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과 주민희생 사건의 진상
노무현 정부의 진상보고서를 반박한다.
金光東(나라정책연구원 원장)
I. 문제 제기 2000년 특별법에 따라 조사하고 2003년 발표한 ‘제주 4·3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역사적 규정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를 기점으로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3년 4월 3일 무장봉기한 이래 제주에서 발행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4·3 사건을 공권력 탄압에 대한 저항이자,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무장봉기를 과잉 진압한 토벌대에 의한 주민 희생사건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에 따라 무장폭력을 일으킨 남로당 당사자들은 정당한 저항 행위로 평가받고 책임소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 및 미군정, 그리고 국군, 경찰 및 이승만대통령으로 귀결되었으며, 노무현정부는 정부 조사보고서에 근거하여 사과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평가는 제주 4·3사건과 관련된 소설 <그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에 대한 초등학교 6학년생의 다음과 같은 독후감에서도 나타난다. “4·3 항쟁 : 4·3 항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제주도 사람을 죽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나라의 총선거가 있었다. 그런데 남쪽만의 총선거여서 제주도 사람들이 반항을 했다. 이때 우리나라는 육지에서 제주도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이라는 사람들을 불러 제주도 사람들을 죽였다. 사람들 중에는 산으로 올라가 게릴라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것은 모두 경찰들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군인과 미군이 제주도 사람의 1/4정도를 죽인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제주도 4·3항쟁 때 제주도를 파괴했다.” 이 같은 역사인식은 2003년 대한민국 역사를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고 한 당시 대한민국 정부수반 노무현 대통령의 역사인식과 같은 것이고, 4·3 사건에 대해 폭동적 반란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남로당’을 흡수한 ‘조선노동당’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대한민국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사과한 것과 동일한 역사적 맥락이다. 남로당의 4.3 사건을 정당한 저항으로 보는 역사적 평가는 4·3 사건을 (a) 세계 공산주의의 확장 전략과 투쟁 (b)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c) 미-소 냉전적 대립, (d) 대한민국 건국 저지 및 (e) 한반도 전역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펼쳐졌던 제반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치열한 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모든 역사적 내용과 단절시킨 결과이다. 1945년 광복의 시점이란 만주(1931)와 중국본토(1937) 지배 후 일본이 전개한 태평양전쟁(1941)에서 미국이 최종 승리한 후 동아시아 전역은 물론 한반도에서 새로운 차원의 대결의 시작이었다. 그 대결은 중국의 국-공 내전과 공산주의의 승리, 남북 베트남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한국에서의 좌우대립과 분단 및 6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대결의 본질은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전체주의의 전세계적 확장과 이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및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저지와 방어였다. 공산주의 소련과 공산화과정에 있던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소련체제가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한반도에서는 1945년부터 한국전쟁(6)이 끝난 1953년까지 소용돌이와 전쟁의 역사였다. 공산주의냐 자유주의체제냐의 싸움에서 한국은 지정학적 성격상 그 싸움의 최전선에 있었고 그 대결 양상은 동유럽 전역과 터키, 그리스, 중앙아시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 소비에트연방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하나같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자 희생과 같았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대립 구조는 일본제국주의냐 반일반제국주의냐의 문제로부터 공산주의체제의 확산이냐, 아니면 이에 대항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확립이냐의 문제로 전환되었고 체제 선택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뒤바뀌었고 개인과 집단의 역사도 뒤바뀌었다. 국가는 물론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개인들도 예외 없는 선택을 강요받았고 선택 결과에 따라 가혹한 희생이 수반되기도 했고 결국 중국, 베트남, 한국 모두 전쟁을 겪어야 했다. 특히 전체주의적 공산혁명(1917)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실제 그 체제를 경험을 해보지 않아 공산주의를 정확히 알지 못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일반인은 공산체제 수립이라는 목표의식이 분명했던 소수의 공산 폭력혁명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에 휘둘렸고, 그 선택으로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1948년 4월 3일을 전후로 펼쳐진 제주 4·3 사건은 약 1만 4천명 전후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전쟁을 훨씬 능가하는 희생이 초래된 사건이었다. 제주라는 특정 지역에서 이와 같은 엄청난 희생을 낸 4·3 사건에 대한 역사적 규명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되어야 한다. 첫째, 미군정이나 한국의 정부 행위의 가혹성과 과잉성의 문제였다면 그 수준이 과연 군국주의 일본에 의한 전쟁동원상태의 식민지상황보다 더 극한적 가혹성과 과잉성이 자행되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와 탄압에도 제주 공산주의자들의 대항은 그렇게까지 격렬하지도 대규모적이지도 않았고 무장투쟁도 없었다. 하지만 日帝를 패망시키고 군정을 실시했던 미국이나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제를 만들기 시작하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서는 제주 공산주의자들의 격렬하고도 무차별적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다. 둘째, 공산주의 모국(母國)인 소련의 존재와 한반도 북부지역에 민족사 최초의 공산체제인 북한 정권이 수립되지 않았어도 제주에서 그런 대규모 무장투쟁이 가능했을까 하는 사실이다. 혁명체제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폭력혁명론과 정권탈취에 대한 목표 없이 과연 공산주의 조직인 제주 남로당이 주도한 폭력사태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이고 장기화했을까 하는 점이다. 마르크스-레닌(Marx-Lenin)의 혁명사상과 스탈린의 공산 전체주의로부터 비롯된 ‘혁명적 공산체제’가 동아시아로 확산되지 않고 한반도에 공산체제를 확립시킬 목표가 없었어도 그런 대규모의 목숨 건 대결을 계속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셋째, 1948년 4월 3일을 전후하여 계속된 제주의 폭력 사태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량 희생은 과연 그 이전에 한국에서 전개되었던 1946년 10 대구 폭동, 1947년 3 투쟁, 1948년 2투쟁과 여수․순천의 제14연대 반란사건 등 광복이후부터 한국전쟁(6) 종결 때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발생했던 충돌 내지 전쟁과 전적으로 다른 것인가 하는 점이다. 광복이후 한반도에서 펼쳐진 좌우대립과 투쟁, 그리고 6 전쟁에서의 충돌과 희생과 4·3 사건에서의 대립과 희생을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유사성을 갖는 사건과 희생의 연속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넷째는, 인구 27만 명 전후에 불과했던 작은 섬 제주에서 그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동원되고 희생될 수 있었을까하는 문제다. 적어도 1만 4천여 명 전후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정규 전쟁을 능가하는 희생자의 숫자다. 과연 무엇 때문에, 어떻게 해서 제주도민의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관여되고 상상하기 힘든 희생이 발생하였을까 하는 문제다. 특히 왜 무장유격대와 군․경찰에 의한 대량 희생이 그렇게 무한정 확대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 같은 대량희생은 어떤 상황과 과정을 거쳐 발생했으며 그 원인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비롯된 것인가의 문제다. II. 공산주의의 확산과 친소․반미 투쟁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전 소비에트연방국(蘇聯)이 對 일본전쟁에 뒤늦게 참여한 것은 전후 동아시아지역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는 대사건이었다. 독일과의 전쟁 중 동유럽전선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최소한의 참여와 희생으로 최대한 이득을 얻는 전략에 치중하였다. 스탈린(J. Stalin)의 소련은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4월 이미 일본과 중립조약(中立條約)을 맺었지만, 1941년 진주만 폭격과 미드웨이해전 이후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고 일본 패배 이후의 동아시아 전후 질서 구상에 착수해 있었다. 미군과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추가적으로 몇 십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촉구했고 스탈린은 참전대가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제정 러시아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였다. 1945년 2월의 얄타(Yalta)회담에서는 제정러시아 때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 의거 일본령이 되었던 남사할린과 쓰시마 열도를 요구하였고, 중국의 동북부지역에서의 이익 우선권을 관철시켜나갔다. 스탈린에게 있어서 전쟁지역에서의 소련군 점령지역이란 곧 소련 공산주의체제의 확산을 의미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탈린은 동유럽의 점령 과정을 통해 누구든 먼저 점유한 국가는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자신들의 체제를 점령지역에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당연시했다.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된 후인 8월 8일에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은 미국과의 협의에 따라 한반도북부를 소련의 점령지역이자 공산 전체주의체제로 편입했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 과정도 소련군의 점령 확대의 산물인 상황에서 한반도 북부지역은 양보할 수 없는 소련 전체주의의 전쟁 공과물로 전락되었으며, 그 뒤에 전개된 소련의 한반도 전략은 처음부터 공산혁명에 따른 소비에트체제를 한반도에 이식, 확산하는 것이었다. 한반도 북부는 동유럽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제국(帝國)의 일부이자 스탈린 통치지역의 일부로 되어가는 과정을 밟았다. 광복후 한국인들은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밀려들어오자 소련의 영향력이 한반도 전역에 미치게 될 것으로 예상하기 시작했다.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이 소련과 미국에 의해 무장해제 되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던 일본 총독부조차도 소련군이 조선을 점령하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나진, 함흥 등 한반도 동북부지역으로부터 소련군의 공격과 점령이 시작된 이래 소련의 조선점령을 기정사실화했고 8월 16일에는 “오후 1시 소련군 입성(入城)”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심지어 ‘해방군(解放軍)’ 자격으로 소련군이 기차 편으로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풍문이 나돌았고 유사한 말들은 대전․대구․부산에서 목포까지 나돌아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던 일반인들을 동요하였다. 공산주의적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것이라는 예상은 초기 한국의 정치 지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공산주의계열의 지하 정치투쟁은 일관된 목표와 지향성을 가진 세력으로서 경쟁의 결과가 민주적 체제라 하더라도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고 그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불법투쟁으로 나아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모국인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있었고 소련의 힘을 빌려 그들이 주도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애당초 독립된 나라를 기대했다기보다는 일본 제국주의를 소련 공산제국주의로 전환하려 했을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광복후 정치적 헤게모니의 장악을 처음 시도한 것은 바로 공산주의 진영인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였고 이들은 곧바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해 정치사회적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건준(建準)’은 광복 직후인 8월 16일 발족해 남한에서 제일 먼저 공식적인 정치활동에 나섰다. 일본의 항복을 앞두고 일본인 약 71만 명의 안전과 재산 및 귀국을 책임져야 했던 조선총독부는 여운형(呂運亨), 안재홍(安在鴻) 과 접촉한 후 치안유지에 대한 조건부 협조 승낙을 받고 건준에 총독부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에 건준은 치안 유지뿐만 아니라 모든 행정 부문을 장악하려 했고, 8월말까지 전국 145개 고장에 지부가 결성되는 등 한반도 거의 전지역에서 건준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었다. 건준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대회라는 것을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란 국가의 출범을 선언하면서 스스로를 ‘정부’로 참칭하고 기존의 건준을 해체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정부 수립은 모두 미군 상륙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자, 중국 상해에 있던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기 전에 소비에트식 정부수립 수립을 기정사실로 만들고자 했다. 건준은 8월 16일 결성부터 다음달 9월 6일 ‘인공(人共)’ 출범으로 해소될 때까지 20여 일간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담당했다. 28일 ‘선언’과 ‘강령’이 발표됐으며, 이강국(李康國), 박문규(朴文圭) 등의 박헌영(朴憲永)계와 그 밖의 계파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주도하였다. 건준은 전형적인 러시아 공산주의의 혁명적 선전과 선동의 주장을 했고 향후 정부는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의원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언명함으로써, 건준이 소련식 소비에트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나타냈다. 건준과 인공은 스스로 ‘국가’와 ‘정부’를 참칭하기 시작하고 소련의 정책과 노선을 받아들이면서, 그 뒤에 들어온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특히 공산진영은 조직적으로 단일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서울에 있던 소련 영사관의 지도와 지원을 받고 있었다. 소련영사관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은 사실상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총독이나 다름없던 슈티코프의 직계로서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며 남한 정세를 슈티코프의 지시를 받는 레베데프에게 보고하였다. 서울의 소련 부영사 샤브신은 레베데프의 지시에 따라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최대 조직인 조선공산당을 움직여 나갔다. 대부분의 약소국가들은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고 복종하며 그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조선 공산당 책임자 박헌영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국의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나 혁명사상적으로 한국 공산주의자에게 소련은 경외의 대상이자 충성의 대상이었다. 이에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공산당과 북조선공산당 명령과 지시를 받아 미국에 대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고 소련에 기댄 그들 방식의 권력투쟁이었다.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은 1946년 10 대구 폭동, 1947년 3투쟁 및 1948년 2투쟁 등을 감행하며 일관되게 친소, 반미투쟁을 벌여나갔고 한국에 공산주의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폭동적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남로당은 이미 3투쟁과 2투쟁을 벌이면서 이미 미국을 ‘제국주의(帝國主義)’로 규정지었으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고, 북조선최고인민회의가 발표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임시헌법초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남로당은 남한을 북한에 건설된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에 흡수시키는 것이 목표임을 분명히 하였다. 제주도 남로당(안세훈, 조몽구)과 통일전선단체 민전은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 등을 제주 남로당의 ‘명예의장’으로 추대하고 대구 10폭동과 연계투쟁을 선언하며 그 무장대인 인민해방군 및 구국투쟁위가 1948년 4월 10일자 포고문을 통해 “단선․단정을 죽음으로써 반대하고,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고 선포했던 것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시작되어 평양과 서울 그리고 제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조직의 목표와 투쟁의 일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III. 제주의 공산 폭력혁명운동과 전개 중앙 공산주의자들의 선제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제주 공산주의운동의 주도세력들은 일제 때부터 신인회, 제주청년연합회,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제주청년동맹,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등과 같은 전체 상부조직을 건설했던 경험이 있었고, 자체 조직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후 제주 건국준비위원회와 제주 인민위원회, 그리고 제주 남로당 및 제주 민전을 주도하고 확산시킬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제주지역의 공산주의 사상과 조직의 확산은 곧 공산혁명의 모국인 소련과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문준, 김달준, 조몽구, 강규찬, 현호경, 강창보, 송성철 등이 대표적인 임물로서 이들은 러시아혁명이후 시작된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보급하고 제주지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강창보의 경우 코민테른 12월 테제(1928년)에 입각하여 노동자, 농민을 토대로 한 하부조직 중심으로 상부조직을 건설할 것을 운동방침으로 정했고, 1947년 2월 제주 민주주의민족전선 구성시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정일, 허헌, 김원봉, 유영준 등을 명예의장에 추대하였다. 제주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5년 광복이후부터 조직 재건에 나서 ‘인민위원회’나 ‘건준’ 등을 통한 대중적 통일전선 작업이 전개되고 성과가 가장 잘 나온 지역이기도 하다. 1947년 가을부터 남로당은 본토에서 파견된 조직책의 도움을 받으면서 당원 확충 작업에 매진했고 무장투쟁을 위한 조직과 훈련을 시작하였다. 1948년 초에 이르자 당원은 압도적 증가를 보였다. 제주도 내 북부지역 대부분의 읍과 면 및 마을별로 당세포가 조직되어 있었다. 제주는 당시 성인 인구의 1/3에 달하는 약 3만 명이 남로당에 가입했거나 남로당 활동에 동조적이었다고 추정될 정도다. 특히 제주 북부지역인 조천면, 애월면 및 한림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지배적이었다. 제주는 작은 모스크바(Little Moscow)로 불리거나 좌우 내전적 상황이 가장 격렬하게 계속된 유럽의 그리스처럼 아시아의 그리스(Greece)라 불릴 정도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제주 주민의 상당수를 적극적 지지자거나 동조자로 규합시키고 제주의 대다수 읍과 면에 당세포를 조직하였다. 특히 제주도는 a. 서울인 중앙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멀고 격리되어 있다는 것, b. 일본 오사카와 교류가 빈번하고 일본 공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는 것, c. 오랜 기간 동안 공산주의 조직이 형성되고 확산되어 있었다는 것, d. 제주는 일본군이 구상한 대미항전(對美抗戰)체제를 위한 제2 오키나와처럼 요새화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 동원체제화된 지역이었다는 것 등이 광복이후 공산주의가 광범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제주 공산주의 사상 및 조직 운동은 1920년대 후반 ‘신인회’ 등의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인 오대진, 김정로, 김택수, 김한정 등이 주도하였고 광복 이후 제주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제주도 조선공산당은 강창보와 송종현으로 이어지는 전남도당 책임비서의 지도를 받았다. 그 외 1930년대의 공산주의운동은 <적색혁우동맹>이나 <재건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혹은 통일전선적 대중운동체인 <제주농민요구투쟁동맹> 등으로 이어졌었고 김한정, 문도배, 신재홍, 김성오 등이 주도했다. 오랜 기간 공산주의운동을 하던 그들은 광복이후 제주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김한정은 제주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제주 4·3투쟁은 투쟁목표로나 조직적으로나 제주 남로당이 주도한 1947년 3 투쟁과 1948년 2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먼저 1946년 2월 좌익단체는 미군정에 저항하는 최초의 시도를 보였는데 미국 과자를 의미하는 ‘양과자 반대운동’이 그것이다. 미 군정청 앞에서 제주농중, 오현중, 제주중 등 중학생 1천여 명이 반미․양과자반대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미군기지 방화사건 등으로 양과자 반대사건은 공산주의 조직의 역량을 시험하고 동원한 중요한 초기 사례였다. - 양과자는 조선을 좀먹는 미제 침략자들의 독약이다! - 양담배를 비롯한 미제상품을 사지 말고 팔지 말라! - 미제와 결탁하여 사리사복을 채우는 모리간상배들을 일침하자! - 학원의 자치에 대한 관권간섭 절대 반대! - 미제에 추종하는 친일친미반동을 단호히 배격하라! <표 1> 1947년 2월 제주 양과자 반대운동 구호 나아가 제주 남로당은 10 대구폭동이 있은 후 1947년 3투쟁을 준비하며 그 성격으로 “10월 인민항쟁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에로의 방향으로 전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을 지시하였다. ‘민주주의임시정부’란 ‘인민민주주의 정부’, 즉 북한에 만들어진 공산주의 정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대구 10폭동에 참가했던 김달삼이 그 대규모 폭동을 계승하는 폭동을 제주에서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주도했다. 따라서 남로당 제주도위가 각 읍․면 위원회에 하달한 「3운동 기념 투쟁의 방침」은 단순히 3절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3절을 계기로 미군정 체제를 거부하고 한국의 질서를 파괴하며 나아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단계적 투쟁의 하나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는 대구 10폭동에 준하는 투쟁 계획을 지시하고 각 야체이카에 「3운동 기념투쟁 방법」과 「3 기념 해설사업의 요령」에 ‘10월 인민항쟁’과 ‘3운동’을 비교 해설하고 투쟁 방침과 방법을 지시하며 10월 인민항쟁의 연속투쟁으로서 반미군정 투쟁으로 이끌어가고자 했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3투쟁 지령문은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근로인민은 남조선노동당당 깃발 아래로!”를 투쟁 표어로 하고 있었고 “최고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고 요구하였다. 특히 제주 남로당은 3 투쟁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을 (1) 신탁통치 지지 및 3상회의 결정 실천과 (2) 인민위원회의 정권접수에 조직 동원하는데 모든 역량을 기울였다. 1947년 3대회는 1만 4천명 전후의 도민을 총동원시켜 제주읍 및 각 면소재지에서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제주 성인 인구의 10분의 1에 달했다. 3.1투쟁후 남로당은 허가되지 않은 가두시위와 제주감찰청 시위를 감행시켜 이에 대한 발포사건으로 6명이 사망했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투쟁을 가속화시킬 계기를 만들었다. 제주 남로당은 3투쟁에서의 동원력을 통해 반미군정투쟁의 전개가능성을 확인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을 통해 제주 전역에서의 투쟁가능성을 확인했다. 4․ 3사건 전에 제주에서 발행했던 1947년 3투쟁 및 3 파업 투쟁을 보면 이때부터 남로당 제주도당의 투쟁 수위와 목적이 공산혁명(革命)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렇기에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짓고 미국 제국주의와 반동진영을 약체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제2혁명 단계’를 향한 대중투쟁을 ‘무력적 준비’를 갖추라고 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 외에도 경찰을 무장해제(武裝解除)하라는 것이나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것 등은 전적으로 당시의 투쟁이 남조선로동당의 정권 탈취 투쟁이었으며 반미 친공산주의 투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을 반대한다. -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 반동총선거를 반대한다. - 민주통일정부 수립 전에 외국점령군의 철수를 요구한다. - 제국주의 선봉자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은 친일반동분자를 반대한다. -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법을 즉시 시행하고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하라. - 노동임금 300%를 인상하라. - 노동자에게 1일 5합의 쌀과 노동자의 가족 및 일반인에게 쌀 1일 3합의 배급을 요구한다. - 현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배분하라. - 통치권을 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요구한다. <표 2> 1948년 남로당의 반유엔 2투쟁의 주요 구호 <표 3> 1948년 제주 남로당의 2 투쟁 구호 -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국제연합조선위원단을 반대한다! -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 양군 동시철퇴로 조선통일민주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라! -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과 같은 친일반동파를 반대한다! -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 -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1948년 1월 8일부터 유엔(UN)한국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되자 남로당은 5 제헌 총선을 저지시키기 위해 ‘2 투쟁’을 전개했다. 남로당과 민전은 2 총파업투쟁을 전개하면서 이미 소규모 무장대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자 하였다. 남로당 중앙은 전평을 비롯한 모든 공산당 외곽조직과 행동대에게 “공장에서 파업을, 학교에서는 동맹휴학과 데모를, 농촌에서는 부락대회를 개최하여 유엔 배격, 양군 철퇴, 5.10총선거 반대를 결의하고, 소규모 무장대를 조직하여 관공서, 통신 및 운송기관과 언론기관을 공격하며, 입후보자․우익인사․경찰관을 테러․암살하고, 야간에는 봉화를 올릴 것 등을 지령하였다. 2투쟁이후 2월 25일 제주 남로당은 인민해방군 체제를 ‘구국투쟁위원회’ 체제로 개편하고 본격적인 무력에 기반한 군사적 투쟁으로 돌입하였다. 그 결과가 반미, 반유엔(UN), 반대한민국을 목표로 한 약 30여일 후 제주 4·3 무장투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IV. 제주 ‘4월 3일 사건’의 전개와 성격 남로당 제주위원회는 1947년 4월 3일 새벽을 기해 제주 전역에서 350명 전후의 무장대 포함, 약 1,500명을 동원해 12개 경찰지서 및 건국세력에 대한 무장 공격을 감행하고 경찰 및 경찰가족, 민족진영 인사에 대한 무차별 살해와 방화를 저질렀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내건 목표와 구호는 다음의 몇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민족해방”을 위하여 “인민의 편”에 서라는 것이었다. 제주도 유격대는 한국을 제국주의국가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통일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으니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고 요구하였다. 둘째, “반미구국투쟁”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미국을 ‘미제 식인종’이라 지칭하며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며 미국을 타격대상으로 지목하고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고 선동하였다. 셋째, 유엔의 활동과 건국을 위한 제헌선거를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건국과 최초의 민주공화제 출범을 위한 한민족사 최초의 민주선거인 5.10 선거를 거부하라는 것이었고, 아울러 “유엔조선위원단은 빨리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제주에서 펼쳐진 4·3 사건의 기본 특징으로는 (a) 군(軍)조직을 갖춘 남로당 제주위원회의 준비된 계획과 군사적 훈련을 토대로 감행했다는 것이다. 1947년 3 투쟁과 3 총파업투쟁 이후 조직을 개편한 제주 남로당은 1947년 8월 이미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 체제를 갖추고 몇 개월에 걸쳐 군사 훈련된 조직으로 계획적 반란을 일으켰다. 제주 4·3 반란 직전 320명의 병력을 편성 완료했다고 밝히고 있고 그 조직에 군사부, 그리고 그 산하에 도(島) 군사위원회를 두어 제주 중앙 및 각 면별로 총사령관/부사령관 및 총사령 등이 활동하였다. (b) 4·3투쟁은 남로당의 3투쟁과 2투쟁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고, 그 이전의 대중투쟁을 넘어서 군, 경찰, 행정조직에 침투조직을 기반으로 군사적 무장 반란을 감행한 것이었다. 4·3투쟁 직전인 1948년 2월 만들어진 제주 남로당의 <구국투쟁위원회>는 강규찬 위원장과 김달삼, 김용관으로 최고 지휘부가 구성되었고 군사부 김달삼, 작전 이덕구 등으로 개편되었다. 나아가 남로당의 4·3 투쟁 조직은 중앙에서 파견된 조직지도자(Org)로서 이두옥,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조직지도자로서 조창구 및 강창욱이 있었으며, 군조직인 국방경비대 침투 조직에는 제11연대 문길상 중위, 경찰 침투조직에는 이기도, 행정조직인 도청 침투조직에는 이정석이 책임자로 있었다. (c) 4·3 사건의 일차 목표는 무장조직으로 제주도 전역의 치안유지기관을 공격해 경찰 중심의 질서유지체제를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인명 피해는 경찰 4명, 우익 인사와 가족 8명 등 총 12명이 살해되었고 약 27명이 중부상 당하였으며 2명의 경찰은 소재 불명되었다. 반란 세력이 경찰을 목표로 한 것은 질서체계를 와해시켜 궁극적으로는 제주지역의 무장해제를 통해 자신들에 의해 장악되는 새로운 질서체제를 기도한 것이었다. (d) 제주 남로당의 4·3 투쟁은 궁극적으로 건국저지, 반미 및 반유엔활동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4·3폭동의 대상과 당시 구호, 삐라 등으로 볼 때 (a) 미군정체제 거부, (b) 이승만 등 민족세력 처단, (c) 유엔의 결정과 활동 거부 및 (d) 5.10 선거에 의한 대한민국 건국 저지라는 목적을 기도한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a) 경찰 및 치안조직의 무력화와 무장해제 (b) 건국 및 민족세력에 대한 테러를 시도하였다. (e) 마지막으로 무장 반란대는 당시 한국 사회의 기본 인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상과 인식을 일관되게 공유하고 있었다. 무장대의 모든 활동을 작전(作戰)으로 부르고 3월 15일부터 4월 2일까지를 제1차 작전, 4월 3일부터 4월 20일까지를 제2차 작전이라 명하는 등 실제 군사작전이었고, 미국을 ‘제국주의’로, 경찰 등 모든 상대방을 명확히 ‘적(敵)’과 ‘반동(反動)’으로 규정짓고 ‘반동 숙청’, ‘반동 사망’, ‘반동 가옥’ 혹은 ‘개 사망’ 등의 표현으로 일반화하였으며 제주 감찰청은 ‘반동의 아성’이라 불렀고 무장대는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부르는 <적기가(赤旗歌)> 내지 <인민항쟁가(人民抗爭歌)>를 불렀다. V. 제주 남로당의 5.10총선 저지투쟁의 전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이 유엔총회에서 가결됨에 따라 구성된 유엔한국위원단이 1948년 1월 8일에 입경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남조선 반국련(UN)조선위원회’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남로당 주도의 총파업으로 인해 50개소 운수기관이 파괴되고, 6개소 철도선로가 절단되었으며, 11명의 경관과 36명의 시민이 살해되었다. 파업을 전개하며 남로당은 하지 장군에게 (1) 국제연합조선위원회의 즉시 철퇴, (2) 미․소 양군의 동시 철퇴, (3)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등을 요구했었다. 또 남로당은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총파업투쟁을 전개할 것을 각 도에 지령하면서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등을 투쟁 구호로 내세웠다. 1948년 3투쟁 및 3.10총파업, 그리고 2‘구국’투쟁의 연속선상에 있는 제주 4·3 무장투쟁은 연이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한 5.10 제헌선거 거부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남로당 제주위원회는 4·3투쟁 및 5.10총선 저지투쟁을 주도하여 3곳의 선거구 중 2곳에서 제헌의원 선출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뿌려진 격문(삐라) 등을 보면 미국을 ‘미제(美帝) 식인종’이라 부르고 경찰이나 행정관료를 ‘미제 주구’라고 부르며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해 궐기하고 무기를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과 공산주의화에 대해 일체의 비판을 하지 않았으며,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강토를 짓밟는 외적” 미국과 싸워 제주를 ‘해방’시키겠다는 명백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공무원과 경찰에게는 “하루빨리 선(線)을 타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끝까지 싸우라고 선동했다. 무장유격대가 부르던 빨치산가를 보면 그들은 ‘원수’와 싸우고 있고 죽으면 ‘붉은 깃발’로 덮어달라고 되어 있다. 5.10 선거저지투쟁을 위한 무장반란대 조직에는 도(道) 및 면(面)투쟁위원회가 있었고, 도사령부 및 면사령부가 있었으며 도사령부의 책임자를 사령관이라 칭하고 그 산하에 ‘참모부’, ‘병기부’, ‘통신부’ 등을 두었다. 면 투쟁위원회 산하에도 ‘군사부’, ‘조직부’ 등이 있고 다시 면군사부 산하에 사령관과 참모부, 병기부 등이 갖춰져 있었다. 무장대는 무장시위나 무장공격 중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 만세!’를 불렀으며 무장을 해제시키거나 질서를 와해시킨 상황을 ‘해방(解放)’시켰다고 표현했고 경찰이 탈출하여 자신들 조직으로 합류한 경우에는 ‘인민군(人民軍) 입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무장대는 그 공격 대상인 경찰 내지 경찰협조 조직자에 ‘적’, ‘개’ 혹은 ‘놈들’이라 호칭하였고 경찰의 사망을 ‘개 즉사’, ‘개 사망’, ‘개 부상’ 내지 ‘개 가족 사망’ 등으로 표현하거나 ‘반동 숙청’이라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무장공격의 결과를 항상 ‘전과(戰果)’로 평가하였다. 따라서 제주 4·3투쟁의 주체로서 남로당 세력의 사상과 인식체계, 그리고 투쟁목표는 모스크바(스탈린)-평양(김일성)-서울(박헌영)-제주(김달삼)로 이어지는 체계적 일치성과 목표의 일치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4·3투쟁의 연장선으로 이어진 5제헌선거 저지투쟁은 반 미군정 투쟁이자 대한민국 건국 저지 투쟁이며, 다른 한편으론 한반도 북부는 물론이고 한반도전역과 제주에서의 공산주의체제 수립 투쟁이었다. VI. 제주 남로당의 북한정권 수립 참여 투쟁 대한민국의 5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 저지에 성공한 남로당은 5투쟁 이후부터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을 위한 정부수립 투쟁으로 전환하였다. 8 해주 인민대표자대회 투표참여 투쟁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립 참여 투쟁이 그것이다. 남로당의 선거거부 및 선거 무효 투쟁에도 불구하고 5 선거는 전국적으로 진행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절차가 이행되자, 남로당 등 좌익은 본격적으로 북한의 정권 수립 투쟁에 나섰다. 남로당이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한 것이 그것이었다. 남로당은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할 남측 대표자 1,080명을 뽑는 ‘지하선거’를 7월 15일부터 민전을 앞장세워 지하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서명투표’-인민대표를 선출하는 연판장에 서명하는 투표-를 실시, 최고인민회의에 참여할 인민대표를 선출했다. 남로당 제주위원회도 5만여 명의 투표용지를 제출하며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 등 6명이 제주도 인민대표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했었다. 안세훈은 3투쟁의 책임자였고 강규찬은 4·3투쟁시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김달삼은 군사부 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자들이었다. 북한 인민대표자대회에서 35명을 뽑는 주석단 선거시 제주 4·3투쟁의 사령관을 했던 김달삼은 그 투쟁 역할을 인정받아 허헌, 박헌영, 홍명희 등 좌파 거물들과 나란히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다. 김달삼은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 시간에 토론자로 나서 제주 4·3투쟁에 관한 연설을 하며 5 대한민국의 제헌 선거를 보이콧 한 무장투쟁의 ‘전과(戰果)’ 등을 설명한 후 “민주조선 완전 자주독립 만세!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안세훈, 강규찬, 김달삼 등 제주 공산주의운동과 4·3투쟁의 주역들이 a. 미군정을 거부하고 b. 유엔활동을 거부하고 c. 4·3투쟁 등을 통해 5.10선거 거부투쟁을 이끌다가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남북한 인민 모두를 대표하는 정부인 것처럼 만드는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4·3 무장반란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다. 남로당과 제주 남로당은 나아가 북한정권 선포된 이후에는 ‘인민공화국’ 지지 투쟁으로 공공건물․고층건물 등에 ‘인민공화국기(人民共和國旗)를 게양하는 투쟁’과 ‘스탈린 대원수께 드리는 감사문 서명 투쟁’, 그리고 총파업 투쟁으로 1948년 11월 30일 제한 파업 등을 전개했다. 결국 4·3 무장투쟁이란 한국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펼쳐진 1945-1953년까지의 국가형성과정에서 펼쳐진 a. 찬탁투쟁 → b. 10폭동 → c. 3투쟁 → d. 2투쟁 → e. 4·3투쟁 → f. 5투쟁 → g. 6 전면 전쟁이라는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모두 공산주의체제의 수립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갖는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투쟁이고 반란이고 전쟁이었다. 제주 4·3투쟁을 비롯한 일련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한반도 전역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전개한 투쟁, 반란, 전쟁이었으며 다양한 형식의 비정규전 및 정규전적 전쟁의 일환이었고 그 본질은 일관되게 제주에서 펼쳐진 친소, 친북 및 반미, 반대한민국을 목적으로 했던 무장폭력에 의한 공산화투쟁이었다. VII. 무장반란의 장기화와 軍․警의 토벌작전 제주 남로당은 4·3 투쟁 및 5 선거저지 투쟁을 이끈 후 1948년 10월 스스로 남로당과 여맹 등을 합쳐 ‘소련식 혁명투쟁(革命鬪爭)위원회’로 단일화하게 된다. “투쟁을 통해 투쟁을 확대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투쟁방식은 3투쟁과 4·3투쟁을 통해 성과를 나타냈고 한층 강화되었다. 투쟁지도부는 4·3투쟁당시 구국투쟁위원장을 맡았던 강규찬과 함께 지도부를 구성했던 김용관이 새로 위원장을 맡았고 상임위원 및 조직부를 맡았던 김양근과 선전선동을 담당했던 김석환이 함께 지도부를 이루었다. 그리고 4·3투쟁시 작전을 담당했던 이덕구가 총사령으로, 4·3투쟁시 병기(兵器)를 담당했던 김대진이 부사령이 되어 지속적인 군사투쟁을 이끌었다. 중앙파견 조직지도는 김서옥, 전남도당 파견 조직지도는 이창욱이 새롭게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달삼 이후 무장대 지휘사령관 이덕구는 여․순14연대 반란 4일 후인 10월 24일에 군경토벌대에 대해서 선전포고문을 발표했고, 소련혁명 기념일을 기해 경찰지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무장유격대는 군경에 대해 “미제를 내쫓고 이승만 일당을 반대키 위해 총부리를 돌리라”고 정부 전복을 선동하며 폭력 투쟁에 나서 반란은 장기화되기 시작하였다. 무장반란은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규모와 강도만 약했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제주도에서 무장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8년 2월과 3월 두 달 사이에 무력충돌에 의해 전국적으로 경찰관 55명이 숨지고 좌익계열 144명이 사살되는 폭력사태가 계속되었었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조차도 계속되는 폭력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간의 충돌로 간주했다. 서울 국방경비대 수뇌부에서도 제주도 사건을 치안상황으로 보고, 그 진압은 경찰이 할 일이지 군이 개입할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미군 및 국방경비대의 불철저한 초기 대응은 결국 장기 대치국면을 낳고 희생의 확대로 귀결되었다. 체계적이지도 못했고 준비도 부족했던 경찰력이나 국방경비대는 그 위상을 상실했고 질서의 수호자로부터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특히 미군정의 안이한 대응과 확고한 질서체계의 미비는 폭력의 확산을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1947년 3투쟁 및 3 총파업투쟁의 지도부였던 안세훈, 오대진, 이도백, 조몽구, 김용해 등이 비밀회의를 갖는 것을 알고 경찰이 급습하고 체포했으나 미군정 경찰고문관(패트릿지 대위)은 오히려 증거부족을 이유로 석방해 주었다. 그들은 1년 뒤 4·3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3투쟁의 지도자 안세훈은 결국 북한으로 넘어가게 된다. 4·3 무장반란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본 사건을 ‘치안 문제’로 간주하였다. 결국 미국은 군을 투입하지 않았다. 군경토벌대의 본격적인 진압작전은 제주도 5 선거가 무효화된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방경비대는 제9연대장 박진경 중령의 지휘 하에 5월 14일부터 21일까지 조천면 송당리와 교래리에서 동굴 수색과 게릴라 진압작전을 벌여 200여 명을 체포하고 7명을 사살하는 등 본격적 토벌을 개시했다. 브라운 대령의 ‘중산간 고립작전’ 아래 박진경 연대장이 지휘하는 제11연대의 소탕작전이 계속되면서 6월 2일에는 구금자가 596명으로 늘어났다.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약 5,000여 명에 달하는 4·3사건 관련자들이 검거되었다. 한편, 제주에서의 무장폭동이 계속되고 진압을 위해 출동해야 했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도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에 의거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또 1948년 11월 국회는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고 12월 1일자 법률 제10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1948년 5월 중순부터 시작된 제11연대의 작전에 의한 토벌은 5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제9연대에 의한 토벌작전은 7월 23일부터 12월 29일까지였다. 그 후 계엄령과 국가보안법에 기반했던 제2연대에 의한 작전은 1949년 2월 28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제2연대에 의한 작전으로 남로당 무장투쟁대의 거의 대부분이 소멸되었다. 그에 따라 1949년 4월에는 무산된 선거가 다시 치러질 수 있었고 그 후의 토벌작전은 제주지구 전투사령부, 해방대 사령부로 이어지다 한국전쟁 중에는 제100전투경찰 사령부에 의해 1957년 4월 2일까지 이어졌다. 1948년 당시의 전쟁 전야상태에서 계엄령과 국가보안법은 북의 파괴공작, 선전책동, 조직망 확대를 봉쇄하기 위한 법적 기반이자 제주도 무장반란과 여수순천 군사반란 사태를 조속히 진압하기 위한 긴급처방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수립되는 상황에서 체계와 규율이 성숙하지 못했던 군경토벌대는 계엄령을 과잉 적용하기도 했다. 근대적 법 원리와 규정을 내면화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상황이고 태평양전쟁의 직후였으며 극한적 좌우대립이라는 공포의 상황에서 군경 토벌대는 법적 절차 없는 과잉된 행위를 반복적으로 보이기도 했고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대대적 진압작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재판절차도 없이 즉결 처형되기도 했던 것이다. VIII. 제주 4·3사건중 집단적 주민 대량희생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법 폭력투쟁은 자기 표현의 수단이자 자기 활동방식의 본질이었다. 초기 무장대에 의한 양민 희생은 주로 경찰과 군 협조조직 단원, 그리고 정부 및 건국에 참여하는 민족진영 및 우익인사와 가족들에게 일어났다. 그리고 차츰 무장대의 활동이 거세지고 장기화되면서 본격적으로 군경의 대대적 진압이 이뤄지자 1948년 11월 이후부터 남로당 무장유격대는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 군․경이 주둔했던 지역의 마을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희생시켰다. 무장유격대는 군경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판단한 양민들을 무차별 희생시켰고 유격대에 협조하지 않거나 지원을 거부하는 자를 대상으로 학살, 방화를 자행하였다. 1948년 11월 28일, 남원면 남원리에서는 대부분의 집이 남로당 유격대에 의해 방화로 소실되었고, 주민 30명 가량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으며, 같은 날 위미리에서는 무장대들이 주택 250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50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70명과 경찰 3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12월 3일 구좌면 세화리에서는 무장대가 불을 지르고 공격을 감행해 40가호 150채 가량이 소실되었고, 중산간 마을에서 소개해 온 사람까지 포함 50명 가량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2월 15일 한림면 두모리(현재의 한경면 한원리)에서는 무장대의 방화, 식량 약탈 등으로 주민 13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1949년 1월 13일, 표선면 성읍리에서는 주민들이 살해되고, 식량을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현재 성읍리 마을 어귀에는 이날 희생된 사람 38명의 명단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많은 지역에서 무장대들에 의한 불법적이고 무차별적인 약탈과 학살, 처단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남로당 무장대에 대한 토벌, 진압과정에서 군과 경찰에 의한 희생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 강경 진압작전 전에,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으나 소개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으면서 많은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이 발생하였다. 집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진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산간지역에 머물러 은신하다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당한 경우도 있었다. 또 중산간 마을 뿐만 아니라 일부 해변마을에서도 서북청년회 단원들에 의해 좌익으로 의심되는 인사들에 대한 집단처단도 벌어졌다. 11월 13일 애월면 하가리에서는 산간마을인 원동에 무장대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하던 토벌대가 그 중간지점인 하가리에 모여 있는 주민들을 ‘폭도 모의’로 오해해 총살한 사건도 있었다. 같은 날 조천 교래리에서는 군인들이 양민 소개 후 남아 있을지 모를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마을을 포위하고 100여 호에 불을 지르고 사격을 가했는데, 이 와중에 무고한 양민들이 함께 희생되었다. 1948년 2월 4일 깊은 산간 마을로 무장대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기도 했던 제주 용강리에서는 소개령(疏開令)에도 불구하고 갈 곳이 없어 남아 있던 많은 양민들이 무장대 내지는 무장대 편으로 오인되어 희생되는 일이 벌어졌으며, 1949년 1월 16일에는 어음리 인근 빌레못 굴에 숨어 있던 양민들이 총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때 굴에는 어음리 뿐 아니라 납읍리, 장전리, 상귀리 등 인근 주민들도 다수 끼어 있어 희생이 더욱 컸었다. 이 외에도 군경 토벌대의 강경 진압을 위한 사전 소개령의 전달 미흡 및 설득노력의 부족과 극한적 대치 상황에서의 주민과의 소통부족과 공포 및 보복심리 등으로 인해 양민 희생이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과 그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1995년 및 1997년 2차에 걸쳐 제주도의회가 조사한 14,504명 전후 일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2001년 ‘제주4.특별법’에 의한 조사 결과의 14,028명(사망 10,715, 행불자 3,171 포함)과 큰 차이가 없다. 그 중 제주 남로당 활동에 주도적 내지 동조적으로 가담한 결과에 따른 기소 및 선고자 약 3천여명과 무장대에 의한 주민 희생자 1,764명을 제외한 나머지 약 8천여 명은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a. 불법적 행위에 상응하는 처벌범위를 넘어섰거나 적법절차 없는 희생자이거나 b. 불법성이 없는 무고한 희생자로 분류될 수 있다. 제주 4·3 사건의 성격은 미군정 체제를 부정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며 공산주의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던 무장반란에 있음은 명백한 이상 제주 희생자에 대한 제1차적 책임 소재는 명백히 공산체제를 지향하며 무장반란을 일으킨 남로당과 공산주의세력에게 있는 것이다. 물론 정부 대응의 미흡과 과정이 많았다. 그것은 국가형성과정이었고, 전세계적 공산주의 확산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정부수립기에 체계적으로 규율되고 훈련되지 못했던 군과 경찰이 극도의 공포(恐怖)상태에서 발생된 군․경의 무절제된 과잉 진압에서 발생된 것이다. XI. 정부 <제주 4·3 사건 진상 보고서>의 문제 특별법에 따른 정부의 <제주 4·3사건 보고서>는 (1) 4사건의 배경과 발발원인 (2) 남로당의 개입범위와 역할 (3) 사망자 숫자 가해자 통계구분 (4) 무장대 및 토벌대에 의한 피해 (5) 군법회의의 적법여부와 계엄령의 집행문제 (6) 미군의 개입과 역할 등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보고서는 4·3 사건을 미군정과 경찰 등의 탄압과 과잉행위에 대한 저항이자 군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 희생이 초래한 무력충돌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하였을 뿐 4·3 사건의 실체에 대한 규명을 의도적으로 포기하였다. 특별법에 따른 정부 보고서의 전반적 내용은 4·3 사건의 주도세력의 명백한 의도와 명확한 불법폭력적 공산주의투쟁에 대해 면죄부를 부여하고 4·3 무장반란을 진압해야 했던 대한민국 정부와 군, 경찰에 대한 정당성의 훼손 및 불법성을 부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첫째, 정부의 <제주 4·3 진상보고서>는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의 기원과 관련하여 그 출발을 1947년의 3사건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에 따라 소제목도 “3사건과 무장봉기의 전조”로 설정하고 3사건에 대해 많은 비중을 할애하면서 1947년 3 사건을 1948년 4·3 사건에 대한 ‘기폭제’ ‘도화선’ ‘기점’이라고 표현 등을 반복함으로써 1947년 3월에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3사건이나 4·3사건은 본질적으로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미․친소 투쟁이자 반대한민국․친‘인민공화국’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3 사건과 4·3 사건의 구호나 지도부의 차이도 없어서 근본적으로는 반미군정이자 친소, 친공산주의적 활동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3투쟁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시켜 미군정 관할지역도 소련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내걸은 반면 4·3투쟁은 유엔의 활동과 제헌선거를 중단시켜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겠다는 목표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1946년 11월 23일 창당된 남로당 중앙은 1947년 3 기념행사를 전국적 규모로 대대적으로 열 것을 각 지방당에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당도 3 기념행사를 앞두고 조직 총동원령을 내리고 반미투쟁을 전개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3운동 기념투쟁의 방침’을 보더라도 1946년 대구의 10월 폭동을 거론하면서 “10월 인민항쟁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의 방향에로 전 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을 지시하고 지휘자와 자위대를 갖출 것을 요구하였으며, ‘인위기(人委旗)’를 들 것과 구호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만세!”,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로 채택하는 등 그 자체가 남로당의 폭동시도였다. 1947년 3 투쟁은 2월 23일 결성된 민전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하였는데, 민전 도위원회 공동대표의 한 사람이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이던 안세훈이 3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간부 수십 명은 3투쟁 직후인 3월 5일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 집에 모여 ‘제주도 3사건 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에 김용관(金龍寬)을 선출하고 3월 7일 각 읍‧면 위원회에 ‘3사건 대책 투쟁에 대하여’란 지령서를 내려 보냈다. 그 내용은 a. 3 투쟁방침의 연장으로서 당의 영웅적 대중투쟁을 위한 합법 전취 b. 미제 및 반동 진영의 약체화에 대한 결정적 최후적 투쟁 c. 제2혁명단계의 대중적 투쟁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사상적 무력적 준비를 지령하였다. 따라서 3 투쟁은 전국 규모의 남로당 투쟁이었고 제주 남로당도 그 지시에 따라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제주 남로당은 그중 가장 대규모적이고 격렬하게 3.1 투쟁을 펼친 것이었지 3 투쟁과 그에 따른 6명의 사망을 포함한 시위자 피해 때문에 1년 1개월 뒤에 있었던 4·3 투쟁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제주 남로당의 입장에서는 대중동원과 파업참여자가 다수였다는 3투쟁과 그 이후의 총파업 투쟁의 성공 때문에 “정권을 인민위원회”로라는 목적의 연속선에 3 파업투쟁, 4.3 무장반란까지 감행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10 투쟁으로 제주는 군‧읍‧면사무소 등 23개 기관 515명을 포함한 166개 기관‧단체에 41,211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대중투쟁 및 파업투쟁의 성공과 동원력이 남로당으로 하여금 4·3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제주 남로당의 3투쟁이나 총파업투쟁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면 4·3 전면무장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남로당의 4·3 투쟁은 기본적으로 친공산투쟁의 연속선상에서 유엔활동 저지와 제헌선거 저지를 목표로 한 1948년 2월 7일의 전국 총파업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남로당은 이때 9개항의 투쟁 슬로건인 “1.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 맡겨라 4.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 … 7.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 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대한민국 건국 저지를 목적으로 한 폭력투쟁이자 정권을 공산주의자에게 넘기라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1948년 2 투쟁에 참가한 노동자의 수는 약 30만 명에 달했다. 경찰관서 습격, 기관차의 파괴, 전신주의 절단, 교량의 폭파 등 극렬한 행동도 있었다. 2투쟁으로 2월 7일부터 2월 20일까지 전국적으로 집계된 통계에 의하면 파업 30건, 맹휴 25건, 충돌 55건, 시위 103건, 봉화 204건, 검거인원 8,479명으로 나타났다. 경무부가 발표한 인명피해는 사망 39명, 부상 133명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목표는 4·3무장반란 주도세력의 목표와 동일한 것이었고 폭동 방법도 동일한 것이었다. 제주는 1948년 “2월 9, 10, 11일 밤, 제주 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17건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폭동을 유형별로 보면 6개의 경찰지서 습격, 삐라 살포, 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폭도들의 시위 등이었고 많은 폭도들은 소련 국가(國歌)를 불렀다. 보고된 사망자는 없으나, 경찰 2명이 심하게 구타당했다. 경찰은 3일 동안 약 290명을 체포했다”고 기술했다. 따라서 1948년 제주 4·3 투쟁이란 남로당의 1948년 2 폭력 투쟁의 연장이자 그것이 확대되어 나타난 제주도적 전개였을 뿐이다. 둘째, <정부 4·3사건 진상보고서>는 무장반란의 주체 세력의 성격, 목적, 무력투쟁의 의도 등에 대한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4·3 무장반란의 주체는 강규찬, 김용관, 김달삼, 김양근, 김완배, 고칠종, 고영수, 이좌구, 이덕구, 김대진, 김석환, 문상길 등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사상을 갖고, 어떤 조직 활동을 하였으며 어떤 목표와 조직을 구성을 하여 어떤 방식의 활동을 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 4·3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그들 대부분은 광복전부터 지속적으로 공산주의 조직활동과 함께 폭력혁명 투쟁을 전개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표는 대한민국에 ‘인민공화국’을 건립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1947년 3투쟁을 주도했던 안세훈 위원장은 일찍이 북한으로 넘어갔고 뒤이어 4·3투쟁을 주도했던 김달삼 등도 북한으로 넘어가 공산주의 정부의 최고회의 대의원이 되어 대남 빨치산투쟁에 계속 관여 하였다. 김달삼 외에도 강규찬 등 총 6명이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의 공산주의정부를 건립하는데 참여하였다. 문상길은 무장반란 진압을 위해 출동한 제9연대장 박진경을 암살하였다. 그 외 이덕구는 제2대 인민해방군사령관으로 활동했고, 김일성체제로부터 국기훈장 3급을 받기도 했다. 제주 4·3 무장반란에 참여한 대부분의 지도부는 곧 미군정 및 대한민국체제를 거부하고 공산주의적 ‘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활동 것이다. 결코 공권력에 대한 저항투쟁이나 탄압에 대한 자구책의 차원의 활동이 아니었다. 4·3 무장반란 세력들은 스탈린 만세,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고 김일성체제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말부터는 제주도내 ‘인민공화국 국기’ 게양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북한의 남침을 ‘조국해방전쟁’으로 규정짓고 ‘인민군지원 환영대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따라서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공산 폭력혁명의 일환으로 제주도에서 전개된 투쟁이자 공산주의자들이 전개한 친소투쟁, 찬탁투쟁, 1946년 10 대구폭동과 1947년 3투쟁 그리고 1948년 2투쟁 및 6.25 전쟁 등과 동일성 선상에서 전개된 무장투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진상보고서는 무장반란 주체의 성격과 의도 및 목표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고 군경에 의해 초래된 각종 희생을 나열하고 그런 희생 때문에 4·3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셋째, 정부 <4·3사건 진상보고서>는 남로당 중앙당과 무관하게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 판단으로 4·3무장반란을 기도하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특히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며 남로당 중앙당과 무관한 ‘자연발생적’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은 남로당 활동의 일환이고 남로당 중앙이 개입, 지도했다는 근거는 수없이 많다. 미군정 방첩대의 보고에 따르면 1월 22일 새벽 3시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린 남로당 회의 문건에 이미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음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문건은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미군 971 방첩대 보고서에는 압수된 문서 중에는 유엔 위원단과 총선거,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자료로 볼 때 이미 남로당은 1월 말 총선저지, 군정반대 및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2 투쟁을 지시했고 그 지시의 수행이 4·3 투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주 4·3투쟁이 남로당 중앙 및 전남도당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음은 중앙파견 오르그 이두옥(이중업), 전남도당 파견 오르그 조창구가 1948년 2월 25일의 남로당 제주도당 당조직도에 드러나 있는 데서도 알 수 있고, 군과 경찰 그리고 도청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락치와의 상호 관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4·3 무장반란이후 무장 유격대 조직과 훈련에서 나타난 ‘혁명투쟁위원회’ 조직도에서도 중앙파견 오르그로 김서옥, 전남도당 파견 오르그로 이창욱을 명기하고 그들에 의해 위원장 김용관이나 사령관 이덕구가 지도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광복이후 전 기간에 걸쳐 남로당 중앙 및 남로당 전남도당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 이운방의 기록을 보더라도 1947년 3투쟁조차도 남로당 전남도당에 건의하고 지시를 받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운방은 “평화적인 항의의 의사표시의 수단으로써 ‘전도 총파업’을 전원일치 가결하고, 대정면 조직부장 이승진(김달삼)을 연락원으로 도당본부에 파견하고 이것을 건의하도록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4·3투쟁을 전개하였다면 그것은 견책(譴責) 사유였지 지원과 지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남로당은 <노력 인민> 등 각종 자료나 발언 등을 통해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4·3 투쟁을 고무하고 찬양하였다. 단일 노선과 다양성,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당의 성격상 지시 없는 무장투쟁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남로당 중앙당에서 지시 없이 4·3 무장투쟁을 진행했다는 자료가 전혀 발견된 바 없는 것이 남로당 중앙의 지시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4·3사건 진상보고서>는 1945년 이후 소비에트 공산혁명을 완수한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동아시아와 한반도 전역에 불어 닥친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폭력혁명의 확산에 대한 역사적, 구조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정부 보고서는 의도적으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한국 공산주의 운동, 그리고 북한에 세워진 북조선로동당 및 소련 군정의 활동에 대한 서술을 배제시키고 있다. 러시아 공산혁명이후 1919년 세계 공산혁명을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코민테른 1922년 동양부 산하에 고려국(꼬르뷰로)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해 놓고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고 지휘하였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된 지휘를 서울에 있던 소련영사 샤브신으로부터 받고 있었고 수시로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과 협의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소련은 한반도 북부에 만들어진 소비에트 공산체제를 ‘민주기지’로 해 한반도 남부를 포함한 다른 지역으로의 공산주의 및 스탈린체제의 확장을 가장 큰 정치군사적 목적으로 하였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거나 세우는 것을 지원하고 있었고 소련군이 주둔했던 중국 동북부에서는 고강(高崗)과 이부춘을 주석과 부주석으로 했던 ‘동북인민정부위원회’와 ‘동북인민정부’ 등이 구성되었다. 공산주의자와 소련은 중국, 만주, 북한 등 동아시아 전역에 ‘인민공화국’을 만들어 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제주도를 포함하여 한국 전 지역에 걸쳐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인민위원회로 정권을 넘기라’고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민’이란 계급투쟁적 표현이자 공산주의적 목표를 내건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제주 남로당에 의한 4·3 사건도 그와 같은 소련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럼에도 제주 4·3 보고서는 당시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규정짓는 공산주의체제의 확산과 폭력적 지배현상이라는 구조적, 역사적 상황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미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그리고 민전 등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은 소련과 스탈린을 숭배하고 있었고 그 방향에 맞는 체제를 제주에서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정부의 ‘진상보고서’는 해방된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적 보편체제를 만들 것이냐,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만들 것이냐의 세계사적 투쟁의 한국적 및 제주도적 전개를 전혀 도외시 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부의 제주 4·3 진상보고서는 제주도라는 지역 차원에서 펼쳐진 군․경과 주민간의 ‘충돌’과 군․경에 의한 희생사건으로 왜곡시켜 그려내고 있다. 다섯째, 정부의 ‘4·3 진상보고서’는 제주 4·3 사건의 무장투쟁과 무장반란적 성격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공산주의의 무장된 군사폭력혁명의 전개 상황을 규명하지 않았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7년 8월 이미 <남로당인민해방군>체계를 갖추고 ‘인민해방군본부’와 사령관(김달삼), 기동대장(이덕구) 및 전투부와 직속부대, 각 읍/면별 유격중대를 편성했으며 이는 다시 4·3 무장반란을 위해 개편된 1948년 2월 25일에도 유사한 무장반란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남로당의 2 구국투쟁에 맞춰 ‘구국투쟁위원회’로 붙인 조직에서도 제주 남로당은 군사부, 작전과, 병기과, 통신과, 보급과를 두고 있었다. 남로당의 4·3 무장반란과 관련된 모든 조직은 그 이전부터 군사조직에 따라 운영되면서 총사령관과 부사령관 등을 두고 활동하였으며 면 투쟁위 내지 면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이미 1947년 3 투쟁에서도 그 전 해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10 폭동을 모델로 투쟁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고 4·3 무장반란을 위해 사전 군사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군과 경찰 및 행정관서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어 놓거나 조직원을 침투시키고 그들과 상호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명확히 반란적 성격을 갖는 것이지 단순 폭동이나 저항 투쟁이 될 수 없다. 여섯째, 정부의 4·3 진상보고서는 4·3 무장반란 사건이 기본적으로 미군정에 대항하여 권력 쟁취 투쟁이자 반미(反美) 투쟁이었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제주 남로당의 4·3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대중 폭동이나 미군정 내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거부 차원이나 무력투쟁을 통한 정권쟁취 투쟁으로 보지 않고 정부의 ‘잘못’에 항거하는 ‘인민 항쟁’으로 보고 있다. 일본 식민지로부터 한국을 해방시킨 후 미군정이 실시하는 체제에서 남로당에 의한 정권탈취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무력에 의한 공산주의 폭동과 반란 행위를 주민의 저항이나 항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4·3 무장반란 세력은 미국을 ‘미제 식인종’내지 ‘미 제국주의’라고 규정지으며, 제주를 ‘해방’시키겠다며 목표로 제시했다. 따라서 광복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남로당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혁명투쟁이고 정권장악투쟁이었다. 1947년 2월의 제주 ‘양과자 반대 투쟁’에서 보듯 벌써 “양과자는 조선을 좀먹는 미제 침략자들의 독약이다!” 혹은 “미제에 추종하는 친일친미반동을 단호히 배격하라!”며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짓고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것은 그 후의 3투쟁이나 2투쟁 및 4·3 투쟁에서 반복적으로 계속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남로당의 투쟁에서 왜 소련에 대한 거부와 저항 혹은 비판적 인식이 전혀 없었는지를 비교적으로 규명하지 않는다. 소련이야말로 당시 한국민을 대상으로 한 만행(蠻行)의 주역이었다. 신의주 의거 진압, 함흥과 원산에서의 만행이나 각종 산업시설의 반출과 민주와 인권의 억압으로 수없는 사람들이 남한으로 넘어오고 있었는데도 남로당이나 제주 남로당의 소련에 대한 비판을 찾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김일성, 박헌영에 대한 비판도 찾을 수 없고 오직 미국과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에 대한 저주와 처단 요구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보고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4·3 무장반란에 대한 역사적 규명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일곱째, 정부의 <4·3 진상보고서>는 주민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정권 투쟁’적 성격을 부각시키지 않으며 남로당에 의한 군과 경찰에 대한 무참한 공격을 축소시키고 있다. 광복이후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남로당 핵심 활동자들이 밝혔듯 ‘정권장악을 위한 각종 투쟁의 전개’였다. 그러나 정부 4·3 보고서에는 그것을 다루지 않고 외면한다. 무장 반란세력인 남로당은 그 어디에서도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미군정을 부정하고 권력을 넘기라고 하였다. 그 모든 것은 박헌영이 1945년 9월20일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에서 “푸로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동하고 “한국민주당 등 반동단체의 반동성을 폭로하여 반대투쟁을 일으키고, ‘정권을 인민대표회의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진보적 민주주의 정치실현을 위해서 투쟁”하라는 지시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3단계로 이루어지 정권 탈취 투쟁에서 나서는데 첫째는 ‘인민공화국’을 조직하고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통한 ‘인민정권’의 수립이었으며 셋째 단계는 북조선노동당이 주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투쟁이었다. 남로당의 소위 ‘8월 테제’ 이후 ‘우리의 당면 임무’에서 조선공산당은 ‘인민정권’을 위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것을 밝히며 “우리는 정권을 위한 투쟁을 전국적 범위로 전개하여야 하나니 … 기본적 민주주의적 여러 요소를 내세우고 이것을 철저히 실현할 수 있는 인민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특히 정부의 4·3 보고서는 남로당에 의한 무차별적 공격과 만행과 이에 따른 군․경의 과잉행위가 있었음에도 일방적으로 군경의 과잉행위에만 초점을 맞춰 마치 원인도 없이 군․경의 과잉행위가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천면 북촌사건만 하더라도 사건 전인 1948년 5월 16일 남로당 유격대원 3명이 부락민을 모아놓고 우도 지서장 양태수결사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시체를 바다에 다른 순경을 사살하고 배에 타고 있던 승객 14명을 납치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의 ‘4·3 보고서’는 1949년 2월 4일에는 제2연대 군인에 대한 매복, 기습공격으로 중위 박재규, 특무상사 오철, 한일우 등 장병 23명과 함덕지서 부원하 순경의 전사와 총기 150정을 빼앗았던 사건 등에 대한 사실은 누락시켜 북촌리에 대한 전반적 상황을 생략시키고 단지 군경에 의한 무고한 주민에 대한 집단 처형만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 등 형평성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제주 남로당은 4월 3일 12개 지서를 하루에 일제히 공격하고, 북촌의 경우처럼 군인 23명과 경찰 1명 등 24명을 몰살시킬 만큼 제주 남로당의 군사력은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그와 같은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은 시종일관 공산주의 권력을 만들기 위한 권력투쟁이었고 그렇기에 군과 경찰 및 공무원,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을 동반한 반란이었다. 그럼에도 정부의 진상보고서는 권력투쟁이자 공산주의 권력 수립을 위한 제주 남로당의 조직과 활동 및 무장투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평가하지 않았고 군경에 의한 과잉진압 행위만을 구체적이고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 사건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오도하고 있다. 여덟째, 정부 보고서는 제주 4·3사건을 주도한 세력에 ‘사상과 체제목표’에 대한 고찰을 무시하였다. 제주 남로당 무장반란세력은 공산주의조직을 만들고 공산주의적 인식과 세계관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전국적으로 ‘공산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많은 좌익들이 소련 당사(黨史)를 외우고 스스로를 볼셰비키나 레닌과 같은 공산주의 전사(戰士)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사회주의)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었고 사회주의와 모택동, 호지명 등의 영웅적 행위를 교육하고 있었다. 미군을 철수시키면 ‘인민정부’의 수립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공통된 사고였다. 당시 남로당의 4·3 무장반란 세력들이 쓰는 표현을 보더라도 프락치, 아지트, 오르그, 삣게, 빨치산, 비트 등 러시아어에 따른 공산주의 조직 용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특히 상부 조직에서 파견된 ‘오르그’는 하부 조직과 당원을 감독하고 지휘할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공산주의 조직의 특징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적’과 ‘개’ ‘놈들’ 및 ‘반동’ 등으로 규정짓고 반동내지 적을 숙청, 사망시켰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지역을 ‘해방(解放)’시켰다고 표현하였으며 당시 주도세력이 부르던 노래는 ‘적기가’, ‘인민항쟁가’ 등이었으며, 치켜들던 깃발은 ‘인공기’ 등이었다는 점에서도 4·3 반란은 공산주의 세력의 무장 폭력혁명적 차원의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홉째, 정부의 진상보고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에 의한 희생자에 대한 성격 규명이 미흡하다. 남로당의 무장투쟁은 그 성격을 볼 때 반유엔, 반미군정 활동이자 제헌선거 저지 투쟁으로 대한민국 건국 저지활동이었음에도 탄압에 따른 저항이라는 차원에서 규명하고 남로당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경찰의 과잉행위의 일부로서 ‘서북청년회’의 과격행위를 지적하나 실제로 그랬다면 ‘서북청년회’에 대한 폭력행사가 집중되었어야 하나 실제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경찰, 경찰관서 및 읍/면 사무소 등 행정관청이 대상이었고 대동청년단이나 선거관리요원이 집중적 피살의 대상이었다. 경찰과 경찰가족, 대동청년단 단원과 사무소 및 그 가족까지 ‘반동’으로 규정짓고 살해하였다. 남로당은 스스로 밝히고 있듯 한국 문제가 유엔(UN)에 상정되자 “유엔 총회의 결정의 휴지화”를 위해 모든 투쟁을 다했다. 실제 남로당의 4·3 무장반란 당시 반란세력에 의해 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면 초기에는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에 집중되었고, 그 후부터는 선거관리원이었다. 특히 5.10 선거를 전후하여 제주읍 도평리, 도두리와 조천면 신촌 및 북촌리의 선거사무소가 피습되었고 제주읍 도두리와 제주읍 화북리 및 대정면 동일리는 선거관리위원장들이 피살되었고 도두리에서는 선거관리위원 부자 모두가 피살되기도 했으며, 한림면 금악 선거관리위원장도 남로당 세력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것은 무장반란의 성격이 ‘피해’에 대한 보복이 아닌 대한민국 건국 저지를 위한 것이고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 그 결과 제주 3개선거구중 2곳을 무산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열째, 정부의 <제주 4·3 진상보고서>는 당시 발생한 대량 희생의 책임소재와 법적 근거를 왜곡하고 있다. 제주에서 발생한 1만 4천명 전후 희생의 제1차적 책임 당사자는 공산주의자들이고 제주 남로당이며 궁극적으로는 ‘조선노동당’이다. 그럼에도 정부의 ‘제주 4·3 보고서’는 미군과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을 곳곳에서 나열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계엄령 시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나 계엄 선포일에 대한 설이 여러 가지여서 ‘과연 계엄령이 선포됐는지 조차 의문이다’라고 서술해 법적 근거를 갖고 있는 계엄선포의 성격을 불분명한 것처럼 하고 있다. 나아가 보고서는 1948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정부 ‘관보 제14호’에 분명히 명시되고, 1948년 11월 23일 제주부락마다 포고된 계엄사령관 포고 제1호에 대해서도 “계엄령이 매우 비밀리에 선포됐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서술하거나 계엄령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지적을 나열하여 결과적으로 당시 대한민국 정부 진압의 법적 정당성을 갖는 계엄령 선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특히 당시 제주뿐만 아니라 여수순천의 제14연대 반란사건과 그에 따른 전남일원의 무정부 상황을 계기로 내려진 계엄령에 대해서도 정부 보고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정부 보고서는 마치 당시의 계엄령이 적법성이 없는 것으로 제시하며 당시 대통령에 의한 반란(反亂) 진압 계엄령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2001년의 대법원 판결로 “계엄선포 행위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불법적인 조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사실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수준이다. 또한 정부의 4.3 보고서는 주민 희생과 관련하여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적 평가를 내리고 있고 ‘강경진압’작전에 대한 책임과 대량 희생에 대해 “미군정과 주한 미 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해 근본적이고 제1차적 책임을 갖고 있는 반란세력이자 대한민국 건국 저지 세력이던 제주 남로당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반란으로부터 국가를 지킨 것이 문제가 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제주 4·3 특별법에 따라 조사되고 작성된 제주 4·3 사건 보고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건국과정의 정당성을 부정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정부의 제주 4·3 보고서가 법적 절차와 형식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제주 남로당의 무장반란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성격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X. 결 론 제주 4·3 사건은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벌인 무장 투쟁이자 반란이었다. 따라서 제주 남로당의 무장반란의 성격은 미국에 대한 소련의 공격이었고 건국과정의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이었으며 자유민주세력에 대한 공산주의세력의 공격이었다. 그 구체적 형태가 제주에서 1948년 전후로 펼쳐진 4·3 사건이고, 그 주체는 명백히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였으며 그 투쟁의 대상은 미군정과 질서와 치안을 담당하고 경찰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목표는 대한민국 최초로 민주공화제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제헌선거인 5 총선을 폭동으로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주 4·3 사건의 시기문제도 민주공화정을 만들기 위한 5 제헌선거의 좌절과 재선거의 완수라는 시기로 명확히 하는 것이 사건의 성격을 분명히 하게 만든다. 물론 제주 전역에서 1949년 중반 이후나 한국전쟁 및 한국전쟁 종결이후에도 제주 남로당의 활동이나 빨치산 활동이 계속되지만 그것은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사건은 5.10 선거 좌절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기에 1948년 4월 3일부터 무산되었던 선거가 재실시되고 완수된 1949년 5월 10일로 종결된 것이다. 물론 제주 4·3 사건을 광의로 보아 남로당 등 공산주의자들의 미군정 및 대한민국 거부투쟁으로 보면 1947년 2월의 양과자 반대운동이나 3월 1일 투쟁부터 1953년 7월 27일의 한국전쟁의 종결 혹은 1954년 한라산에 대한 금족령 해지하는 시기로 확대될 수 있다. 제주 남로당의 4·3 사건은 광복이후 펼쳐진 공산주의 활동의 연속선에 있는 것으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스탈린의 공산주의 확산이라는 공산 제국주의운동의 일환이었다. 1946년 10월 대구폭동, 1947년 3투쟁, 1948년 2투쟁이 그것들이고, 1948년 5월 10일 자유선거 저지와 제14연대의 여순반란, 그리고 1950년부터 시작된 6전쟁도 동일한 차원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자유민주적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고 공산주의적 체제를 만들자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의 확산과 자유주의의 정착이라는 그 역사적 대립과 소용돌이의 중간에 위치한 제주 남로당의 4·3 사건도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의 전개의 연속선상에 있었던 것이고 ‘제주에서의 사건’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본질은 공산주의 조직에 의해 유엔활동을 거부하고, 미군정체제를 거부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반란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목표는 한반도 전역에 공산주의체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1948년 제주 남로당에 주도한 4·3 사건이 폭동(暴動, riot)이기보다는 반란(反亂, rebellion/treason)인 것은 미군정을 부정하고 공산주의와 소련을 충성대상으로 삼았으며 대한민국 건국과 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공산정권을 향한 목표가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뚜렷했으며 군사적 조직체계를 갖추고 훈련으로 준비된 무장 세력의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제주 남로당의 주도세력들이 내건 목표를 보더라도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는 것이 항상적 목표였다. 미국을 제국주의로 여기고 소련을 위대한 국가로 여기며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대한민국 건국 선거인 5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4·3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5 선거 저지를 완수한 이후에는 공산주의체제를 만든 북의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수립선거인 8.25 선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북한의 국가건설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시종일관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고 정부 전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따라서 1948년 제주에서 4월 3일을 전후에서 발생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폭동행위는 명백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당시 계엄령을 선포(1948. 11. 17)하면서 대통령령 제31호의 선포 사유를 정부는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라고 하여 이미 그 때부터 ‘반란’임을 명확히 했었다.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에 참여했던 주도세력 스스로 ‘4·3 무력봉기’가 ‘반미국 반이승만 투쟁’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없다면 일단 ‘제주도만이라도 해방시키자’는 목적에 따른 ‘무장 투쟁’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 ‘인민해방군’ ‘구국투쟁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군사부를 갖추고 병기과를 두고 있었으며 사령관제를 두고 군사훈련을 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군사무기로 무장하고 그 조직과 이념적 뿌리는 공산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다음 <표 4>의 4·3 무장반란 주역 12명의 활동상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제주 남로당의 무장투쟁 주역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그 충성대상을 소련, 북한, 공산주의에 두고 있었고 나중에 북한 건국에 참여하고 다수가 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고, 국기훈장을 받거나 대남 유격투쟁을 계속한다. 그것은 대한민국 제주에서 펼쳐졌던 무력에 의한 공산혁명투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 4·3 무장반란은 1945년 광복부터 시작된 소련 공산 제국주의와 한국 공산주의 세력의 공산주의 무장혁명투쟁의 일환이다. 그들은 광복이후 1946년 찬탁투쟁 → 1946년 대구 10 투쟁 → 1947년 3 및 3.10 총파업 투쟁 → 1948년 2 투쟁 → 제주 남로당의 4·3 투쟁 → 5 선거 저지 투쟁 → 8.25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지원투쟁 → 한국(6) 전쟁으로 이어진 국가건국 역사에 소련, 북한, 공산주의를 선택한 세력이었고 제주 4·3 무장반란은 그들이 주도한 중심 투쟁이었다. 제주 남로당의 4·3투쟁을 비롯한 그 모든 투쟁은 모두 단일한 목표를 갖는 동일한 세력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그것은 대한민국에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고자 펼쳐 민족사적 투쟁이자, 세계사적 투쟁이고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건국되었고 1948년 12월 12일 유엔 제3차 총회에서 유엔결의안 195호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다. 그런 면에서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은 실패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는 전혀 4·3 사건과 본질적으로 시각을 달리하는 또 다른 ‘4·3 사건’이 형성되어 왔고 그것을 ‘한국 정부’가 주도하고 추인하였다. 제주 남로당의 반란사건인 4·3 사건을 합리화하고 이를 진압해야 했던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를 잘못된 것으로 평가하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심지어 제주 4·3 사건을 반제국주의 자주 독립운동이자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도 많다. 그 결과 광주 5.18 민주화운동 조차도 제주 4·3 사건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하기까지 한다. 제주 남로당의 반란이 곧 통일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이며 반제투쟁이었다는 것이다. 국가에 의한 반란사건의 진압에만 초점을 맞춘 시각과 그런 시각은 확산은 대한민국과 미국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4.3 진상보고서가 완료되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 사건을 정부의 과잉 학살행위로 잘못 판단하고 사과하기까지 하였다. 정작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한반도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이고 그 후 남로당을 흡수 합병한 북한을 통치하는 조선노동당이다.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정부 공권력에 의한 과도한 행위를 근거로 4·3 사건의 실체를 부정, 곡해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추진했던 행위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4·3 무장반란 사건에서의 군경의 과잉행위를 소재로 삼아 대한민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훼손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세력에게 직간접적으로 휘둘리는 것일 뿐이다. 제주 4. 3 사건에 대한 본질은 바뀔 수 없는 것이고 4·3 특별법과 정부 보고서가 역사의 모든 인식과 평가를 다 포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4·3사건을 경찰에 대한 정당한 항거행위로 규정짓는 것이나 유엔활동을 저지하고 5 선거를 저지하여 대한민국 건국저지 투쟁에 나서고 군과 경찰을 공격한 사람들까지 명예 회복시킨다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의 정당성과 정통성 훼손이다. 그것은 사건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고 남로당의 4·3 무장반란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전개되는 반대한민국적 선전이자 선동인 것이다. 제주 4·3 사건에는 남로당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고 만들기 위해 희생당한 군인과 경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과 희생을 마다한 수많은 사람들도 있다. 공산주의와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도 있었던 것이고 오늘의 우리도 있는 것이다. 제주 남로당의 무장반란에 맞선 그분들의 희생은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맞는 시점에 다시 한 번 거룩하게 조명되어야 하고 기려져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성숙하지 못했고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체계와 질서가 잡혀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에게도 온전하게 위로하고 명예 회복시켜주는 것도 사건의 본질적 성격 규정이 분명할 때 그 분들의 넋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물론 ‘제주 남로당의 4·3 무장반란 사건’은 남로당의 무장에 의한 반란행위와 그에 따라 초래된 무고한 주민희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흔히 사용되는 ‘제주 4·3 사건’이란 규정과 표현에는 1948년 4월 3일을 전후로 한 제주 남로당의 무장반란 사건과 무장반란의 장기화와 빨치산 투쟁, 그리고 그에 따른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군경에 의한 주민 희생까지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주 남로당이 일으킨 4·3 무장반란 사건에 대해 명확한 역사적 규정을 내리는 것이 결코 그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주민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군과 경찰에 의한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의 대량희생이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0세 이하 어린이가 740명이 넘고 61세 이상 노인 희생까지 합친다면 1,700명에 달할 만큼 많았다는 것은 정부수립기임을 감안하더라도 정당하고 적법한 공권력 행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질서의 미비와 제주의 여러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준해방구’적 상황이 지속되고 군경 및 그 가족과 민간인에 대한 남로당 유격대의 무차별적 학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고한 주민의 대량희생은 분명한 국가공권력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형성과정에서 나타났던 대립과 대치의 결과이기도 하고 극도의 공포감과 보복심리, 그리고 체계적으로 훈련되지 못했고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모르고 안이하고 미온적으로 대응했던 당시 미군정과 한국 정부의 수준에서 나타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4.3 사건의 본질적 성격과 사건에 따른 주민희생은 별개의 사항이다. 군․경의 과잉 진압행위와 그에 따른 무고한 대량희생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남로당의 4·3 무장반란 사건의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진압과정에서 발행한 무고했던 많은 희생을 결코 부정하거나 기리지 않자는 것도 아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