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증보판>김영중의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9. 제주4.3사건의 시기(始期)와 종기(終期)
가. 4.3사건의 시기(始期)
4.3특별법이나 정부보고서는 4.3사건의 출발 시점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필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해방 후부터 1947년 3월 1일까지 역사적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4.3은 단순히 3.1발포사건이나 고문치사 사건으로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주4.3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미ㆍ소 군인들이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진주하면서 태동하였고,(“미제 침략자가 해방된 우리나라의 남반부를 감점하는 첫 날부터 우리 인민의 반미구국투쟁사는 시작되었으며..”) 1945년 12월 28일 미ㆍ영ㆍ소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모스크바 발표내용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좌우익이 찬탁, 반탁으로 대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미소양군의 남북한 진주는
북한에 김일성 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전략에 의해 좌익들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급선회하면서 조직적인 선전선동으로 세력을 확대한 반면, 우익은 신탁통치 절대반대 입장을 시종일관하면서 사활을 건 극한대립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각기 자기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동조자를 규합하고 반대자를 제거해야만 하는 극한적 '체제선택' 상황에 있었다.
※ 모스크바 3상회의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 사실이 1945년 12월 28일 국내에 알려지자 좌,우 공히 반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파는 1946년 1월 2일부터 찬탁으로 돌변했습니다. 신탁통치 소식이 국내에 전파되자 박헌영은 즉각 반대하였고 12월 31일에는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위원장 김삼룡)가 반탁 전단을 시내에 살포하기도 했다. 이에 놀란 소련 치스차코프 대장과 레베데프 소장은 1946년 해가바뀌자 마자 박헌영을 평양으로 불러 소련정책이니 찬탁에 따르라고 명령식 설득하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는 찬탁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나, 교통 통신 사정이 열악했던 제주도에서는 “1946년 1월 15일에 각 읍ㆍ면에서 신탁통치반대군중대회를 가졌는데...(중략), 이때까지만 해도 우익정당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지부나 한국독립당 제주도지부가 결성되기 전이었다.
제주도의 유일한 정치집단은 조선공산당과 인민위원회이기 때문에 신탁통치반대 군중대회를 비롯한 신탁통치반대 운동을 전개한 것도 조선공산당과 인민위원회였고, 이를 신탁통치 찬성으로 정책노선을 급선회한 것도 이들이었다.
“신탁통치안안에 제주도민은 2만이라는 인파가 모여 '신탁통치 절대반대'라는 슬로건으로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중략), 이때 중앙당에서는 벌써 신탁통치안의 진보성을 인정하여 ‘지지'로 슬로건이 바뀌었는데, 도당에서는 전달이 늦어져 신탁통치반대 시위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1월 15일까지 반탁을 부르짖던 제주도내 좌파는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조선인민당 회의실에서 개최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전국 각도 인민위원대표자회의‘에서 모스크바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결의안을 체택함에 따라 뒤늦게 이 사실을 전달받고 1947년 1월 16일 이후부터 아무런 해명없이 슬그머니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하게 된것이다.
이후 좌,우익간 첨예한 갈등이 시작되었고, 4.3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좌파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그 중에서도 홍만기씨는 “지금 우리는 대강 4.3의 출발점을 47년 3.1기념식때부터 보고 있는데, 46년 찬탁, 반탁에서부터 항쟁의 시작을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4.3이라는 것은 총을 갖고 대항했기에 4.3이지, 싸움은 2년 전부터였다는 증언은 항쟁의 시작을 46년 찬,반탁대회부터 보는 견해겠지요”
그 후 1947년 2월 10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1천 수백 명(미군정 보고서는 300~400명)의 제주 농중, 오현중, 제주중 등의 중학생들이 '양과자는 조선을 좀먹는 미제침략자들의 독약이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반미와 양과자 반대 시위를 했으며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풀밭에 방화하는 등 반미군정활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양과자 반대 시위도 제주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볼 때 중앙당의 지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14일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와 한국독립방안 준비에 관한 제2차 유엔총회의 결의안'을 체택하여 남북한 동시 인구비레에 의한 보통선거와 비밀투표 원칙에 의한 총선의 실시하기로 하고, 또 이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했다.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위원단은 22일 소련의 거부로 38선 이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2월 16일 유엔소총회를 열어 선거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에 관한 권한을 동 위원단에게 부여했다. 따라서 위원단은 주한미육군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국제,국내정세가 남한에 있는 좌익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남로당은 1948년 2월 7일 소위 2.7구국투쟁 지령을 통해 경찰관서 습격과 통신시설 파괴, 총파업선언, 반동분자 처단 등 투쟁의 강도를 점점 높여 나갔다. 2월 7일부터 2월 20일까지 전국적으로 파업 30건, 맹휴 25건, 충돌 55건, 시위 103건, 봉화 204건, 사망 39명, 부상 133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8,479명이 검거될 정도로 극렬했으며 투쟁 슬로건 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라는 구호도 있었다.
제주도내의 2.7투쟁은 '시위 95건, 불법집회 72건, 선동 포스터 첨부 및 삐라 살포 375건, 협박 공갈 27건 이외에도 1948년 2월 9일 안덕지서 최창정(崔昌貞)경사와 오두황(吳斗煌)순경이 납치된 사건이 있다. 그들은 안덕면 사계리 속칭 '행기물'에서 생매장 당하기 직전에 이화영(李花英)경위가 인솔하는 제주경찰학교 졸업을 앞둔 40명이 훈련 차 도일주하던 도중에 급보를 받고 현장에 출동해 구출한 사건이 있었다. 참고로 최창정 경사 부인도 남편 구명차 나갔다가 그들에게 붙잡혔다. 그런데 끌고 오면 같이 파묻으려고(했지만)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구출되었다.
또한, 2월 10일 고산리 청년 100여 명이 시위 후 고산지서 앞에 몰려갔다. 이에 경찰은 해산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자 발포해 주민 1명이 총상을 입은 사도 있었다.
그밖에 정부보고서 148쪽에는 미 24군단 정부보고서를 소개하고 있다. “제주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17건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했다. 유형별로 보면 6개의 경찰지서 습격, 삐라살포, 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폭도들의 시위 등이었다. 주목할 점은 많은 폭도들이 소련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보고된 사망자는 없으나 경찰관 2명이 심하게 구타 당했다. 경찰은 3일 동안 약 290명을 체포했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경찰관 2명이 심하게 구타 당했다”는 기록은 정황상 앞에서 언급한 최창경 경사와 오두황 순경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2ㆍ7구국투쟁에서 단선을 저지하지 못한 좌익세력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2.7구국투쟁의 연속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지휘 하에 필사적인 5.10선거 반대폭력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설상가상 남로당제주도위원회는 조직이 완전 노출되어 “앉아서 죽느냐” 아니면 “일어나 싸우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될 경우 그들의 입지는 물론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막다른 처지에 몰리자, 5.10선거는 통일을 가로 막는다는 논리를 펼쳐 대중선전의 좋은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한편 그들은 공산통일로 간다는 말을 일언반구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주에 방점을 둔 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도민들을 현혹했다.
남로당은 광복이후 건국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폭력투쟁을 전개했다. 발생한 순서대로 간추려 보면 1946년 1월 찬탁투쟁→9월 총파업투쟁→10월 대구10.1투쟁→1947년 3월 3.1절기념투쟁→제주3.10파업투쟁→7.27투쟁→8.15투쟁→1948년 2월 2.7구국투쟁→4월 제주4.3투쟁→5월 5.10선거저지투쟁→8월 8.25북한정권창건지원투쟁→1950년 6월 6.25남침전쟁 등이 있는데 이렇게 이어지는 일련의 투쟁들은 소련과 북한 공산주의를 선택한 세력(남로당)이 주도한 투쟁이었다.
이 모든 투쟁은 단일한 목표를 갖는 동일한 세력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그것은 대한민국에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고자 펼쳐진 무장투쟁이다. 이처럼 일련의 투쟁은 하나하나가 단절되고 돌출한 사건이 아니라, 일관된 공산화투쟁 목적 하에 동일한 세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행된 것이니, 제주4.3은 이 과정 중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다.
2011년 6월 29일 제주도가 주최한 '제주4.3사건 교과서 수록방안 공청회' 때 토론자로 나온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제기한 “왜, 공산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양민들이 함께 일어났는가의 문제이다” 라고 동일세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나 일반인도 있었으나, 이는 당시 제주도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착각이고, 오판이다.
예컨대 제주도 2개 선거구가 투표수 미달로 무효가 된 5.10선거를 두고 양민들도 많이 참석했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무식의 소치일 뿐이다. 투표를 거부한 사람들 중에는 남로당원 처럼 자진 불참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로부터 테러 위협이 무서워 살아 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같이 산으로 올라간 양민들도 많았다는 것은 4.3경험세대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4.3을 주동하거나 적극 가담한 자는 분명 3.1사건 당시 1천~3천명의 남로당원이거나 그 전위행동대로서 활약한 민민전 및 민청 대의원 2,250명, 그리고 1948년 4.3당시 5천~6천명에 달하는 남로당원과 산하 조직원 일색이었다. 양민이 가담했다면 그것은 협박과 강요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이고, 감언이설과 선전선동에 부화뇌동한 순박한 사람 일부 뿐이다.
☞ →7.27투쟁
남로당은 미소공위 진전에 대비해 가장 강력하며, 인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1946년 11월, 3당 합당(공산당+인민당+신민당=남로당) 직후부터(제주도의 경우 1947년 초부터) 당원 1백만 돌파를 목적으로 한 5배가(나중에는 10배가)운동 전개를 지령했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위가 재개됨에 따라 남로당은 미소공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권 형태는 인위(인민위원회)로, 민주 인사 석방, 박헌영 체포령 취소” 등을 내용으로 한 진정서 제출을 지령해 6월 27일까지 약 20일 동안 전국에서 67,578통을 작성시켜 미소공위에 접수시켰다.
또한,남로당은 7월 27일을 기하여 전국 각지에서 '미소공위재개경축 및 임시정부수립촉진인민대회'를 개최하라는 지령을 내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인민대회를 개최하고 결정서를 체택하여 미소공위에 보냈다. 또한 북조선노동당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이름으로 '해방통신‘을 통하여 7.27투쟁을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2차 미소공위는 10월 18일 62차 회담을 끝으로 성과없이 끝났으며, 10월 21일 소련측 대표가 서울을 떠나면서 그 막을 내렸다.
☞ →8.15투쟁
남로당은 1947년 7월 27일 '미소공위재개경축 및 임시정부수립촉진인민대회' 즉, 7.27투쟁에 이어, 8.15해방 2주년을 앞두고 대규모 '8.15해방2주년기념 시민대회' 개최를 결정하고, 대회장에 허 헌, 박헌영, 김원봉, 김창준을 선정했다. 근민당, 인민공화당, 청우당과 연계해 민전, 전평, 전농, 여성동맹, 민애청 등 당 외곽 단체를 총 동원, 3.1기념투쟁과 같은 군중투쟁 계획을 세웠다.
미군정 당국이 행정명령 제5호로 옥내행사만 허용함에 따라 남로당은 8월 7일 기관지 '로력인민'을 통해 “박헌영 체포령을 취소하라, 지방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라”는 등의 60가지 '8.15기념구호'를 발표하고, 그 실천을 위해 선동하는 등 투쟁을 강행했지만, 주동자를 사전 검거해 당일 예상됐던 큰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7년 5월 16일 미군정청 행정명령 제2호에 의거 남조선노동당 전위조직인 조선민주청년동맹을 해체하고, 본부를 폐쇄하면서 동맹원들을 검거하는 등 좌익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나갔다. 좌익계는 이때부터 폭력투쟁일변도로 투쟁방향을 전환하고, 8.15해방 기념일을 전후하여 남한 각도를 중심으로 미군부대 공격 등 총 535건(1947년 6월 29일부터 1948년 1월 2일까지 집계)의 소요사건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 →2.7구국투쟁
조선공산당 및 그 후의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남한에 공산주의 정권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은 국내외 정세 추이에 따라 세 단계로 추진되었다.
나. 무장반격전 결정시기(時機)
무장반격전은 어마어마한 위험부담이 따른다.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므로 수 많은 토론과 장기간의 준비를 필요로 했다. 앞에서 자세히 설명된 부분은 간추리면서 복잡한 과정을 살펴본다.
(1) 남로당은 1947년 3.1투쟁과 3.10총파업 투쟁 직후 무장투쟁을 각오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전남도당으로부터 각 면당(面黨) 직속 자위대(自衛隊)를 조직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나 그 실적은 미미했다.
9연대에 프락치 4명을 파견했으며, 5월에 내도한 중앙 올구 이명장 동무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고 9연대 동원을 열망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변이 신통하지 않자 그래도 9연대 활용을 포기할 수 없어서 도당부(島黨部) 독자적으로 선(線)을 확보하는 등 군대 동원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진했다.
(2) 1947년 3.1사건과 3.10총파업 투쟁 후 군정 당국은 대대적인 검거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검거를 피할 목적으로 도피한 형태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일본이나 육지부 또는 월북한 경우인데, 이는 그곳에 연고가 있거나 탈출에 필요한 정보나 돈, 그곳에서 생존이나 활동능력이 있어야 하고, 조직이탈이나 도피 목적을 가진 자에 한했기 때문에 아무나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였다.
다른 하나는 (한라산에)입산하는 것이었다. 후자인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인원은 점점 증가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경찰에 맞설 준비를 하게 되었고, 인원을 통제하거나 보급지원 문제 해결을 위한 조직 및 책임자 선정이 필요했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1947년 8월 남로당 제주도당이 인민해방군(사령관 김달삼)을 창설하고 무장 반격전 준비에 착수했다.
(3) 제주4.3연구소에서 간행한「이제사 말햄수다」에 의하면 “활동이 강했던 지역의 경우는 벌써 1947년 9월이 되면서 입산하기 시작합니다. 스물 안쪽의 젊은이들은 동트기 전에 산에 올라갔다가 땅거미가 지고나면 마을로 내려왔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도당(島黨)이 47년 9월~10월에 선흘 쪽으로 옮기고, 이에 따라 각 조직도 무대를 옮겨가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신문사, 병원, 약국 등도 다 올라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홍만기씨 증언 : 그러나 저는 47년 10월에 무장투쟁이 결정되어 하나씩 하나씩 준비해 가느라고 병원, 인쇄소 등이 올라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계속 오르지 않으면 안되겠끔 하는 상황의 악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민해씨 증언 : 당시 경찰에 근무했던 분의 얘기가 47년 말에 벌써 올라간 젊은이들이 훈련했던 흔적들 즉, '아지트'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는 무장투쟁 준비를 체계적으로 계획적으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이것은 싸워야 하는 문제라는 점은 공동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이고, 싸우는 시기 선택 문제로 압축되며, 일단 준비는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두 사람의 증언에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1947년 10월에 이르러 도당본부와 인쇄소, 병원, 약국 등이 입산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준비가 완료되고 본격적 훈련단계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4) 1948년 6월 20일 미 제24군단 정보참모부 헝거(RㆍHunger) 상사가 남로당원들을 조사해서 얻은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인민해방군은 1948년 1월 이전 한림지역의 오름 중턱에 설치된 일본군 군사시설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고, 1948년 2월 초에 300여 명이 애월면 새별오름(추정)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는 경찰보고가 있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와 식량, 민간인 옷이 훈련 장소에서 발견되었고, 이때부터 폭도들은 전도에 걸쳐 비협조자에 대해 살인, 방화, 납치 등 적극적 활동을 하였다” (참고로 무장대와 경찰의 최초의 충돌은 1948년 3월 20일 새별오름에서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1948년 1월 이전부터 무장 반격전을 위한 훈련을 강화하면서 섬의 모든 지역에서 비협력자들을 죽이고, 주택을 불태웠으며, 포로들을 데려가고, 시골마을과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제주민중항쟁1」자료에 의하면 이보다 앞서 1947년 7월부터 좌익계에서는 우익진영 주요 인사들에 공갈, 협박, 테러를 자행하고, 도지사, 국장급 암살에 현상금 1만원, 광복청년회 김인선 단장 암살에는 1만 5천원의 현상금을 각각 걸었다고 한다.
(5) 당시 서귀포경찰서에 근무했던 이동규(李東圭)씨에 의하면,
「관내에 용의자로 지목되는 부재자들을 암암리에 내사하고 보니 역시 몇 놈이 집을 나간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으므로 그 중 혐의가 가장 짙은 두 놈의 집을 수색하기로 했다. 때는 1948년 1월 10일 경 소재지는 강정리 Y모씨 집이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잡히는 것이 없었는데...(중략), 소 마굿간 천장 포도나무 위에 둥그스런 양철봉통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을 꺼내어 보니 짤막짤막한 엷은 종이에 등사된 한글체 인쇄물인데 통 의미가 통하지 않은 것이었다...(중략), 암호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중략), 이것을 연구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맞추어 가며 연 3일간을 주야로 몰두하다보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신이 머리에 통함인지 제법 말이 형성되었다...(중략)
「넘즌내둔키캤즈디놈롱부측이 자치프좀니마...(중략), 로랑손수든 착늠 아패제래시가니 쥐가져 시창간 낙조모 라즘놔낱지 랑난수 닌늡 괴즤믈 오칩가디 천즨 써침젒지 캄억가니 사만라 ... 」
이런식으로 내려가는 암호를 해석하고 보니,
“도당본부는 작금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로 다음과 같이 당간부 긴급회의를 소집하니 전원 빠짐없이 참석하기 바란다. 참석범위:도당지도부 간부, 읍면책, 읍면 조직책, 일시:1월 15일 오후 5시, 장소:남로당 임시본부 동수동(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 동수동), 연락방법:당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조천면 신촌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고, 그 부근 소나무 밑에 서있는 청년의 안내를 받고 찾아올 것, 그 청년은 학생 모자를 쓰고 왼손에 하얀 붕대를 감고있다...(중략)”
나는 서장이 상청(上廳) 허가를 받으려고 전화하려는 것을 만류시켰다. 경찰 내부에도 프락치가 숨어들어 경비전화를 도청할 때니까...(중략), 서장을 수행 경찰청에 직접 가서 부청장에게 보고했다...(중략), 남로당 도본부는 동수동에 있었는데, 그날밤 거기에는 남로당 중요 인물들이 다 모여지는 날이었다. 불과 10호 미만의 작은 부락 동수동을 3,4방면으로 경찰이 포위했더라면 여기에 모인 남로당 주요 인물들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중략), 경찰 지휘자가 동수동을 내버리고 엉뚱하게 신촌 본부락을 뒤져서 겨우 남로당 연락원 1명(K모씨)을 잡아 온 것이었다.
그날 밤 동원된 경찰 지휘자가 과연 동수동 위치를 실제로 몰랐을까? 그 사람 자체가 경찰에 숨어들어 온 남로당 프락치가 아니였는지 의심할 여지도 없지 않았지만, 나의 낮은 지위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거론 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동원된 경찰이 동수동을 놓치는 바람에 여기에 모여진 남로당 중진들은 모두 마음 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소위 제주도를 해방시킨다는 구실로 한라산 무장대로 하여금 전도에 무자비한 무력투쟁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지 않은가?」
라고 쓰여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1948년 1월 13일 께 중문면 강정리 당세포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세포는 경찰의 취조과정에서 자신과 선이 닿았던 동당부 조직부 연락책의 이름을 대었다. 그 무렵 당조직의 핵심부서인 조직부 아지트는 조천면에 있었다. 1월 15일 새벽 께 경찰은 트럭 2대분의 기동대원들을 동원, 조천면 신촌리에서 조직부 연락책을 검거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과 날짜가 일치한다.
필자는 처음 이 신촌리 동수동 회의를 무장반격전을 확정한 회의로 보았다. 암호풀이 내용, 회의 개최 장소인 동수동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는 이삼룡의 증언, 참석자 등이 일치했기 때문에 이미 발행한 책에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여러 가지 증언과 자료를 종합해 보면 2월 대책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정설인 듯하다. 무장반격전이라는 중차대한 주제가 한 번에 일도양단(一刀兩斷)식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므로 동수동 회의도 많은 회의 중 하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6) 역시 제주4.3연구소에서 간행한「이제사 말햄수다」에 의하면,
“소위 '신촌회의'라고 하는 '2월회의‘는 48년 2월 중에 아마 한 보름 동안 구좌면과 조천면을 오가면서(애월면에서도 논의했다는 증언도 있음) 이루워졌던 중요 간부회의입니다...(중략), 최종 회의는 신촌에서 열렸습니다. 신촌에서는 연 3일 동안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무장투쟁이 결정되어 군사부를 중심으로 조직개편이 내용적으로 이루워지고, 실질적인 봉기거사 준비에 들어가게 됩니다...(중략), 마지막 회의를 3일 동안 밤낮으로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항쟁파'와 '항쟁반대파'로 나누어 지는데 항쟁 반대파에 섰던 사람은 조몽구, 안세훈, 김류환 등의 40대 층 지도부들이고, 김용관, 김달삼, 문도배, 송필순, 김양근 등은 항쟁파에 섰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이 보통 '신촌회의'라고 부르는 이 대책회의를 여기서는 '2월회의‘라고 부르고 있으며, 무장반격전을 최종 확정한 회의로 보고 있다. 신촌회의에서 무장 반격전을 최종 결정한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2월 중에 보름 동안 구좌면과 조천면을 전전하면서 회의를 계속했고, 최종적으로 신촌에서 3일간 주야로 격론 끝에 결정되었으며, 그 직후인 2월 25일, 도당이 전투태세로 개편(구국투쟁위원회)된 점으로 보아 2월 20일 전후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7) 4.3주동자로서 일본으로 도피한 이삼룡은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즘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중략),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중략),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중략), 강경파는 나(이삼룡)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올구)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중략),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것 아닌가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 보면 2월 그즘에서 3월 초보다는 일찍 결정되었으며, 3월 6일 조천지서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 이전에 결정된 것이 확실하다.
다. 4월 3일 거사일 결정 시기
(1) 2월 25일 조천면 조천읍 선흘리에서 남로당제주도당 핵심 14명이 참석하여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한 조직도(별표 4 조직도 참조)를 보면 군사부에 4.3지대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때(2월 25일) 4월 3일을 거사일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추론이 가능하다.
홍만기씨의
(2)「한라산은 알고 있다」17쪽에는 “3월 25일까지를 도상임(島常任)(특히 투위(鬪委)=멤버)으로써 군위(軍委)를 조직...(중략), 예정 기간을 넘어 3월 28일 비로소 재차 회합을 가져 기간(其間)의 준비 사업에 관한 각자의 보고를 종합 검토한 결과 4월 3일 오전 2시~4시를 기하여 별항의 전술 하에 무장 반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음”이라고 나아 있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해 보면 3월 25일까지 모든 준비를 완료하려던 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정 기간을 넘기게 되자 3월 28일 재차 소집한 회합에서 모든 준비상황을 총정검하고 4월 3일 오전 2시~4시를 기해 거사키로 결정했다는 것이 된다.
라. 4.3사건의 종기(終期)
4.3특별법과 정부보고서에는 4.3사건이 끝난 종기(終期)를 한라산이 개방된 1954년 9월 21일로 정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재선거가 실시된 1949년 5월 10일, 또는 6.25 휴전일인 1953년 7월 27일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한라산이 개방된 후에도 유격대의 습격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므로 1957년 4월 2일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 토굴에서 마지막 공비인 오원권을 생포하고 그가 소지한 칼빈총 1정과 실탄 14발을 압수한 날로 정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1948년 4월 3일에서 기산(起算)하면 하루도 틀리지 않은 만 9년이 된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게시물 삭제요청방법
Copyright(c) www.nongak.net
tapng97@hanmail.net
연락처 : 010-4696-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