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12일 법률 제6117호로 제정된 4.3특별법에 의해 4.3특위(위원장 국무총리 고 건)가 2003년 4월 29일「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발행하고 6개월 동안 수정의견을 접수할 때 필자도 114쪽에 달하는 수정의견을 작성 제출했으며, 자유시민연대 등 경향 각지에서 376건의 수정 의견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반영된 것은 33건, 그것도 자구수정에 불과하였고 거의 묵살 당했다.
(※수정의견-대한민국재향경우회 제주도지부 제19호, 동 수정의견 제출에 공동명의로 참여한 단체는 제주도상이군경회, 전몰군경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6.25참전동지회, 자유수호협의회, 대한민국건국희생자유족회, 경찰참전유공자회 등임)
처음부터 집필진 및 특위위원 구성이 당시 정치 상황에 영향을 받아 편향적이었을 뿐 아니라, 보고서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위원 3명(국방부 추천 2명, 경찰청 추천 1명)이 강력 항의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항의 및 부동의’ 뜻으로 사퇴하는 등 많은 무리가 있었다. (한광덕, 이황우 위원 사퇴)
더구나 사건의 성격규명을 유보함으로써 위법하고 미완의 보고서가 되었으며, 건국의 중요성을 도외시하고, 폭동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수되어 일어난 인권침해 사실은 강조된 반면 토벌대의 피해나 인민유격대의 만행은 축소되었다. 소련과 북한 및 박헌영의 역할을 누락하고, 사건의 본질인 폭동 반란을 외면하였으며, 폭동 주동자의 책임을 면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명피해를 다룸에 있어서도 내용은 고사하고 양적으로도 가해자별 분류를 보면 토벌대가 78% 인데 130쪽에 걸쳐 비판하고, 유격대의 잘못은 4쪽에 불과하여 97% : 3%란 편향됨을 보이고 있다. 잘못된 곳이 너무 많아 일일이 지적하려면 한정이 없으니 중요한 사항만 아래에 지적해 보겠다.
가. 군의 개별 작전 및 피해상황 완전 누락
⑴ 신엄리 전투
1948년 12월 19일 폭도 30여 명이 마을을 습격하여 민간인 10여 명을 살해하고 민가에 방화하였고 군인 출동 중 매복조에 걸려 15명이 전사하고 1명이 중상.
⑵ 노루악 전투
1949년 3월 9일 노루오름에서 군(민보단 대한청년단원 포함)과 유격대가 교전하여 군 27명과 우익단체원 9명 사망.
⑶ 녹하악 전투
1949년 4월 초 2연대 4중대는 이덕구가 직접 지휘하는 유격대 1,000여 명과 격전을 벌여 78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2정을 포함한 총기 207정을 노획했다. 4.3발발 1년 후인데 기관총 2정을 가지고 전투에 참가한 유격대가 1천명에 달했다는 것은 핵심세력 3천명이라는 주장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 군경에 침투한 프락치 사건
(※프락치-각 기관이나 단체에 침투하여 공산주의화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 또는 사람. 여기서는 남로당에서 해당 기관에 잠입시킨 자를 말함)
⑴ 군 프락치 사건
1948년 10월 28일 군에 침투한 프락치 사건으로, 송요찬 연대장 사살 등 반란 거사 직전 80여 명을 검거하여 6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2) 경찰 프락치 사건
1948년 11월 7일 소위 ‘11.7사건’ 또는 ‘제주도 적화음모사건’이다. 여순10.19사건 반란군이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오판 하에 경찰에 침투한 프락치들이 통신을 장악하고 유치장을 개방하며 무기고를 탈취하고 경찰간부 및 사회 저명인사와 우익단체 간부들을 일시에 처단하려는 음모가 거사 불과 몇 시간을 앞두고 경찰 내 프락치였던 서용각이 전향 제보함으로서 전모가 밝혀져, 경찰은 물론 각 기관에 침투 암약하던 프락치 83명을 검거 처리했다. 군경프락치사건이 사전 적발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이상과 같이 군경토벌대가 진압을 위해 기울인 많은 작전과 희생도 분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벌대는 무조건 양민만 학살한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다. 다랑쉬 굴 진상 왜곡
1948년 12월 3일 밤 유격대 100여 명이 구좌지서 및 세화리를 습격하여 민간인 43명을 살해하고 학교와 민가 등 138채를 방화하였고, 12월 18일 군,경,민 합동 토벌과정에서 다랑쉬 굴속에 은신한 자 11명(취사 담당 여자의 아들 10세 1명 포함)이 희생된 사건을 1992년 3월 22일 제주4.3연구소가 발견하여 여론화하였다. 이때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의 조사보고서와 많은 참고인 진술서에 의하면, 사건 당일 남로당 구좌면당 위원장 정권수의 지시로 유격대 조장의 지휘 하에 대원 2명과 함께 현장을 확인하여 사체를 수습하고 명단을 작성 보고한 사실이 빠져있다.
위 유격대원 3명 중 1명이 다랑쉬굴에서 유격대 일행 8명과 같이 지냈으며, 죽창과 철창을 가지고 4~5명으로 조를 편성하여 기본적 경비를 하면서 상부 지시에 따라 통신연락과 보급,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진술, 유격대 조장이 민간인 1명을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진술도 정부보고서에 없다. 당시 군 책임자가 굴속에서 나올 것을 설득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던 사실과 희생자 중 굴과 인접한 마을(속칭, ‘선수머세’ 총 12가구) 출신이 전무한 점, 현장에 남아 있는 철창, 대검, 철모, 탄띠, 도끼, 군화 등 무기류 등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완전 왜곡하였다.
필자는 위 내용을 1차 정부보고서 수정의견 으로 제출했으나 묵살되었음은 물론이다. 정부보고서는 굴속에 있다가 희생된 사람들 전원이 선량한 사람들인데 군경이 아무 이유 없이 학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사실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역사 기록은 사실대로 밝혀놓고 2차적으로 죄 없이 희생된 어린이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옳다.
라. 김익렬 유고(遺稿)과신에 따른 오류
정부보고서 집필진은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를 과신한 나머지 이를 비판 없이 두루 인용하였다. 김익렬의 유고에서 밝힌 ‘4.28평화회담’(협상) 약속을 경찰과 미군정이 위반하여 “평화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벌어진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은 협상이 파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편향성을 나타냈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4.28평화회담과 오라리 방화사건을 먼저 설명하고 의문점을 제시하겠다.
- 정부보고서에 나와 있는 4.28평화회담(협상)이란
제9연대장 김익렬의 유고문, 이를 인용한 장창국의「육사 졸업생」, 이 두 개의 글을 토대로 작성한 정부보고서에 기록된 ‘4.28평화협상’의 요지는, 1948년 4월 28일 김익렬과 김달삼이 구억국민학교에서 회담하여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3개항에 합의했는데,
협상 3일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오라리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졌고, 이후 제주4.3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오라리 (방화)사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오라리방화사건’이란?
- 오라리
• 제주읍내에서 2km가량 떨어진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고 8.15 직후 600여 호에 3,000여 명이 거주했음.
• 사회주의계열 항일인사 고사규, 박기만, 오행윤, 송삼백, 이순정 등이 건준운동 등을 통해 마을을 주도하였고, 1948년 5.10선거 때 주민 2,000여 명이 선거를 거부(자진 참여자도 있었지만 협박 때 문에 살기위해 동참한 자도 많이 있었을 것임)하여 열안지오름, 당병이 등지로 대이동하는 등 당시 좌익세가 강한 마을이었음.
- 4.28평화회담 이후 사건 개요
→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김달삼 평화회담
1. 1948년 4월 29일
좌익청년들이 오라리 대청단장 박두인, 부단장 고석종을 납치 살해 (박두인을 납치한 자는 박두인 의 8촌)
2. 1948년 4월 30일
• 08:00 동네 민애청 단원 등 좌익청년들에 의해 대청단원 부인 강공부와 그의 동서인 임갑생을 민오름으로 납치, 수백 명 주민의 포위 속에 눈 가리고 소나무에 결박,
• 17:00경 구원 경찰이 오고 있음을 느낀 임갑생은 결박을 풀고 필사 탈출하였으나 강공부 여인은 좌익청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함.
3. 1948년 5월 1일
• 09:00경 경찰관 3~4명과 대청 서청단원 30명이 오라리 제기물동산에서 강공부 여인 장례식 치 룸.
• 12:00경 장례를 마치자 경찰관은 트럭으로 귀환하고 청년 30여 명이 연미마을에 들어와 유격대 가담 주동자 허두경, 강병일 집 등 5세대 12동에 방화.
• 13:00경 민오름에서 이를 바라보던 좌익청년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추격하자 30여 명 청년들은 사라지고 좌익청년에 의해 오라리 출신 김규찬 순경 모친 살해.
• 14:00경 폭도 출현 신고를 받은 경찰기동대가 2대의 트럭을 타고 출동하여 총격전을 전개하였으 며 이때 동네 좌익청년 1명 사망함.
- 4.3발발 후 5월 1일까지 오라리 인명 피해
- 토벌대에 의해 3명 사망, 1명 부상
- 무장대에 의해 4명 사망, 1명 탈출
⑴ 유고문의 진실성 검토
2008년 11월 12일 한겨레신문 인터넷 판에 허호준 기자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1948년 8월 6일, 7일, 8일, 3회에 걸쳐 김익렬 연대장이「국제신문」에 연재한 기고문(寄稿文)과 그가 1988년 12월 사망 후에 전해진 유고문(遺稿文, -1969년 1월 육군중장 예편, 그 뒤 회고록을 집필)을 비교하고 유고문의 진실성을 검토해 본다.
우선 1948년 8월 6~8일「국제신문」에 보도된 기고문의 작성일은 1948년 6월 (날짜 없음)로 되어 있으니 4.28협상일로부터 최단 33일, 최장 63일 사이에 작성하였다. 반면 김익렬은 1977년 3월 “회고록 집필중임을 제남일보 편집국장에게 서한 발송”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고문은 1977년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기억력을 감안하거나 제반 사항을 고려할 때 29년 후에 쓴 유고문 보다 협상 후 1~2개월 어간에 쓴 기고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생전에 공개한 글이라 독자들로 부터 검증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본 ⑴항은 2011년 6월 16일 제주자유수호협의회가 발행한「제주도의 4월 3일은?」제2집 80~142쪽에 게재된 김동일 논문 ‘김익렬의 기고와 유고’를 기초로 하고 필자의 관점을 더하여 4.28평화회담과 유고문, 기타 의문점을 제기해 보겠다.
㈎ 4.28평화협상일
기고문에는 협상일이 4월 28일이 아니고 30일로 되어 있다.
유격대로부터 “二七, 二八, 二九, 三일간은 맹렬한 전투를 개시하였는데〔......〕二十九일 상오 十二시에 정보부(情報部)에는 광목잠뱅이에 밀짚모자를 쓴 三十四,五세의 중년 농부가 반란군의 연락으로 경비대를 찾아왔다. 〔......〕그는 간단한 인사가 있은 후 三十일 상오 十二시에 안덕면(安德面)산간부락에서 회견할 것을 제기하고 〔......〕”라고 썼다.
이중 확인기재로 보아 오기(誤記)나 오식(誤植)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유고에는 평화회담의 날짜가 4월 말로 결정되었다. 휴전 4일째 되는 5월 1일은 (회담일이 27일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며, 정부보고서는 이를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은..’이라고 달리 기록하였다)이라고 애매한 표현을 썼을 뿐 4월 28일은 없다. 김남식의「남로당 연구Ⅰ」,에는 4월 30일께,「이제사 말햄수다」1권에는 4월30일인가에,「 제주민중항쟁Ⅰ」에는 4월 30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4월 28일은 장창국의「육사 졸업생」에 나와 있을 뿐이다.
왜 유고에 정확한 회담날짜를 기록하지 않았느냐(못했느냐?) 혹시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닌지라는 의문에 해답이 있어야 한다.
㈏ 협상장소
기고문에는 “보통 농가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유고에는 “산간부락 초등학교 「( 4.3은 말한다」- 구억국민학교)였다〔. ......〕일본식 다다미 방이었다. 아마 교장의 내실인 듯 싶었다”로 썼다. 농가와 학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 회담 참가자
기고문에는 “두 사람의 부관 그리고 자동차 운전수 도합 네 사람”인데 유고문에는 “지프 운전병과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이렇게 3명”으로 되어있다. (이윤락 씨는 박경훈 씨도 동행했다고 증언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대동청년단 대표도 동행했다는 증언도 있다.)
㈑ 김달삼 요구조건 중 중요항목 누락
기고문에는 김달삼이 요구한 6개 조건 중 가장 중요하고 첫 번째인 단정반대 내용이 있으나 유고문에는 없다.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 휴전기간
기고문에는 김익렬이 요구한 4가지 조건 중 네 번째‘단, 이상 3조건은 조약일로부터 7일 간으로 한다.’로 되어 있으나 정부보고서에는 유고를 인용하여 72시간 내 전투 중지 등 3개항에 합의했으나 5월 1일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등으로 깨졌다며 경찰에 모든 책임을 씌우고 있다. 오라리 방화사건에 맞추려는 것은 아닌지 라는 의문에 답해야 한다. 정부보고서는 미군정이 오라리 방화사건과 미군이 이를 공중 촬영한 사실을 놓고 강경진압을 위해 명분 쌓기 위한 의도된 행위로 왜곡했다.
㈓ 평화회담 결과 보고 후의 상황
기고문에는 “나의 의견은 통과를 보지 못하고 그날 밤부터 총공격은 개시되었고 반란군도 상당한 기세로 대전하여 왔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유고에는 “나의 요청에 의하여 전 경찰은 지서만 수비 방어하고 외부에서의 행동을 일절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오래간만에 제주도는 총소리가 그치고 평온을 되찾았다”라고 썼다. 한 사람이 쓴 기고와 유고내용이 정 반대다.
-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4.28평화협상 장소에서 가장 가깝고 김달삼의 연고지로서 연락이 쉬운 대정면 관내에서 발생한 유격대 기습사건은 4월 28일 면사무소와 안성리에, 4월 30일 모슬포지서에, 5월 1일 신평리와 영락리 등 모두 5건이다.
- 4월 28일 유격대 8명으로 면사무소 습격, 반동직원 1명 숙청, 1명 부상 연락 불충분으로 인하여 동무 직원(프락치) 1명 희생.
- 4월 28일 안성리 반동 구장 집 습격, 구장에게 중상 입힘.
- 4월 30일 국경(國警)을 지서 보초로 세우고 유격대 15명을 동원 모슬포(摹瑟浦)지서 습격을 시도했으나. 여관 2층에 배치한 특무대(特務隊) 2명이 지서를 향하여 황린탄(黃燐彈)을 투척, 그 폭발음을 신호로 일제 포위 습격하기로 작전했으나 황린탄(黃燐彈) 불발로 인하여 퇴각, 국경國警(군인)까지 동원한 지서 습격 시도는 지휘부 몰래 전개할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 5월 1일 신평리(新坪里)와 영락리(永樂里)에서 각각 반동 1명씩 숙청
이것은 유격대의 도발이고 협상 위반이다. 정부보고서는 이에 대한 지적이 없다.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나와 있는 투쟁일지에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도내 상황을 보면, 제주읍 관내 2개 지역, 조천면 관내 2개 지역, 대정면 관내 5개 지역에서 각각 도발하였다. 왜 정부보고서는 이를 외면하고 유독 ‘오라리방화사건’에만 비중을 두고 비난하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정부보고서 집필진은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와「국제신문」기고문을 묵살한 것이다.
필자도 평화회담이 잘 이루어져서 제주도민의 피해가 적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오라리 상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동네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끼리 죽임을 당하고 여기에 보복을 가한 악순환 현상일 뿐이다. 전쟁터에서 인간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이웃에 살던 친한 사람들끼리 죽임을 당했으니 분노는 배가(倍加)된다. 유격대에게 난자당해 사망한 강공부 여인의 장례를 치루고 나서 홧김에 유격대에 가담한 자의 집 5세대 12채에 방화한 것이 오라리 방화사건의 전모이다. 정부보고서에서 방화사건과 공중 촬영한 사실을 들어 각본에 의한 것인 양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그건 아니다. 아무튼 모두의 비극임에는 틀림이 없다.
⑵ 2011년 4월 21일 22시 제주KBS 1TV에서 ‘제주의 쉰들러, 4.3의인(義人)김익렬 장군’이란 프로가 방영되었다. 공영방송이라면 당연히 형평성을 고려하여 다른 시각도 함께 편성 방송해야 옳다. 필자는 사전에 이 프로그램 담당책임자에게 이런 취지를 고하고 대담에 응할 뜻이 있음을 밝혔으나 묵살 당했다.
㈎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9연대 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이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니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다면 국경(國警)이 산(山)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전후 2회에 걸쳐 군책(軍責-김달삼)과 김 연대장과 면담하여 금반 구국항쟁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을 특히 인민(人民)과 국경(國警)을 이간시키려는 경찰의 모략 등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김 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음(제1차 회담에는 5연대 대대장 오일균(吳一均)씨도 참가 열성적으로 사건 수습에 노력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정부보고서나 김익렬의 기고문과 유고에는 제1차 회담 사실이 완전 누락 되었다. 김익렬 연대장이 제2차 회담 때 비로소 김달삼을 처음 만난 것처럼 묘사한 것이 석연치 않다. 혹시 제1차 회담 때 5연대 대대장 오일균을 데리고 간 때문인가? 구국항쟁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면 단선단정 반대 구국투쟁이라는 유격대 거사 목적에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말인가?
㈏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오일균吳一均은 김달삼과 회담하여 정보교환과 무기 공급, 반동의 거두 박진경朴珍景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 탈출병脫出兵적극 추진 등을 합의했다.
김익렬은 이런 오일균과 박진경 연대장 암살주범 문상길 중위와 형제간 같이 지내던 지휘관으로서 지휘책임이 있다.
더구나 제1차 회담은 미군정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김익렬 연대장 독자적 시도이다. 오일균 대대장의 반역적 행위를 알았거나 몰랐거나 간에 적과 내통하는 부하 대대장을 대동하고 허가나 승인 없이 1차 회담에 임하였다면 직접책임이 있다. 김달삼이가 노린 ‘회담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술책에 이용당했을 수도 있다. 이런 약점 때문에 기고문이나 유고에 제1차 회담을 밝히지 못한 게 아닐까? 김달삼으로서 는 군軍개입 없이 5월 10일 선거일만 무사히 넘기면 단선반대라는 목적이 달성 된다는 계산으로 그 말마따나 ‘회담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의도가 이미 서 있었다.
그리고 김익렬 연대장 유고에는, 4월 3일 보급관 전순기 대위를 서울에 있는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에게 보냈고 3일 후 돌아온 전순기 대위로부터 “상부 명령 없이는 절대로 행동하지 말 것이며〔......〕총사령부의 명령은 미군정이나 군사고문에게 극비로 하라는 지시를 전달 받았다”고 밝혔는데 송호성 장군은 좌도 좋고 우도 좋고, 심지어 인민군도 좋다는 총사령관이었다.
6.25후에 북한 인민군전사여단 단장과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경력이 말해주 듯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확고한 신념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명령을 받은 김익렬 연대장이 김달삼과의 1,2차 회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일 것이 아니라, 오일균, 문상길 그리고 김달삼의 반대편에 서서 엄중 경고 설득하거나 단호했다면 사건은 조기에 수습되었을 것이다.
⑶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카빙탄환 15발을(각각) 공급받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이상의 모든 행적은 그가 전격 교체될 이유로서 충분하다. 인사발령이 큰 잘못이고 마치 조병옥과의 육탄전(사실인지도 의문이지만)의 여파인 듯한 지적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나중에 6.25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우고, 4.3당시에는 평화적 해결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라는데 이의는 없다.
그러나 4.3 진압책임을 진 9연대장으로서 유격대(적)에게 실탄을 제공한 사람이 사후에 공개할 유고를 작성하면서 “박진경 연대장은 민족반역자이다”라고 써서, 비명에 간 후임자를 비판할 자격은 없다고 보며, 그래서 ‘제주도 쉰들러’나 ‘의인’이라는 평가나 그가 쓴 유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기고와 유고 중에는 맞는 내용도 있다. 회담 시작 전 양담배 ‘럭키’를 내놓았다는 점인데, 부하 동료들은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죽을 고생을 하는데, 대장이란 사람은 그토록 배격했던 미제 ‘럭키’를 피우고 있다. 이런 사람이 무슨 구국항쟁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를 따르던 사람들만 가련하다.
그리고 김익렬은 유고문 중, 골수 공산주의자인 김달삼의 사상에 대한 의문 표시, 단순히 일본과의 밀무역에 관련된 자로 보는 무지와 우호적 시각, 박진경 대령 암살범의 자수했다는 허언, 김달삼이 제주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엉뚱한 추측, 김익렬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미군정청이 10만 달러 망명 회유설, 아무 관계없는 오동기 중령을 등장시킨 일(김익렬은 유고에 “나의 후임 14연대장 오동기 중령은〈여순〉반란 발생을 미연에 방지 못하였다는 죄명을 쓰고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하였다”고 썼으나 여순사건 당시 제14연대장은 박승훈 중령이었고, 오동기 소령은 1948년 9월 28일 좌익사상범, 혁명 의용군 주모자로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등은 소설이다. 정부보고서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유고를 재검증하고 사실대로 고치는 게 좋겠다.
마. 조천면 북촌사건 기술(記述)의 비형평성
북촌리 집단총살 사건에 대하여 잘못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무고한 사람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극으로서, 왜 그랬는지 경악하고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다.
북촌사건 발생원인에 대하여 정부보고서 413쪽에(1949)에는 “1월17일에는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라고 하였다. 군인 2명이 전사한 사건이 북촌사건의 직접적 근인(近因)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북촌 마을은 “1947년 8월 13일〔......〕경찰대가 순찰도중 삐라를 붙이는 소년을 뒤쫓아 가면서 발포, 무고한 농민과 10대 소녀 등 3명에게 총상을 입혔다. 이에 흥분한 주민들은〔......〕경찰관 1명을 붙잡아 뭇매를 가한 뒤 2백 명 가량이 인근 함덕지서에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인 사건이 있었고, 4.3발발 무렵에는 좌파계열에서 ‘민주부락’이라고 불렀으며, (5.10선거당시)조천면북촌리에서 오후4시께 투표소가 불탔다. 모든 투표용지가 파손됐다. 이 마을에서는 5.10선거도 보이콧했다” 는 사실에서 보 듯 당시 예의 주시(注視)받던 마을이었다.
서귀포시 서귀동에 거주하는 김덕선(1928년생)씨의 증언에 의하면,
1948년 5월 16일 우도에서 제주로 가던 범선이 풍랑으로 북촌포구에 피항하자 이 마을 출신 유격대 3명이 마을 주민 3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도지서장 양태수(梁泰秀) 경사를 권총으로 사살해 바다에 던져 버리고, 동승했던 진남양(陳南亮) 순경도 때려서 죽였다. 이후 7~8명의 무장유격대가 범선 승객 14명을 속칭 ‘선흘곶’ 위에 있는 연대본부로 납치해 5월 20일 저녁 전원 처단하려는 순간 군 토벌대가 피랍자들을 구사일생으로 구출했다. 이때 생포한 유격대원의 안내로 북촌 마을 안에 있는 굴속에 은신 중이던 이 사건 관련 유격대원 7명을 검거했다.
권총을 휴대한 정황으로 보아 이들을 유격대 지휘관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었고, 북촌 마을은 좌익세가 매우 강한 마을(민주부락)이라는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사건들이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촌사건이 발생한 것이지, 정부보고서 처럼 사건 당일 군인 2명이 사살된 것만으로 북촌사건의 원인을 한정짓는 것은 미흡하다.
한편, 북촌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유격대가 1949년 2월 4일 북촌 마을 동쪽 일주도로변에 매복했다가 제2연대 장병들의 무기 수송차량을 기습했다. 이들은 군인 23명을 모조리 죽이고 함덕지서 부원하(夫元廈) 순경을 죽여 불태웠으며, 운전자 민간인 1명에 중상을 입혔고, 99식 총기 150정을 탈취했다. 전사자 전원의 의복은 완전히 벗겨갔다. 이 사실은 필자가 정부 1차보고서 수정의견으로 제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보고서에 누락되었다.
참고로 이때 전사한 2연대 장병은 중위 박재규(朴載圭), 특무상사 오 철(吳 徹), 한일우(韓一愚), 일등상사 이규하(李圭夏), 이등상사 조고일(趙高鎰), 김광식(金光植), 일등중사 김석환(金石煥), 김사룡(金四龍), 김진조(金進祚), 이순범(李順範), 김동호(金東浩), 김민수(金敏洙), 장은달(張殷達), 박노영(朴魯英), 이등중사 이제하(李濟夏), 김현수(金賢洙), 박병규(朴炳圭), 이등하사 강태근(康泰根), 오병환(吳炳煥), 이홍서(李弘瑞), 민선기(閔璇基), 임상호(林相虎), 이 철(李 徹) 등 23명이다. 1949년 7월 제2연대 장병 일동 명의로 전사 장소에 비석을 건립하였으나 도로확장 공사 중 팽개쳐져 있다가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행히 비석이 없어지기 직전 이를 필사한 내용이 남아 있다.
희생당한 북촌 주민의 한이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전사한 군인들도 본인이나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한이 많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건국을 위해 전사한 군인들의 비석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비극이다.
이처럼 정부보고서는 그 근거 자료를 공정하게 인용하지 않고 유,불리를 따져 편향적으로 취사선택 또는 왜곡하였다. 정부보고서 집필자는 조선 시대 사관(史官)과 같이 엄정 중립적이어야 하며 자료 인용에서도 공평해야 한다. 예를 들어 토벌대가 16개 학교 시설을, 유격대가 27개 학교 시설을 방화 파괴했는데, 이 중에서 토벌대가 파괴한 사실만을 인용하거나 편중해서 기술한다면 되겠는가? 오로지 진실만을 공평하게 기록해야 되는 것이다.
정부보고서는 개인이나 학자, 연구소, 단체에서 내는 연구서가 아니고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내는 정부 보고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는 등 합법적 절차에 의했고, 관보에 게재하였으며, 대법원에서도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한 계엄령 선포(이로 인한 피해는 별도로 논할 문제)에 대하여, 그 후계 정부의 국무총리로서 계엄령에 대해 11쪽에 달하는 시비조 또는 의문조의 내용을 수록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필자는 단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고 건 총리 개인적으로 계엄령은 불법이라고 여겼을지라도 정부보고서 작성책임자라면 전임 정부의 합법적 절차와 관보 게재, 대법원의 판결 결과를 인용하여‘계엄령은 합법적으로 발령되었다’라고 간단히 그리고 분명히 기록해야 마땅하다. 부연한다면‘학자들 간에 이론이 있지만’이란 몇 글자 정도 삽입하면 되는 것이다.
국무총리가 정부보고서 35쪽부터 540쪽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고, 집필진이 일정한 상황을 설정하고 의도적인 글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이런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위원들이 전원 사퇴한 모든 기회 등을 이용하여 집필진의 사견을 보고서에 삽입 수록하였다면, 이는 국무총리를 가탁한 행위로서 도덕적 이상의 역사적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정부보고서 집필진을 포함하여 책임 있는 사람들은 ‘역사 교과서적 성격의 보고서’ (필자는 1차정부보고서 수정의견 제출 때도 이 점을 매우 강조했다)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망각하고,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을 폄훼하였으며 주동자들을 면책 미화하고 당시 정치세력에 영합했다.
성격규명이 유보된 위법 불완전, 편향 왜곡된 보고서라는 지적에 대답해야 하며, 비록 합법적 절차를 거쳤다 하더라도 중요하고도 명백한 하자가 있으므로 조속히 수정되어져야 한다. 안타까운 점은 이미 정부보고서가 나와 있는데 왜 이를 부정하는 것이냐 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보고서를 새로 써야하느냐 라는 항변이다.
여기에 대해 필자는 보고서 작성에는 집필진과 위원들을 공평하게 선정해야 되고 정치색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방적 편향적으로 처리해 놓고 중대하고 명백한 성격누락과 왜곡된 내용을 무조건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태도는 비민주적이고 비지성적이다. 그리고 핵심적 내용이 누락됐거나 잘못되었으면 올바르게 고치는 것이 바른 태도이지 흠 많고, 왜곡되고, 미완의 보고서를 그냥 두고 인정하라는 태도는 약점 감추기, 틀린 것 굳히기와 다름 아니다. 하다못해 국무총리가 성격규명을 후세 사가에게 미루었으니 4.3의 성격만이라도 똑바로 써 놓아야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