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제주4.3사건 -오균택 (4.3유족)
저의 고향은 제주도 제주시 화북동입니다. 저는 16살에 4.3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마을은 독립된 마을로 100여 호에 가까운 부락이었으나 행정 구역상 멀리 떨어진 화북동에 속해 있었기에 일제의 압박에 더해 이중의 설움을 받아오던 터라 조국 광복의 물결에 편승하여 화북동에서 독립하는 분구(화북3구)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나의 선친(오두현)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한번 책임을 맡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밀고 나가는 성품이어서 당시 제주읍 사무소 출입을 매일 하다시피 하여 불과 몇 개월 만에 화북3구로 분구 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조국 광복에 다음 가는 기쁨으로 환호하였습니다. 다시 마을총회를 열어 구(區) 책임자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역시 아버님이 초대 구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선친께서는 사양하였지만 분구 추진의 공로를 인정하여 마을발전에 더 힘써 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여망에 못 이겨 승낙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피난지에서 생활 터전을 잡고 정착하게 된 계기였고 앞으로 우리가정의 운명의 갈림길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조국의 광복과 마을의 독립으로 메아리쳤던 환호 소리가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악랄하고 무자비한 골육상잔의 만행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4.3폭동이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3.8선 이남에서는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10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방방 곳곳이 선거체제로 들어갔습니다. 화북3구에서는 구장인 선친이 선거위윈장에 위촉 되었습니다. 선거사무가 본격화함에 따라 이를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남로당의 만행이 시작되었습니다. 4.3폭동이 본격화 된 것입니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인민해방군 유격대에 참여한 사람은 김oo 한 사람뿐 이였으며 2~3명이 그들과 내통하여 정보를 제공하면서 밤에는 삐라를 마을의 곳곳에 뿌리고 집집의 대문에 붙이곤 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경찰들과 마을 유지, 대동청년단원들이, 선거위원들과 합세하여 삐라를 제거하고, 밤이 되면 저들이 와서 다시 붙이고 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쯤에 인근 마을인 화북지서가 폭도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경찰관과 양민이 살해당하는 참사가 있었고 그로 인해 밤낮으로 경비가 더욱 엄하여졌습니다.
그런데, 1948년 4월 27일 오전 11시경 어떤 정보를 입수 하였는지 이웃마을(화북2구)에 주둔한 경찰관 7명이 마을에 당도하여 선친을 비롯한 대동청년들과 같이 마을을 순시하다 김 모 집을 점검 하는 순간 거물급으로 추정되는 폭도 한명이 월담을 하고 도주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획한 것이 일본 군인들이 사용하던 대형배낭이었습니다.
경찰관들은 대동청년들과 함께 선거사무소인 우리 집에 들였다가 각기 떠나갔습니다. 선친께서는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습니다. 필시 뭔가 중대한 사태가 닥쳐올 것 같은 눈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30분도 못되어 와르릉 하고 울타리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을 포위했던 무장 폭도 20여 명이 집 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긴급물자를 뺏긴 폭도의 연락을 받고 이를 회수하기 위하여 우리 집을 급습한 것이었습니다. 4.3폭동 이후 폭도들이 대낮에 행동 한 것은 우리 집 사건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제민일보가 발간한 “4.3을 말한다”의 2권 79쪽의 G.2보고서의 4월 상황일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4월 27일 오후 4시 30분경 화북에서 마을리장이 납치됨. 같은 장소에서 경찰관은 인근산악에 있는 습격대들에게 운반중이라고 믿어지는 일화 50만엔 상당의 긴급 물자와 약품을 압수, 6사단 4월 29일”
인민유격대에서 작성한 제주도 인민 유격대 투쟁보고서 37쪽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4월 27일 리 구장(里 區長) 집에서 개(경찰)가 식사 중이라는 정보에 접하여 아 부대 16명이 이를 포위하였으나 개는 도주해 버리고 반동 구장(區長) 1명을 포로 해다가 숙청”
바로 나의 선친 오두현을 숙청했다는 기록인 것입니다. 놈들은 아버지를 끌어낸 다음 눈에 보이는 생활 용품과 의류 등을 챙기고는 ‘신발도 채 신지 못한 아버지’를 개 끌듯이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맨발로 경찰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울부짖는 동생들을 껴안고 함께 울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다시 경찰들과 함께 왔으나 아버지는 이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경찰관 50여명의 1개 부대가 사건 발생 보고를 받고 출동하였으나 맨발로 끌려간 아버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경찰관들은 위로의 말을 던지고 떠나버렸습니다.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와 가까운 친족 몇 분이 찾아와 밤을 새우며 바람에 흔들리는 문소리에도 혹시나 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도 아버지가 안 돌아오자 필시 놈들에게 피살된 것으로 여기고 시체를 찾으려 할아버지와 친지들이 나서서, 놈들이 달아난 방향으로 구석구석 찾아 헤매었으나 허사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으로 산야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피난 짐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날이 5월 9일이라 다음날 총선거를 못하도록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이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어머님과 상의했고, 그 결과 우리가족 모두 간소하게 차려입고 친척들의 틈에 끼어 따라 나서기로 했습니다. 피난처는 용강동 마을을 지나 소나무로 우거진 목장 지대였습니다. 그날따라 봄비는 계속 내려 온몸은 비에 젖어 견디기 힘들었고, 모두가 밤을 지낼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우리도 대충 소나무 가지를 꺾고 움막을 짓고 저녁도 간단히 지어먹었습니다. 드디어 제헌국회의원 선거일인 5월 10일, 역사적인 총선거의 날이 밝았습니다. 산속이었지만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끝내니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나도 친지 틈에 끼어 약간 떨어진 곳에 집합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놈들의 아지트였습니다.
왜놈들이 버리고 간 99식 총을 메고 닛본도를 찬 놈 등 50여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제주읍 동남부, 화북, 봉개, 삼양, 용강 출신 들이였으며, 그 중에는 하북 출신 이욱X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이 자가 오현중학교 교모와 교복을 입고 왜놈장교가 신었던 장화구두를 신고 대검을 차고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후 귀순하여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가 6.25가 발생하자 해병대 3기로 지원입대 한 바 있고, 제대 후에는 제주 사회에서 저명인사로 등장해 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떵떵 거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각 부락에서 모여든 사람이 너무 많아 집결하는데 시간이 걸려 한참 후에야 연설이 시작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으나 나는 아버지 찾는데 정신이 팔려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정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한참 후 아버지 일을 도와주시던 송모씨가 정신 차리라고 흔들어 나를 깨워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이유는 아버지를 찾던 중, 무장폭도 중에 우리 집에 습격 왔던 놈이 습격당시 놈들이 훔쳐간 아버지의 옷을 입고 있어서 저 놈이 아버지를 죽였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을 잃고만 것이었습니다.
한편 나를 위로하는 송 모씨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놈들에게 피살 되였다. 네가 살아야 원수를 갚을 것이 아니야, 네가 더 이상 여기서 발악하여 놈들이 구장 아들이라는 것을 눈치 채면 너 하나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나를 정신 차리게 했습니다.
그러는 순간 놈들의 선전 선동하는 연설도 끝나고 해가 질 무렵 귀가를 서들기 시작 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밤중 이였다. 이 사실을 할아버지와 친지들에게 알리고 나니 집안은 울음바다로 변했고 그나마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 가족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이런 일이 38일째 되풀이 되던 날, 할아버지께서 가마니와 새끼줄을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잘 모르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서로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무턱대고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는데, 집으로부터 약 2km 지점쯤 되는 아주 험한 소나무 밀림 지대까지 갔습니다. 38일 동안 아버지를 찾을 때 이 부근도 몇 번 거쳤지만 아무도 발견을 못했었는데 어제 할아버지가 이 부근에 왔을 때 악취가 풍겨 짚이는 데가 있어 찬찬히 찾아 헤매다가 아버지가 처참하게 살해된 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땅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참상의 현장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글로도 차마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1년만 쉬고 중학교에 진학시켜 주기로 한 아버지와의 약속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셔야 할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남로당 조직원들의 공갈 협박에 못 이겨 남로당 산하의 민애청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인민공화국 깃발을 앞세우고 죽창을 어깨에 메고, 인민항쟁가 (원수 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마라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를 소리높이 부르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낮에는 마을 부근 높은 동산에 깃대를 세우고 경비(비깨)를 서면서 군인 경찰 등 토벌대 접근을 조직원들에 알려 사전에 도피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밤에는 죽창을 들고 마을 골목길을 지키며 조직원들의 야간 활동(삐라 살포, 문서연락, 식량운반)을 도와주는 부역행위를 6개월 동안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폭도들은 우익인사 집을 골라 불을 지르고 식량을 약탈하는 악랄한 행동으로 발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우리 집은 제2의 사태가 발생 하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작은 숙부는 형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경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중숙부는 대동청년단원으로 국군 토벌대를 지원하고 있는, 소위 놈들이 말하는 반동분자 가족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입니다.
1948년 11월 16일 제주읍 영평상동 에서 우익진영 가족(그들의 표현으로는 반동가족) 5명이 폭도들에 의해 피살 되였습니다. 그때 폭도에게 희생된 주민들은 바로 대청단원 가족들이었습니다. 폭도는 60대노인과 부녀자등 5명가량을 대청가족 혹은 친척이라는 이유로 학살했습니다. 그중에 우리 가족이 하늘같이 의지하여 살아가려던 할아버지가 끼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또 겪게 된 것입다, 그 폭도들은 이웃 마을 봉개, 용강동 출신들이며 그중에는 할아버지의 외4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 현장을 목격한 막내 고모가 외5촌인 임보기를 붙잡고 삼촌, 제발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하면서 매달렸으나 지금 이 마당에 삼촌이 어디 있느냐며 냉정히 뿌리치며 어디론가 할아버지를 끌고 가 살해 했습니다.
그들 폭도 중에는 할아버지 옆집에사는 김원희와 남노당 영평동 조직책인 김병익라는 자가 가담 하였으며 그들은 지금 4.3평화공원에 할아버지 4촌 임보기와 합께 희생자로 올라 있습니다
다음날 새벽 할아버지의 피살 소식을 접하기도 전에 집 인근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밖을 처다 보니 10여명의 폭도들이 우리 집을 향하여 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총소리가 울렸고, 놈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대동청년단원인 숙부가 전날 밤 할아버지의 피살 정보를 접하고 국군 토벌대를 대동하고 출동한 것입니다.
숙부께서는 할아버지의 피살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제주시내로 피난 갈 준비를 서둘러라 했습니다. 우리는 피난 짐을 꾸리고 제주시내 삼도동 무군성 5촌(五寸)댁 창고 한구석을 빌려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 했습니다.
나는 길지도 않은 기간에 죽을 고비를 3번 넘겼습니다. 첫 번은 무장 폭도들이 우리 집을 습격 할 때였습니다. 순경들이 30분 늦게 집을 떠났거나 폭도들이 30분 빨리 우리 집을 습격 했다면 우리 집은 폭도와 경찰의 전쟁터가 되여 우리가족은 몰살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는 5.10선거를 피하여 산으로 갔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를 끌고 간 폭도를 목격하고 정신을 잃었을 때 놈들에 발견 되였으면 여지없이 살해 되었을 것입니다. 3번째는 1948년 11월 16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피살 당하고난 뒷날 아침 폭도들이 우리 집으로 우리를 죽이려고 몰려올 때 국군과 숙부가 10분만 늦었어도 우리가족은 몰살 되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이 필자가 체험한 바로는 4.3사건은 남로당의 지령에 의하여 4.3주도세력들로 하여금 1948년 5월 10일의 귀중한 선거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자유 민주국가를 세우는 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무장한 유격대들이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살인 방화는 물론 선거관련 사무소를 기습하여 선거 관계자와 대동청년 단원 및 민간인 등을 납치 살해함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선거일 1~2일 전부터 주민들을 야산으로 강제 이동시켜 선거에 참여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서 제주도 3개선거구 중 남제주군을 제외한 북제주군 2개 선거구에서는 국회의원을 선출하지 못하게 한 것이 바로 4.3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그 당시 제주4.3사건현장을 직접 체험한 민애청 조직원으로 일했고, 폭도들에 의해 선친과 조부를 잃은 피해자 가족입니다. 이런 관계로 편견을 가지고 이 글을 쓴 것이라 일축할지 모르지만 필자는 오직 필자가 겪고 보았던 진실만을 말합니다. 4.3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 오늘의 제주4.3특별법에 의한 희생자 심사결정은 너무 많이 편향돼 있고, 왜곡돼 있습니다. 위령공원조성, 진상조사보고서, 화해와 상생백서 등도 너무 많이 편향돼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쓰게 되면 왜곡된 부분이 노출될 것이 분명한데 그 책임은 누가 질것인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왜곡된 제주4.3의 진상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이것이 희생자의 명예를 진정하게 회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오균택 (4.3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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