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증보판>김영중의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10. 희생자 수
가. 피해자 수
정부보고서는 전체 인명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정부1차보고서 수정 의견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15,000명을 고수하고 있다. 1994년 2월 7일 제주도의회 내에 4.3피해신고실을 개설하면서부터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조사와 신고를 받고 1995년 5월「제주도4.3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낸 후 1997년「2차보고서」, 2000년「3차보고서」를 연이어 발행했고, 2007년 6월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도,내외 및 해외까지 제4차 신고를 접수했다. 제4차 신고자는 2011년 1월 26일 심사하였고, 현재 희생자는 총 14,033명(사망 10,144명, 행방불명 3,519명, 후유장애 156명, 수형자 214명)이며, 이때 수형자가 처음으로 희생자로 결정되었다.
현재 제주도와 4.3유족회 등이 4.3특별법 시행령 개정을통해 추가 신고기간을 운영하고자 노력 중인데 2008년 11월 19일자 제주일보 5면 기사를 보면 “행정당국과 문헌상에 확인된 희생자 가운데 신고를 하지 않은 인원은 현재 590명으로 파악됐다”라는 기사와 2011년 4월 2일 제주일보에 “과거 연좌제 등의 잠재된 피해의식으로 신고를 미루거나 후손이 없어 신고를 못한 피해자 및 유족이 1,5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 예측되고 있어...”라는 기사가 근거가 있다면 이미 결정된 자 중 월북자, 자연사, 허위신고자, 생존자 등 형식적인 심사로 인한 허수(虛數)를 상쇄시키면 희생자 숫자에 대한 필자의 주장이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것임을 확신한다.
1949년 2월 15일 제주도 가톨릭 선교사 오스틴 스위니 신부가 서울 조지 캐롤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사망자 명단은 현재 최고 15,000명에 이르고...”, 1949년 4월 1일자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 1097호 첨부 1’에 의하면 “지난 한 해 동안 14,000명~1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는 토벌대에 의해 살해되었다”라는 것은 인명피해 대부분이 이때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이런 근거를 토대로 15,000명을 고수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3특위 위원이나 집필진마져 3만 명을 고집하고 있다. 심지어 제주도교육청에서 발행한 4.3교육자료「만화로 보는 4.3의 아픔을 딛고 평화를 이야기하다」에는 15,000~65,000명으로 과장하고 있다. 역사 기록은 사실에 근거하여 정확해야 한다. 따라서 정부보고서를 비롯하여 잘못된 자료들은 당장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4.3희생자를 선정함에 있어서 김봉현, 김민주가 스스로 밝힌 3,000명 또는 다른 기록에 있는 1,500~2,000명을 희생자로 인정하는 문제는 남북 대치라는 엄연한 상황 하에서 간단하지 않다. 이는 통일과 동시에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가 되면 6.25당시 남침한 후 전사한 인민군도 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희생자를 심사하면서 3,000명은 고사하고 2,000명이나 정부보고서에서 인정한 유격대 500명 조차 연기처럼 사라졌다.
「정부보고서」에서 1,764명, 「제주백년」에서 3,200여 명이나 된다는 군경 또는 선거관리위원 등 대한민국 건국희생자에 대한 가해자가 없어졌다. 이는 당연히 희생자에서 제외되어야 할 3,000명 또는 2,000명은 분명 형식적 심사로 희생자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주동세력은 분명 존재했는데 지금와서 십 명도 안된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봐도 수긍하기 어렵다.
참고로 제3차 신고까지 총 신고자 14,373명 중 778명은 중복 신고자이고, 나머지 심의 대상자 13,595명 중 31명을 제외한 13,564명을 희생자로 결정했다. 제외자된 31명 중에는 4.3사건과 무관한 사망자들이 다수 포함되었고 4.3주동자로서 희생자가 안된 자는 10명 미만 극소수이다. 그런데 무관자, 주동자가 몇 명이며 누구인지 확인 조차 안된 가운데 제4차 신고자에 대한 심의에서는 469명이 희생자로 추가 결정해 버렸다.
시대의 흐름과 방향은 화해와 상생이다. 그들도 한 시대의 격량에 희생된 자라면 잘못을 언제까지 들춰내기 보다 진일보된 미래지향적인 차원에서 어느 선에서 화해와 상생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사실 인정 및 사전 양해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건국에 적대재적 위치에 있던 사람을 마치 독립투사나 된 것처럼 주장하거나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매도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지켜야 하고 전제되어야 할 사항이 생략됐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쨌튼 희생자를 신고하면서 허위와 계산이 개입했고, 심사 결정함에 있어서 착오와 무리가 있었으니 1차 제주도실무위원과 2차 중앙4.3특위 위원들은 형식적인 심사를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정신에도 위배된다.
그 이유는 희생자로 결정된 자 중에는 분명 도당 간부 등 핵심주동자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 월북자, 자연사한 사람(1987년 90세로 집에서 병사한 자도 희생자로 결정되었음), 일본으로 도피하여 편안히 살다 자연사한 사람, 유격대 핵심세력끼리 살해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더구나 법원마저 심사기록 열람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해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처지에서는 재검증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방법도 사라진 상태이다.
지금처럼 건국세력을 매도하면서 한편에서는 주동자를 희생자로 인정하라면 수용하기 어렵다.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비석을 세운 사람 중에는 4.3을 적극 주동한 자도 있다. 이들에게 의료혜택과 2011년 9월부터 생활보조비가 주어지고 있으며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반(反)대한민국 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동하고 수행한 사람들에게 국민 세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료는 멸실되고 경험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있으며 정확히 알고 있는 생존자도 여러 이유로 증언을 기피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60여 년을 어울려 살다 보니 얽히고 설킨 인연으로 사돈되고, 친구되고, 이웃이 되어 점점 사실을 말하기 어렵기 되었고, 되어 가고 있다. 이미 잊어진 일을 새롭게 거론하는 것 자체가 괴롭고 사원(私怨)만 사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체성 확립과 도민 화합과 상생이라는 현실적 과제 사이에는 난제가 한 둘이 아니다.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 사건이 일어난 이곳에 살고 있는 모두는 새롭고 어려운 숙제 앞에 진심으로 고백해야 한다. 자기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용하거나 위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조급함은 반드시 부작용이 있는 법이다. 더디고 어렵더라도 순리에 따라 상대방을 설득하면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희생자 숫자에 국한된 말이 아니고 사건 자체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나. 무고한 희생자
필자는 희생자 가운데 핵심세력 3,000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억울한 죽음이라고 보고 있다. 즉, 김봉현이 밝힌 핵심세력 3천 명을 제외하더라도 12,000여 명은 무고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다. 토벌의 불가피성과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에게 매우 엄숙하고, 경건하며,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억울한 희생자나 그 유족입장에서 보면 원통함과 고난 및 피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망에 이르는 참혹한 과정, 사망일자도 모르고 시체 마져 찾지 못한 유족들의 아픔, 개개인이 그동안 살아온 삶의 굴절현상을 글로 쓰면 소설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이는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뿐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서도 비록 숫자가 적을 뿐이지 분명 존재한다. 한 맺힌 삶을 살아온 유족에게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원혼들을 위령하며, 국가가 이들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은 물론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보상해 줘야 마땅하다는데 동의한다.
이와 관련 남시욱씨가「한국진보세력연구」를 통해 “사살 당한 남로당원과 빨치산 그리고 보도연맹 가족들은 우선 심정적으로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동정함으로써 본능적으로 대한민국에 반감과 한을 가지는 경향이 커졌다. 이들에게 굴레가 된 연좌제는 잠재적인 좌파 동조세력을 양산하였다” 고 언급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제주4.3사건이 6.25전쟁에 버금가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해서 사건의 성격이 폭동과 반란에서 항쟁으로 변하는 것은 아나다. 또한, 4.3성격이 폭동, 반란이라고 해서 무고한 희생자 12,000여 명의 명예도 결코 욕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재향군인회안보문제연구소 김광동씨도 향군안보 발제문을 통해 “군경의 과잉진압행위와 그에 따른 무고한 대량학살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남로당의 4.3무장반란 사건의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무고했던 많은 희생을 결코 부정하거나 기리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라고 부연해주고 있다.
어쨌튼 제주4.3사건은 6.25남침전쟁의 도화선에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1950년 북한군의 6.25기습남침으로 불과 사흘 후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앗기고, 8월 2일~9월 15일에는 포항-영천-대구-마산을 연결하는 선까지 후퇴,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하여 사수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6월 27일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전쟁 참전결의안이 통과되고 16개국 군으로 편성된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다.(당시 미해공군은 6월 27일 참전, 이날 미 공군기가 소련제 야크기 1대 격추, 지상군은 일본주둔 미 제24단 선발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접전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후방에 준동하는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10월 1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가 38선을 돌파(이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로 정함)했고,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7연대가 압록강변 초산까지, 11월 1일 미 제24사단 21연대가 평북 선천 북방 22km 정거동(신의주까지 남은 거리 33km)까지, 11월 28일 미 제7사단 17연대가 함남 혜산진까지, 11월 30일 수도사단이 청진을 넘어 부령과 부거까지 북진,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10월 6일 중공이 참전을 결정한 후 소련과 협상, 재협상 과정을 거쳐 10월 13일 이를 확정하고, 10월 19일 압록강 3개 지점으로 중공군이 도하(渡河)하기 시작, 인해전술 공세를 전개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 당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1월 15일에는 삼척-제천-안성-평택을 연결하는 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국군과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재반격에 나선 결과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현재의 휴전선을 경계로 휴전에 합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민간인들 간에 작은 전쟁이 마을 곳곳에서 벌어졌다. 인민군 치하에서는 우익인사가 당하고, 상황이 역전되면 부역자들이 보복당하는 비극이 속출했다. 박찬승의「마을로 간 한국전쟁」에도 전쟁시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사례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제주4.3사건도 “낮에는 토벌대가 무섭고, 밤에는 산사람이 무섭다”했으니 남로당의 폭력성으로 보아 선량한 도민들이 살아 남기 위해 얼마나 전전긍긍했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산통일을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려는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기 위해 이쪽저쪽에 협조하거나 지원할 수 밖에 없었고, 4.3행동 주체인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들이 급증했다. 명부가 노출되면서 마을간, 씨족간, 개인간의 갈등은 더 심화되었고, 남로당의 협박과 조장으로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원한을 품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밀고, 중상모략, 보복 등도 다반사였다. 때문에 이런 원인으로 인한 피해도 고찰해 봐야 한다.
제주4.3사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진압임무를 수행한 군경토벌대측 과잉진압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피해 당사자나 유족은 심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당시 혼란상을 경험하지 못한 외지인이거나 지금처럼 편향적인 현세대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책임을 토벌대에게만 전가하지 못한 요인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