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권력과 역사 왜곡의 실상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의 문제
현 길 언 (소설가. 전 한양대 교수)
1. 보고서의 근본적인 문제점
(1) 정치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보고서”
노무현 정부가 잘못된 역사 바로 잡는 다는 정치적인 명분으로 “과거사 청산”을 하기 위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로)를 설치하고 3여년에 걸쳐 만든『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4.3보고서)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편향적으로 인식함으로, 사건의 진상을 왜곡시켜 ‘정치권력이 역사를 왜곡시킨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이 사건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한 제주도민들의 명예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실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 대통령의 국정 과제로 정부 기관으로 설치된 위원회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4.3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의도부터 잘못되었고, 그 결과도 역시 잘못되었다.
‘잘못된 역사’를 대통령의 의지에 의해 바로잡겠다는 그 발상부터 잘못되었고, 여기에 더해서 ‘과거사를 청산’하겠다는 권력자의 의도도 무모하다. 과거사는 어느 한 사람, 특히 대통령의 의지에 의해 청산되거나 바로 잡을 수 없다. 역사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부임 후에 “대한민국의 역사를 ‘독선과 부패의 역사’, ‘분열의 역사’, ‘패배의 역사’, ‘굴욕의 역사’ 등 갖가지 부정적인 표현으로 폄하하고, 이러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겠다’면서 ‘과거사 청산’을 핵심적인 국정과제로 삼았다. 이것은 ‘기득권 세력’을 타파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주류 세력을 교체하려는 한 방편이었다.” 는 점에서, 이 사업으로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음은 명확하다.
(나) 정치적인 의도로 시작한 이 사업은 추진 과정에서부터 공정성을 잃기 시작했다.
2000년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특별법” (법률 제6117호)이 공포되었고, 그 해 8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어 그 해 10월 6일에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이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 보고서가 확정될 때까지 많은 문제가 있었다. 위원들이 사퇴하거나 전체회의에서 내용의 오류 문제로 의견의 통일을 얻지 못하여 일부 위원이 “부동의”를 표명한 후에 사퇴하였다. 위원회는 편향성을 최소화하려는 의지도 없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학술적 의미를 외면하고 정치적 목적을 충족하기 위한 전략으로 처리했다.
(다) 이 사업의 법적 근거가 되는 법률 제정에서부터 문제가 드러났다. 사업은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일종의 정치행위에 머물도록 법령을 제정했다.
4.3위원회의 설치와 활동의 근거가 되는 특별법을 법률 제 6117호로 제정 공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2001년 1월 12일). 제1조 목적은 “이 법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 신장과 민주 발전 및 국민 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어 제2조 용어 정의에서,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개정 2007.1.24)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2000. 1.12 법률 6117호로 제정, 일부개정 2007.1.24 법률 제 8264호, 일부 개정 2007.5.17 법률 8435호)로 되어 있다.
이 법률은 연구 활동과 그 결과에 의해 이루어질 ‘명예회복’ 등의 사업을 혼동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순수 학술 행위이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다음, 그에 뒤따라 사업이 시행될 것이다. 그런데 연구와 정치 사안을 뒤섞여 처리하면 전자가 후자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 법조문의 의도는 진상 규명은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명예회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즉 법 제정의 취지는 사건의 진상 규명보다는 희생자의 명예 회복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또한 2조도 문제가 된다. 4.3사건의 용어 정의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이미 예단해 놓았다. “제주 4.3사건이라고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1947년 3월 1일을 4.3사태의 기점으로 정해놓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밝혀질 문제인데 법률로 정해버렸으니 진상 규명 활동은 제한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법조문에 1948년 4월 3일에 새벽 2시에 남로당의 결정에 의해 무장대를 동원하여 전도에 걸쳐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우익 인사를 테러하고 살해하였던 사태를 단지 ‘소요사태’로 미리 그 성격을 규정해 버렸다. 이것은 이 사태의 진상을 의도적으로 축소 조작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불상사는 과장되게 처리하여, 이 사태가 4.3사건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시사함으로 사건의 발발 목적을 축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위원회는 그 활동 근거가 되는 법률 제정에서부터 사건의 진상을 정치적 의도에 맞게 가상하고 이를 합리화할 수 있는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하려고 했다.
또한 법조문에서 ‘진압과정에서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는 문맥도 법률의 객관성을 훼손하는 내용이다. ‘진압과정에서 주민이 희생당했다’는 문제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학술활동을 통해서 밝혀질 사안인데, 법률로 정해놓은 것은, 앞에서 제1조의 의도된 대로, 위원회의 사업 목적이 ‘주민의 희생자의 문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소요’ 수준인데도 주민이 희생이 컸다고 법률에 제시함으로, 진압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도민에 대한 정치적 행정적 조치보다 앞서야 할 문제는 사건의 진상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다. 실상을 규명하는 일은 학술적 영역이고, 명예회복과 보상 문제는 정치적인 사안이다. 전자는 학자의 몫이고, 후자는 정부의 몫이다. 이 둘은 주체가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후자보다 전자가 더 중요하고 앞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법률에 의하면 이러한 활동의 주체가 무너져 버렸다. 즉 성격이 다른 두 일을 위원회가 담당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법률의 오류는 위원회의 조직과 인적 구성, 활동 과정에서 예상했던 대로 정치권력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기 시작한다.
(라) 위원회 조직과 인적 구성이 편향되어 사건의 진상을 정치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당연직으로 관계 부처의 장관과 책임자, 임명직은 대부분 위원회의 목적에 부합하게 일할 사람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소위 우측 인사들을 일부 충원했다. 그 결과 보고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내용의 타당성 문제로 ‘부동의’한 위원들이 있었고, 일부 위원은 중도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이렇게 애초부터 위원회는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보다는 정치적인 의도를 실현하도록 운영 체제와 법률 제정과 조직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위원회는 의도적으로 모순을 안고 출범했다.
(2) 위원회의 정치적 의도를 충족하기 위한 보고서
이렇게 출범한 위원회는 3여 년에 걸쳐 조사 연구하여 그 결과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귀납적으로 4.3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않고, 의도를 충족해줄 수 있는 결론을 예상하고 이를 합리화할 수 있는 자료들을 선택해서, 결론을 만들어 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료의 한계를 넘어서 결론을 억지로 도출하기도 했다.
위원회가 의도한 보고서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4,3사건은 통일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5.10 선거를 반대하고 외세인 미군정의 세력과 부정부패 세력에 맞선 정당한 도민저항운동이었다. (2)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이승만 정권은 불법을 자행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 (3) 미군정하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처음부터 미군정이 개입하였고, 그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이 음험하게 작용하였으므로 미국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의도는 4.3사건의 정당성을 강조함으로, 남로당의 반란으로 야기된 인명 살상과 테러 행위를 과오 정도로 인정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한 반란군에 대한 진압을 계엄령의 불법성을 내세워 그 부당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이끌어갔다. 이러한 논점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미군정의 책임론을 제시함으로 4.3의 문제를 반미와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인식하게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희생당한 도민들까지 남로당의 저항 세력에 포함시킴으로, 희생자들이 다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 4.3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은 이것을 명예회복이라고 희생자 유족들을 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2. 사실(Fact)은 무엇인가?
==4.3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4.3사건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위원회에서 내놓은 보고서의 자료와 기술 내용을 토대로 해도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어렵지 않다. 그런데 보고서는 역사를 복원한다는 학술적 자세를 외면하고, 정치권력이 의도했던 “역사 바꾸기”라는 의도에 맞게 서술하였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역사관에 의해 달라질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팩트(Fact)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면 4.3 사건의 팩트는 무엇인가?
이 사건은 정치 사회 변동기에 일어난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다. 그래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주체를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두 주체에 의해서 시작되어 종식되었다. 첫 주체는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사건을 일으키고 의도대로 5.10선거를 거부하는데 성공했다. 미군정하에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정부 수립 후에까지 사태가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이 사태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일으킨 빈국가적인 사태를 방치할 수 없어서 진압하게 된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정부도 이 사건의 주체가 된다.
주체가 남로당으로 보면,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거부한 저항이고 봉기이다. 이 사실은 4.3사건의 팩트이다. 이러한 결론은 보고서가 제시한 논지와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남로당은 이 저항을 위해서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 그러므로 도민의 순수한 저항이 아니고 남로당 조직에 의한 정치적 저항(남로당의 입장)이다. 그것은 3.1사건이 4.3 사건의 전 단계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3.1절 기념식 과정에서 경찰관 발포 사건으로 야기된 불상사는 제주 좌익세력이 정치세력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좌익은 이 사건을 전략적으로 잘 이용함으로 애초에 의도한 것보다 더욱 큰 성과를 얻게 된다.
보고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경찰관 발포사건으로 일어난 도민 저항이 4.3의 원인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은 의도적으로 3.1절 기념행사를 기회로 정치세력화를 도모한다. 이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1947년에 1월 제주도 민청이 결성된 이후부터 도내 읍면 단위로 민청과 부녀동맹, 농민위원회 등 좌익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 조직대회의 상황은 비슷하다.
임원 선출, ‘조직 강화’ ‘계몽운동’ 에 대한 통의가 있었다. 그리고 조직대회마다 박헌영 허헌 김일성 조희영 김택수 등 공산당과 남로당계 주요 인사들은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제주읍 민청 결성대회에서는 특별한 사항들을 처리했다. 남조선 인민항쟁에 쓰러진 희생자에 대한 묵념, 박헌영을 비롯한 4인을 명예의장으로 추대, 박헌영 체포령 철회 진정서 하지 중장에게 전달키로 하고, 목포 형무소에 수감중인 강성렬에게 전서(傳書), 그리고 남조선 일대 애국투사들 즉시 석방 요구 메시지 하지 중장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강령을 채택하였고, 이어 토의 사항에서 3.1절 기념행사 건이 논의되었다(제주4.3사건자료집,2, p,83) 이어 2월 17일에 3.1절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 총망라한 인사가 모여 준비위원장 부위원장을 비롯하여 위원 28명을 선정했다(자료집, p.83) 이 후에도 각 지역에서 민청 결성대회가 열렸다. 경찰에서는 3.1절 행사시 시위 금지를 공포하면서 3.1절기념준비위 해산을 명령했다.
2월 23일에는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가 열렸는데, 명예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 유영준 6씨를 추대하였고 시국선언과 정세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3.1절 기념일을 앞두고 각 학교 대표자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가) 3.1절기념투쟁위원회와 보조를 같이한다.
(나) 학교 별로 3.1투쟁 기념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다) 완전 독립을 위해서 투쟁을 계속하고 교원조합과 연대한다.
3.1절 기념행사 준비위는 전도적으로 각 학교와 사회단체 각 지역 민청 민전 인민위원회 조직과 연대하여 치밀하게 도민 동원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 행사를 계기로 좌익계은 힘을 과시하면서 새로운 정치 국면을 시도했다. 그런데 당일 행사 도중에 벌어진 불상사로 사회 혼란이 더해졌고, 좌익 측에서는 이를 계기로 투쟁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불상사가 도화선이 되어 3월 10일에 제주도청을 비롯한 학교와 관공서 기업체 공장 등 166개 기관 (전체 기관의 95%)이 파업에 참여하게 된다. 경찰에서는 3.1절 기념행사와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났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남로당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대중의 저력을 응집하여 투쟁력을 강화하였다. 애초에 법률 제정에서 4.3 사건의 정의를 3.1절기념식 사태를 시발로 한 것은 위와 같은 좌익 측의 전술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3.1사건 발포 사건으로 야기된 민간인 희생이 발단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불상사가 아니었더라도 남로당은 3.1절기념일 계기로 그들의 정치적 역량을 발위하려고 했다.
이 사건이 4.3사건의 전초가 되었음은 여러 자료가 증명하고 있다. 3.1시위 및 총 파업 이후에 각 면 마을 야체이카에 보낸 문건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건에 뒤따르는 여러 사태는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불상사에 대한 도민의 대응이 아니라, 남로당의 투쟁 전략이었다. 이 문건에는 그 당시 정세 분석과 3.1운동 투쟁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그것을 인민에게 교육하는 방법, 선전 선동 방법과 지시, 투쟁 실상, 총 파업에 대응한 농촌 및 가두세포 활동에 대한 내용, 기타 체련대회 파업단합대회에 대한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는 3.1절 기념투쟁이 4.3사건의 전초적인 사태임을 더욱 확증시켜 준다. 도민의 소요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은 노동당의 전략이다. 박헌영은 "1946.10의 민족적 저항을 모델로 삼아 그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노동당이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듯이 제주 3.1사태는 남로당 전략으로 이용가치가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3.1사건을 준비하던 1947년 초부터 사건 당일 1948년 4월까지 남로당은 4.3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2)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투쟁은 중앙당의 지시와 관계없이 남조선 혁명의 단초가 되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보고서는 4.3사건이 중앙당의 지시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 제주도당 자체의 결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 사태가 통일정부 수립을 가로막는 5.10선거와 미군정과 군정 관계 관리들의 비리에 대한 저항으로, 민족적 자주적 사회저항적 도민 저항 운동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그러나 위원회에서 제시한 자료에 의해서도 그러한 논지는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보고서의 기술 내용에 의해서도 제주 4.3은 치밀한 남로당계의 계획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4.3사건을 전후한 여러 사태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이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4.3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술자는 결론에서 엉뚱하게 논리를 비약시켜 제시한 일련의 사태와 관계없이 결론을 맺고 있다.
남로당은 2·7폭동을 준비하면서 제주도당에도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켜서 총선거와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주한 미 971방첩대 격주간보고서, 1948. 2. 15, 주한 미 제6사단 일일정보보고서, 1948. 2. 12~13)는 지령을 내렸다. 남로당 중앙당은 2·7폭동이 별 성과 없이 진압되자 조직이 온존한 제주도당에 사람(이재복, 조경순 안내)을 보내어 “폭동을 일으켜서 단선·단정을 강력히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렸는데, 이 지령은 위원장 안세훈이 경찰에 피검중이어서 조직부장 김달삼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당시 남로당의 주동 세력이었다가 전향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여, 4.3반란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는 판단을 했다.
또 남로당 중앙위원회가 제주인민에게 보낸 격려문과 이에 대한 남로당 제주위원회의 화답문을 보면 제주의 사태가 남로당으로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투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제주 투쟁에 대한 격려문
친애하는 제주도 인민대중들이여! 조국해방의 전사들이여! 우리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미제국주의와 침략자 그 주구들이 음모하는 단선단정을 쳐부수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항쟁하는 여러분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끓는 형제적인 인사를 드립니다.--당신들은 오늘 위대한 조국해방의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장에는 구국의 뜨거운 피가 끓고 있으며, 여러분의 팔뚝은 영웅적 항행의 공격정신에 뛰고 있습니다.--우리는 반드시 숭리할 것이며, 또 승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승리를 확신하고 돌진합시다! 우리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여러분과 함께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
1.위대한 구국항쟁에 돌진하는 제주도 인민에게 승리와 영광을 드리자!
2. 단선분쇄투쟁에 육탄돌격을 감행한 인민영웅들의 뒤를 따르자!
3. 망국민족 침략으로부터 조국주권방어를 위한 구국인민항쟁만세!
4. 통일적 민주주의 조선 완전자주독립만세!
1948년 6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 黨 中央委員會 메시지에 答함
--우리는 이 고귀한 메시지를 방방곡곡 모든 항쟁대열에 전하였으며, 또한 이미 원수들의 총칼에 쓰러진 존귀한 동지들과 인민영웅들의 무덤에 이 영광의 꽃다발을 드렸습니다. ----제주도 항쟁이 “조선인민의 모범적 항쟁이며”"우리조선민족의 영예와 불굴의 애국심을 전 세계에 선양하였으며, 따라서 “조선인민은 제국주의적 폭압과 학살로도 멸할 수 없는 것을 천하에 公示”하는 역할을 놓았다고 평가하여 주신 것은 과분의 명예로 생각함과 동시에 존귀한 지하의 영웅들과 항쟁하는 전사들의 의사를 대표하여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조국해방 투쟁사상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루는 영예를 실지에 관철할 것을 지표로 하여 망국멸족의 단선분쇄의 가열한 초소를 죽엄으로써 지킬 것이며, 통일독립을 우리의 손으로 전취할 때까지 과감히 투쟁할 것을 확언하고 맹세합니다..
1.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만세!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이 메시지에서 남로당이 추구하는 투쟁 목적과 방법이 4.3을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남로당이 남한에 수립될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는데, 그것은 4.3 사건의 주동세력들의 입장과 일치한다. 조선인민의 모범적 항쟁은, 육지 여러 지역에 남로당이 일으킨 반란이 큰 성과를 얻지 못 한 현실에 비추어 매우 성공적이고 고무적인 사례로 평가하였다.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의원 선출을 위한 지하 선거에 제주도민 85%가 투표에 참가한 사실에서 남로당이 4.3 사건을 일으킨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의원으로 해주대회에 참여한 김달삼의 보고와 제주 대의원들이 받은 환영은 이 사건의 실체를 말해준다. 유엔 감시 하에 자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5.10선거를 온갖 회유와 협박과 조직적인 방해 공작으로 거부하여, 결국 북제주 갑.을 두 선거구에서 투표자 미달로 선거 무효가 되었다. 그 해 8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의원를 선출하는 (소위) 지하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주도민이 85%가 참여했다. (그 지하선거가 남로당 지도부가 획책한 부정과 불법 선거였지만) 제주도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도장 찍기 투표를 했지만, 남로당 지도부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들은 5.10 선거가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가로막는 선거라고 선전하여 투표 불참을 강권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통일정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지하선거를 통해서 그 통일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음이 분명했다. 이들은 그들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포섭 세뇌 교육을 시켜 남로단의 동조자로 만들어 희생의 제물로 삼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사태가 악화됨으로 인해 무고한 양민들까지 희생되는 참극은 연출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도민의 희생의 첫째 원인은 38선 이남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던 남로당의 전략 때문이었음을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념 추종자들에 의해서 그 망령이 되살아나 이 무고한 동조자들까지 진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싸운 정항자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에 순수한 민간 희생자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의 모습이다.
(4) 4.3사건은 남로당의 전략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한 조직망을 갖추고 일으킨 무장 반란이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4.3을 위하여 무장대를 조직하여 강한 훈련을 실시했고, 이 하위 조직으로 각 지역별로 행동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당 차원에서는 무장대의 투쟁을 후원하기 위해서 읍.면 부락별로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각 직장, 심지어는 경찰과 군부대까지 세포를 두었다. 이것은 군사적 활동과 사상 활동을 동시에 실현함으로 무장 투쟁의 성공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이 조직체가 흔들려서 4.3 반란이 경찰의 지휘부와 9연대까지 동원하지 못했지만, 만약 그들의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제주도는 완전히 남로당 무장대의 해방구가 되었을 것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무장대의 조직 현황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보고서, pp,174-188)
(5) 단선 반대의 명분인 민족 통일정부 수립은 허구적 발상으로 설득력이 없다.
보고서는 4.3의 발발 원인 중에, 남한 단독 정부 수립으로 분단을 획책하여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한다는 명분으로 5.10선거를 반대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민족적 저항’이라는 식으로 ‘민중봉기’, ‘소요’, ‘저항’으로 4.3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당한 논리가 아니다. 5.10선거를 거부하는 것은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38이북의 정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령에 따라 공산국가 건설이 진행되고 있음은 기정사실이었다.
북한은 1946년에 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하였고, 같은 해 3월 15일에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 해 11월 3일에는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여 1947년 2월 24-25일에 “북조서인민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이미 남한보다 먼저, 38이북에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공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어놓았다. 소련은 박헌영을 통해서 북조선만이 아니라. 남한에도 같은 정권이 수립되도록 공작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전략적으로 남한의 정치 세력을 분란시키기 위해서 성사가 안 될 남북협상을 꾸준히 제의했다. 이것이 남로당으로 하여금 단선정부 수립 반대 명분을 세워주었다. 남한에서 남로당이 내세운 투쟁 명분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외세인 미국의 세력 거부, 혼란기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 친일세력 청산 등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명분을 내세우는 전략을 썼는데, 이것이 그대로 제주 4.3사건 전략이었다.
남로당을 주체로 볼 때, 이 4.3사건은 38선 이남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3.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가?
=4.3사건의 진압은 불법인가?
(1) 4.3사건은 미군정 하에서는 치안 상황이었는데,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가 변란으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이 사건은 38선 이남의 한 지역의 사건에서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전초적인 국가 변란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그래서 미군정에서는 경찰을 통해서 치안 상황의 범위에서 대응했는데, 정부 수립 후에는 국방의 차원에서 군이 중심이 되고 경찰 병력이 도움을 받아 진압 작전을 펼치게 된다.
(2) 사건은 남로당이 일으킨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제주 사회가 혼란에 처한다. 우선 5.10선거에서 북제주 갑.을 두 선거구가 투표자 미달로 선거 무효가 되었고(정부 수립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달성됨) 치안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주민은 불안하게 되고, 남로당 무장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군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심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반란군을 진압하려는 진압군과 수세에 몰린 무장대들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으로 확대된다. 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무장대 측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에는 군 병력을 교체하는 등 진압 작전에 적극적이었다.
정부가 무장대를 진압하는 것은 국가의 시급한 과제였다. 군정에서는 이 사건이 치안 사건이었으나, 정부의 입장은 국가변란이었다. 그것은 그 발발동기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할 목적으로, 즉 38이남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일으켰기 때문에 빠른 기간에 평정해야 했다. 더구나 이러한 반 정부 무장 세력들이 제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리산 태백산을 비롯해서 남한의 산악지대에는 빨치산들이 조직적으로 활동을 벌리고 있었다.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남에 대한 통일 전략을 구축하고 있었고, 북한 정부는 남한 빨치산 세력과 남로당 지하 세력과 공동 전선을 펴서 남한의 공산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로당 무장대와 그 동조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강경 진압 작전을 펼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 인권적인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3) 제주도의 마을은 개화기 이후에 개설된 일주도 변에 면사무모와 경찰관서가 있고, 여기에서 한라산 쪽으로 더 올라간 지대, 소위 중산간 부락이 형성되어 있다. 이 부락들은 당시에는 치안의 부재 지역이여서 입산자들이 은거처가 되거나 식량 보급 통로가 되었다. 진압군 측에서는 전략상 중산간 부락 주민을 해안부락으로 이주시킨 다음에 그 부락에 사람이 생활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민 소개를 뒷전으로 두고 먼저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모두 산사람으로 몰아서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산간 부락 주민들은 진압군을 피해서 입산하게 되었고, 결국 이들도 무장대의 협력 동조세력이 된다.
이들이 결국 토벌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귀순하여 심사를 받고 석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희생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이북에서 월남한 반공 서북청년단원들이 초법적 행위가 도민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더구나 군경 진압군 지휘관이나 대원들이 제주도 실정에 낯설었기 때문에 문화 충돌이 일어나고, 군과 경찰의 제주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도민과의 갈등을 깊게 만들기도 했다.
(4) 보고서는 계엄령 선포의 적법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로 진압군이 토벌작전에서 계엄법에 의해 조치된 사항이 불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내전 상황에서 국가 기강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서 진압작전에 따른 불법적인 사태가 발생하였음은 사실이다 (보고서.pp276-286). 이러한 상황을 정부가 인정하여 대통령이 사과한 것이다. 그리고 약식 재판을 받고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6.25가 발발하자 집단 처형된 경우도 있다. 어떻든 무장대를 토벌하던 1948년 가을부터 1여 년 간은 제주의 중산간 부락 주민들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진압 작전 과정에서 많은 불법적인 일이 벌어져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이 되었다. 그런데 남로당 무장대에 대한 진압 작전은 남북의 대치 상황에서 38선 이남에서 반란군에 대한 진압은 국가 체제를 수호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본격적인 토벌 작전이 실시되고 1년 6개월 후에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무장대에 대한 토벌은 피치 못할 사안이었다. 문제는 사안을 감정적으로 불법적으로 처리하였다는 데서 도민의 피해가 컸다는 사실이다.
4. 4.3의 비극을 극복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위무(慰撫)하는 길.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전제로 할 때에 가능하다.
(1) 사건을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반 인권적 사례가 4.3사건의 발발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반면에 4.3 사건이 반 국가적 반란이라 하더라도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반 인권적 사실 또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것은 제주4.3사건을 인식하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대 전제가 되어야 한다.
(2) 우선 팩트를 정직하게 복원하는 일이 선결 문제이다. 진실만이 화해의 열쇄가 될 수 있다. 팩트가 마련될 때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변동기에 새로운 역사를 희망하는 청년의 열정이 남로당을 선택했던 경우나. 여러 정황으로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도 남로당의 추종 세력이 되었던 경우, 중산간 부락에 살았기 때문에 산사람이 되었던 사람들, 그 외 일신상의 여러 문제로, 서로 다른 편이 되어서 미워하고 죽고 죽여야 했던 그 상황, 자기 선택이 가능할 수 없었던 그 상황을 이해할 때에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적과 동지의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 4.3을 이념으로 포장하여 서로가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상대의 부당함을 생각함으로 아픔을 치유하려 한다면, 스스로 허위를 붙잡고 위로를 받으려는 어리석음에 빠질 것이다.
(3) 사건의 주체를 몇 단계로 나누어보면, 4.3사건이 변동기 한국사회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이해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피해를 역사적 상황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혹 패배주의적 역사 인식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현실을 직시할 때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발발의 주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전략적 봉기, 저항이라고 하지만, 그 주체들로 다시 여러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가) 남로당 당원과 그 진정한 추종세력, (나) 심정적으로 이들을 도왔던 주민, (다) 이들과는 상관없는 주민,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직접 주체 외에도, 남로당제주도당원들이 항쟁을 하도록 한 배경이 되는 힘 인 (라) 남조선 노동당, (마) 북한의 김일성 세력 (바) 소련 공산당 세력까지도 이 사건의 주체와 무관하지 않다.
만약 남로당이 막강한 세력으로 38선 이남 지하에 상존하지 않았다면, 제주에 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무장대를 조직 훈련하고 전도적인 조직체를 통해서 단선 반대, 미군정에 저항의 명분으로 무장 봉기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38이북에 김일성 정부가 수립되었기에, 그리고 그 뒤에 세계 양대 세력인 소련이 있었기에 4.3사건은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은 3.1사건 이전에 각 지역에서 조직된 민청을 비롯한 좌익 단체의 결성에서 스타린 박헌영 김일성 등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제주지역의 좌익 조직과 인사들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이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좌익 세력으로 하여금 저항의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시도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반면에 진압군 측에서도 대한민국의 정부의 진압 명령에 따른 것이고, 그 뒤에 미국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할 때, 제주 4.3은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양대 세력의 정치적 영향 하에서 일어났고, 진압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더 올라가면, 일본의 한국 토치라는 식민지 상황과 2차대전 종식과 해방이라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이 사건은 세계의 열강의 대립과 무관하지 않으며, 신생 독립국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인 부채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사태로 인해서 피해를 당한 것은 역사 발전을 위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나를 공산주의자로, 또는 그 동조자로 만들었는가?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어도 칭찬도 비난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 사태를 인간주의적으로 인식하는 길이고 이것을 통해서 그 비극과 원한을 어느 정도 위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도 이들의 대한 명예회복과 위로를 이러한 차원에서 시행해야지, 선택과 행동이 정당성은 인정하는 이념주의적 발상은 진정한 화해에 이를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4.3 사건을 바라본다면 4.3평화공원 전시장의 콘텐츠도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분노아 저주를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이해와 정직한 역사적 성찰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콘텐츠를 재정비해야 한다. 상생과 화해란 무엇인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여 공감을 같이할 때에 가능하다.
(4) 4.3희생자를 위한 추념일 제정 문제도 이런 입장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추념일을 정하는 것은 그 날의 비극은 공유하면서 그 비극을 극복하고 승화하기 위해서이다. 제삿날을 언제로 정하느냐? 그런 의미에서 추념일 지정은 필요하지만, 4월 3일로 정하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 왜냐면 (적어도 제주도민의 입장은) 4.3은 두 번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날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추념일을 정한다면, 마치 6.25 전쟁으로 순국한 영령을 위로하는 현충일을 6월 6일로 정한 것처럼, 4월 3일이 아닌 다른 날로 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북한에서는 6월 25일을 통일전쟁 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민족의 비극을 기억하는 날로 새기는 것과 같다. 4월 3일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한 혁명의 불꽃을 터뜨린 날이기에 의미 있게 지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추념일로 정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희생자를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 본의 아니게 남로당 추종자가 된 것만도 억울하고 한스러운데, 그 한을 매년마다 기억하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4월 3일을 추념일로 정하여 추념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도 위배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