살폭압을 반대하여 감연히 일어선 줄기차고 용감한 투쟁, 제주도인민들의 영웅적 유격투쟁에서 우리들은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독립과 민주개혁을 위한 제주도인민들의 정정당당한 운동을 미군정이 잔인한 압박과 학살로 대하게 되자 제주도인민들은 분개하여 테러는 테러로 대답해야 된다는 입장에서 작년 4월 3일부터 손에 무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제주도인민들은 조국의 일시적 분할을 고정화하고 남반부를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하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은 무력으로서 강제실시 된 5․10단선이 파탄된 것은 세인이 주지하는 바 사실입니다. 수륙천리를 떠러진 절해고도에서 제주도의 우수한 인민들의 아들딸들은 수십배의 폭압무쌍한 소위 「국군」과 「경찰」을 대항하여 1년 3개월이 지난 금일까지 백전불굴의 투지로서 용감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조선인민들의 진정한 아들딸인 제주도의 빨치산 영웅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제주도 전 도민과 더불어 침략자와 학살자에 대하여 줄기차고 용감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하였고(許憲, 1949년 6월 25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서 진술한 허헌 선생의 보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선언서․강령 부록, 1949).
⑤ 그리고 남로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李承燁(朴憲永은 북한의 해주에 위치)은 1950년 1월 남로당의 기관잡지인 「근로자」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남반부 인민들의 무장유격투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46년 10월 인민항쟁에서 발단되었다. 이것이 1948년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 李承晩 악도들에 의하여 조작된 5․10망국단선을 파탄시키기 위하여 궐기하였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에서 본격적인 유격투쟁으로 발전되었고 10월 20일 여수의거사건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 보라 ! 25만의 주민밖에 없는 제주도에서 3만이상의 애국적 인민들이 살륙되지 아니 하였는가 ? 그의 15%의 주민이 단 수개월동안에 학살된 것이다. 사실상 살륙된 3만의 제주도인민들은 거의 전부가 밭 갈고 고기 잡는 평화적 주민들인 것이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와 독립이 하루 속히 쟁취되기를 기대하는 애국적 정렬과 제국주의적 침략자를 미워하고 인민을 학살함으로써 제자신의 더러운 탐욕에 미쳐 날뛰는 매국노들을 미워하는 아름답고 순진한 심정이 가슴속에 가득 찬 사람들이다.”라고 언급하였고(「근로자」, 제1호, 1950. 1. 15, 이승엽, “조국통일을 위한 인민유격투쟁”).
⑥ 남로당 중앙위원(부위원장)인 李基錫은 1950년 7월에 남로당 기관지인 「인민」에의 기고문에서 “2․7구국투쟁에도 많은 산사람들의 활동에 의하여 원수들의 다수기관이 파괴되고 매국졸도들이 숙청되었으니, 벌써 유격대 편성의 조건들은 성숙되었고 인민들이 자기희망의 달성에 대한 열정도 이 방면으로 기울어졌다. 이와 같이 고조된 유격투쟁의 기세는 1948년 4월 3일 영웅의 섬 제주도에서 1, 2개 「경찰서」를 일거에 소탕한 것으로서 폭발되었다. 제주도인민들은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부를 비롯하여 金達三, 李德九 등 애국적 영웅들의 지휘하에서 유격대를 편성하고 천고의 요새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였다.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고 매국졸도들을 숙청하며 그「선거소」들을 분쇄하여 5․10단선을 완전히 파탄시켰다. ----- 사고무원한 절해고도에서 이와 같이 악랄한 살벌정책이 진행되었으나, 영용하고 명민한 유격대는 수배 혹은 수십배의 원수도 어느 때나 분쇄했으며, 인민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그 희생적 원호에서 나날이 장성 강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제주도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이 남반부 전체 인민들에게 거대한 격려와 희망을 준 것은 물론이요, 흉악무도한 원수들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으며, 큰 공포를 던지었다. 이러한 투쟁과 아울러 조선인민들의 희망은 통일된 민주주의적 독립주권을 수립함에 집중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李基錫, “남반부인민유격대의 영용한 구국투쟁”, 「인민」, 제7호, 1950년 7월).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사령부의「일일정보보고서」와 「주간정보요약서」나, 동 사령부 휘하의 방첩대(CIC)의 「반월간정보보고서」와 「월간정보보고서」에서는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 유격대의 유격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첩보 내지 정보를 여러 곳에 게재하고 있다(구체적 사례 생략). 1948년 5월에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미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도 “제주밖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모략․위협에 잘못 인도된 청년들이 선거공무원, 경찰관, 애국적 제주도민들을 살해하고 방화하고 있다.”고 언명하였다(「동아일보」, 1948년 5월 7일; 「서울신문」, 1948년 5월 7일). 1958년 5월 22일~6월 30일 사이에 제주도 현지에서 군경의 토벌작전을 지휘하고 현지실정을 조사하고 귀임한 주한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Rothwell H. Brown 육군대령(제20연대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및 제주도의 전술부대장임)도 1948년 7월 1일자 보고서에서, “1947년 초기동안에는 남조선노동당 조직이 천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한단독선거가 시행될 것이 확실해지자 남조선노동당 조직은 강화되었고, 특수조직원이 육지본토로부터 파송되었다”, 또는 “제주도의 남조선노동당을 설치하기 위하여 6명 이내의 훈련받은 선동원과 조직원이 외부로부터 파견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W. F. Dean, Major General, United States Army Commanding, USAMGIK이 Major Edgar A. Noel, Chief Civil Affairs Officer, 59th Military Government Company에게 보낸 1948년 7월 17일자 서한의 첨부; “1948년 7월 1일자 Brown 대령의 보고서”(Rept, Col. Rothwell H. Brown to Commanding General USAMGIK, subj.; Activities on Cheju Do Island from 22 May 1948 to 30 June 1948" ). 주한미군의 「주한미국군사」에서도 이 Brown 보고서를 인용하여 “단지 6명의 훈련된 선동책과 조직책이 남조선노동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육지본토로부터 파견되었으나 약 500~600명의 동조자가 그들에 합류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USAFIK, History of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1947․1948, Part Ⅲ, Chapter Ⅳ, item; "Causes and Effects of Cheju Outbreak"). 제주4․3사건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있었느냐의 여부문제에 대해서는
(1) 1948년 4월 3일 새벽의 무장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있었느냐의 문제와
(2) 동 폭동이 일어난 후에 폭도들의 유격활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지원이 있었느냐의 문제를 나누어 생각할 때, 백보를 양보하여 1948년 4월 3일 새벽의 무장폭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동 폭동이 일어난 후에 제주도 폭도들의 유격활동에 남로당 중앙당의 지원이 있었던 것은 앞에서 제시한 사례만 보아도 분명함으로, 제주4․3사건이 진행되는 전체과정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할 때, 제주4․3폭동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라남도당 내지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과 지원에 의해서 단행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제주4․3보고서」에서 제주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이 없이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제주4․3사건의 정의를 제주4․3특별법 제2조에서 정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1947년 3월 1일~1954년 9월 21일까지의 기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볼 때,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기념행사와 시위 및 총파업투쟁은 남로당 중앙당을 핵심으로 하여 구성된 중앙의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지령에 의해서 단행된 점은 당시의 미군정당국 수뇌부의 담화나, 혹은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보고서」와 「주간정보요약서」 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구체적 사례 생략). 특히 이에 대해서는 좌익계의 지령문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① 1947년 2월 5일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제1차상임위원회에서 “3․1절의 행사절차는 급속히 제정하여 남조선 전부에 시달할 것”을 결의 한 점(「독립신보」, 1947. 2. 9),
② 1947년 2월 2일 3․1절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許憲, 朴憲永 등 남로당 간부를 명예의장으로 추대한 점(「독립신보」, 1947. 2. 4),
③ 1947년 2월 25일 남로당 제주읍위원회의 지시, “3․1기념캄파에 관한 건”에서 중앙당 선전부의 지시에 의해서 2월 10일부터 3월 10일까지를 3․1기념캄파 기간으로 정한다고 밝히고 있는 점(제주4․3연구소, 「제주항쟁」, 1991, 창간호, 171~175쪽),
④ 1947년 3월 7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각면위원회 및 제주읍위원회 야체이카에게 하달한 “3․1사건대책투쟁에 대하여”라는 문건에서 “우선 중앙에서 사건에 대한 결정적 방침이 내려올 때까지” 동 투쟁노선에 따라 투쟁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점(제주4․3연구소, 「제주항쟁」, 1991, 창간호, 189~195쪽),
⑤ 위의 “3․1사건대책투쟁에 대하여”라는 문건에서 대책위원회의 소관임무에 투쟁결과를 중앙의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보고토록 하고 있는 점(제주4․3연구소,「제주항쟁」, 1991, 창간호, 189~195쪽) 등이다.
이런 점에서 제주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 내지 지령에 의해서 단행되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남로당의 조직지휘계선은 남로당 중앙당→ 전라남도당→ 제주도(島)당으로 계선화되고 있었다(1946년 8월 1일 濟州島가 濟州道로 분리독립된 후에도).
「제주4.3보고서」(148쪽)는 신촌회의 참가자 이삼룡이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는 늘 왔으며,라고 증언한 기록을 소개하고 있으며,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서도 전남도당이 파견한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고 명기하고 있다.
올구란 상급당에서 하급당에 파견하는 조직지도책으로서 올구의 임무와 권한은 상급당을 대표하고 현실문제에 자문, 보고, 결정하며 상급당의 승인을 받지 못할 급박한 상황에서는 단독으로, 선(先)결정 후(後)보고하고 그 결정은 상급당의 결정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남로당 전남도당 이상의 지령 내지 지원이 있었다는 증거다.
수정의견 : 제주4․3사건을 일으킨 쪽은 “남로당 제주도당”이라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남로당”이라고 규정하여야 한다.
5. 제주4․3폭동에 대한 소련 또는 북한의 배후지원설 부정의 인식착오
「제주4․3보고서」(11쪽)는 “제주4․3사건은 구체적인 근거 제시도 없이 소련이나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제주도를 비롯해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키기 위해서 공산도배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라고 기술하여, 제주4․3사건에 북한이나 소련의 개입이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으나, 이는 당시의 국내외정치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수긍할 수 없는 잘못된 인식이다. 당시의 국내외정치상황은 남로당이,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과의 야합 내지 지령에 따라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서 제주4․3사건을 비롯한 각종 폭동을 남한의 전지역에서 전개하고 있었고, 미군정당국과 대한민국정부는 미국을 등에 업고 남로당의 폭동을 제압하여 그들의 적화기도에 대항하고 있었다. 朴憲永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에 남로당으로 개편됨과 동시에, 1946년 8월에 북조선공산당이 북조선노동당(이하 북로당)으로 개편되고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수반인 金日成이 북로당의 당권까지 장악함으로써, 남로당과 북로당은 외면상 병립상태에 있는 것 같이 보였지만, 朴憲永이 1946년 10월에 북한 해주로 월북함에 따라서, 이 무렵을 기점으로 하여 남로당은 북로당의 지배권역으로 점차 전화되었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는 남로당이 남한의 모든 세포책에게 북한의 1948년 8월 25일 선거 전에 북한에 도착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하면서, 동 8․25선거가 끝나면 남로당과 북로당이 더 이상 구 당명을 사용하지 않고 양 당이 합당된 새 당명이 채택될 것이고, 그 때에는 새로이 명명된 정당이 현재의 북로당 간부의 지도하에 놓일 것이며 남로당은 새 정당의 한 지부로 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13, 17 August 1948). 특히 1949년 6월에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을 구축하고, 동 7월에 남로당과 북로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합당되면서는 남한에서의 무장유격투쟁을 효율화시키기 위해서 7월부터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직속으로 대남유격사업지도부를 편성하여, 1948년 11월에서 1950년 3월까지에 10차에 걸쳐 남한에 많은 유격대원을 파견해서(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971, 227~230쪽), 남한의 오대산, 지리산, 태백산, 기타 등지의 유격투쟁을 지휘하게 됨으로써, 남한에서 남로당의 형식상 실체는 유지되었지만, 남한에서의 유격활동은 주로 북한에 있는 조선노동당의 지휘하에 수행되었다. 1949년 2월 21일자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의 역량과 게릴라활동을 분석하면서, “도(道) 군사부의 중심조정기관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남로당이 어느 정도로 게릴라활동에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있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남한의 공산주의활동과 같이 중요한 명령은 평양에서 고안이 되어 매일 38도선을 월경하는 요원을 통해서 남한으로 전달되고 있다. 훈련된 조직원이 계획활동과 게릴라활동을 돕기 위해서 북한으로부터 남파되고 있다. ----- 제주도는 게릴라부대 병력과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온지 오래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Central Intelligence Agency, Communist Capabilities in South Korea", ORE 32-48, published 21 February 1949).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나 「주간정보요약서」에는 여러 곳에 북한의 제주도 폭도의 유격활동 지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예를 들면,
① 1948년 6월 21일자 「일일정보보고서」는 “북한인민군 전위대, 제주도 파견”이란 제하에 “무기와 기타 보급품으로 무장된 약 160명의 金日成 전위부대원이 진남포(840-1780)에서 제주도로 파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 부대의 임무는 청년조직체내와 특히 조선경비대 및 조선해안경비대내의 분열을 조성하고 폭도들을 인민군 수중으로 규합하는 것이다(통위부 보고, F-6).”라고 기술하고 있고(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865, 21 June 1948),
② 1948년 6월 3일자 「일일정보보고서」는 “경찰이 제주도행 다이나마이트 적재선박 나포”란 제하에 “5월 31일 18시부터 6월 1일 18시까지의 24시간 동안에 제주도(929-1206) 경찰이 부산으로부터 제주도로 다이나마이트를 운송중인 한 선박을 나포하였다(군정청 보고, B-2).”라고 기술하고 있으며(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850, 3 June 1948),
③ 1948년 8월 17일자 「일일정보보고서」는 “북한인이 제주도에 도착”이란 제하에 “북한인민군 증강 선거촉진위원회라고 자칭하는 새로운 공산주의집단이 8월 7일에 북조선으로부터 제주도에 도착하였다는 루머가 유포되고 있다. 전문한 바에 의하면 이 조직은 각기 15명으로 구성된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있으며, 각 집단은 조천면, 한림면 및 대정면에 파견되었다고 한다(방첩대 일일보고서, 제192호, F-6).”라고 기록하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13, 17 August 1948).
④ 1948년 9월 3일자 「일일정보보고서」는 제주도인민해방군 상찬”이란 제하에 제주도인민해방군이 金日成으로부터 칭찬과 의류, 탄약, 및 자문형태의 지원을 약속하는 서한을 받았다. 전문한 바에 의하면 6월에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제주도 출신자 수명이 金日成의 추후지원 약속과 지시를 가지고 북한으로부터 제주도로 향하였다고 한다(방첩대 일일보고서, 제207호, C-3)라고 기술하고 있으며(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28, 3 September 1948),
⑤ 1948년 9월 20일자 「일일정보보고서」는 “최근 북한으로부터 귀환한 제주도의 인민해방군 지휘자 金達三이 다시 북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되었다(C-2). 이 최근의 여행의 목적은 그가 전에 북한을 방문했을 동안에 마련한 무기와 보급품을 수령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방첩대 일일보고서, 제219호, C-3).”라고 기술하고 있고(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41, 20 September 1948),
⑥ 1948년 11월 8일자 「일일정보보고서」는 “남한침략 루머, 재유포”란 제하에 “보고에 의하면 약 1개월 전에 남한의 인민군사령관 주효(Joo Hyo)가 소련 잠수함으로 제주도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주(Joo)가 말한 바에 의하면 만일에 폭동자가 대전(1043-1494)까지만 성공적으로 남한을 점령한다면 북한인민군이 남한의 조선경비대와 경찰에 대항하는 전투를 지원하기 위하여 남한에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다(방첩대 속보, C-6).”라고 기술하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83, 8 November 1948).
⑦ 1949년 4월 1일자 「일일정보보고서」는 <게릴라 군수> 항목에서 “폭도들이 육지본토나 북한으로부터 군수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보고들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기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1 April 1948), 앞에서 제시한 여러 사례들에 대한 확증은 없지만, 이들 정보의 신뢰도가 B-2급(정보원; 통상 신뢰가능, 정보내용; 진실일 가능성 있음), 또는 C-3급(정보원; 비교적 신뢰 가능, 정보내용; 진실일 가능성 있음)에 해당되는 것도 있는 점으로 보아서(일부는 F-6급<정보원; 판단 불가능, 정보내용; 판단 불가능>도 있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기록들이라고 할 수 있다.
⑧ 1985년 비밀해제 된 미국의 UN한국임시위원단 관계문서, 국사편찬위원회가 1987년 발행한, 「대한민국사자료집 UN한국임시위원단 관계문서-1 」 92쪽과 152쪽에 제주4․3폭동과 5․10선거에 관하여공산주의자들은 제주도의 가문간의 반목과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그 곳의 선거를 충분히 교란시키는데 성공하여 군정장관으로 하여금 재선거를 명령하게끔 유도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훈련된 선동가들과 다량의 무기 및 화약을 다른 지역과 북한 자체로부터 들여왔음이 분명했다. 공작은 계속되고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라디오 방송에서 동양의 그리스로 크게 이용될지 모른다는 기록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당시 미군 구축함을 비롯하여 조선해안경비대의 제주도연안 해안봉쇄가 삼엄하게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육지본토나 북한으로부터의 병력이나 군수물자의 수송은 그들의 계획된 의도대로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8월 25일 북한의 평양에서 실시된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소위 8․25지하선거가 제주도에서도 1948년 7~8월에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원과 무장폭도들의 주도하에 광범위하게 실시되었고(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10, 13 August 1948; No. 910, 13 August 1948; No. 913, 17 August 1948; No. 919, 24 August 1948; No. 920, 25 August 1948), 제주4․3폭동의 주동자 金達三 등 일행이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점만 보아도(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07, 10 August 1948, 및 金奉鉉․金民柱 공편,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1963, 154쪽), 남로당 제주도당과 그의 산하 무장폭도의 활동은 북한의 통제하에 진행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948년 10월 7일부터 제주도의 많은 부락에 1948년 9월 9일 창건된 북한정권을 찬양하는 북한 적색기의 게양이 이루어진 점도(USAFIK, HQ CIC, CIC Monthly Information Report, No. 5, 18 October 1948;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71, 25 October 1948) 남로당 제주도당과 그의 산하 무장폭도들의 활동이 북한의 통제하에 진행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로당의 소위 “인공기게양투쟁”에 의한 것이었다.
또 1949년 1월 13일자 구좌면 투쟁위원회 명의로 면민에게 호소함제목의 삐라에는 인류해방의 은인이며 평화이 보장자며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백방으로 원조하는 소련군은 조선의 완전독립과 영원한 번영을 기약하면서 거 1948년 12월 26일 완전 철수하였다.-------38선은 깨뜨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깨뜨리고야 말 것입니다.----김일성 수상은 1949년 1월 1일 신년벽두에 성명하기를 멀지 않은 장래에 남반부 동포들에게도 노동자에 노동법령을, 농민에게 토지개혁을----미제를 철수시키고-----여러분 김일성 수상 성명서가 구체화될 날도 시간문제이며 인민군이 원수를 섬멸시킬 날도 가까워 졌읍니다.(박서동 채록. 영원한 우리들의 아픔 4․3, 월간관광제주. 1990. 12. 1. 표지부터 9매째 후면-10매째 전면)라고 되어 있는데, 백방으로 원조하는 소련군이란 말과, 당시 통신 사정으로 보아 6․25남침을 예고한 김일성 신년성명이 불과 13일만에 신속히 제주도 구좌면당까지 하달된 사실도 새겨 볼 일이다.
수정의견 : 제주4․3폭동은 소련과 북한의 정치적 배려와 군사적 배후지원하에 남로당이 일으킨 것이라고 명기하여야 한다.
6.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 및 성격에 대한 진단의 오류
「제주4․3보고서」는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을 1949년 4월 1일의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1947년 3월 1일의 3․1절기념행사에서의 경찰발포사건과 경찰의 탄압행위에서 찾고 있다. 동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이 미군 보고서(▲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1 April 1949)는 3․1사건을 ‘4․3사건의 도화선’으로 보고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라고 기술하여(100쪽), 1948년의 4․3사건의 원인을 1947년의 3․1절 기념행사사건에서 구하고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의 동 보고서는 “제주도에서 야기한 소요는 경찰이 제주시가에서 거행된 좌익의 3․1절기념식 참가자집단을 공격해서 수명을 살해한 때인 1947년 3월 1일까지는 미군의 점령에 의해서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찰에 대한 신속한 보복이 공격적 도민에 의해서 취해지고 1년간의 피의 폭동이 시작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지(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1 April 1949), 경찰발포가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나 촉발원인이 되었다고 직접적으로 기술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제주4․3보고서」(156쪽)는 “4․3사건은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선거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기술하여, 제주4․3사건의 근본원인을, 남로당 등 좌익계의 5․10선거반대투쟁과 남한공산화계획에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제주도의 특수여건, 경찰의 3․1절발포사건,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의 갈등으로 인한 긴장상황, 남로당 제주도당의 5․10선거반대투쟁 등 다원적 원인을 애매하게 나열하고 있다. 또한 「제주4․3보고서」(577쪽)에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해서 제주사회에 긴장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 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고 기술하여, 역시 이들이 제주도 내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 및 유격대가 제주도를 공산화하기 위하여 경찰지서 및 관공서나 경찰관, 군인, 관공리, 우익청년단체원 등을 무력으로 공격하고 살상을 했기 때문에, 이를 방어하고 질서를 회복하며 5․10총선거를 무사히 치뤄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이들의 공격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앞에서 「제주4․3보고서」가 지적한 사유가 발생한 것이다.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동 사건의 발생이후 미군정당국 및 대한민국정부당국과 중앙 및 제주도의 토벌군경당국의 발표나,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 및 「주간정보요약서」, 언론기관의 보도, 학자의 연구문헌 등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행정적 시각에서 무수히 많은 원인이 제시되었지만(구체적 사례는 너무 많아 생략함), 이런 많은 원인은 모두가 제주4․3사건의 원인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근본적 원인은 남로당 등 좌익계가 남한의 5․10단독선거를 저지하여 남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데(즉 남한을 1948년 9월 9일 북한에서 수립된 金日成 정권의 통치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한) 있었다. 이것은 남로당 중앙당(및 수뇌부)과 남로당 제주도당 및 유격대가 발표한 각종 선언문이나 담화문에도 표명되어 있고 구호, 노래, 기(旗), 삐라에도 있다.
다음에 「제주4․3보고서」는 제주4․3사건의 성격을 “폭동” 또는 “내란”, 혹은 “반란”으로 분명히 규정하지 않고,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577쪽), 이어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단독선거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고 기술하여(577쪽), 제주4․3사건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동 사건이 남로당이 제주도 내지 남한의 공산화를 위한 폭동이라는 것은 무시하고(경찰, 서청 등의 탄압에 대한 무장봉기라고 분식하고 있음), 마치 그들의 주장을 수용하거나 가만히 내버려둬도 될 사안을 군경의 강경진압작전으로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특히 북한의 단독공산정부 수립에 대한 비판은 없고, 남한의 5․10단독선거반대투쟁이라는 것을 부각시켜 이를 정당시하는 것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동 보고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것은 과오이다라고 하여(578쪽) 이를 하나의 과오에 불과한 것으로 표현해서, 선거관리요원이나 경찰가족 이외의 군인, 경찰관, 일반 관공리, 우익 정당사회단체원, 기독교인에 대한 살해행위를 정당시하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남로당 중앙당이나 제주도당은 제주도의 폭동을 경찰의 탄압에 대한 항쟁, 즉 “인민항쟁”(1980년대에 주로 제기된 “민중항쟁”과 같은 뜻임)으로 표방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표현이다. 당시 남로당 중앙당 또는 제주도당은 선언문, 담화, 또는 언론지 등을 통해서 제주도의 폭동을 경찰의 탄압에 대한 항쟁, 즉 “인민항쟁”으로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투쟁이 제주도 내지 남한의 공산화를 위한 폭동이라는 점을 교묘히 은닉하고, 경찰의 탄압에 대한 “인권보호투쟁”이며 “남한단독선거반대투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발행된 남로당 기관지(신문 또는 잡지) 등에 실린 자료가 현재 많이 남아 있다(구체적 사례 생략). “인권보호투쟁”은 그들의 남한공산화투쟁을 위한 명분(구실)에 불과했으며, “남한단독선거반대투쟁”도 거짓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서, 남한보다도 북한에 먼저 단독정권이 수립되었으며(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출범, 신상준 저 제주도4․3사건 하권 1146쪽), 남한에서도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소련이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다만 북한에서는 통일된 공산주의정부(당시 그들의 표현은 “민주주의정부”였으나, 이는 “인민민주주의정부”, 즉 공산주의정부를 의미했음)를 한반도에 수립하려고 했으며, 남한에서는 통일된 자유민주주의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하려고 하다가, 미국과 소련간, 그리고 한국내의 좌우정치세력에 의해서 타협점을 찾지 못해서, 북한은 북한대로, 남한은 남한대로 각기 별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일 뿐이다. 당시 남로당(및 북한)이 주장했던 “인권보호투쟁”이나 “5․10선거반대투쟁”(즉 공산통일정부수립투쟁)과 같은 외형적이고 위작된 명분을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를 계승하고 있는 현정부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동 보고서에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잘못된 생각으로서 매우 유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정의견 :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은 근본적으로 남로당 등 공산계열이 경찰의 탄압에 대한 항쟁(즉 인권보호투쟁)과 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를 명분(구실)으로 하여, 제주도 내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일으킨 것이고, 그의 성격은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므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정부와 군경의 토벌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선언하여야 하며, 아울러 군경의 토벌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음을 병기하여야 할 것이다.
7.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주민희생자수의 과장
「제주4․3보고서」(383~384쪽)는 1948년 1월 1일의 인구 281,000명에서 1949년 5월 1일의 인구 254,589명을 공제한 26,411명을 산출하고, 이에 해외로 도피한 자의 수와 1950년 6․25한국전쟁 후 예비검속 중 처형된 자와 육지 형무소 수감 중 처형된 약 3,000명을 상계할 때, “1948년 초부터 1949년 말까지 감소한 인구 25,000명~30,000명을 전체 4․3사건 당시 희생자로 보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결국 제주 4․3사건으로 빚어진 인명피해는 25,000~30,000으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1) 인구감소수 254,589명을 전제로 하여,
(2) 예비검속 중 처형자와 형무소복역 중 처형자를 합하여 3,000명으로 보고
(3) 해외(일본, 육지, 기타) 도피자 수도 3,000명으로 가정하여 양자를 상계해서, 인명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1) 인구감소수는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2) 예비검속 중 처형된 자와 형무소복역 중 처형된 자를 3,000명으로 보고
(3) 해외(일본, 육지, 기타) 도피자 수도 3,000명으로 가정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 추정에는 인구감소수에서 공제시켜야 할 변수가 다 망라되어 있지 않고, 해외 도피자 수가 과소 산정되어 있으며, 예비검속 중 처형자 및 형무소복역 중 처형자의 수가 과대하게 계산되어 있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해서 사망한 주민희생자의 수에 대해서는 정확한 조사통계가 없어서, 「제주4․3보고서」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우선 인구감소와 기타 변수를 가지고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1948년 1월 1일의 인구 281,000명(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됨에 따른 인구조사위원회의 추정조정치)에서(USAMGIK, South Korean Interlm Government Activities, No. 32, May 1048, Part Ⅰ, Section 1, Table 1) 1949년 5월 1일 현재의 254,000명(한국은행조사부 편, 「4288년판 경제연감」, 동태조사 상편=각론, Ⅰ-10~11쪽)을 공제한 27,000명을 우선 전제로 하고,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인명피해를 산정하는데 있어서 위 수치에 추가해야 할 수치와 감축시켜야 할 수치를 가감하면 추정치이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인명피해 수가 나오게 된다. 추가 및 감축요인 수치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1) 추가요인 및 수치
① 형무소 복역 중 처형자 1,000명
1948년 5월~1951년경 사이의 형무소 복역자(무기징역형 및 유기징역형 언도자) 2,204명(신상준, 제주도4․3사건<하권>. 2002, 843쪽) 중 6․25한국전쟁 발발 후 탈옥 및 북한인민군 입대자를 제외한 처형자(최대 가정)를 말한다. 「제주4․3보고서」(503쪽)는 “제주에서 이송된 4․3사건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명이 한국전쟁직후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2,500여명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6․25한국전쟁 발발 후 탈옥 및 입북자와 북한인민의용군 입대자를 고려에 넣지 않고 있다. 형무소 복역 중 처형자는 1,000명 이하로 판단된다.
② 예비검속 중 처형자 369명
1950년 6․25한국전쟁 발발 후 예비검속 된 총인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50년 8월 4일자로 제주도경찰국장이 내무부 치안국장에게 보낸 “불순분자 검거의 건<대<對> 7월 일 암호전보 제19호”에 의하면 동년 8월 4일 현재 820명으로 나타나고 있는데(이도영 편역, 「죽음의 예비검속; 양민학살진상보고」, 2000, 206~210쪽), 1950년 9월에 이들 중 일부를 석방하기 시작할 때까지(11월 17일에 완전 석방) 1950년 7월 27일 발생했던 “제주도인민군환영위원회사건”으로 구속된 자를 제외하고는 추가로 예비검속 된 자는 별로 많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총예비검속자는 최대 1,000명을 초과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들 예비검속자 중에서 처형된 자를 제외한 석방자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1950년 9월 18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153명, 1950년 9월 23일 직전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48명, 1950년 9월 17일 서귀포경찰서 예비검속자 120명, 1947년 9월 18일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자 90명, 및 1948년 9월 14일 198명(예정)을 합하면(「제주4․3보고서」 462~463쪽) 461명이 됨으로, 총예비검속자 820명 중 석방된 461명을 제외하면 처형자는 369명이 된다.
(2) 감축요인 및 수치
① 형무소 복역중 6․25한국전쟁 발발 후 탈옥 및 월북자나 북한인민의용군 입대자 1,200명
1948년 5월~1951년경 사이의 형무소 복역자(무기징역형 및 유기징역형 언도자) 2,204명(신상준, 제주도4․3사건<하권>. 2002, 843쪽) 중 6․25한국전쟁 발발 후 처형자 1,000명을 제외한 자이다.
② 일본, 육지, 기타 지역 등으로 도피한 자 5,000명(가정)
제주4․3사건 당시 미군함과 조선해안경비대가 제주도해안을 봉쇄하였으나, 일본이나 육지 등으로 밀선으로 도피한 사람이 많았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에서도 일본밀항자에 대한 보고가 있는데, 예를 들면 1948년 8월 7일 100명 이상의 불법피난민을 실은 일본행 선박이 화북에서 출발 직전에 억류되고, 거기에는 남로당 수명과 게릴라부대원이 승선해 있다가 체포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고(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10, 13 August 1948), 이상의 불법피난민을 실은 일본행 선박이 화북에서 출발 직전에 억류되고, 거기에는 남로당 수명과 게릴라부대원이 승선해 있다가 체포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10, 13 August 1948), 1948년 8월 25일 불법여객 70명을 태운 일본행 밀수선이 출발 직전에 억류되었으며 거기에는 전 폭도이고 남로당원 5명이 동승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26, 1 September 1948).
③ 인구자연증가수 2,248명
1944~1955년간의 인구증가율이 30.4%로서(1944년이 221,366명, 1955년이 288,781명) 연간평균증가율이 2.4%이므로(제주도, 「제주도지」 제1권, 1993, 463쪽), 1945년 8․15해방이후의 사회적 증가율(해외귀환동포 및 월남민) 약 60,000명을 도외시한다고 하더라도, 1948년 1월 1일~1949년 5월 1일간(16개월간)의 인구자연증가율은 0.8%정도를 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사회적 소요로 출산율이 평균치의 1/4 이하로 감소된 것으로 가정하면 연간<12개월>의 증가율은 0.6%가 되고, 16개월의 증가율은 0.8%가 됨), 1948년 1월 1일 현재의 인구 281,000명의 0.8%인 2,248명이 된다.
이상과 같이 감축요인 및 수치로는
① 형무소 복역 중 6․25한국전쟁 발발 후 탈옥 및 월북자와 북한인민의용군 입대자 1,200명,
② 일본, 육지, 기타 지역으로 도피한 자 5,000명, 및 인구자연증가수 2,248명, 합계 8,448명이 되고,
추가요인 및 수치로는
① 형무소 복역 중 처형자 1,000명, 및
② 예비검속 중 처형자 369명, 합계 1,369명이 되게 되어, 이 양자를 상계하면 7,079명이 되게 된다. 따라서 1948년 1월 1일 현재의 인구 281,000명에서 1949년 5월 1일 현재의 인구 254,000명을 뺀 27,000명에서 7,079명을 제외하면 약 20,0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1993년 3월 20일부터 희생자 신고 접수를 시작해서, “제주4․3특별법”에 의해서 구성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01년 5월 30일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선 조사기간이 8년 이상이며, 지역적으로 도내는 물론 국내와 해외까지 실시했고, 행정적으로는 읍.면.동.리 직원과 전문조사요원이 총동원되었으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최종결과, 14,028명(사망자 1만 715명, 행방불명자 3,171명, 후유장애인 142명)에 불과하고, 신고된 명단 중에도 자연병사자, 월북자, 해외도피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신고누락자와 잘못 신고된 자를 공개리에 검증 확인하고 상계하면 15.000명 선을 크게 넘지 않을 것이다.(별첨 2. 참조)
그리고 제주도는 지역이 협소하고 산간 오지부락이 없으며 부락마다 전화와 전산망이 잘 구비되어, 읍면동과 통반을 통해서 자연부락단위로 조사(특히 미신고자가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부락 원로들을 상대로)하면 시행령을 개정하여 추가로 신고기간을 마련하는 번거로움 없이 1개월 이내에 충분히 미신고자 파악이 가능하다.
수정의견 :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주민의 희생자의 추정수를 15,000명에서 20,000명 선으로 잠정하고, 보고서 확정 전에 일제 조사를 실시하여 조사된 인원을 기록해야한다. 그리고 희생자로 신고된 내용을 언제나 누구든지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해 주길 건의한다. 왜 감추는지 그 의도를 모르겠다.
8. 제주4․3사태 강경진압의 책임(李承晩 및 미국) 문제
「제주4․3보고서」는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판단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241쪽), “한편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낼 수 있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는 강경진압작전이 미국과의 교감속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295쪽), “그러나 최종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강경작전을 지시한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밝혀졌다.”(580쪽)라고 기술하여, 대한민국정부가 미국의 지원하에 제주4․3사태를 속히 진압하여 제주도의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남로당을 비롯한 공산계열의 공산화기도를 분쇄해서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 공로는 간과하고, 강경진압작전만을 비난하면서 그의 책임을 李承晩과 미국에게서 찾고 있다. 그 “책임”이 법적 책임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치적 책임을 뜻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강경진압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특히 인명)이 피해를 본데 대해서 李承晩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나, 그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가능치도 않거니와 부당한 처사로 보이며, 특히 미국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李承晩 대통령이 국무회의석상에서 강경진압작전을 지시했다고 하면서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하지만, 李承晩은 오랜 외국 생활로 우리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그의 표현에 타인의 오해를 살 수 있는(뜻을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며,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라는 표현도 가혹한 방법이라는 말이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법에 따라 엄히 다스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국무회의라는 것은 국가정책에 대한 의결기관으로서, 법적으로는 대통령도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비록 의장이기는 하지만) 의결기관인 국무회의 의장으로서 국무위원에게 하는 말은 집행기관인 대통령으로서 각부장관에게 하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에도 당시 미군정하에서는 정책적 결정을 미군정관료가 담당하여 4․3사태진압과정에서 나타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부담해야 하고, 대한민국정부하에서도 고문 내지 작전통제권자로서 어느 정도의 제한된 책임은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미군정하에서 구체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미군정장교들은 한국인 경찰관의 고문행위나 불법행위를 차단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 보고서는 일개의 학자나 연구소가 제출하는 보고서가 아니고 대한민국정부보고서로서, 제주4․3사태의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대한민국의 탄생에 절대적 기여를 하고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아끼지 않은 미국에 전가시키는 기록을 남겨 놓으면 미국과의 외교마찰도 자초할 수가 있는 일이다.
수정의견 : 李承晩 대통령도 한국정부 수반이며 국군통수권자로서 과잉진압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기술함이 옳다고 본다.
9. 기타의 사실왜곡
「제주4․3보고서」는 일부 자료 또는 증언을 주로 편향적으로 제시하면서(반대입장을 취하고 있는 자료 또는 증언은 제시하지도 않고) 확증도 없는 무근거한 사실을 단정적으로 왜곡기술하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괴선박 출현설 또는 소련잠수함 출현설에 대한 부정
「제주4․3보고서」(255~265쪽)는 당시 제주도 근해에 괴선박 또는 소련잠수함의 출현설이 미군정당국 및 군경당국이나 대한민국정부당국 및 군경당국에 의해서 여러번 확인이 되고,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나「주간정보요약서」에 보고가 되었으며, 언론기관, 기타 자료에 무수히 적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몇개의 부정자료만을 가지고, “1948년 10월경부터 터져나온 이른바 ‘괴선박 출현설’ 혹은 ‘소련잠수함 출현설’은 강경작전을 합리화시키는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255쪽), “----- 그런데 주목되는 사실은 괴선박 출현설이 이때 외에도 여러 차례 있었고, 4․3전개과정의 중요한 고비가 되는 시점이면 으례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257쪽), 또는 “이처럼 ‘괴선박 출현설’은 강경진압작전을 펼치는 시점에 앞서 꼭 터져 나왔고, 실제로 대규모 유혈사태의 구실로 작용했다.”(261쪽)라고 기술하여, 당시의 괴선박 또는 소련잠수함 출현설을 자의적으로 부정하고 더하여 조작했다는 인상을 주고있다. 괴선박 또는 소련잠수함 출현설의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1948년 8월 17일 한림면 비양도 해상에서 괴선박이 나타나서 조선경비대 경비선이 정지를 명하였으나,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도주(1948년 8월 21일자, 「서울신문」)
② 1948년 10월 8일 제주시가 북방 10마일 지점에 붉은 별이 새겨진 백색기를 단 잠수함 목견(주한미군사령부의 1948년 10월 9일자「일일정보보고서」(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58, 9 October 1048), 및 제6사단사령부의 1948년 10월 8일자, 「일일정보보고서」(HQ 6th Inf Div, G-2 Periodic Report, No. 1085, 8 October 1948)
③ 1948년 10월 8일 상오 11시 50분경 성산포 전면 5마일 해상에 모국 잠수함 출현, 시가 북방 10마일 지점에 붉은 별이 새겨진 백색기를 단 잠수함 목견, 동일 하오 1시경 동 20마일 해상에서 부산 쪽으로 항해중인 인민공화국기를 게양한 괴잠수함(C 53)의 발견(1948년 10월 14일자, 「서울신문」)
④ 1949년 1월 3일 삼양리 해상에 소련표지를 한 선박 2척 출현(주한미군사령부의 1949년 1월 5일자 「일일정보보고서」(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29, 5 January 1949, 및 1949년 1월 6일자, 「동아일보」 )
⑤ 약 2주일전(▲ 1949년 5월 16일의) 묵호 주변에서 국적불명의 잠수함에게 조선경비대 508호함이 기관고장을 일으켜 피포(被拿捕); 1949년 5월 16일의 신임 육군총참모장 蔡秉德 소장의 취임식에 참석한 申性模 국방부장관의 언명<1949년 5월 17일자, 「조선일보」>)
⑥ 1949년 11월 15일, 16일 및 18일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제주도, 대정면 모슬포 서방 10마일 지점 및 모슬포 남서방 10마일 해상에 출현(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215, 17 November 1949; No. 216, 18 November 1949; No. 219, 25 November 1949)
제주도근해의 괴선박 출현사실에 대해서는 1949년 3월 10일 李範奭 국무총리와 申性模 내무부장관이 제주도를 시찰한 바가 있었는데, 3월 16일 申性模 내무부장관은 공보처를 통하여 제주도 현지상황과 수습대책을 논의하는 가운데서, 소련 선박(상선인지 전투함인지는 미상)이 제주도 해안선에 출현해서 폭도와 통신연락을 하고 있고, 무기제공과 훈련된 폭도를 입산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언급하였으며(1949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 또한 3월 22일에 국회에서 행한 보고에서도 모국(某國) 잠수함 1대가 제주 근해를 순행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1949년 3월 2일자, 「독립신문」). 李範奭 국무총리도 1949년 3월 17일 직전에 제주도 시찰후 신문기자단과 가진 회견에서 북한정권 소유의 기선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나서 한라산의 폭도와 화광신호를 교환하고 국적불명의 기선이 제주 해변을 잠행한 사실이 있다고 언급하였다(1949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 申性模 내무부장관은 2주일간에 걸쳐 인천에서 선박편 또는 육로로 전라남․북도와 지리산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1950년 2월 16일 국회에서 시찰결과를 보고하는 가운데서 1950년 2월 5일 밤 12시에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떠났는데 제주읍에서 2마일 반 거리에 8천~1만톤급의 소련 선박 1척을 보았다고 언급하면서, “제주도에 가서 하루밤을 자고 여기에서 들은 바에 확실히 제주도에 가서 상륙을 시켜 가지고 제주도 교란을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심까지 있습니다.”라고 언급하였다. 「제주4․3보고서」는 제주4․3사건의 중요한 고비가 되는 시점이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기 전이면 괴선박 출현설이 터져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제주4․3사건은 1949년 3~4월에는 거의 진정되었는데도 1949년 3월 또는 1950년 2월을 “제주4․3사건의 중요한 고비가 되는 시점이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기 전”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정권은 남한의 게릴라조직을 지원하기 위하여 북한의 영흥(永興)지역에 잠수함기지를 설치하였으며, 동 기지의 사령관인 「강파」라는 사람은 제주도 출신이고, 동 잠수함기지 및 함대 정치위원 「高치산」도 제주 출신이라고 기술하면서, “1949년 3월까지 3회에 걸쳐 제주도로의 화물운송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 화물의 형태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무기, 탄약, 통신장비 및 선전물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111, 4 May 1949).
수정의견 : 괴선박 또는 소련선박의 출현설을 소개하고 난 후에 이를 부정하는 자료도 있음을 소개하면 될 것이다.
(2) 1947년 3․1절 기념행사 때의 경찰발포사건에 대한 정당방위 부정
「제주4․3보고서」(93~94쪽)는 「제주신보」나 박경훈 제주도지사의 발언(1947년 4월 5일자,「독립신보」 보도) 등을 인용하여, “그럼에도 당시 경찰당국은 민심수습보다는 발포의 정당성 강조에 주력했다. 도립병원 앞의 발포에 대해서는 ‘무사려한 행위’로 잘못 시인하면서도 핵심적인 사건인 관덕정 앞의 발포에 대해서는 치안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고 기술해서, 3․1절 기념행사 때의 경찰발포사건을 전적으로 정당방위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주한미군사령부의 「주간정보요약서」(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79, 16 March 1947)나 제주도 군정책임자(수석민정관) Thurman A. Stout의 발언(1947년 4월 5일자,「독립신보」 보도)도 이를 정당방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조병옥 경무부장을 비롯한 경찰책임자의 발표는 하나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정당방위행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발포경찰관이 피해자와 사적인 감정에서 또는 단순한 구경꾼에게 살상할 의도로 저지른 행위는 아니며 아무런 이유 없이 발포한 것도 아니다. 사상초유의 집회 인파와 불법 가두 시위로 초긴장 심리상태에서 경찰서를 경비근무 중인 경찰관이, 황급히 쫓겨 들어오는 기마 경찰과 그를 위협 추격하는 일단의 무리들을 보는 순간,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판단 발포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돌발적 상황에 처하여 평소 생명에 위험을 느끼며 근무했던 경찰 입장에서, 긴급비상 상황으로 판단, 즉각 초동대응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경황 중 비조준 발사로 연결되었다. 경찰은 남로당의 삼일절가두시위 불법강행 등으로 불안한 치안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취한 대국에 입각한 정당한 직무행위로 판단한 것이다.
수정의견 : 정당방위라고 하는 주장과 이를 부정하는 양론을 소개하는데 그치고, 정당방위가 아니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3) 1947년 8월경의 좌익의 반미삐라 내용의 사실왜곡
「제주4․3보고서」(119쪽)는 주한미군사령부의 보고서에 1947년 8월에 반미삐라 살포사실을 기록하고 있다고 기술하면서, “그러나 그 무렵 뿌려진 삐라내용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은 보리공출 문제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미삐라에 보리공출문제가 거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삐라를 가지고 내용을 분석해 보고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인지? 이는 전적으로 왜곡된 기술에 해당된다. 이 당시 단지 주민을 선동하기 위하여 반미삐라에 하곡수집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나, 주로 반미 구호에 치중되었다.
수정의견 : 반미삐라에 보리공출문제도 많이 거론되었다고 기술하면 될 것이다.
(4) 1947년 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에서의 공산주의자 불법집회에 대한 경찰의 급습사실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의 보고서에 관한 의문 제기
「제주4․3보고서」(143쪽)는 1947년 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에서의 공산주의자 불법집회에 대한 경찰의 급습사실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의 보고서를 제시하면서(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752, 6 February 1048; No. 753, 7 February 1948) 세 가지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①새벽 3시에 100명 이상의 집단집회가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 ②경찰에 압수된 문서에 2월 중순에서 3월 5일까지 폭동을 일으키라고 되어 있는 사항의 진위문제, ③남로당원을 방면한 문제), 이들 문제는 제주4․3사건당시의 국내 및 제주도의 정치상황 및 치안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쉽게 이해가 갈 문제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제주4․3보고서」가 동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와 「주간정보요약서」를 무수히 인용하여 그의 주장의 근거로 삼으면서, 왜 주한미군사령부의 이 보고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인지가 의문이 된다.
첫째 의문인, 새벽 3시에 100명 이상의 집단 집회가 있었느냐이다.
새벽 3시에 집회를 한 것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경찰이 남로당의 불법활동을 엄중히 단속했기 때문에 낮에 공공연히 집회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며, 100명 이상이 집단으로 모였다는 것은 추산일뿐만 아니라 동 미군정보보고서에 회합 참가자 106명을 체포하였다고 명기하고 있는데 여기에 무슨 의문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100명 이상이 모인 것은 중요한 회합이며 여러 지역 간부들(또는 경비인력)이 회합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뿐이다.
둘째, 2월 중순에서 3월 5일까지 폭동을 일으키라는 문서의 진위 문제인데, 이는 미제6사단사령부 「일일정보보고서」(HQ 6th Inf Div, G-2 Periodic Report, No. 847, 13 February 1948)에서도 1948년 2월 12일에 경찰과 방첩대가 남로당 본부를 기습해서 1948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 사이에 투쟁을 계속하라는 문서를 압수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金奉鉉. 金民柱 공편,「제주인민들의4.3무장투쟁사 - 자료집-」에서도 1948년 1월 13일 중문과 안덕 사이에서 3명의 투항분자가 문서를 압수 당하여 김생문(金生玟의 오기인 듯)의 허위 고백으로 1월 23일(22일의 오기인 듯)에 대량 검거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셋째, 남로당원을 방면한 문제는 미군정당국이 인권보호차원에서 이뤄진 측면도 있었으나(당시 경찰은 남로당 가입 사실만 가지고 검거했지만 미군정당국은 남로당을 합법시하고 있었음), 여기에는 5․10총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시민의 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보장)을 위해서 취한 조치였다. 1948년 2월 26일 국제연합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이 제시되었고, 이에 의거해서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3월 17일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을 요구했으며(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 문서 A/AC19/53, 1948년 3월 18일자), William F. Dean군정장관도 1948년 1월 27일 각 도지사 및 서울특별시장에게 선거에 있어서 시민의 자유권(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을 보호할 것을 지시하고(1948년 1월 27일 남조선과도정부 군정장관실, 언론, 출판 및 집회에 관한 건), 1948년 3월 3일 경찰관서장 회의에서도 이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을 지시하였다.
수정의견 : 따라서 이 문제는 의심의 여지가 추호도 없는 문제로서 거론할 가치가 전혀 없다.
(5)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의 암살동기의 왜곡
「제주4․3보고서」(218 및 224쪽)는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8일 그의 작전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孫善鎬 등 암살범들의 암살동기를 미화시켜주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재판정에서의 피고인들의 주장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국제신문」, 1948년 8월 10일), 검찰관의 기소문에서 암살범들은 金達三으로부터 암살지령을 받은 文相吉의 지시에 의거 박진경을 암살한 사실(「새한민보」, 1948년 10월 상순<2권 16호>, “동란 제주의 새 비극 -박대령 암살범 재판기”)은 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은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수정의견 : 孫善鎬 등 암살범들의 암살동기를 여러 자료를 근거로 하여 공정하게 기술하여야 한다.
10. 자료 및 증언 선택의 편향성
「제주4․3보고서」는 주장의 근거자료로서 인용하고 있는 자료 또는 증언을 주로, 제주4․3사건을 경찰의 탄압에 대한 민중봉기로 보고 있는 자료 또는 증언에서 구하고 있고, 제주4․3사건을 공산폭동으로 보고 있는 자료 또는 증언은 거의 무시하거나, 적시하는 경우에도 매우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4․3보고서」는 濟民日報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①, ②, ③, ④, ⑤(전예원; 1994~1998 발행), 제주4․3연구소의「제주항쟁」(1991, 창간호), 「이제사 말햄수다- 4․3증언자료집」(1989), 「4․3장정」 등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이들 문헌과 「제주4․3보고서」의 집필진이 동일인(추정)인 점에서, 자신들이 이미 쓴 글을 「제주4․3보고서」에서 재인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모순된 일이다. 부득이 필요하다면 “참조”로 표시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제주4․3보고서」(581~583쪽)는 “이 조사는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4․3사건의 전체 모습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라고 언급하면서, 이 원인을 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지휘관의 증언 거부 및 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에 돌리고 있는데,
(1) 구체적인 재판기록, 즉결처형사실에 관한 기록 등의 부재로 인한 희생자의 사망 일자, 장소, 이유 등과
(2) 폭도들의 성명과 산중 투쟁상황 및 주민 살해사실 등에 대해서는 “전체 모습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 타당하나, 현재 제주4․3사건의 전모에 대한 자료는 대체로 노출되어 있어서, 「제주4․3보고서」가 이들 자료를 십분 활용하지 못하고 편향적으로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수정의견 : 자료 및 증언을 형평성있게 선택하여 확정적으로 신빙이 가는 문제에 대해서만 결론을 내리고, 그렇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찬반 양방의 주장을 형평성있게 소개하는데 그쳐야 한다.
11. 조천면 북촌사건에 대한 편향적 기술
(1) 발생 원인(遠因) 누락
「제주4.3보고서」(437-440쪽)는 북촌사건에 대하여 세화 주둔 제2연대3대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는 사실만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48년 5월 16일 우도에서 제주로 가던 범선이 풍랑으로 북촌포구에 피항 중 이 마을 출신 공비 3명이(부락민 30여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배에서 우도지서장 양태수 경사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그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렸으며 진순경을 박살하고 이들의 소지했던 총기 2정을 탈취한 후 7-8명의 무장공비가 범선승객 14명 전원을 납치, 선흘곶 위 연대본부에서 5월 20일 저녁 전원 처단하려다 다행히 군 토벌대에 의해 구출된 사건이 있었으며 이 때 생포한 공비의 안내로 북촌 마을 안에 있는 굴속에서 이 사건 관련 공비 7명을 검거한 사실이 있다. 권총을 휴대할 만큼 지휘관급 공비가 있던 북촌 마을은 좌익세가 매우 강한 부락이라는 인식이 원인으로 작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에는 완전 누락되었다.(별첨 3. 참조)
수정의견 : 이 사건 경위를 상세히 기술하고 북촌사건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한 점을 당연히 기술해야 한다.
(2) 김병석 증언에 대한 의문
「제주4.3보고서」(439-440쪽)는 북촌사건 현장 목격자 김병석의 증언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김병석은 위로 세 분 형이 경찰관이었고, 공비에게 큰어머니가 희생되었으며 특히 1964년 11월 8일 창성호를 타고 명태잡이를 하다가 기관고장으로 표류 중 북한경비정에 피납되어 1개월 간 북한에 억류됐던 자로서 귀환된 후 안보강연 연사로도 활동하였으며 북촌사건 당일 경찰 운전보조원으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였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증언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① 대대장 차가 고장났으니 자동차 하나 빌려달라고 했다면 찦차나 스리쿼터를 빌려 줄텐데 왜 엠브렌스를 빌려 주었는가? 또 3대대가 함덕에 주둔했고 월정(함덕 동쪽 14㎞지점)까지 공무로 다녀오려면 경찰국(함덕 서쪽 13.8㎞지점인 제주읍에 위치)과 같은 거리에 위치한 연대본부(제주읍에 위치)에 요청하면 쉽게 해결될 일을, 왜 차량도 얼마 없는 경찰에 요청했는지.
② 약 7-8명의 장교가 모였습니다라고 해서 사살 방법에 대한 장교회의 참석자를 7-8명으로 증언하였는데 당시 3대대에는 대대장 정대위, 부관 이중위, 한소위, 그리고 김소위 2명으로 모두 5명이며 그 중 부관 이중위는 제주읍에서 연대본부 참모회의에 참석하여 현장에 없었으므로 장교는 4명뿐이었다.(별첨 4. 참조)
③ 증언자는 엠브렌스 내에서 사살 방법에 대한 장교회의를 할 때 아마도 운전석에서 들은 모양인데, 소속대원도 아니고, 제주출신이며(당시 제주출신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음), 경찰에서 처음으로 지원 나온, 일개 운전보조원 앞에서 중요한 회의를 했겠는가?
④ 사살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박격포를 쏘아---, 군에 들어온 후에도 적을 살상해보지 못한 군인들이 있으니까----총살을 해서 처리하는 게 좋다,대대장에게 급히 사정했더니 그들을 빼라고 하더군요 ----장윤석----가족 7-8명을 우선 빼내었습니다, 저기 끌려가는 노인----- 무슨 사상이 있습니까 저들을 살려주십시요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대대장은 나도 살려주고 싶지만 그러면 어떻게 저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등등 대화 내용이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⑤ 증언자는 운전보조원으로 근무하다가 순경으로 임명되었다(보고서 출처에 당시 경찰이라고 기록됨)고 말해 왔으나 확인 결과 순경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⑥ 특히 내가 계속 사정하니까 대대장은 그러면 네가 책임져라면서 사격을 중지시켰습니다라고 한 것은 자기미화라는 의문이 든다.
사격중지는 3대대 부관 이중위가 당일 제주읍에 있는 연대본부 참모회의에 참석 중이었는데, 회의 도중 함병선 연대장이 북촌에서 집단총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중위에게빨리 가서 당장 중지시켜라는 명령을 받고 이중위가 급히 차로 현장에 와서 중지명령을 전달 중지한 것이다.
당시 현장상황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살기등등한 분위기였는데 증언자의 신분지위로 보나 대대장과의 친숙도로 보나, 연령(20세)으로보나 감히 그가 수차례 위와 같은 조언을 할 수 있었으며 그의 말을 듣고 사격중지를 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검증 없이 사실인양 전재했다.
수정의견 : 이와 같이 검증을 거치지 않는 증언을 사실인양 인용하거나 전재해서는 안 된다. 제주4․3사건을 모르는 후세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오도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3) 희생자 300명에 대한 이견
「제주4.3보고서」(438쪽)는 이 날 희생된 주민들이 대략 300명에 이른다고 증언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한 증언자는 군이 전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로 모이라고 할 때 증언자도 같이 운동장에 모였는데 군․경․ 민보단 가족을 분리한 후 나머지 사람들을 4열종대 10명씩 1차로 40명과 2차로 40명을 서쪽 밭으로 데려갔고, 3차로 40명을 데려가서 사살하기 직전 부관의 사격중지명령 전달로 이들은 살아서 운동장으로 되돌아왔다. 따라서 이날 희생된 주민들은 운동장에 모였던 사람들 중 40명씩 두 번에 80명,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하는 과정에서 보초경비 소홀 내지 공비와 내통 혐의로 3-4명, 군경가족 분리과정에서 3명, 함덕으로 이송된 사람(증언자도 여기에 포함) 중 무고에 의해 그 뒷날 30여명이 희생된 것을 포함 모두 120명 선이라 한다(별첨 5. 참조)
수정의견 : 정확히 조사 후 기록해야 한다.
(4) 공비의 보복 공격으로 군인 23명, 경찰 1명 전사 및 민간인 1명 중상사실 누락
1949년 2월 4일 제2연대 장병들이 무기 수송 중 북촌 마을 동쪽 일주도로변에서 공비들이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장병 23명과 함덕지서 夫元廈순경이 전사하고, 운전자 민간인 1명은 중상을 당했으며, 99식 총기 150정이 피탈된 사건이 있는데 군경의 희생에 대한 사실을 완전 누락하였다. 이 때 전사한 2연대 장병은 중위 朴載圭, 특무상사 吳徹, 韓一愚, 일등상사 李圭夏, 이등상사 趙高鎰, 金光植, 일등중사 金石煥, 金四龍, 金進祚, 李順範, 金東浩, 金敏洙, 張殷達, 朴魯英, 이등중사 李濟夏, 金賢洙, 朴炳圭, 이등하사 康泰根, 吳炳煥, 李弘瑞, 閔璇基, 林相虎, 李徹 등 23명이며 1949년 7월 제2연대 장병일동 명의로 전사 장소에 건립한 비석은 도로확장 공사 중 팽개쳐져 있다가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다행히 비석이 없어지기 직전 비명을 필사한 내용을 입수할 수 있어 전사장병의 성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공비들은 전사군인 및 부순경의 옷을 전부 벗겨 가져갔으며 부순경의 시신은 불태워 버렸다. 이로 보아 공비들은 현장에 상당한 시간 체류했고 무장공비와 경계병 등 지원세력도 대단히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정의견 : 공비들의 보복기습으로 군경 민간인이 많이 희생된 사실도 누락시킬게 아니라 형평성 있게 기술하여야 한다.
12. 계엄령 선포의 불법성 논란 부당
「제주4.3보고서」(280-292쪽)는 계엄령에 대하여 제민일보가 피소된 사건 및 학자들의 견해, 증언들을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 하고 수정의견을 제시한다.
(1) 계엄령 선포의 미군의 승인 또는 사후 승인문제
동 보고서 280쪽에 이 계엄령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의 직접 지시를 받아 선포된 것인지 사후 추인을 받은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계엄령시행과정에 깊숙히 개입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계엄령 선포는 작전행위가 아니고 일종의 국무행위로서 미군의 지시나 사후 추인을 요하는 문제가 아니다. 1948년 8월 24일 발효한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간에 체결된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외무부방교국. 조약집: 양자조약 제1권〈1948-1961〉. 서울. 1968. 238-243쪽)에 의하면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진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말 그대로 군사작전의 통제권이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제정되는 계엄선포와 같은 국무행위에 대한 통제권이 아니다.
수정의견 : 정부보고서에 사실도 아닌 것을 사족으로 기술하여 자칫 반미적으로 비칠 오해소지가 있는 기록은 수정해야 온당하다
(2) 계엄선포일에 대한 기록물의 불일치 문제
동 보고서 281쪽에 계엄 선포일을 보면 10월 8일 설과11월 17일 설(혹은 11월 16일), 그리고 11월 21일 설로 나뉜다라고 기록하고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였는데, 이는 집필자가 제1차적 직접자료인 대한민국정부 공보처 발행 1948년 11월 17일자 「관보 제14호」에 의존하지 않고 잘못된 자료들을 인용한 실수에 불과하다. 이 날자 「관보」에는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의 전문(국무회의 의결사실, 국무위원 성명, 계엄선포의 목적, 계엄의 종류, 계엄시행일, 계엄사령관 등)이 공포되어 있다. 이러함에도 보고서 283쪽에는 과연 계엄령이 선포됐었는지 의문이 간다라고 하면서「창군」이나 「육군역사일지」등을 소개하고, 특히 미군보고서에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바 없다(이 문제는 다음 항에 언급하겠음)라고 소개하고 있어, 마치 제주도에 계엄령이 없었던 것처럼 어처구니없게 기술하였다. 그러다가 중간에는 계엄령선포 사실을 명시하여 논리적으로도 전후가 모순되게 구성되었다. 정부보고서가 공보처의 공식기록인 「관보」를 인용하지 않고 잘못된 잡다한 기록들을 인용한 것이 매우 의문이다.
수정의견 : 계엄선포일 불일치 등은 길게 나열할 가치가 전무하며 계엄령선포에 대한 의문도 긴 설명이 불필요하니 삭제 정정함이 옳다.
(3) 미군정보보고서에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바 없다의 문제
동 보고서 283쪽에심지어 미군은 줄곧 제주 계엄령에 관해 보고하다가 뒤늦게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바 없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라고 기술하고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 보고서」 (1949년 2월 5일자)를 인용, 김동성 공보처장의 말을 소개했다.
제주도 계엄령은 1948년 11월 17일 선포되었고 위의 미군정보보고서는 1949년 2월 5일자이므로 김동성 공보처장이 제주계엄령선포를 몰랐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인데 이는 언어도단이다. 이는 한국의 계엄령을 미국에서는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라고 해석하며, 미국의 계엄령(martiar law)은 질서교란지역에서 당해지역의 군사령관이 무력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군사행동으로 해석(292쪽에 이인 법무장관은 국회답변을 통해 계엄령은 현지 군사령관이 발동하는 것이며라고 말한 것도 미국의 계엄령 개념을 말한 것으로 보임 : 잘못된 발언임)하는데, 양국간 개념차이를 모른데서 나온 것이다.
수정의견 : 미국에서의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와 계엄령(martiar law)의 개념을 구분하고 또 우리나라의 계엄령이 미국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서 보고서에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야 한다.
(4) 제주도 계엄령의 비밀처리 문제
동 보고서 285쪽에 계엄령이 선포되면 즉시 공고하고 국회에 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조차 그 진위 여부를 놓고 혼란이 있었다는 것은 계엄령이 매우 비밀리에 선포됐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라고 기술하였다. 의심하는 사람의 눈에는 전부가 의심되게 마련이지만 정부보고서를 작성하는 집필자는 이를 초월하여 냉정한 시각을 유지함이 필요하다. 「관보」에 게재하였으며 계엄사령관 포고 제1호가 1948년 11월 23일 발포(發布)되고 동 포고문이 부락마다 게시된 사실과, 늦게나마 1948년 11월 30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점을 본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해야한다.
그리고 국회통고 문제는 헌법에 규정되었으나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아 국회통고 요건과 절차규정이 없고 무경험이며 다급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으로 해석된다.
수정의견 : 비밀처리 운운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고 현재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고쳐 써야한다
(5) 계엄사령관 송요찬에 관하여
동 보고서 285-286쪽에 송요찬은 계엄령이 무엇인지 몰랐다. 송요찬은 무식한 편이었습니다.라고 제9연대 군수참모 김정무와 서귀포경찰서장 김호겸의 증언을 제시했는데 이는 송요찬의 명예에 관한 문제로서 정부보고서에서 언급할 사항이 아니다. 일제하에서 법을 전공한 자가 아니면 그 때 계엄령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금 잣대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된다. 또 계엄사령관으로서 예하 법무참모가 보좌하면 계엄사령관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는 것이다. 보고서 내용이 사실이라고 쳐도 뒤집어 생각하면 그 만큼 혼란한 건국 초기에 국방은 물론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인재난과 경험 부족으로 온갖 어려움이 있었었음을 증명하고 그런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6.25전쟁을 치렀다.
수정의견 : 송요찬의 계엄령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실책에 대한 언급은 가하나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기술은 정부보고서에서 당연히 피해야한다.
(6) 제주도 계엄령 선포의 위법성 문제
동 보고서 287-292쪽에 제주도 계엄령에 대한 불법성에 관하여 길게 여러 가지 주장과 사례를 제시하고 기술하였다. 그러면서 289쪽에 2001년 4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계엄선포 행위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불법적인 조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음을 소개한 후 여타 주장들을 기술하고 있다. 학자나 국회의원, 일반 국민 각자의 주장은 개인의 주장이고 최종적 판단은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또 합법적이라는 법학자의 주장은 일언반구도 없어 형평성을 잃고 있다.
수정의견 : 계엄령 선포 자체에 대한 불법성 논란은 준법질서를 국민에게 요구하는 정부로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여 보고서를 작성해야 마땅하고 이것은 삼권분립 원칙에도 합치한다. 구태여 위법성을 논하려면 찬반양론을 같은 비중으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7) 계엄령과 계엄포고에 대한 이해부족
동 보고서 293쪽에 대통령령 제31호로 선포된 제주도계엄령에는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는 막연한 표현 외에 그 어떤 규정도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계엄령은 계엄의 근거, 대통령이 선포, 계엄사령관의 포고, 계엄사령관의 포고집행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만약에 계엄령을 발령한다해도 위 대통령령 제31호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수정의견 : 막연한 표현 외에 그 어떤 규정도 없다라는 기록은 수정해야 한다.
13. 폭동세력에 대한 축소 문제
「제주4.3보고서」(578쪽)는 4.3사건 전 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무장유격대 세력만을 기술했다. 이는 「한라산은 알고 있다」(문창송 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27쪽)에 기록된 내용, 즉 1948년 6월 18일부터 7월 15일까지 제5차 조직정비에 의해 편성된 501명을 인용한 듯하다.
그러나 이 500명은 순전히 직접전투에 참가하는 부대편성 된 자 즉, 무장유격대 뿐이다. 여타 이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지원 보조하는 입산자(연락책, 납치한 자들에 대한 감시자, 경계경비자, 처단명령 집행자) 등 제1차적 지원세력과, 부락에 잔류하면서 군경 및 우익세력에 대한 감시 및 각종 정보제공, 물자운반조달 등 보급, 안내 및 연락, 편이제공, 테러 가담, 결원보충 예비인력 등 제2차적 지원세력은 이의 몇 배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완전 누락했다. 이들 지원세력은 시기별로 많은 차이가 있지만 제주4․3폭동의 주역 김봉현이 「제주도인민의 4․3무장투쟁사」(김민주와 공편, 오사까 문우사, 1988년 4월 83쪽)에서 스스로 밝힌 3,000명 이상이며, 심정적동조세력은 이의 몇 배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일체 언급이 없다.
무장공비의 출동은
1) 대상선정(세포에서 선정→ 읍면지구→ 도당부 보고 후 행동결행 결의)
2) 준비작업
- 동향감시 및 경계(비케=보초, 세포전담 = 선정보고시부터 종료시까지)
- 마비투쟁 = 세포에서 전담
① 마비대상(전주, 전선 절단으로 통신마비)
② 도로파괴(차단 및 지연으로 가동력 및 시간확보)
③ 장소선택(전술적 유리한 지점 선점)
④ 운반조(식량, 물자, 무기 등 운반)
⑤ 죽창부대(무장공비 지원 및 경계, 호송)별로 편성 임무분담 후 결행하는데 무장공비 10명이 출동시 최소한 30명의 세포원이 가동된다고 한다.
특히「제주4․3보고서」467쪽에도 11월 28일 새벽 6시 무장폭도 200명과 비무장폭도 500명이 남원리와 위미리를 공격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500명만 한라산에 은거하면서 게릴라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하다. 또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764명인데 수세적 위치에 있던 무장대 500명이 1,764명을 살해했다는 것은 군사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수정의견 : 따라서 무장대세력 500명만을 적시할 것이 아니라 그 지원세력을 포함, 폭동주체세력은 제주4․3주역인 김봉현이가 스스로 밝힌데로 3,000명으로 고쳐야하며 이들을 희생자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반면, 폭동주체세력 3,000명을 제외한 희생자에 대하여는 당연히 명예회복 및 보상이 이뤄져야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14. 4․3사건의 정의에 대한 문제점
제6항에서 지적했지만,
「제주4․3보고서」(577쪽)는 제주4․3특별법 제2조를 인용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한다.
(1) 제주4․3기점을 3․1발포사건으로 한 점에 대하여
제주4․3의 기점은 제주4․3특별법상에 명시되었기 때문에 법률상 거론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으나, 정치적인 면에서 그 줄기를 찾아보면 분명하게 남로당을 주축으로 1946년 9월 23일 서울철도파업사건을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 1일 대구폭동사건을 비롯해 1947년 3월 1일 삼일절기념투쟁, 제주도에서는 3월 10일 3․10총파업투쟁, 1947년 8월 15일 광복절 투쟁, 1948년 2월 7일 2․7구국투쟁과 맥을 같이하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기술해야 한다.
(2) 폭동이유에 대한 이견과 애매성
「한라산은 알고 있다」(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17쪽에 전남도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 단정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무장반격을 결정했다라고 명시하고 있어, 첫째 이유는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남로당 조직과 주동자의 일망타진으로 제주도 공산화 계획에 차질을 초래하고 검거시 처벌을 우려해서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남로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와, 적기가, 혁명가를 불렀으며, 인공기를 게양하였다.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항거라면 왜 그와는 전혀 무관한 일반인,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고, 또는 인민위원회나 남로당 가입은 물론 백지날인, 입산강제, 자유투표를 무자비한 테러로 위협했는가?
두 번째 이유를, 단선.단정을 기치로 라고 간단하게 기록하여 통일을 위한 의거처럼 오해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8일 임시정부 기구인 북조선임시위원회(위원장 金日成)를 결성하여 曺晩植이 영도하는 5도임시인민위원회(1945년 10월 8일 결성)를 무력화 시켜 북한의 통치권을 장악하였고 이어 1947년 2월 22일 정식 정부기구인 북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金日成)로 개편하여 북한의 통치권을 행사했던 것이다(申相俊 저 제주도4․3사건 하권 1146쪽), 그런데 남로당이 4․3을 전후하여 일관되게 주장한 것을 보면, 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 반대한 경우는 전무하고, 오히려 그의 사상과 이념에 적극 동조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친 것은, 단순히 민족통일을 위한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4․3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북한의 단선단정은 인정하고 남한의 단선단정만 반대하여 즉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공산통일을 위한 폭동임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생략하고 애매하게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므로서 사실인식의 혼란과 오해 소지가 많다.
수정의견 :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를 남로당 조직수호와 방어수단으로, 즉 남로당 조직의 탄로와 주동자 등이 일망타진되면 한반도 공산화 계획에 차질을 초래하고 처벌을 우려해서라고 고치고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를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실시하는 5․10 제헌의원선거를 저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기록해야 한다.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1998년 11월 24일 한라일보) 라고 공식 선언했다. 이 범위 내에서 정의하여야 한다.
15. 다랑쉬굴 사건에 대하여
「제주4․3보고서」(309쪽)는 다랑쉬굴 사건에 대해강경진압 작전이 한창 진행될 때는 발각 당하는 즉시 총살됐다. 1992년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굴된 사건은 제주4․3사건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특히 희생자들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들로서 그 중엔 여자 3명과 아홉 살 난 어린이도 포함돼 있어 충격을 주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이는 1948년 12월 3일 무장공비가 구좌면 세화리를 습격, 국민학교와 공회당, 주민가옥 150여채가 소실되고, 50명 가량이 하루밤 사이에 희생되자 군․경․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는데,
(1)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채모씨 참고인 진술 내용
1948년 11월 8일 밤 11시경 자경단원으로 종달리 중동을 순찰 중 종달리 출신 공비 오달용 일당에게 진술인과 김호준, 윤인현, 강사현, 김원일 등 5명이 함께 납치되어 상도리경 개남밭으로 끌려가다 김호준은 피살되고, 야산 2-3곳을 전전하다가 다랑쉬굴에 가보니 유해로 발견된 강태용, 고태원, 박봉관, 함명립, 고순경, 고순환, 고두만과 그외로 채정생, 한영환, 오정일, 김태길, 윤태만, 이씨, 오씨 등 14명이 있었고 여자들이 밥을 지어 식사했으며 이들과 2-3일 지내다가 하도리 출신 오치학이 구좌면당부에서 왔다면서 면당으로 가자고하여 따라가 보니 정권수 등 20여명이 있었는데, 대토벌전이 있던 날 밤 정권수의 지시로 진술인은 조장 오치학을 따라 하도리 출신 고완규와 함께 다랑쉬굴에 들어가 조장의 지시에 따라 시체를 한두군데로 가지런히 놓고 오치학은 사체신원을 확인 명단작성하고 면당으로 돌아와 정권수에게 보고했으며 이들은 죽창과 철창을 가지고 기본적 경비를 하면서 상부지시에 따라 통신연락 보급,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맡았던 공비라는 증언이 있고,
(2)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오모씨의 참고인 진술내용
세화리 피습 후 군경민 합동토벌전에 참가, 다랑쉬굴을 발견하고 군인들이 밖으로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나오는 사람이 없자 굴속을 향해 총 몇발을 쏘니 종달리 출신 고태원이가 굴밖으로 나와, 굴속에 11명이 있고 자기가 자수시키겠다하므로 그를 포승줄로 묶고 굴속으로 들여보내면서 군인이 따라 들어갔으나 중간에 줄이 끊어지자 군인은 나오고, 계속 자수를 권유하였으나 불응하므로 굴입구에 메밀짚으로 불을 피워 30여분이 지날 때쯤 청년 1명이 나와 덕천리쪽으로 도주하다 사살되고 3시간쯤 후에 세화리 함모씨를 따라 굴에 들어가 종달리 출신 고태원, 박봉관, 강태용, 고순경, 고두만 등 시신을 확인하였다는 증언이 있고.
(3)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함모씨의 참고인 진술내용
세화리 피습 후 군경민 합동토벌전에 참가 다랑쉬굴 주변에서 사람이 용변한 것을 발견 굴속에 공비가 은신 중임을 확인, 군인이 총을 발사하자 청년하나가 나왔는데 굴속에 11명이 있고 책임자는 오달용인데 지금은 다른 거점에 갔다고 했으며 그 청년이 자수시키겠다고 하자 몸을 묶고 들여보냈으나 줄을 끊어 그들과 합세하므로 굴입구에 불을 피우게 되었으며 한참 후 종달리 오모씨와 같이 굴에 들어가 사체신원을 확인하였다는 증언이 있고.
(4)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김모씨의 참고인 진술내용
다랑쉬 굴속에서 죽은 자들은 당시 세화리 일대를 출몰한 공비가 분명하며 군경에 발각되자 합동으로 죽자고 결심한 공비들로, 양민이 어째서 동굴에 숨어있겠느냐, 죽은 유골은 반드시 공비로 활약했던 자들이라는 증언이며
(5) 굴속 유류품 중에는, 안경 등 신변잡기류와 낫, 도끼, 나대, 곡괭이 등 연장류 및 가마솥, 물허벅, 놋그릇 등 생활용품 외에 대검, 철모, 군화, 탄띠 등 무기류가 발견된 점 등을 종합하면 이들은 남로당 구좌면당책 정권수 산하에 오달용의 지휘를 받아 다랑쉬굴 등을 거점으로 공비활동을 한자로 판단되고 여자 3명은 이들에게 취사편이를 제공하였으며 어린이는 하도리 여자 김진생의 아들 이재수 당시 나이 10세이다.(별첨 6. 참조)
자수시키겠다고 굴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스스로 그랬거나 내부에서 통제한 것인데, 모두가 자수했다면 최소한 공비들에게 취사편의만 제공한 여자나 어린이는 희생을 면할 수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수정의견 :발각당하는 즉시 총살했다,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이라고 기술하지 말고 토벌대측의 사정도 상세히 조사하여 같이 기술해야한다.
16. 사용용어의 형평성
「제주4․3보고서」는 용어사용에 있어서 군경의 토벌작전을 부정적으로 보는 듯 한 색채를 띈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학술 논문도 아니고 정부보고서이므로 “공산폭도” 또는 “무장공비” 등으로 써야 할 것을 “무장대”로, “폭동”으로 써야 할 것을 “무장봉기”로, “토벌작전” 또는 “강경토벌작전”, 또는 “중산간부락소개” 등으로 써야 할 것을 “초토화작전”으로, “현장처형” 또는 “즉결처형” 등으로 써야 할 것을 “학살”, “살해” 또는 “살인”, “대살(代殺), 관광총살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군경의 토벌작전을 부정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더구나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라고 하여 , 마치 제주4.3폭동은 당연히 발생할 의로운 사건인양, 그리고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라고 기술하여, 정부진압군과 무장공비를 대등한 위치에 놓고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다.
수정의견 : 현 대한민국정부가 북한 김일성 정권의 후계체가 아니고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정부의 승계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또한 군경 토벌작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전제로 해서 용어를 선택해서 문장을 구성해야 한다.
반론 끝에
제주4․3보고서는 2003년 3월 29일 심의 의결했고 이로부터 6개월 이내인 2003년 9월 28까지 수정의견을 제출하게 되었는데 보고서가 인쇄 발행된 것은 4월 29일이며 6월 2일 입수하여 일독하니 절반이 지났다.
생업에 종사하거나 노령으로, 결국 이 반론은 1-2명이 전담 작업할 수밖에 없고 단기간에 조사한 내용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극히 일부분일뿐 아니라 내용도 빈약하다.
보다 광범위한 증언채록과 조사 및 연구 위에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출하여 역사서로서 후세에 남겨질 정부보고서 작성에 기여하고 싶지만 인력, 능력, 시간, 재정, 주위분위기는 최악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그리고 직접 4․3을 경험한 세대들은 제주4․3보고서를 비롯하여 모든 언론에서 편향된 보도들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실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4․3으로 입은 상처가 55년이 지나면서 거의 아물어 가는 이 때, 반론자와 함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에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없다는데 어려움이 더하다.
사건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입을 닫고, 간혹 사석에서 진상을 토로하지만 막상 채록하려면 거절한다. 시대 조류를 민감하게 읽고 보이지 않은 위압감을 느끼며, 협소한 지역에서 그 간 얼키고설킨 인연과 쌓은 정에 금이 가면 안 된다는 인간적 배려와 나서봐야 미움이나 받지 득 될 게 없다는 계산 때문에 무장공비와 그의 만행은 묻혀지는 듯 하다.
끝으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국무총리)이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작성 주체로서 역사적 사명감을 자각하고 이 반론을 예의 검토, 반영해주길 기대하면서 더하여 보고서 작성팀을 가급적 권위 있는 전문 학자로 하되, 시각차가 있는 사람을 절반씩 형평성 있게 구성하여, 보고서가 확정된 후 시비꺼리를 사전 일소하도록 강력히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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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 덕 선 증언
공비의 만행 사례
본인은 1949년 5월 3일 제주도 경찰에 투신하였다가 1977년 1월에 퇴직하고 서귀포시 서귀동 597-7번지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김덕선 76세 입니다.
본인이 직접 체험한 공비의 만행 사례 하나를 증언한다.
보고서에, 토벌대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많이 기재하여 차후 재발 방지를 기한다는 것도 일리는 있으나 진상이란 양쪽을 공평하게 사실데로 밝히는 것이다. 양과 질적인 면에서 너무 일방적이면 아니 된다.
본인은 1950년 11월 9일 합법적인 작전 경비 명령에 의해 본인을 포함 경찰관 15명이 북제주군 조천면 대흘리에 거점을 두고 추수(秋收) 경비를 하다가 같은 면 와흘리에서 공비에게 습격 당해 김일준 경사 등 경찰관 9명이 전사했는데 공비들은 경찰관 9명의 목을 잘라 머리를 멀리 던져 버렸다. 당시 그 참상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는 점만을 밝혀둔다.
우리들은 대흘리 주민을 동원하여 겨우 9구의 머리를 수습, 사체를 조천리 소방대 창고로 이동하고 제주시 고영은 의사가 현장 출장, 머리와 몸을 봉합하고 장례를 치른 바 있다.
여러 개의 몸과 머리가 모두 분리 된 시신을 정확히 잘 맞추느라 노력은 했으나 워낙 훼손이 심하고 그 때는 경황 중이라 혹시 머리와 몸이 바뀌어 합신(合身)된 사람은 없었는지 지금도 나는 마음이 괴롭다.
2003년 4월 23일
서귀포시 서귀동 597-7
김 덕 선 (인) (064) 762-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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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강 학 송 증언(제주4.3보고서 467-468쪽과도 관련)
증 언 록
1. 본인은 한 때 교직에 있다가 퇴직하고 현재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2. 본인의 고향 위미리는 4․3사건 당시 폭도 습격으로 피해가 많은 부락인데 제1차 습격 때 폭도들이 위미국민학교를 전소하고, 인명피해는 50여명이 죽고 100여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부락민가는 좌익과 내통한 사람집 5-6호를 제외한 750여호에 1,500여채를 전소시키는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자 부락 주위에 성을 쌓고 경비를 하게 되었으며 본인의 부친 康基瑞 당시 47세는 이 때 민보단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3. 1948년 12월 31일 저녁 7시부터 9시 사이 두시간 동안 제2차 폭도습격이 있었을 때 저의 부친은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4. 본인의 부친은 그 날 친족들과 여럿이 종손집에 있다가 폭도 습격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폭도들에게 붙잡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과 칼로 난자 당하였는데 시신을 수습하고 보니 손발은 물론 신체 부분 부분을 주먹만큼씩 여러개로 도려내었으며 심지어 성기까지 잘라버렸는데 길에서 수습한 시신 덩어리는 5㎏을 넘을 정도였습니다.
5. 본인은 길옆에 내팽개쳐진 아버지 시신을 집으로 모시려고 시신을 업고 오는데 수십 군데 찔린 상처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내려 내가 신은 고무신으로 흘러드니 신발이 미끄러워 걸을 수가 없자 하는 수 없이 신을 벗고 맨발로 업고 집에 왔습니다. 사람을 죽이려면 그냥 목숨만 끊으면 되지,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천인공노할 정도로 잔인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6. 이날 위미리에서 폭도에게 희생된 사람은 모두 7명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시신은 저의 부친이고 그 다음은 당시 의용소방대장이며 저의 4촌형님 康衛吉과 동네 康官三씨 시신이 매우 험악했고 나머지 4명의 시신은 그리 험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7. 폭도들은 시간상으로 볼 때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저의 아버지와 4촌형님의 얼굴을 알고 집중 공격한 점으로 보아 위미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8. 최근 이런 폭도들도 희생자로 신고했는데 저는 이런 것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영전에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입니다.
2002년 5월 24일
증언자 주소 : 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 1974
성명 : 康 鶴 松(인)
전화번호 : (064)76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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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 문 혁 증언
진 술 서
1. 저는 서귀포시 상예동 767번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김문혁 71세입니다.
2. 저는 4․3사건 당시 17세로서 저의 아버지 김봉일 당시 39세와 어머니 김경옥 당시 44세, 두 분이 폭도에게 희생되었습니다.
3. 폭도들이 저의 보모님을 살해한 이유는 아버지가 당시 대동청년단 상예2리 단장으로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시 같은리 선거관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 극렬분자들이 1차 테러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봅니다.
4. 저의 아버지가 희생된 날은 1948년 5월 10일 선거일 이른 아침에, 집에 부모님과 누님, 남동생 2, 여동생 3, 본인 등 9명이 있었는데 폭도 20여명이 철모를 쓰고 일본도 또는 철창을 든 채 집을 습격, 저의 부모님을 끌어내어 빨래줄로 두 분의 손을 뒤로해서 포박하고 집안을 뒤져 궤짝속에 있는 책들을 모두 찢어버린 다음 삐라를 기둥에 붙인 후 본인을 결박하여 집에서 500-600m 떨어진 속칭 거린돌 집결지로 끌고가서 저는 어리다는 이유로 방면되고 부모님은 그 곳에서 400m나 더 떨어진 소나무밭으로 끌고가 나무에 동여매고 철창으로 가슴 등 전신을 수십군데 찔러 죽였습니다.
특히 저의 어머니가 당한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5. 저의 집을 습격한 폭도 20여명 중 저가 알 수 있는 사람은 동네 사람 오용주, 중문리 안두현, 색달리 이보택, 회수리 이명 미상 등이었습니다.
6. 저를 직접 묶고 끌고 간 사람은 오용주인데, 집결지에 이르자 때마침 상예리 향사에 있는 투표함을 뺏어 집결지 부근에서 박살낸 팀과 합류하고 나를 방면한 다음 부모님을 끌고 갔습니다.
7. 오용주를 희생자로 신고한 사람은 누이동생 오연지이며, 보증자는 상예2리 오규찬 77세외 1명입니다.
8. 오용주는 당시 남로당 활동을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했고 저와 부모님을 납치 살해한 일당 중 한 사람임을 저의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이런 자가 희생자로 선정되어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받는 다면 지하에 있는 저의 부모님 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9. 그리고 오용주의 좌익활동을 충분히 알고 있는 오규찬이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고 친족이라 하지만 희생자로 보증을 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10. 당시 저의 누님은 19세로 아팠었는데, 부모님 참변 소식에 충격을 받고 일주일 후 사망하였으며 저는 졸지에 17세로서 오남매를 거느릴 가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막내 동생은 세 살이었는데 이듬해 죽고 제가 군에 입대할 때는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집안이 풍비박산되었습니다.
11.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희생된 저의 부모님의 영혼을 달래 주어야할 정부에서 정중한 위로는 못할망정 폭도들을 희생자로 명예회복하고 보상을 해 준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역사를 바로 잡아 주십시오.
2002년 8월 4일
진술인 : 김 문 혁 (인)
전화 :(064) 738-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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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 경 만 증언
진 술 서
1. 저는 남군 남원읍 태흥리 1774-5번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김경만 71세입니다. 그리고 저는 해병대 4기생으로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상이군인입니다.
2. 저는 4․3당시 저의 아버지 김석추 당시 49세와 형님 김배만 당시 22세가 폭도에게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3. 폭도들이 저의 아버지와 형님을 지목해서 죽이게 된 것은 당시 저의 아버지와 갑장인 양창민, 백부 김석규, 구장을 역임한 송인혁씨 등 4명이 주축이 되어 부락을 지키기 위하여 향보단을 조직하려는 동향이 그들에게 누설되었고, 형님은 몸이 쇠약하여 집에서 휴양 중이었는데 시국이 뒤숭숭하니 경찰에 투신하려고 이력서를 서귀포경찰서에 제출한 사실이 그들이 입수하여 제거하려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4. 형님을 죽인 날짜는 1948년 음력 10월 10일 오후 2시경 동네 건장한 청년 2명(이름은 알지만 생략, <양씨, 정씨>)이 집에 찾아와 저의 형님을 납치하여 태흥1리경 속칭 도타닛도에 끌고가 태흥리와 인접부락 의귀리 좌익청년 70-80명이 모인 장소에 이르러 옷을 완전히 벗기고 팬티만 입히고 당시 남로당 남원면당위원장 김계원이 인민재판장이 되고 검사(이름은 알지만 생략, 〈태흥1리 고운학〉〈변호사 태흥1리 정성선〉)가, 평소 남로당에 비협조하고 경찰에 투신한다는 죄목으로 사형〈구형을 하고 재판장이〉선고를 하여 남원읍 의귀리 출신 김남○(이름은 알지만 생략)가 일본도로 목을 치고 엎어지자 옆에 있던 청년들이 철창으로 8군데를 찔러 무참히 살해하였으며 이어 3항에서 밝힌 아버지, 백부, 송인혁, 양창민도 죽여야 된다고 판결하였습니다.
5. 그 후 같은 날밤 10시경 30-40여명이 태흥리로 내려와 저의 아버지와 갑장인 양창민의 집을 습격, 잠자고 있다가 방에서 부엌으로 도망가는 양창민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두 번째로 저의 집에 와서 아버지, 어머니, 본인과 동생이 한 방에 잠자고 있는데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여 아버지가 방밖으로 나가자마자 철창으로 16군데를 찔러 죽이고 이웃집 송인혁씨 집에 가서 송인혁씨도 죽이고 마지막으로 저의 백부 집에 갔으나 백부님은 눈치를 채고 오래된 동백나무 위로 피신하여 화를 모면하였습니다.
6. 그런 후 그 해 11월경 군인 2연대 2중대가 폭도토벌을 위하여 의귀리에 있는 국민학교에 주둔하였는데 폭도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군인 6명이 전사한 사건이 있자 부대를 태흥리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7. 당시 본인은 17세로서 토벌대 보조원으로 자원하여 자주 수행하게 되었는데 1949년 1월경 의귀리 돔박머들 지경에서 저의 형님과 동창이며 의귀리 출신인 공비 김진일(일명 김윤일)을 생포하였는데 그 자가 입은 옷이 본인의 형님이 죽을 때 입었던 국민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8. 김진일을 부대로 데리고 와서 조사하는 과정을 저가 직접 들었는데 그 내용이 지금 제주도4・3사건지원사업소장을 맡고 있는 김동화의 아버지 김계원이 인민재판장을 맡아 본인의 아버지와 형님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김계원은 당시 제주농업학교를 나와 남로당 남원면당위원장이었으며 그러니까 재판장을 한 것입니다. 〈2003년 7월 3일 제주도청에 전화로 확인 결과 김동화는 얼마 전 타부서로 전출되었음〉
9. 그런데 이게 김일성 체제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하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런 사람이 4・3희생자로 신고되고, 보증을 서주고, 희생자가 되면 당시 희생된 군경이나 일반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10. 이상 진술한 것은 제가 임의로 사실데로 진술한 내용입니다.
2002년 5월 24일
진술인 김 경 만 (무인)
※〈 〉내는 반론자가 추가로 조사 기술한 것이며 <견명조체>는
4‧3특위에 제출한 서류에는 없는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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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 형 인 증언
증 언
一. 증언자 인적
성명 : 오형인 남 (갑술생 당년 70세)
생년월일 : 1935. 7. 21. (실제 1934년생)
원적 : 제주도 남제주군 중문면 상예 2구 4663번지
(현재 서귀포시 상예동 4663번지)
본적 : 제주도 남군 대정읍 하모리 869번지
주소 : 제주도 남군 대정읍 하모리 818의 1번지
二. 피해자 인적
1. 성명 : 오대호 남
생년월일 : 1903. 7. 7. (실제는 신축 1901년생)
본적 : 제주도 남군 중문면 상예리 4663번지
주소 : 제주도 남군 중문면 상예리 4482번지
사망년월일 : 1948. 5. 10.(음력 4. 2일 당시 48세)
사망장소 : 제주도 남군 중문면 상예2구 3859번지
(속칭 거린돌 동쪽 당시 고창학씨 소유 소나무 밭)
2. 성명 : 이기생 여
생년월일 : 1910. 2. 14. (실제는 기유 1909년생)
사망년월일 : 1948. 7. 21. (음력 6. 15. 당시 40세)
三. 증언자와의 관계
증언자의 부모
四. 부모님 사망 경위
1948년도 4․3사건 당시 저희 가정은 부모님, 형님, 누님과 저 그리고 외할머님을 모시고 여섯 식구가 기독교 예수를 믿고 농사를 지으며 농촌 순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1. 저희 아버지께서는 8・15광복 후 건국을 위한 우익 애국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 상예2구 분회 회장직을 맡고 계셨으며 5․10선거 아침 철모를 쓰고 칼과 창, 몽둥이 등을 손에 든 중문리 출신 이보택(일정 때 면서기)이의 인솔하에 오용주(같은 동리이며 저희 6촌형) 등 7-8명의 공산폭도들이 침입 잡혀가 속칭 거린돌이란 지경 동쪽 소나무 밭에서 같은 부락 대동청년단장이시며 선거관리 부위원장이신 김봉일씨와 그 부인 김영옥씨와 함께 폭도들의 총칼에 의해 전신이 난자, 갈기갈기 찢기고 목이 잘려 돌아가셨다. 이 사실은 그 당시(5‧10선거일) 수 많은 동리 사람들과 함께 폭도들에 의해 산으로 끌려가다 도망쳐 집으로 돌아 온 백부님의 작은 아들 오형도(사촌형님)의 말에 의하면 도망쳐 올 때 소나무 밭에 사람이 죽은 시체를 멀리서 보았다고 말하므로 알게 되었다.
이튿날(5. 11.) 중문지서 경찰들과 대동청년단원들이 현장으로 와서 확인하고 시체를 저희 집으로 모셔 온 것을 저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더니 아버지의 가슴과 등 그리고 머리에는 창칼로 수 없이 찌르고 쑤셔서 살점들이 갈기갈기 찢기우고 도려져 난자된 상태였으며 뒷 목부위는 일본군도(칼)로 잘라 손바닥만하게 살점이 달랑달랑 붙어 있었고 목 뼈가 보였다.
폭도들도 인간임은 틀림없는데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처럼 사람을 창칼로 잡아 난도(亂刀)질을 할 수가 있었는지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저희 어머니께선 오열을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쓰러져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저희 외할머님을 중심으로 3일째 되는 5. 12일 급히 서둘러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그 날로 양식도 살림도구도 다 둔 채 안덕면 화순리 이모님(이봉록) 댁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2. 저희 어머니께서는 5. 11. 남편(저희 아버지)이 참혹하게 죽은 모습을 지켜보다 쓰러진 후 회복을 못하시고 2개월 후 7. 21.(음력 6. 15) 안덕면 화순리에서 세상을 뜨셨다.
저는 그 때 나이 15세였으며 대동청년단장이시며 선거관리 부위원장인 김봉일씨의 큰아들 김문혁씨는 현재 서귀포시 상예동767번지에 생존해 계신데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도 당시 17세 어린 나이로 부모님들과 함께 폭도 오용주에 의해 밧줄에 손이 묶여 속칭 거린돌이란 곳으로 잡혀 갔다가 그 현장에 있던 동리 어른들의 만류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은 그 부모님들과 저희 아버지께선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악질반동으로 몰려 죽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동리 사람들이 흘린 말에 의하면 소나무 밭에서 폭도 이보택이의 주제하에 인민재판을 열어 저희 아버지와 청년단장과 그 부인 이렇게 세 사람을 복판에 세워놓고 창칼을 든 폭도들은 둥그렇게 둘러서게 한 후 지금이라도 잘못을 반성하고 자기들 말에 복종하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응하지 않음으로 가슴과 등을 창과 칼로 찌르며 재차 거듭 물었으나 여전 불응하므로 몇 차례 창칼로 찌르며 이 악질 반동새끼들하고 다시 창칼질할 때 세사람 모두 그 자리에 푹하고 쓰러져 엎드려지자 창으로 머리를 몇차례 쑤시고 일본군도(칼)로 뒷목을 두 번 내리쳐 목을 잘랐다는 것이다.
五. 또 다른 증언자 이평화 오사생
1.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저희 고종사촌형님(이평화)이 당시 4‧3사건 후 5-6년이 지난 뒤에야 말하길 5‧10선거일 전날 밤에 속칭 거린돌이란 장소에서 폭도들은 부락 청년들을 모아놓고 인민회의를 열어 폭도 이보택이가 말하길 내일 (5‧10선거일)우리들의 임무는 선거를 못하도록 오늘밤 선거인명부를 압수하고 투표함을 부셔버리고 그리고 이 부락에 노랑개(미군)를 쫓는 악질 반동분자 국민회 회장 예수쟁이 오대호와 청년단장이며 선거관리 부위원장 김봉일을 처형하는 일에 여러 동무들이 적극 협력해주기 바란다란 말을 현장에서 들었지마는 전달해 줄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후회하며 저에게 들려주었다.
2. 역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사생(폭도 오용주의 집 앞집에 살았고 부락 서기였다)씨가 들려 준 말에 의하면 5. 9일 밤 뒷집 오용주네 집에는 낯선 젊은 사람들이 모여 돼지를 잡아먹는 것을 뒷문으로 보았으며 밤늦게 낯모른 젊은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와 너 선거인명부를 가져있지 빨리 내 놔라고 큰소리치자 겁에 질려 선거인명부를 내 주었다고 한 그 말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도 생생하다.
참고 : 당시 저희 집에 쳐들어왔던 7-8명의 폭도들 중엔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을 밝히면 이보택 오용주 안두현이다.
1. 이보택이란 자는 중문리 출신이며 일정 때 중문면 서기였다. 공무로 저희 부락에 왔을 때 저희 집에 들려 점심도 먹은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폭도 중문면 총책이였으며 자수하여 지내다가 예비검속에 잡혀가 제주 정뜨르 비행장에서 처형 당했다고 하며 도의회에서 조사 발간한 (희생자)명단에 들어 있다.
2. 오용주는 저희와 같은 동리이며 6촌형벌이 되며 일제말엽에 북해도 징용을 갔다온 후 불량했으며 저희 부락에서 폭도 책임자였었다. 1949년 여름엔가 예래란 부락에 잠입하여 활동했으며 속칭 열리 큰이물이란 곳에서 출장 온 경찰과 중문면 국민회 회장 김동화란 분이 길을 가다 너무나 무더워 냇가에서 목욕을 하려는 찰라 뒤로 미행 따라와 경찰관이 소지한 총을 탈취하려다가 들켜 잡힌 후 육지 형무소에 갔는데 6‧25 때 인민군들이 옥문을 열어줘 그 후 이북으로 건너간 후 소식도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3. 안두현이란 사람은 중문리 출신이며 저희 형님과 중문국민학교 동창이며 폭도로 활동하다가 자수하여 6‧25 때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에서 산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2003. 6. 30.
오 형 인 (싸인)
T. (064) 794-3571
별첨 2
2-1
4・3관련 교도소 수감자 북한 거주 확인 사례
○ 사례 1(희생자로 신고)
제주시 봉개동 2499-1번지 강인홍 여 103세의 2남 강익수 71세가 북한 황해남도 삼천군 삼천읍에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4․3당시 20세인 강익수는 4․3관련,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그 가족이 한때 책을 보낸 적도 있었는데 6․25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가 남북 적십자회담 결과 제3차 교환방문자 명단에 포함되어 그 생존이 확인되었다.
이 집안은 4․3관련 장남과 3남이 사망하고 딸 강윤희(80세)가 제주시 화북1동에 거주하면서 아들 허병호 44세로 하여금 외조모를 돌보며 살아 왔다 한다.
근거 : 2001. 1. 31. 제주일보 1면.
○ 사례 2
서귀포시 토평동 1228번지 오미생 여 83세의 남동생 오유범 71세는 4․3당시 서귀중학생이었는데 4․3관련 타 지방 형무소로 연행된 후 소식 두절되었다가 북한이 제3차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후보자 명단에서 북한에 거주, 생존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근거 : 2001. 2. 1. 제주일보 23면.
○ 사례 3(희생자로 신고)
1948년 10월 4․3관련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그 해 의용군으로 입대, 현재 평안북도 룡천군 북종구에 살고 있는 남제주군 남원읍 남원리 출신 오광흡 80세가 2001년 3월 17일 서귀포시 중앙동에 거주하는 큰딸 오갑생 58세에게 보낸 편지가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되었다. 이 편지는 남원읍 남원리에 살고 있는 오광흡의 부인 정동춘 81세의 집에서 오갑생씨와 작은 딸 해생 56세 등이 보는 앞에서 개봉되었고 아버지가 죽은 줄로 알고 제사를 치러왔다고 한다. 한편 오광흡은 북한에서 1954년 6월 제대하고 기계공장에 종사하다가 재혼해 4녀 1남을 두고 있다한다.
근거 : 2001. 3. 18. 제주일보 22면
○ 사례 4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제주도 혈의 역사」를 김봉현과 공동 편찬한 김민주는 1948년 당시 16세로 4․3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었는데 1950년 6․25전쟁 발발로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된 후 남로당의 빨치산으로 북한의 인민군과 합세 전투에 참가, 목포까지 내려왔는데 한․미 합동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지리산으로 도피 빨치산 활동을 계속하던 중 충북 단양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시 출소한 후 고향 제주에서 생활하다 일본으로 밀항, 재일조총련 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의 동생 둘이 북송되었는데 그 중 1944년생 김태원은 1962년 북송된 후 1970년 전후 북한 당국에 스파이 누명으로 체포되어 20여년 구금되었다가 비밀리에 숙청된 것을 계기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이는 일본 고지현 출신 1937년생 아끼하라료,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기자가 1972-1973년까지 1년간 평양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자가 폭로한 내용이다.
근거 : 도서출판 월간관광제주. 박서동 채록 편집.「영원한 우리들의 아픔 4․3」 275면.
○사례 5(희생자로 신고)
오치혁 1928년 3월 29일생은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1226번지에서 생활하다가 4․3사건 당시 입산 공비로 활약타가 피검되어 1949년 3월 제주지구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서울 마포 교도소에서 복역 중 6․25당시 탈옥 인민의용군으로 지원 활동타가 월북하고 1965월 11월 하순 자정에 동리 출신 간첩 김태욱 1925년 10월 25일생과 함께 하도리 해안으로, 본인의 6촌 동생 본적이 하도리 1220번지이고 주소가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932번지 거주 김태곤과 간첩 김태욱의 친동생 김태순 1928년 11월 5일생을 대동월북하려다 이들이 거절하자 공작금과 불온서적 등을 교부하고 월북한 자임.
※ 간첩 김태욱은 6․25당시 서울에서 인민의용군으로 지원 활약타가 월북한 자임.
근거 : 1990. 10. 제주도경찰국 발간 제주경찰사 385면
○ 사례 6
이기백 1931년 5월 19일생은 북제주군 조천읍 신촌리 1966번지 출신으로 4․3사건 당시 제주농고 3학년에 재학하면서 민애청 및 학생동맹에 가입하여 살인 방화 등을 감행하다가 피검되어 1948년 12월 8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인천교도소에서 복역 중 6․25 당시 인민군에 의해 탈옥하고 인민군과 합세 활동하다가 월북한 자로서 1966년 5월 18일 24:00시경 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 당머르 해안으로 침투하여 동생 이기신을 대동월북하려고 하였으나 동생의 거부로 실패하자 사상교육만 하고 월북한 자임.
근거 : 1990. 10. 제주도경찰국 발간 제주경찰사 387면
○ 사례 7
김원하 1931년 9월 6일생은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716번지 출신으로 4․3사건 당시 남로당에 가입 활동타가 피검, 인천교도소에서 복역 중 6․25 당시 북괴군에 의해 탈옥 월북한 자로서 1966년 6월 29일 01:00시경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남당머리 해안으로 간첩3명과 함께 침투 친동생 김원방 1940년 3월 5일생을 대동월북 밀봉교육을 시킨 후 동년 7월 28일 03:00시경 간첩 2명과 함께 북제주군 구좌읍 동복리 해안으로 재침투 본인은 북한으로 즉각 복귀하고 일행 간첩 4명은 김원방 가에서 3키로미터 상거한 김원방 소유 경작지 귀퉁이 밀림에 밀거지를 구축, 동년 9월 1일까지 밀봉교육 및 임무 수행 중 민간인의 신고로 간첩 김원방은 9월 2일 검거하고 김건학(일명 문학철)은 9월 5일 사살, 김복성은 9월 10일, 이춘만은 9월 28일 각각 생포, 대간첩작전을 종료하였음.
근거 : 1990. 10. 제주도경찰국 발간 제주경찰사 390면
○ 사례 8
김기홍 1929년 2월 15일생은 제주시 외도2동 246번지 출신으로 4․3사건 당시 남로당원으로 활약타가 피검되어 서울 교도소에서 복역 중 6․25 당시 탈옥 월북한 후 1966년 3월, 6월, 10월 등 3회나 침투, 외도국민학교 1년 후배, 북제주군 애월읍 광령리 1274번지 출신이며 광주시 동구 광산동 46번지에 거주하는 김보헌 1938년 12월 23일생을 접선, 일제 노싱을 대량 밀수하였는데 이를 인수 판매하여 수익금을 분배하자고 유혹 1966년 10월 9일 24시20분경 제주시 삼양동 해안가에 유인 북한 공작선에 승선 월북시켜 1개월간 밀봉교육을 받고 1966년 11월 12일 23:00시경 제주시 외도동 해안으로 복귀토록 한자임.
근거 : 1990. 10. 제주도경찰국 발간 제주경찰사 393면
○ 사례 9
김상화 70세 조천면 신촌리 출신은 2003년 2월 20일부터 금강산에서 실시되는 제6차 이산가족 상봉 북한측 후보자 명단에 제주출신 5명과 함께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2003년 1월 27일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김상화는 4․3 때 인천형무소로 끌려갔는데 동생 청자 63세 두화 57세가 경남 남해군 미조면에 생존해 있고 고향에는 조카 순석이 살고있다.
근거 : 2003. 1. 28. 제주일보 22면
○ 사례 10(희생자로 신고)
제7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북한측에서 대한적십자사에 보내 온 명단 200명 중 제주시 이호2동 김경종은 4․3사건 당시 19세로 좌익활동타가 피검 인천형무소에 수감 중 6․25당시 월북, 북한에 생존 거주 중 이번 이산가족 상봉시 금강산에서 노모와 만났다.
근거 : 2003. 7. 1. 제주일보 1면
별첨 2
2-2
4․3희생자로 신고된 자 중 제외 대상자
북제주군 구좌읍 덕천리를 표본 조사한 바 희생자로 총 33명이 신고된 자 중
1. 박원길은 4․3당시 포고령 19호위반으로 형(형량 미상)을 받고 집행유예로 나와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에서 거주하다 1990년경 노환으로 사망
2. 고명옥은 북제주군 구좌읍 김녕리에서 거주하다 1985년경 노환으로 사망.
3. 김태봉은 덕천리 속칭 큰곳도에서 거주하던 자이나 4․3사건 이전에 사망.
4. 김열규, 김종윤, 송재현은 덕천리에 거주사실 및 지인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자임.
5. 고하석은 남로당 덕천리 총책으로 입산 적극 활동타가 북제주군 구좌읍 송당리경 속칭 시리뱅디에서 토벌대와 교전 중 사망한 자임.
※ 2003년 4월 3일 제55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범도민위령제 및 평화공원기공식 안내책자 42쪽
「제주4・3사건 희생자(신고된 자) 명단 북제주군 지역 : 구좌면 덕천리」편을 참조 조사하였음.
별첨 3
김 덕 선 증언
1949년 1월 17일 조천면 북촌사건 원인(遠因)에 대한 증언
(제주4․3보고서 324쪽, 437쪽 관련)
본인은 1949년 5월 3일 제주도 경찰에 투신하였다가 1977년 1월에 퇴직하고 서귀포시 서귀동 597-7번지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김덕선 76세 입니다.
본인이 현장에서 직접 겪은 사건으로서 북촌사건에 간접적 원인(遠因)이 된 내용을 밝히고 진상보고서에 반드시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본인이 제주농업학교 4학년 때, 임시 휴교 기간 중 북제주군 우도면에 있는 집에 왔다가 개학한다는 연락을 받고 1948년 6월 15일 우도포구에서 돛대가 3개 있는 큰 범선에, 북제주군 한림면 출신 우도지서장 경사 양태수와 인천 출신 진순경, 이장 김응석, 백하룡 순경의 처 김선심과 그의 장남 등 일행 16명과 함께 타고 같은 날 오전 10시경 출항, 제주항으로 항해 중,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 앞 해상에 이르자 풍랑으로 인하여 도저히 항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때마침 잠수기선 두 척이 북촌항으로 입항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탄 배도 일기가 호전될 때까지 북촌항에 잠시 대피하기로 해서 포구에 배를 대자마자 건장한 청년 3명(편이상 갑.을.병으로 칭한다)이 접근하여, 이 배가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누가 탔느냐? 라고 질문했는데 우리들은 그들이 향보단원으로 오인하고 우도에서 왔고, 제주로 가며, 우도지서장도 타 있다고 대답하자 갑.을.병이 배를 좀 보겠다면서 승선, 그 중 「을」과 「병」은 때마침 배멀미로 배 안에 누워 있는 양태수 경사와 진순경에게 각각 순간적으로 접근, 「을」은 양경사가 옆에 놔 둔 칼빈총 총구 부분을 잡고, 「병」은 진순경이 옆에 놔 둔 44식 총을 잡아 빼려고 격투를 하는데 「갑」이 뒤 따라 오면서 권총으로 양경사와 진순경을 쏴, 양경사는 즉사하자 사체를 바다에 던져 버리고(일주일 후 함덕 해안가에 인양됨) 진순경은 옆구리를 총에 맞고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뇌가 노출될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에는 부락 사람 청장년층 남녀 30여명이 모여 있으면서 진순경과 우리들을 모두 배에서 내리게 한 다음 밧줄로 결박하고 3-4정의 총과 철창 등으로 무장한 청년 7-8명의 감시를 받으며 2시간 정도 끌려가서 당도한 곳이 선흘곶(밀림)인데 일몰시간이 되었다.
진순경은 그곳에 도착한 후 곧 그들이 몽둥이로 머리를 박살내 죽이고 본인을 포함한 나머지 14명은 결박당한 채 3박4일간 감금되었다가 연대본부가 있는 곳으로 1시간 가량 이동하던 중 갑자기 매복한 보초가 석하고 암호를 묻자 우리를 연행하는 자가탄이라고 대답하여 서로를 확인한 후 우리들을 그들에게 인계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2시간 정도 더 걸어서 연대본부에 도착했다. 연대본부 병력은 50-60명 정도 있었으며 그들 간에는 국경동무라고 부르는 소리도 들렸는데 우리들이 도망갈 수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비로소 결박을 풀어 주었으나 삼엄한 감시 속에서 1박을 하고 2일째 되는 날 저녁에 우리들을 처단하여, 북촌포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완전 은폐하려고 했으나, 다행히 인근에서 토벌임무를 수행하던 경찰이 우리를 연행했던 공비 1명이 사찰에서 식사 중인 것을 생포 신문한 결과, 「우도 사람이 북촌에서 많이 잡혀와 오늘밤에 처단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 상부에 보고하자 모슬포 군부대에 근무하는 북제주군 애월읍 금덕리 출신 강노반 중위가 인솔한 토벌대가 긴급 출동 구사일생으로 구출 당하고, 이 군부대는 생포한 공비를 신문하여 이 사건을 주도한 공비의 은거지를 추궁, 그를 앞장세워 북촌리 마을 안, 한 주택의 마당 구석에 입구가 돌로 교묘히 위장된 굴을 안내 받아 그곳에 은신 중인 공비 7명을 생포하였는데 그 중 김진태는 내가 범선에서 하선할 때 나의 우측 눈을 발로 차, 나를 바다에 떨어지게 한 사람이고 이 자는 4․3희생자로 신고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본인은 당시 배 안에서 경찰이 사살되는 현장에 있었으며 그들에게 직접 납치 감금당하였다가 군 토벌대에 의해 구출된 후 생포 공비를 앞세워 북촌마을에 있는 굴속에 은신 중인 공비를 검거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다. (그 굴은 지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소위 북촌사건이라 칭하는 집단 학살 사건은 나도 잘못된 일이라고 인정하는 바이나 그 이면에는 군인 수송차량이 북촌리 앞 도로에서 매복한 공비들의 기습으로 2명이 전사한 사건이 직접적 원인이라면 당시 권총을 휴대할 만큼 지휘자급 공비가 이 부락에 있었을 정도로 좌익세가 매우 강한 부락이라는 인식 위에 본인이 체험한 위 사건 또한 원인(遠因)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타고 왔던 범선은 후에 4․3에 관련된 자들이 해외도피 하는데 이용하였다고 한다.
2003년 6월 7일
증언자 서귀포시 서귀동 597-7
김 덕 선 (인)
(064) 762-2434
별첨 4
전 정 택 증언(제주4․3보고서 439쪽 관련)
증 언
1. 본인은 북촌사건이 일어난 1949년 1월 17일 함덕지서에 순경으 로 근무했습니다.
2. 당시 함덕지서는 공비들이 백주에 습격하여 불타버렸으며, 부득이 함덕국민학교 교장관사로 이전하여 임시 사용하였고, 2연대 3대대는 국민학교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3대대 사정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3. 그 당시 3대대에는 대대장 정대위, 부관 이중위, 한소위, 김소위 2명 등 장교는 5명 뿐으로 알고 있습니다.
4. 그리고 북촌사건 당일 사격중지 명령은 부관 이중위가 제주시에 있는 2연대 본부 참모회의에 갔다가 회의도중 함병선 연대장이, 북촌에서 집단총살 사실을 알고 이중위에게 당장 가서 중지시켜라는 명령을 받고 이중위가 자동차로 급히 현장에 와서 중지시켰습니다.
5. 북촌 사건 후 1949년 2월 4일 2연대 병력이 무기를 싣고 가다가 북촌리 동쪽 일주도로에서 공비들의 기습을 당해 전멸하고 함덕지서 근무 부원하 순경이 전사했으며 운전수 민간인 1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공비들은 총을 몽땅 가져감은 물론 군인들의 옷을 모두 벗겨 가져갔으며, 함덕지서 부원하 순경의 옷을 벗겨 가져가고 시신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함덕지서에서는 부원하 순경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2003년 6월 30일
증언인 주소 : 제주시 일도2동 1034-12
성명 : 전 정 택(인) 연령 : 77세
전화번호 : (064)722-6585, 753-5581
별첨 5
한 수 섭 증언(제주4․3보고서 437-440쪽 관련)
증 언
1. 본인은 1931년생으로 북촌사건 당시 제주오현중학교 2년생이었다.
2. 본인은 제주시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다가 식량을 가지러 집에 와 있을 때인 1949년 1월 17일 군인들이 북촌리 사람들을 전부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라고 할 때 같이 운동장에 모여서 시종 사건현장을 직접 보고 체험했다.
3. 주민들이 전부 운동장에 모이자 군인이 폭도가 군을 습격하고 (북촌)마을 안으로 도망갔다. 교전 현장에서 폭도가 버리고 간 것을 보니 돼지고기 반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있었다. 이로 보아 폭도는 이 동네 사람이다. 부락을 포위하고 폭도를 색출하기 위하여 모이라고 했다. 폭도 나와라.라고 몇 번 말했으나 누가 감히 나가겠는가. 아무도 나가지 않자 군인가족 나와라(이 때 본인은 4촌 형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나갔으며, 다소 안도하였음), 경찰가족 나와라고 해서 해당된 주민이 나가자 별도로 앉히고, 민보단 가족 나와라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하고 몰려 나가려고 하여 혼란해지자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발포, 현장에서 3명이 사망하였다.
4. 군은 나머지 사람들을 4열 종대로 10명씩 대열을 형성토록 한 후 1차로 40명과 2차로 40명을 운동장 서쪽 밭으로 데려가서 사살하고 3차로 40명을 데려 갔으나 마침 대대 부관이 급히 와서 사격 중지명령을 전달하여 그들은 살아서 운동장으로 되돌아 왔다.
5. 별도 분리된 군. 경. 민보단 가족은 현장에서 방면되지 않고 몇 차례로 나누어 함덕으로 이송되었는데 본인도 이에 포함되어 함덕 대대본부에 차로 이동하였다. 우리들은 즉각 방면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우리들을 조사하려고 하므로 나는 잘못해서 온 것이 아니고 군인 가족으로 별도로 여기에 왔다고 말하여 방면되 었다.
6. 그리고 본인 일행과 달리 함덕으로 이송된 사람 30여명도 우리와 같이 즉각 방면되지 않고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북촌 출신으로서 평소 군에 협조적인 사람이 그곳에 있다가 조사 받을 사람들 중에, 평소 자기와 감정이 좋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수사관에게저것들 전부 빨갱이들이다라고 무고하여 이들이 그 뒷날 총살되었다.
7. 그리고 부락 사람들을 운동장으로 모이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부락에서 보초 경비를 잘 못하고 공비와 내통한 것이 아니냐면서 3-4명을 사살하였다.
8. 따라서 다른 일시 장소에서 희생된 것은 나로서 알 수 없지만, 북촌사건 당일 희생자는 40명씩 두 번에 80명, 주민 집결과정에서 초소근무 태만 내지 내통 혐의로 민보단장을 포함 4-5명, 군경가족 분리과정에서 3명, 함덕으로 이송되었다가 무고로 뒷날 희생된 30여명을 합하여 모두 120명 선을 넘지 않는다.
2003년 6월 19일
증언자 주소 : 제주시이도2동 1767-9 학사서로 37
성명 : 한 수 섭 (싸인)
전화 : (064)722-1056
별첨 6
6-1부터 6-5까지는, 1992년 3월 22일 다랑쉬굴 유골이 최초로 발견되고 지방언론에 보도된 직후인 1992년 4월 4일부터 6일 어간 제주경찰서 보안과에서 진상조사차, 당시 상황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참고인 4명으로부터 받은 진술조서로서 분량이 많아 여기에는 생략하나 그 주요 내용은 반론 본문에 인용한 바와 같으며 4・3특위에는 진술조서 사본이 제출되었음.
별첨 6
6-6(제주도지방경찰청 보안과 문서)
4․3사건 관련 유골 처리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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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12. 3 제주도 무장 폭동사건 당시 재산공비로 동굴 속에 은신했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11구가 발견되어 1992. 5. 15. 유족에게 인계, 화장처리되었음. |
1. 유골 발견 장소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2608-2번지 소재 월랑봉 속칭 다랑쉬 굴내
(해발 170m 지점)
2. 발견 유골 및 유류품
가. 유골 : 11구(사망자 및 연고자 명단 별첨)
나. 유류품
(1) 무기류
철창, 대검, 철모, 일본식 군화, 탄띠
(2) 신변 잡기류
비녀, 안경, 혁대, 바클, 고무신, 가죽신, 단추, 옷감.
(3) 연장류
낫, 도끼, 나대, 자귀, 곡괭이, 숫돌, 톱, 가위.
(4) 생활용품
질그릇, 놋그릇, 가마솥, 항아리, 호리병, 물허벅, 접시, 잔받침, 제기용 놋쇠그릇, 물통, 후라이팬, 약병, 석쇠, 화로, 주전자 등 33종
3. 발견 경위
제주4․3연구소(소장 고창훈 제주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4․3무장폭동사건을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단체)에서 4․3사건 당시 폐촌된 마을을 조사하던 중 발견한 것임.
4. 현장 상황
가. 동굴의 위치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2608-2번지 월랑봉 다랑쉬굴
(해발 170m : 자연동굴, BN 987049)
나. 동굴 형태
(1) 입구 60㎝ (가로×세로)
(2) 동굴 총길이 33m
(3) 높이 : 1.2m
(4) 너비 : 입구 쪽 5.4m
안 쪽 5.73m
(5) 입구는 산야초에 가려 외부에서 보이지 않고 입구가 기어가야 할 정도로 좁고 30도 가량 내리막 경사
다. 유골
(1) 입구 쪽에 유골 10구가 가지런히 몸을 기대인 것 같이 누워 있었음.
(2) 안 쪽에 유골 1구는 가마솥 등 생활용구와 낫, 곡괭이, 도끼, 철창, 대검 등 유류품과 같이 있었음.
5. 유골 신원 확인
가. 북제주군청(구좌읍사무소)에서 92. 4. 25. - 5. 1(7일간) 연고자 신고기간을 설정 신고 접수 결과 전기 11구의 유골 신원을 확인하게 되었고
나. 당시 세화리장이었던 김병수(76세)는
1948. 12. 3. 21:00경 공비 100여명이 구좌지서 및 세화리 마을 일대를 습격, 양민 43명을 학살하고 학교, 가옥 등 138채에 방화한 후 산으로 도망친 사건이 발생하자
익일(48. 12. 4.) 군.경.민보단 합동 토벌대가 공비 토벌차 출동, 은거예상지인 위 동굴 주변 지역에서 공비 토벌작전이 있었고 입산 공비가 아니면 굴속에 은신해 있을 양민은 없었으므로 발견된 11구의 유골은 공비들이 틀림없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다. 발견된 유류품에서
○ 가마솥, 물통, 그릇류 등은 입산 공비들이 장기 은신을 위한 생활용구이고
○ 철창, 도끼, 대검, 낫 등은 통상 입산 공비들이 휴대하여 살상용으로 사용했던 무기인 점
라. 당시 정황으로 보아 전시 유골들은 생존시 재산 공비들로 양민들에게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저지르고 동굴속에 은거해 있다가 군.경.민 합동 토벌대의 작전과정에서 소탕된 입산 공비들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음.
6. 유골의 처리
북제주군과 유족간 협의 결과 유족 대다수의 주장이 유골들을 합동 화장 후 향리 앞 바다에 살포하겠다는 의견에 따라 화장 후 해상에 살포한 것임.
가. 화장 일시 및 장소
92. 5. 15. 08:40 - 12:35
제주시 아라동 소재 제주시 화장터
나. 살포 일시 및 장소
92. 5. 15. 14:00 - 15:00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와 종달리 간 앞 바다
7. 유류품의 처리
유골 발견 장소에 매몰하였음(동굴 입구를 바위로 완전 봉쇄)
8. 참고사항
가. 4․3연구소(소장 고창훈, 제주대학교 문제권 교수)에서는 본 유골 발견 후다랑쉬굴 4․3희생자대책위원회(회장 고창훈)를 결성하고 본 유해에 대한 장례를 정중하게 거행하고 유골 발견 동굴 및 유류품 등을 전문기관에 넘겨 보존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4․3무장폭동사건을 민중항쟁으로 미화하려는데 본 유골 발견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혈안이 되고 있으며, 화장 장면을 비디오 촬영.
나. 유골 발견 동굴 및 화장시에 일본 요미우리신문 편집위원 기무라고조가 취재하려 하였으나 유족들의 제지로 취재 못함
다. 화장 장소에 제주도의회 장정언의장, 이재현의원, 이영길의원, 유족 등 70여명 참석
9. 예상되는 문제점
가. 4․3연구소에서는
본 유골 발견 사실을 4․3사건을 민중항쟁으로 미화하는 증거자료로 계속 악용할 우려가 있으며
당시 목격자 및 체험자들의 증언 등에 의해 유골들은 재산공비가 틀림없음에도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희생된 양민들이라고 계속 주장할 것임
나. 92. 5. 11 - 5. 15.어간 도 전역에서 증언청취 등 4․3사건 전개과정을 취재한 일본 요미우리신문 편집위원 기무라고조가 4․3무장폭동사건을 민중항쟁 차원에서 편향적인 보도 우려가 있음.
다. 본건과 관련 행정기관에서 각종지원(장례비 400만원 보조 등)을 하고 도의회 의장 및 의원들이 4․3사건 당시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을 불태우는 등 선량한 도민들에게 가진 만행을 자행한 폭도들 유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협조 지원하고 특히 폭도 유골 화장장에 참석 위로 격려한데 대하여 4․3사건 당시 이들 폭도들에게 부모 형제 자녀를 살해당하고 가옥소실 등 재산피해를 당한 생존자 및 그 후손들은 폭도 유골을 조상처럼 모시는 도의원이나 다른〈참석한〉사람들도 폭도들과 다름없는 자들이라고 욕설을 하며 심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음.(첨부문서는 별지)
다랑쉬굴 유해 인적사항
|
연번 |
사 망 자 |
연 고 자 |
비고 |
|
성명 |
생년월일 |
성별 |
본적 |
관계 |
성명 |
생년
월인 |
주소 |
|
1 |
高順京 |
28.
1. 13. |
남 |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807 |
조카 |
고광치 |
41.
9.15. |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3동 2979-16 |
|
|
조카 |
고광언 |
45.
12.6 |
인천시 북구 부평1동
799-5 미도A 1-112 |
|
|
2 |
高順煥 |
22.
9. 20. |
남 |
종달리
807 |
자 |
高光治 |
고순경 연고자와 같음 |
|
|
자 |
高光彦 |
|
|
3 |
高斗萬 |
28.
4. 2. |
남 |
종달리
1965 |
자 |
高宗煥 |
48.
3.3 |
울산시 동구
방어동 572 |
|
|
조카 |
高玉姬 |
33.
5.8 |
종달리 807 |
|
|
4 |
朴奉寬 |
17.
12. 12 |
남 |
종달리
776 |
자 |
朴東培 |
49.
6.1 |
종달리 761 |
|
|
5 |
咸明立 |
29.
5. 10. |
남 |
종달리
797 |
제 |
咸明儀 |
56.
8.12 |
종달리 797 |
|
|
6 |
高泰原 |
23.
2. 15. |
남 |
종달리
1777 |
자 |
高官善 |
47.
2.10 |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1동 445-271 |
|
|
제 |
高泰福 |
27.
1.25 |
종달리 1777 |
|
|
7 |
李成蘭 |
29.
1. 15. |
여 |
하도리
1974 |
시
누이 |
吳貞順 |
22.
1.7 |
하도리 1376 |
|
|
8 |
夫成滿 |
27.
4. 9. |
여 |
하도리
1468 |
조카 |
夫元均 |
49.
6.14 |
하도리 1468 |
|
|
9 |
康泰用 |
15.
1. 5. |
남 |
종달리
729 |
자 |
康明由 |
38.
1.20 |
부산시 영도구 봉래
1가94 |
|
|
10 |
金辰生 |
27.
3. 3. |
여 |
하도리
1974 |
조카 |
金泰順 |
28.
11.
5.
|
하도리 816-2 |
|
|
11 |
李在洙 |
39.
3. 25. |
남 |
하도리
1974 |
사촌 |
|
김진생
의 자 |
별첨 6
6-7 오 길 웅 증언(본건은 증인이 서울에 장기 출타로 4・3특위에 제출치 못한 것임)
자 술 서
1. 저는 제주4․3연구소 팀에 의해 1992년 3월경 다랑쉬굴 유해가 최초로 발견되고 그 직후 일간지에 크게 보도될 때, 제주경찰서 보안과에 근무하였으며 2003년 6월 30일까지 제주경찰서 보안지도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2. 저는 당시 상사의 지시로 다랑쉬굴 현장을 답사하였으며 참고인을 조사하고 종합보고서를 작성 제출한 사실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 참고인 진술 내용
(1)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채정옥의 참고인 진술 내용
1948년 11월 8일 밤 11시경 자경단원들과 종달리 중동을 순찰도중 종달리 출신 공비 오달용 일당에게 납치되어 상도리경 개남밭으로 끌고가다 그들이 김호준을 사형시키고, 야산 2-3곳을 전전하다가 다랑쉬굴에 가보니 강태용, 고태원, 박봉관, 함명립, 고순경, 고순환, 고두만, 채정생, 한영환, 오정일, 김태길, 윤태만, 이씨, 오씨 등 14명이 있었고, 여자들이 밥을 지어서 식사를 했으며, 이들과 같이 2-3일 지내다가 하도리 출신 오치학이 구좌면당부에서 왔다면서 면당에 가자고 하여 따라가 보니 정권수 등 20여명이 있었는데, 대토벌전이 있던 날밤 정권수의 지시로 채정옥은 조장 오치학을 따라 하도리 출신 고완규와 함께 다랑쉬굴에 가서 조장의 지시에 따라 시체를 한두군데로 가지런히 놓고 오치학은 사체신원을 확인, 명단작성하고 면당으로 돌아와 정권수에게 보고했으며, 이들은 죽창과 철창을 가지고 기본적인 경비를 하면서 상부의 지시에 따라 통신연락 보급,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맡았던 공비라는 증언이며.
(2)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오지봉의 참고인 진술 내용
오지봉은 종달리 출신이나 신변위협을 느껴 세화리로 이주 생활하고 있을 때인 1948년 12월 3일 공비들이 세화리를 습격, 큰 피해를 끼친 후 군경민 합동토벌전에 참가하여 다랑쉬굴을 발견하였는데 군인들이 밖으로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나오는 사람이 없자 굴 입구를 향하여 총 몇 발을 쏘자 종달리 출신 고태원이가 굴밖으로 나와, 굴속에 11명이 있으며 다시 들어가 자수시키겠다고 하므로 그를 포승줄로 묶고 굴안으로 들어보내면서 군인이 뒤따라 들어갔으나 중간에 줄이 끊어지자 군인은 더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자수를 권유하였으나 나오지 않자 굴입구에 메밀대와 잡초를 가져다 불을 붙였으며 30여분 지나자 청년 하나가 나와 덕천리 방향으로 도주하는 것을 사살하고 3시간쯤 후에 세화리 함만실을 따라 굴에 들어가서 사체 몇 구의 신원을 확인하였다는 증언이며.
(3) 북제주군 구좌읍 당시 세화리장 김병수의 참고인 진술 내용
1948년 12월 3일 밤 공비 100여명 이상이 세화리를 습격, 국민학교와 공회당, 민가 100여채를 불태우고 주민 40-50 여명을 죽창으로 또는 불태워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후 다랑쉬굴 주변에 대한 군경민 합동토벌전에 참가한바 있고 다랑쉬굴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세화리 일대에 출몰한 공비가 확실하다는 증언이고.
(4)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함만실의 진술 내용
함만실은 공비들이 세화리 습격 후 합동토벌전에 참가, 다랑쉬굴 주변에서 사람이 용변한 것을 발견 굴속에 공비가 은신중임을 확인하고 군인이 굴을 향해 총을 발사하자 청년 하나가 나왔는데, 굴속에 11명이 있고 책임자는 오달용인데 지금은 다른 거점에 갔다고 했으며 그 청년이 굴에 들어가 자수시키겠다고 하자 몸을 묶어 들여보냈으나 줄을 끊어 그들과 합세하므로 굴입구에 불을 붙였다는 증언이며.
4. 추가 조사 내용
(1) 채정옥으로부터 ; 자신과 같이 오달용 일당에게 납치당한 5명 중 김원일과 강사현은 상도리 개남밭으로 가는 도중에 공비에게 피살(김호준도 사형당함)되었다하며.
(2) 오지봉으로부터 ;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종달리 출신은 좌익운동을 하다가 입산한 자들이라는 증언이며.
(3) 함만실로부터 ; 다랑쉬굴 속에 들어가 보니 철창과 죽창이 여기 저기 있어 공비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증언이고.
(4) 김병수로부터 ; 세화리 공비습격으로 48명이 죽을 때 부성우는 부부와 갖난애기까지 무참히 살해당했으며, 합동토벌전이 있기 전인 1948년 10월 하순경 다랑쉬굴 인접부락 속칭 선수머세 12호 주민은 세화리로 소개한 후라 입산 공비가 아니면 굴속에 은신할 양민은 없었다는 증언이며.
(5) 유해발견 후 굴속에 있는 유류품을 보면 비녀, 안경, 고무신, 등 신변잡기류와 낫, 도끼, 나대, 자귀, 곡괭이 등 연장류와 항아리, 가마솥, 물허벅, 놋그릇 등 생활용품 외에 철창, 대검, 철모, 군화, 탄띠 등 무기류가 발견되었음.
5. 이상 종합 판단할 때 이들은 남로당 구좌면당 책임자 정권수의 산하에 있는 오달용의 지휘를 받아 다랑쉬굴 등을 거점으로 공비활동을 한 자들로 사료되며 여자 3명은 이들에게 취사편이를 제공하였으며 어린이는 여자 김진생의 아들임.
6. 이상 다랑쉬굴 유해발견과 관련하여 당시 조사 내용에 대해 사실데로 자술서를 작성했습니다.
2003년 6월 30일
주소 : 제주시 일도2동 984-13
성명 : 오 길 웅 (무인) 연령 : 44. 9. 10.
전화번호 : 758-8590
(1) 성 명 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의견에 대한 엉터리 심사와 형식적 추인을 절대 반대한다!
1. 대한민국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건국희생자제주도유족회, 자유수호협의회 등 경향 각계에서 제출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수정의견에 대해, 10월 4일 4․3진상보고서 심사소위원회가 토론 한 번 없이 회의를 끝냈다는데 이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한마디로 말해 엉터리 심사다.
더구나 이 심사 결과를 가지고 10월 7일 오후 5시 4․3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 주재로 소위원회를 개최하여 추인 할 예정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애당초 제주4․3위원회가 각계의 수정의견을 무시한 채 진상보고서 작성 기획단이 작성한 원안에 몇 개의 자구 수정만을 거쳐 확정하려는 계획된 의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2. 심사소위의 수정의견에 대한 검토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진상조사보고서 집필진을 배제하고 제3의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이를 기초로 심사소위에서 수정의견 항목 하나 하나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거쳐 심사 결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상보고서 작성 집필자 한 두 사람에게 방대한(360여건) 분량의 수정의견을 검토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또한 극히 짧은 기간에 검토 수정한 내용을 일사천리로 심사한 것은 사실상 수정의견을 묵살한 처사다.
3. 4․3진상조사보고서는 정부보고서로서 4․3을 모르는 후세들에게 역사교과서적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사실과 무장폭도에게 희생당한 피해사실을 축소 누락시켰으며 토벌대의 과잉진압만을 부각시켜 4․3의 진상을 편향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현 정부가, 대한민국 건국을 공산무장폭동으로 짓밟으려 했던 제주4․3폭동사건의 주동자들을 희생자로 둔갑시키기 위한 진상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대한민국정부 스스로 정통성을 훼손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제주4․3폭동사건 진상보고서가 수정의견 대부분을 무시한 채 사실상 원안 그대로 확정된다면 이는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우리는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제주4․3위원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보고서를 확정할 경우 국무총리, 나아가 이 정권이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후계체인지 아닌지를 추궁하지 않을 수 없음을 엄중 경고하며 객관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전문가들에 의해 수정의견을 철저히 검토하여 진상보고서에 반영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앞으로 벌어질 사태는 전적으로 국무총리와 4․3위원회, 나아가 이 정권에 그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2003년 10월 7일
대한민국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건국희생자제주도유족회
자 유 수 호 협 의 회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제주도지부
제주일보 2003년 10월 28일 화요일 제17825호
(2) 성 명 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확정에 대한 우리의 입장
내란을 은폐한 4・3진상조사보고서 우리는 절대 인정 할 수 없다.
지난 10월 15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심히 왜곡 편향된 보고서로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1.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를 파탄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남로당이 일으킨 내란이다. 이는 4・3사건 연루 수형인 명부에 나타난 죄목이 모두 내란죄, 내란음모죄, 내란방조죄, 소요죄, 살인죄, 방화죄, 국가보안법위반죄 등이라는 사실이 말해준다. 또 4・3사건 경험자 누구에게 물어봐도 4・3의 주체는 남로당 등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 목적은 공산화였다는 점을 증언할 것이다. 이들은 공산폭도들의 살인・방화・약탈은 물론 선전선동과 노래, 구호, 삐라, 인민재판, 인공기 등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보고서는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숨기고 희생자에 대한 인권침해 부분만, 그것도 무장폭도들의 만행은 축소시키고 군경토벌대의 과잉진압 부분만 과대포장하여 기술함으로써 제주4・3사건의 본질을 왜곡했다.
2.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이어오고 있는 현 정부가 작성한 보고서가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군경 및 민간인의 희생은 무시한채 4・3무장폭동에 대한 진압의 불가피성에 대한 언급없이 일방적으로 과잉진압과정만 부각시킨 것은 큰 잘못이다.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무장폭동이지만 진압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사건”이라는 기조하에 기술되어야 함에도 많은 희생자를 낸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봉기로 미화시켰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무장폭도들에게 희생된 군경과 민간인 1,764명에 대한 가해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3.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수정안 심의도 엉터리였다. 9월 28일까지 6개월동안 각계로부터 376건 1,033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수정의견이 접수되었는데, 보고서 집필자 한 두 명이 하루 이틀만에 검토하여 이들의 주관적인 의견을 달아 10월 4일 검토 소위원회에 회부, 단 3시간만에 단어의 오류 등 극히 지엽적인 33건에 대해서만 수정, 본회의에 올렸으며 10월 15일 본회의에서도 검토할 시간을 달라는 위원 3명의 요청을 묵살 당해 즉석에서 사퇴성명을 내고 퇴장한 상태에서 일사천리로 통과시킨 것은 형식적인 절차이며 대부분의 수정의견이 묵살당한채 확정한 이번 진상조사보고서를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4. 따라서 정부는 제주4・3사건의 성격을 남로당(공산당)의 무장폭동이지만 진압과정에서 선량한 주민이 많이 희생된 사건임을 공식 선언하고 그 다음에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2003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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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제주도지부장
대한민국참전경찰제주도유공자회
충 의 회 제 주 도 지 부
통일안보중앙협의회제주도지부
제주지구이북5도민연합회
자 유 수 호 협 의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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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건국희생자제주도유족회
대한민국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건국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제주도지부
호국봉사회(제주도전몰군경유자녀회)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제주도지부장 |
(3) 성 명 서
노대통령은 4・3사건 사과를 사죄하라
제주4・3사건 관련 노무현 대통령 사과에 대한 우리의 입장
노무현 대통령은 왜 제주4・3사건 당시 공산무장폭도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양민들과 대한민국 건국을 지키려다 숨져간 군경을 두 번 죽이고, 반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유족들의 분노와 한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가.
우리는 그 날의 비극을 가슴에 묻어 둔 채 분을 삭이며 50여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대통령이 나서서 4・3사건에 대해 사과함으로써 그 날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대통령의 사과는 곧 국가의 사과인데 그렇다면 공산무장폭도들이 정당했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 한 그들이 정당했다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인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려다 산화한 군경과 무고한 양민들의 죽음은 개죽음에 지나지않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대통령이 마지못해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운위한 것은 공산반란세력에게 면죄부를 주고 나아가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따른 우리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직시한다. 그까짓 한마디의 미사여구로 우리의 분노와 한이 잠재워질 수 있다고 본 것인가?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이 북한 김일성 세력과 함께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무장반란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반란을 진압하지 않는 국가란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사과는 잘못된 것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사과를 함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군경과 민간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폭도들에게 준엄히 꾸짖고 나서 순국영령과 그 유족에게 추념과 위로를 한 다음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람들에 대해서 사과하는 게 순서이다.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선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국가가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어야 하지만 인명을 살상한 폭도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공산무장폭동인 제주4・3사건을 무장봉기로 규정한 역사왜곡과 사과를 즉각 취소하고 폭도들에게 살해당한 원혼들과 유족들에게 사죄하라. 우리는 이후 대통령과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 볼 것이다.
2003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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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제주도지부장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제주도지부장
제주지구이북5도민연합회
호국봉사회(제주도전몰군경유자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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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건국희생자제주도유족회
대한민국건국회제주도지부
대한민국참전경찰제주도유공자회
충 의 회 제 주 도 지 부
통일안보중앙협의회제주도지부
자 유 수 호 협 의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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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반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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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3년 11월 21일
발 행 : 충 의 회 제 주 도 지 부
☎ (064) 752-3053
인 쇄 : 해 동 인 쇄 사
☎ (064) 751-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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