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증보판>김영중의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8. 단선단정(單選單政)반대 통일투쟁의 허구
해방 후 남북 분단을 방지하고 통일 국가를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과 이승만이 추진하는 단선단정을 반대한 통일 항쟁이 바로 4.3이라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수립되었으며, 북한 이보다 25일 뒤인 9월 9일 수립되었다는 점을 들어 남한이 먼저 단정을 수립했기 때문에 북한이 단정을 수립할 수 밖에 없었다고 강변한다. 이런 논리로 남북 분단 책임이 미국과 남한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리다라고 하는 것도 억지 주장이고 편향된 시각이며 일부만 아는 것이다.
가. 소련의 동향
'남북분단의 상징인 38선 확정만 하더라도 미국의 일방적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소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남한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수차 38선을 경계로 단절된 남북한 간의 교통, 통신의 회복, 남북한 주민 간의 자유왕래와 자유로운 상거래 등을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게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즉, 남북 분단의 책임은 군사분계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킨 소련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나. 북한의 인적 청산과 소련의 계산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하여 여기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인자들을 일소하는 인적 청산 작업, 즉 숙청을 단행했다.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주민들은 처형, 추방, 유형, 투옥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전향하였고 나머지는 월남하게 되는데 1946년 1월 15일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을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소련측 표현으로는 보호적 구금)을 마지막으로 북한 내 비공산주의 세력은 일소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북한의 숙청작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서 모스크바협정(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모든 단체나 사람을 숙청하고, 미소공위에서 반탁입장을 취했던 정당, 사회단체 사람들을 일체 참여하지 못하도록, 즉 찬탁세력인 좌파만을 참여시키려는 무리한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소련군정과 북한은 남한에서 5.10선거가 무사히 종료되자 1948년 5월 중순 평양에서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들고 '남조선 5.10선거무효투쟁'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왜 스탈린 사진을 들고 궐기대회를 했을까? 그 의도와 이면을 알 필요가 있다.
이보다 앞서 노련한 스탈린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얄타에서 열린 미, 영, 소 수뇌회담에서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참전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면서 사할린 남쪽과 치시마 열도를 얻고, 외몽골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존속시키며, 다렌항의 국제화, 뤼순항의 조차권 회복, 중국과 만주철도 공동운영권 등 푸짐한 선물을 챙겼다. 이처럼 소련은 종전 후 동북아 관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1945년 6월 29일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장 주코프와 부국장 에브게니 자브로딘이 작성한「코리아 : 짧은 보고서」에서 “코리아의 독립은 장차 코리아가 어느 다른 나라가 소련에 대한 공격의 발판이 되지 않을 만큼 효과적이어야 한다...(중략), 그리고 동방에서 소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는 소련과 코리아 사이에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점이 앞으로 코리아에 정부를 세우는 데 반영돼야 한다”고 코리아에 친소정권 수립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보고서 내용이 소련의 솔직한 계산이었다.
다. 친소파 전진 배치
(1)「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이하 평양의 소련군정)의에 의하면 “소련은 대일전 개시 한 달여 전인 1945년 7월 6일 소련군 극동총사령부 정찰부대장 치브린 소장과 제2극동전선 참모부 정찰부대장 안쿠지노프 대좌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소련군 극동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재가를 받아,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있는 소련군 제88정찰여단 대대장 김일성 대위를 비롯한 조선인 출신 빨치산 88명과 소련국적 조선인 15명 중 47명은 북조선 시,도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으로, 15명은 통역관으로, 37명은 지방 자위대와 기타 기관에 이용하라”고 지령하였다. 일찍부터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2) 1945년 9월 초순에 스탈린은 비밀리에 김일성을 모스크바 크렘린궁으로 불러 4시간 가량 대좌하고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낙점한 후 평양으로 보냈고, 극동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 제1극동전선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제1극동전선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 제25군사령부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 제25군사령부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대좌 등 소위 북한정권 창출 5인방이 스탈린 의도를 충실히 실행했다.
라. 스탈린의 북한 '민주기지' 정책
(1) 스탈린의 비밀 지령문
(가)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스탈린 지령날짜는 20일과 21일로 혼용되고 있지만, 20일은 스탈린이 지령한 날이고, 21일은 이 비밀암호 전문을 접수한 날임) '최고기밀'로 분류된 지령문 “북조선에서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지령하여 '소련은 최소한 점령지에서만이라도 소련의 국가 이익을 지킬 인물로 구성된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즉 소련은 북한 점령 초기부터 북한만이라도 소련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는 정부를 수립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 참고로「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이인호 외 2인 저, 85~86쪽)에 의하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레닌의 '연속2단계혁명론'에 의거,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제1단계로 혁명역량이 열악한 경우 대중을 널리 규합할 수 없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대로 내세우는 것을 피하고, 파시즘에 대하여 민주주의를 옹호하려는 진보적 부르조아 계층까지 포함한 계층을 혁명의 주체역량으로 설정하여 먼저 지배체제를 타도한다. 즉 주(主)타도 대상을 제외한 대부분을 동맹세력으로 포섭하여 혁명을 한 다음, 제2단계로 부(副)타도 대상(전술상 일시적 동맹세력으로 포섭한 진보적 부르조아 세력)을 제거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한다'라고 했다.
⟶ 소련의 위성국화 전략
소련은 1945년 4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유고슬로비아 사절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제 한 영토를 점령한 사람은 누구나 그곳에 자신의 체제를 부과할 수 있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군대가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자신의 체제를 부과한다. 다르게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소련군이 점령한 국가를 위성국화하려는 본심을 솔직히 드러낸 말로써 여기에 북한이 예외일 수 없다. 당시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동구 국가들의 실정을 보면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소련의 굴레에 벗어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나) 1946년 7월 하순 스탈린은 김일성(박헌영과 함께)을 재차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조선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에 실현토록 투쟁하라”고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비롯한 소위 민주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 1945년 10월 평양주둔 소련군정에 급송했으며, 소련군정은 1947년 말부터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정하고...(중략), 동유럽 위성국들을 창설할 때 작성한 헌법을 참고해 헌법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 초안을 소련 외무성과 소련 공산당에 보고하고,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가 세부적으로 검토한 뒤 다시 평양의 소련군정에 지령해 헌법작성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그리고 내각구성 제1,2차남북연석회의 등 모든 문제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고, 이를 검토, 승인, 조종하여 김일성 이름으로 추진하게 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헌법제정이나 초대 내각구성에 있어서 미국정부나 미군정이 개입한 사실이 전혀 없다.
북한이 소련에 완전 종속되었다는 예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가 끝나고 김구 선생이 “내가 평양(平壤)으로 떠나는 날 김일성(金日成)氏다려(더러) “오늘 조 선생(曹 先生=조만식)을 다리고(데리고) 가고 싶으니 갓히(같이) 가게 해 주구려”했더니 김일성씨는 “아! 제 마음이야 얼마든지 갓치(같이) 가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마는 어듸(어디) 제가 무슨 권한이 있어요?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됩니다”하였다. 나는 “그대들의 권한이 그뿐인가? 그래서야 어듸(어디) 자주정권인가?”하며 농담하였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다) 특히 1948년 7월 31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명단을 소련군정 레베데프 장군에게 제출했다. 소련군정의 세밀한 조사를 거쳐 극동군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냈으며, 모스크바로부터 내각 구성에 남조선 대표를 늘리라는 지령을 받고 이를 수정하여 다시 승인을 받은 후 확정하였다.(스티코프 비망록에도 '소군정은 각 성(省)의 간부 인선까지 개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외형상으로 상(相)이 해당 부처를 대표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소련파(소련의 명령으로 입북한 소련 거주 고려인) 부상(副相)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이중구조의 내각이 편성되었다. 이는 소련이 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내각을 감시하고 지휘하겠다는 '위성국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이며, 실제로 중요 내각 부상에 소련파 8명을 배치했다. 이상과 같은 자료들은 남북분단의 책임을 소련과 김일성에게 먼저 물을 수 있는 명백한 증거라 할 것이다.
(라) 이외에 1945년 9월 10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사령부 정치지도원 그로차르 중좌가 각 지역 위수사령부에 지령한 '독립조선의 인민정부 수립요강' 6개항을 하달했다.
(마) 1945년 9월 14일 소련 점령군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치코의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에 '소련군이 노동자 농민정권수립을 원조하고 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2) 슈킨(쉬킨) 보고서
소련군의 군사위원회 위원, 소련의 서열 3위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 또는 총정치사령관으로 불리는 이오시프 바실리예비치 슈킨(쉬킨) 대장의 1945년 12월 25일자 '북조선의 정세에 관한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몰로토프에게 제출한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1945년 9월 21일자(발령일은 20일자) 최고사령부 훈령 즉 스탈린 비밀지령이 언급한 '북조선에서 민주 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블록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창설‘을 목표로 한 노선이 절대적으로 미흡하고, 소련의 국가 이익을 보장할 정치, 경제적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소련의 국가이익을 지킬 수 있는 인물 양성을 위해 중앙집권화하고, 반대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른 시일 내에 농지개혁을 시행하며, 소련에 호의적이고 소련의 정치적 입장을 굳건히 지켜줄 간부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라”고 강조했다.
이 보고서가 9월 20일자 스탈린 지령을 거론한 점과 미소공위 개최(예비회담=1946년 1월 16일~2월 6일, 1차회의=3월 20일~5월 8일, 2차회의=1947년 5월 21일~10월 18일 결렬-21일 소련대표 서울 떠남) 직전에 나온 점 등으로 보아 처음부터 미소공위에 대한 소련 최고위의 방침은 이미 북한 단정을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마. 북한의 선(先) 단정(單政)
(1) 태아적(胎兒的) 정부 출범
소련군사령부는 1945년 10월 8일부터 11일, (그들 표현대로) 각 지방주권기관의 유기적 연락과 통일적 보조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북조선5도인민위원회연합회의를 개최하여 북조선5도인민위원회를 출범하고, 산하에 북조선제행정국(北朝鮮諸行政局)(통칭 북조선행정국)을 두기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 교수는 “이 기구가 사실상 태아적 정부”로서 “북한의 분리적 국가 수립을 향한 첫 걸음을 의미했다”고 평가했다. 바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및 북조선행정국의 출범은 북한은 비록 과도기적지만 중앙행정기관임에는 틀림없는 태아적 정부의 출범을 의미했다'는 말이다.
(2) 사실상 북한 단정(單政)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모스크바 및 소련군정의 전략에 따라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 17일부터 18일까지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북조선을 통일국가 건설의 강력한 민주기지로 전변시키는 것이 당의 첫째가는 과업이다'라는 소위 '민주기지 창설노선'을 공포했다.
이때 김일성의 연설문에는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북부공산당' ‘북조선공산당' ’우리공산당' 이라고만 표현했으며,1946년에 들어서면서 '북조선공산당' 하나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념할 것은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 앞에 '중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넣어 지금까지 1국(國), 1당(黨) 원칙에 의한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당에서 분리 독립하여 북한 단정(單政) 출발을 예고했다.
1946년 2월 8~9일 평양에서 “북부조선의 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의 발기로써 목전(目前) 북부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인민생활상 긴급히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를 토의, 결정하고자 '북부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 각 행정국 급(及)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가 소련군 사령부의 사전 허가를 받고 개최하여 조선임시인민위원회구성에 관한 규정을 체택했다”
이 규정은 제1조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북조선최고행정기관' 또는 '북조선에 있어서의 중앙행정주권기관'이라 선언하고, 제3조에 임시 법령을 제정, 발포할 권한을 주며, 제9조에 북조선최고재판소와 북조선최고검찰소를 조직한다고 규정했다. 이어 위원장에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책임비서 김일성을 선출했다.
김일성 스스로 북조선의 중앙집권기관이라고 부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제행정국을 대체했으며, 북조선에서 사실상 단독정부로 기능했다. 이 기구는 산하에 10국 3부를 두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회의에서 행한 김일성 연설 가운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발족을 위한 “발기부(發起部=나중에 발기위원회로 호칭)의 의견을 소련군사령관에게 진정한 결과 반의(反意)가 없을 뿐만 아니라 환영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이다. 이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극비밀리에 소련군사령부와 김일성을 비롯한 극소수의 공산당 간부 사이에서 그 조직과 준비가 추진되었던 것으로 단정할 수 밖에 없다' 어떻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최소한의 형식적인 선거의 절차도 밟지 않고 구성된 것이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2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지난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일성 스스로 북한 단독정부를 인정한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3월 5일 본회의를 열고 17개 조로 구성된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위원장 김일성과 서기장 강량욱의 공동명의로 공포하였다. 그리고 3월 말까지 단기간에 그 집행을 완료하여 사실상 정부만이 할 수 있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미소양국은 한반도 문제를 양측의 점령군사령관이 임명하는 대표들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에 위임하기로 했고, 첫 번째의 공동위원회 모임이 1946년 3월 20일에 열기로 합의된 바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정은 회의개최 이전인 2월 8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3월 5일에는 토지개혁법을 공포하고 즉시 실행해 버림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과 협상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소련의 입장을 확연하게 나타냈다. 즉, 이는 분단의 고정화 작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이어서 8월 1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12차 회의에서 '산업,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을 공포, 시행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남한보다 먼저 수립한 사실상의 단독정부, 즉 북한 단정(단독정부)이었다.
한편,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경축식에서 김일성은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이며 이를 해방할 의무가 북한에 있다”고 연설했으며, 1947년 2월 21일~22일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체택한 강령에 '북남통일을 촉진할 것'을 최초 공식 언급함으로써 북한은 이때부터 한반도 공산화 전략을 수립한 이래 현재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음을 인식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20개 정강 발표
'1946년 3월 23일에 김일성 명의로 기본 헌법의 성격을 가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20개 정강'을 발표했다. 이 정강 ②항에는 '국내에 있는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 팟쇼 및 반민주주의적 정당급 단체, 개인들의 활동을 절대 금지할 것'이라 규정했다. 필자는 1946년 2월 8일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북한의 단정(단독정부)라고 보는 입장이다.
(3) 확실한 북한 단정(單政)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
(가)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소련 군정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강화하고 제도의 창설을 계속하는 동시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임시'를 빼기(바꿔말하면 조직강화, 조직격상) 위한 작업이 스티코프에 의해 주도되었다.
스티코프는 모스크바와 협의하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하여금 1946년 9월 5일 '북조선 도,시,군,면,리 인민위원회에 관한 규정'을 체택토록 하고, 11월 3일 전국 3,459개 선거구에서 흑색함과 백색함 두 개를 놓고 선거를 실시했다. 후보자를 찬성하면 백색함에, 반대하면 흑색함에 투표용지를 넣도록 하는 투표방법이었다. 여기서 선출된 자들이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 구성원이 되어 북조선인민회의를 창립하게 된다.
(나) 북조선인민회의
스티코프는 1946년 12월 19일 연해주사령관 메레치코프, 북조선 주둔 소령군사령부 정치담당부사령관 로마렌코를 불러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 창립에 관한 협의를 마치고, 연해주군관구 소속 특별임무 수행 크라프초프 중령에게 지시하여 그가 작성한 보고서를 로마렌코와 검토한 후 12월 23일 모스크바로 출발하는 소로킨 중장편에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티코프는 1947년 1월 2일 치스치아코프, 로마렌코, 김일성을 연해주군관구로 불러 1월 3일부터 5일까지 북조선인민회의 설립을 위한 북조선 시,도,군 인민위원회 소집에 대한 문제들을 협의했다.
이에 따라 1947년 2월 17일~20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 시,도,군 인민위원회 대회'에서 지난 해(1946년) 공포, 시행한 토지개혁법령에 대한 추인도 받고, '북조선인민회의에 관한 규정'을 체택했다. 북조선인민회의에 관한 규정 제1조는 '북조선인민회의는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인민정권의 최고기관이다‘라고 선언하고, 제3조에 북조선입법권을 행사한다고 규정했다. 북조선인민회의는 2월 21일부터 22일까지 제1차 회의를 열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다) 북조선인민위원회
1947년 2월 20일 북조선인민회의가 체택한 규정 제11조에 따라 '북조선인민위원회에 관한 규정'을 체택하고, 제1조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인민정권의 최고기관이다라고 선언하고, 제2조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이를 조직하는 바 그의 모든 사업 활동에 있어서 북조선인민회의에 복종한다 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구성은 위원장에 선출된 김일성에게 맡겼다.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 출범은 확실한 북한 단정(단독정부)으로서 이를 기준으로 해도 대한민국보다 1년 6개월 먼저 북한 단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유엔 결의에 따라 남북총선에 의해 통일된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김일성의 반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북(입북)이 불가능했으며, 북한이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했으니 분단의 책임은 소련과 북한에 있다.
그러나 4.3주동자들은 먼저 출범한 북한의 단정(단독정부)을 찬양하고, 남한의 단정(단독정부)은 물고 늘어졌다. 유엔 승인 하에 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소련식 공산통일만이 통일이라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아무리 양보해도 분단된 책임의 절반은 소련, 북한, 김일성에게 있음에도 모든 책임을 오직 미국, 남한, 이승만에게만 지우려고 억지논리를 펴고 있다.
(라) 면,리(동)인민위원회
소련군정이 마련한 시나리오에 따라 1947년 2월 24일~25일에는 리(동)인민위원회 위원을 선출하고, 3월 5일 토지개혁법령 공포 1주년을 택하여 면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를 실시했다. 이때도 흑백함 투표를 실시하였음은 물론이다. 하여간 면(리)동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끝으로 북한은 말단 리(동)에서부터 중앙에 이르기까지 비록 흑백함투표를 실시할 망정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체제를 갖추는 형식을 취했다.
(4) 남북한 헌법 제정
남북한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6월 3일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헌법초안을 만들어서 7월 12일에 국회를 통과, 17일 공포 시행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반면 북한은 1947년 11월 18일 임시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고, 12월 20일 조선임시헌법초안을 체택했으며, 1948년 2월 6일에 이 초안을 전인민의 토의에 붙일 것을 결정했다.
2월 9일에 북조선노동당은 이 초안에 기초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 것임을 재확인하고, 2월 10일 조선임시헌법초안 발표, 1948년 4월 28일~29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특별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체택했으며, 9월 3일 최고인민회의가 비준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립을 선언했다.
※ 남북협상 전후 정치 일정
북한은 헌법을 남한보다 먼저 착수한 것은 물론, 초안을 '소련 외무성과 소련 공산당에게 보고하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세부적으로 검토한 뒤 다시 평양의 소련군정에 지령해 헌법 작성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즉 1948년 9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작품이다. 북한은 자신의 단정을 은폐하고 남한의 단정에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 미리 체택한 헌법과 정권 수립을 뒤늦게 시행하는 잔꾀를 부린 것이다.
또 스탈린은 김구 등이 평양에서 김일성과 협상하고 있을 당시인 1948년 4월 24일에 북한 헌법안을 승인했고, 또 남북회담이 아직 끝나지 않던 때인 4월 28~29일에 북조선 정권은 북조선인민회의특별회의를 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통과시켰다는 사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소련과 북한은 비밀리에 북한 단정을 추진하면서도 겉으로는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북협상에 응한 김구 등은 소련과 김일성의 음흉한 정치공작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우를 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전개는 당시 소련점령군사령부 정치담당사령관 겸 민정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 비망록에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심지어 레베데프는 김일성에게 인공기와 인민군기를 제작하되 붉은색과 청색, 흰색과 검은색(선과 악을 상징)을 배합하도록 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등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지시할 정도였다.
스티코프도 김일성의 연설문들을 미리 읽어 보고 수정하거나 가필했으며, 심지어 북한에서 실시되는 선거 구호와 전단까지 스스로 꼼꼼하게 점검했고, 그런것들에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북한정권은 소련군정의 결정과 지시에 철저히 복종하고, 충실히 따랐으며 소련군정의 결정과 지시를 언제나 찬양했다. 북한정권이 자율성을 누렸다면 그것은 소련군정의 결정과 지시의 범위안에서 가능했고, 소련군정이 묵인하거나 허용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였다.
바. 월북한 4.3주동자들의 거취와 말로
소련군정사령부는 남한에서 활동한 혁명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강동정치학원 개설을 지령하여, 1948년 1월 1일 평양근교 평남 강동군 승호면 대성리에 강동정치학원을 개소했다. 강동정치학원생들은 지하선거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고, 여순반란사건 당시 180명이 밀파되었으며, 6.25 후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300명을 인솔하여 태백산지구에 남파되었다가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과 같이 월북하여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란 영광(?)을 얻었던 안세훈은 6.25후 월남하여 전남에서 은신하다가 병사했으며, 강규찬도 6.25 전쟁 당시 사망했고, 그의 처 고진희도 비슷한 시기에 남하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던 중 1951년 2월, 군경에 체포되자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은 6.25때 남로당 출신들을 일선 죽음의 현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여기서 이정숙, 문등용 등의 생사는 알지 못하지만 모두가 이용만 당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것 같다.
북한 김일성은 6.25 전쟁에 실패하자 1인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고, 패전의 책임을 전가할 구실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단행했다. 국내파 박헌영은 1953년 3월 11일 체포되어 3년 동안 온갖 고문을 버티다가 종내에는 세 번째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 준다는 김일성의 약속을 믿고(약속이 지켜졌는지는 미상) 스스로 미국에 고용된 스파이였음을 자인하여 1956년 7월 19일 방학세가 쏜 권총 2발을 머리에 맞고 숨을 거뒀다.
필자의 상상이지만 박헌영은 지금 지하에서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루고자 한 공산주의 통일국가 건설도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1946년 3월 26일 서울에서 UP통신(UPI통신 전신) 호이트 기자와 가진 '역사 진행에 역행하는 반동분자는 몰락한다'는 제목의 일문일답에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가 창설될 때 대통령으로 김일성을 지지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당은 인민과 함께 지지한다"고 할 정도로 김일성을 추종했던 박헌영이 미국의 고용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목숨을 무자비하게 빼앗겼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북한정권 탄생에 헌신하고 김일성에게 충성하였으나 자신은 물론 월북 열성 남로당원들이 철저히 숙청당했으며,(확인된 제주 출신 숙청자는 강문석, 고경흠, 김응빈, 송성철, 김택수 등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현재 북한주민들이 굶어 죽는 상황과 한반도 남쪽의 발전상을 비교해 보면서 내뿜는 후회와 한숨소리가 필자의 귀에 들려 오는 듯 하다.
결론적으로 4.3을 일으킨 남로당이 남북분단 책임을 미국과 이승만에게 돌리는 '단선단정 반대 통일항쟁'이란 주장은 잘못이며 오히려 그 책임을 소련과 김일성에게 먼저 추궁해야 순서이다.
사. 우리 지도자의 선견지명과 옳은 선택
남한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 4개월 후인 1946년 6월 3일 비로소 이승만 정읍발언이 있었고, UN결의에 따라 선거 가능지역에서 보통선거에 의해 대표가 선출되었다. 이승만 정읍발언은 미소공위가 교착상태이고 통일정부가 여의치 않으니 일단 남한이라도 단독정부수립을 해야 한다는 요지로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休會)된 공위(共委)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해야 될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12월 12일 유엔 제3차 총회에서 유엔 결의안 195호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 오늘날 우리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으며, 이만한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체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는 현재 북한이 처한 실정에 비추어 볼 때 백번 옳은 선택이고 잘한 처사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3선 개헌을 시도하는 등 결함도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확고한 반공주의자로서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산주의를 막지 않으면 스탈린의 폭압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예측한 유일무이한 선각자이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기초를 마련한 제1유공자이다. 미소 합의에 의한 5년간 신탁통치를 무산시키고, 3년 만에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소련의 전략에 따라 북한이 사실상 단독정권을 수립한 이상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현명한 선택이었다.
건국(建國) 대통령으로서 농지개혁을 성공리에 수행하였고,(해방 당시 국민 75%이상 농민 중 자작농은 14%였으나 유상매입, 유상분배원칙에 따른 농지개혁 이후 자작농 비율이 96%로 상향되었음)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며,(유럽, 아시아권 공산화 지도 참조)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을 맺어(1954년 11월 17일 발효) 안보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전쟁중에도 자유,보통선거를 실시함으로서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정착시켰다.
교육에도 많은 투자를 하여 인재를 육성하는데 기초를 다졌고(해방 당시 문맹률 80%, 정규교육 이수자 14%, 전문학교 이상은 0.2%에 불과한 것을 1959년까지 96%가 초등학교 취학했고, 1960년에는 한국의 대학생 수가 영국의 대학생 수를 능가했음) 기간산업 건설에 매진한 공로자다.그리고 평화선 선포로 독도 영유권을 확실히 했으며, 원자력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이러한 공적은 그가 (후반기 말년에)독재를 했다는 단점을 내세워 무조건 매도할 수 없는 이유로서 충분하다. 독재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국가라는 가정(假定)에서 탈피하여 남북한에 군대를 진주한 미소간 냉전대립과 특히 미국과 소련의 숨은 전략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를 잘 활용한 유능한 정치가이다. 국내적으로 좌우가 첨예하게 대결하는 혼란기에 건국되었고, 기초를 다지기도 전에 6.25전쟁이라는 특수사정이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 근대국민국가 건설과정에서 일본, 터키, 이스라엘, 싱가포르, 타이완의 경우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한때 좌파운동권의 이론적 대부였던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은 “이승만 정권은 권위주의적이기도 하고 반공주의적이기도 했는데...(중략), 그 당시에 자유민주주의 한국이라는 국가를 지키려면 그 방법이외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중략). 권의주의와 공산주의가 없으면 사상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대한민국을 유지한 뼈대였다고 생각하는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존립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국부(國父)를 폄혜하고, 무시하는 풍토는 그 이유야 어쨌튼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잘 모셔야 한다는데 적극 찬성한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건국은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곧 사라졌을 것이고 그 결과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여 지리멸렬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1946년 11월의 북조선인민위원회선거와 그것에 따른 1947년 2월의 북조선인민회의 구성도, 1948년 남북회담 개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향한 정치적 일정과 행사들도, 심지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인선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마련했거나 최소한 북조선주둔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관할한 소련극동군 연해주군관구가 마련한 큰 그림에 따라 진행됐다. 북한의 헌법 역시 소련이 마련해 주었지만 이승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북한은 소련의 치밀한 계획과 조종 하에 정부가 출발하였고,(소련은 소련에 거주하던 한인 2만에서 3만 명을 공산혁명요원으로 훈련시켜 북한으로 데려왔으며, 그 결과 그들은 북한을 신속히 안정시켜 공산국가 건설에 곧바로 착수할 수 있었다) 3대세습 독재와 우상화, 심한 주민감시와 통제로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고,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북한의 현실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수용소 군도」나 조지 오엘의 소설「1984년」에 다름이 아니다.
이승만을 비판하기 전에 그 수십배 김일성의 독재와 잔혹사(殘酷史)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마땅하다. 다행히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절반이라도 혹독한 공산주의 실험을 면했고, 김일성 체제에서 처참한 숙청과 참혹한 배고픔을 면했다. 이것이 항쟁이 아니라는 두 번째 큰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좋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대한민국에서 모든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고 건국을 방해하려는 폭동을 미화하여 민중항쟁으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과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영광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아니면 공산주의 국가가 건설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 북한이나 동구공산권국가(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처럼 공포와 탄압으로 고생한 나라가 되었기를 바라는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다행히 제주도가 남로당 해방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에 도움이 되었으며, 곧 터진 6.25를 극복하는 데도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참고로 ①1951년 1월 22일 육군제1훈련소가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한 후 1955년 4월 30일까지 신병 50만 명(하사관 38,745명, 자동차운전 교육수료자 7,355명 포함)을 배출했다. ②1950년 8월 5일 제주출신 1,500명이 해병3기생으로, 1950년 8월 30일 제주출신 1,500명(126명 여자해병 포함)이 해병4기생으로 자원입대하여 6.25 통영 및 인천상륙작전 때 수훈을 세웠으며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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